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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18-21)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자, 하나님의 아들, 참된 자의 아들, 참 하나님,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하신 분, 따라서 하나님의 참 아들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시니, 예수님은 참되신 분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참되신 분이십니다. 나아가 참 하나님이라고 하였고, 또한 영생이시십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1) 사도 요한은 진리(眞理)라는 말과 함께 ‘참’이라는 말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① 곧 요한복음 1:9에 ‘참 빛,’ 47절에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 나오는데, 그 외에도 ‘참 말씀’ 곧 ‘참 도(道)’가 1:1,14에 선포되었습니다. 2장에서는 ‘참 포도주’와 ‘참 성전’이 나옵니다. 포도를 가지고 만든 포도주는 진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물을 변화시켜서 만들어주신 것이 진짜이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만드신 것이 참 포도주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마셔야 영생을 받습니다. 3장에는 거듭남이 나오는데 이는 ‘참 변화’를 말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말끝마다 ‘개혁, 개혁’ 하는데 그런 개혁은 말장난이요 속임수일 뿐입니다. 자기들 자신이 개혁되지 않았는데 무슨 개혁을 합니까? 그러므로 ‘참 개혁’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 외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② 4장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우물물을 놓고 생수에 대한 이야기로 발전합니다. 나아가 ‘참 예배’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린다고 하는 예배들은 거의 모두가 가짜임을 인정하실 수 있습니까? 5장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앉은뱅이를 고쳐주셨는데, 성전에서 예수님이 그를 다시 만나셔서 경고하셨습니다. 만일 다시 죄를 범하면 병이 재발하게 될 것이라고요.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은 아직 참이 아닙니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않는 사람이 되어야 참으로 병을 고친 것입니다. 또한 32절에는 ‘참 증언’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 그리고 성경, 이 모두가 예수님에 대한 참 증언들입니다. 나아가 성령의 증언이 참 증언입니다. 6장에는 오병이어의 표적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표적 후에 예수님은 참된 양식에 대해 길게 설명하십니다. 곧 32절에는 ‘참 떡’ 55절에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 참된 양식이고, 그의 피가 참된 음료입니다. 이를 먹고 마셔야만 생명이 있습니다. 8:31에는 ‘참 제자,’ 8:36에는 ‘참 자유,’ 9장에는 ‘참 소경’은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라 선언하십니다. 10장에는 ‘참 목자’가 소개됩니다. 15:1에는 ‘참 포도나무,’ 17:3에는 ‘참 하나님’ 등이 나옵니다.
③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공관복음에서는 ‘진실로’라는 말을 한 번만 기록하였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여 두 번씩 거듭 사용하셨습니다. 이때의 ‘진실로’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아멘, 아멘’입니다. 요한계시록 3:14에 예수님을 가리켜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한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은 ‘아멘, 아멘’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고후 1:20).
2) 소위 ‘여호와의 증인’ 파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만이 하나님이고, 아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피조물이라고 폄하합니다. 안식일교에서도 겉으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은 예수님은 미가엘 천사라고 하여 피조물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가 과연 무엇인지 아리송합니다. 그들의 본의는 아니겠지만, 그 배후에 마귀가 있어서 간교한 말로 신자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성부는 물론 하나님이시지만, 성자도 성령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세 하나님이 합하여 하나의 큰 하나님을 이룬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수평적 결합을 말하면 이것은 삼신론(三神論)이라는 이단이 됩니다. 곧 1+1+1=3임을 말하되, 1x1x1=1을 말하지 않으면 가짜 삼위일체론입니다. 성 삼위께서는 입체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곧 우리 사람이 몸과 영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있어서 이 셋이 합하여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온전히 구원받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먼저 마음과 영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회개할 때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하였습니다. 나아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셔야 비로소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하나님의 율례를 지켜 행하게 됩니다. 또한 새 영, 곧 성령을 주셔야 우리가 거듭나고,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우리의 육신도 새로워지는데, 이 세상에서는 건강을 유지하며 살다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부활, 또는 변화되어 새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설명하는 성경의 증언을 살펴봅시다.
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그 아들도 하나님이심을 증명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요, 의 아들은 소가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천사나 사람일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본래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곧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셨다.”라고도 말합니다. 물론 그렇게 이해할 만한 비슷한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학설이 아니라, 불신자들이 추측입니다. 양자란 우리 인간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롬 8:14-16고 하였습니다.
② 구약에서는 창세기에 자주 나타나는 ‘여호와의 사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야곱과 밤새 씨름하시고는 야곱에게 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이 이름을 묻자 “왜 내 이름을 묻느냐?”라고만 대답하시고 그에게 축복하셨습니다. 마노아에게도 나타나셔서 그가 장차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그가 이름을 묻자,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기묘(奇妙)하니라”(삿 13:18)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더욱 분명한 것은 이사야 9:6에 “그의 이름은 기묘한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한 아기로 태어나신 그 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버지’란 성부를 말하는 것으로 혼동하면 안 됩니다. 이 말은 온 인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우리 온 인류의 아버지십니다. 곧 우리의 창조주시며, 피 흘려 구원하시고, 오늘도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계십니다.
③ 신약에서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빌 2:6)고 선언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곧 도(道)이시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도를 깨달을 때에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양으로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곧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가리켜 참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심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에도 나타납니다.
①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30에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셨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9-10)라고 대답하셨습니다. 5:18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한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②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때에도 그 말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베드로의 고백을 비롯하여 예수님께 대한 많은 신앙고백이 있지만,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의심 많은 제자라고 하던 도마의 고백입니다. 그는 드디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만일 이런 고백이 잘못된 것이라면,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도마를 심하게 질책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서 하나님으로 대접을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③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셨습니다. 누가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성경은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화신이요, 곧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무슨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옷이야 무엇을 입었거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육신은 영혼의 옷입니다. 예수님을 육체대로 알지 말고(고후 5:16)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볼 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왜 참 하나님이라고 합니까?
1) 거짓된 신들과 참 하나님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① 거짓 신이란 곧 이방의 신들입니다. 나라마다, 종족마다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다.”(고전 8:5-6)고 말합니다. 출애급 때에는 하나님께서 애급의 모든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습니다(민 33:4). 이방의 신들은 모두 허무합니다(대하 13:9; 렘 18:15). 마귀의 이름으로 귀신의 왕 ‘바알세불’(마 10:25; 12:24,27), ‘바알세붑’(왕하 1:2,3,6,16)이라는 이름과 함께 벨리알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고후 6:15) ‘벨리’란 없다는 말이고, ‘야알’이란 가치란 뜻입니다. 곧 벨리알이란 이름의 뜻은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② 거짓된 신이란 곧 우상(偶像)이요, 귀신입니다. 본문에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하십니다. 바울도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뇨?”라고 묻고는 “대저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전 10:19-20)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참 하나님을 버리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도 똑같습니다. 참 하나님을 오히려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자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③ 이방 신화에 나오는 신들입니다. 나라마다 신화라는 것이 있어서 자기 백성들에게 신들의 이야기를 해 주고 그런 신들을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쓰스, 곧 제우스나 허메 같은 그리스의 신들 이름이 나옵니다(행 14:12,13; 19:35). ‘아데미’라는 여신은 제우스의 딸인데 그 이름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행 19:24,27,28,34,35). 우리가 흔히 ‘루시퍼’라고 부르는 신은 이사야 14:12에 나오는 가나안의 신의 이름을 라틴어로 번역함에서 나온 오류인데 원이름은 ‘헬렐’입니다. 곧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라는 말은 “샤하르의 아들 헬렐”이라고 해야 바른 번역입니다.
2) 참 하나님이란 천지를 창조하신 신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시기에 참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은 거짓 신입니다.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에서 망합니다”(렘 10:11). 참 신과 거짓 신의 첫째 구별은 창조주인가 아닌가에 있습니다. 우리 우주와 인류를 창조하신 분이 참 하나님이요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창조주가 아닌 자가 우리에게 경배를 받으려고 한다면 이는 창조주에 대한 반역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① 창조에는 능력과 지혜와 명철이 모두 들어있지 않습니까? 천체의 별들이 어떻게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까? 지구에 어떻게 사계절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밤과 낮이 정확하게 나타납니까? 이 너르고 너른 우주 공간 어디에 그렇게 정확한 길을 만드셔서 별들이 자기 궤도를 따라서 돌고 있나요? 모두가 창조주가 계심과 그의 지혜와 능력을 알게 해줍니다.
② 참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천체의 별들은 물론이고 우리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인간의 흥망성쇠가 하나님, 곧 거룩하신 우주의 섭리자의 손에 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과 그분의 길을 깨달아야 합니다.
③ 참 하나님은 우리 인류의 역사뿐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생명을 주장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나 죽는 일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연이란 없습니다. 또한 아무런 뜻도 없이 태어나는 법도 없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되었던 청년에 대하여서도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하심(요 9:3)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당신에게는 그런 뜻이 없으시겠습니까? 바울은 뒤늦게 부르심을 받고 드디어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우리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길을 돌이켜야 합니다.
3) 참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거룩한 인격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①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함이 없는 신은 거짓 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시고, 나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45; 19:2; 벧전 1:16)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히 12:14).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기를 열심히 가르쳐야 했으나(레 10:10; 겔 22:26; 44:23) 그렇게 하지 않아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②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요한일서 3:16에서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로마서 8:32에서는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합니다.
③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서는 불의의 재판도 많지만,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십니다(요 7:24; 행 17:31; 살후 1:5,7; 벧전 2:23; 계 19:11 등). 여기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늘 의식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고, 또한 지혜의 근본입니다(잠 1:7; 9:10).
3.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참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지만, 거짓된 신을 믿으면 어찌 구원을 받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기독교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①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우선 지식적인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것을 신경(信經) 또는 신조(信條)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든 신경 중에서 사도신경을 가장 잘 요약해 놓은 신경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예수님에 대한 부분이 제일 많습니다.
②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씀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데에 있습니다. 신명기 28:9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민, 곧 거룩한 백성이 된다고 하셨고, 예레미야서에도 이런 말씀이 자주 나타납니다(7:23; 11:4; 24:7; 31:33 등).
③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게 해 주시는 방법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곧 새 마음과 새 영을 부어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신다는 것(겔 11:20)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④ 나아가 그 말씀을 따라서 살기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헌신이 없으면 주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2) 전심으로 예수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자신을 나타내주시기를 기뻐하시지만, 거룩한 것이나 진주를 개돼지에게는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십니다”(대하 16:9). 시편 119:2에서는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고, 10절에서는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때에 하나님의 응답이 옵니다.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시고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십니다. 기도에 게을러지면 결코 바로 서지 못합니다. 우리의 시작은 미약해도 나중이 창대해지기를 원하시면 먼저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어야”(욥 8:5) 합니다. 이런 복 받고 구원받는 비결을 성경에서 배워서 실천해야 합니다.
3) 우리도 참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참사람이 누구입니까? 원래의 창조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여호수아는 그의 고별설교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만 섬길 것을 간곡히 당부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대답하기를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의 열조를 인도하여 애급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수 24:15-19)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우리도 거룩해지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참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참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참사람이 되지 못하면 어찌 참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드디어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고, 능력을 받아 죄를 이기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법을 지켜 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가볍게 생각하여 입술로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다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죽은 믿음은 우리를 죽입니다. 우리는 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2004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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