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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분홍잠☆]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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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잠]
김겨리 시집 / 제10회 시산맥 기획시선 공모 당선시집 / 시산맥시기획시선 41 /
시산맥사(2016.07.30)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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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잠
김겨리
고수레로 남겨 둔 홍시의 밀린 잠이 붉은 저녁이다
마당을 쓸던 노인이 허리를 굽히자 짧은 옷단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등골,
그 깊은 계곡까지 노을이 들었다
무너지는 한쪽 벽에 봉창 달빛을 빚어 얽는 거미가
바람이 들지 않도록 거미줄을 암팡지게 엮는다
명아주 이파리 스적거림으로 창문을 단 집
구절초 꽃대로 세운 배흘림기둥에선 풍경風磬 소리가 향긋하다
노인이 굽혔던 허리를 펴면 가을볕이 어리광처럼 달려든다
도돌이표만 있는 가을볕은 노인의 십팔번이다
음정은 새털구름이고 박자는 떨어지는 은행잎,
아무나 풍월로 읊어도 진양조 장단*
지붕엔 말표고무신 한 짝이 노을로 배꼽만 덮고 누워 있다
갈기털 다 빠진 목덜미에 솟대 그림자를 괴고 잠든 말굽은
아직도 따스한 발걸음을 기억하며
지붕에 올라가 누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긴 한숨을 쉬는 노인의 호흡이 가늘게 떨린다
허공에 써 놓은 점자로 되짚어 가는 길에도
과속방지턱이 있는지 바람도 잠시 주춤하는 법인데
어느새 성성해진 백발과 그믐달만 뜨는 눈썹
슬하에 노을 닮은 은행나무 한 그루만 달랑 둔 노인의 가계家系
입술에 허옇게 일어나는 각질을 옷소매로 쓱 훔치니
노을이 찍 묻어난다
노인의 등뒤로 달이 뜬다 어쩌면, 오늘밤
은행잎 한꺼번에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뜻
노을의 끄나풀이 길다
*진양조 장단 : 판소리에서 가장 늦은 박자
시들다
김겨리
잎이 무성하던 나무에 그늘이 앙상해진다
밑동에 드러난 하지정맥류가 심장 같다
우듬지가 간지러우면 바람의 손을 빌려 등허리를 긁는다
재채기할 때마다 나무의 한 생애가 온통 흔들리고
요실금인 듯 뜨거운 그것, 시들수록 싱싱해지는 나무의 언어를 생각한다
목젖까지 뱉는 그늘, 외부가 하염없이 젖는다
내부가 조금씩 여백으로 남는 동안
외부를 공고히 다지는 그늘의 모서리
우리는 그걸 나무의 폐경이라 부르지만, 혹은
무덤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의 여생일지도 모르지만
모다깃비 지나간 뒤 아무렇게나 내지른 나무의 새끼들처럼
붉고 푸르고 늙고 앳된 낙엽들
탯줄도 안 자른 난태생의 옹아리로 길은 젖는다
발자국이 짝짝이인 소멸의 뒤태
그윽하고 이슥하게
詩드는 꽃잎들, 아슴아슴
발톱
김겨리
발톱을 깎다가 뿌리가 드러난 나무 한 그루를 본다
아무렇게나 생기고 짓무른 발가락,
늘 퀴퀴한 냄새로 점철된 협곡 사이사이 각질이 일었다
각질은 단층이 녹아 생긴 윤슬이었다
우리의 외부가 건조하게 진화되는 동안
발가락 사이는 원시의 습지 그대로였다
길의 습성을 고스란히 본떠 생의 죄표로 삼는 일
평생을 그늘로 옥좨 생의 깊은 골이 된 발톱은
벨러스트가 되어 생의 중심을 잡는 천형이었다
온몸을 돌아다니던 피들이 마지막 체온을 식히는 곳,
발바닥에는 수많은 수문이 있다
몸의 독소들을 침전시켜 응고된 각질이 되기까지
보폭은
얼마큼 견고한 간격을 유지했을까
걸음걸이의 중심이 이동될 때
직립도 편히 눕는 수평의 후생으로 옮겨지는 법
보폭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몸의 톱이 된 발톱은
스스로 생살을 도려내어 몸의 중심을 잡는다
아무렇지 않다 아무렇지 않다고 태연한 저 고통,
허공을 찢고 나오는 달의 탈피처럼
발가락을 빠져나오나 발톱의 행장이 참 가볍다
삐뚤어질 테다
김겨리
염천이 붉은 잇몸으로 짓무른 복숭아 단물을 오글오글 빨고 있다
가로수에는 바싹 마른 그늘이 자란다
앙상한 그늘을 물어 나르는 개미 떼의 팬터마임이 흐릿하고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돌로 괴어 놓는다
예고 없는 낮비에 떠내려가는 지붕들
거리의 텅 빈 내부와 앙상한 쇄골이 훤히 드러난다
사라지는 모든 것에는 모퉁이가 있다
거리의 여백을 채우는 건 공터가 아니라
집을 나온 유기견뿐, 목줄은 왜 입고 나왔을까
변성기를 거치는 동안 몇 장의 깔창을 덧댄 걸음걸이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발자국이 뭉툭하게 진화되었으므로
이젠 행려자의 거처가 된 모퉁이의 직업은 노숙
담장으로 획 집어던진 가출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대추나무
그리 붉어서 제 속의 열꽃은 언제 피운단 말인가
붉은 그림자가 뚝뚝 떨어져 있는 골목에서
미래가 봉인된 수취인불명의 반송 택배는
자신이 수많은 오류의 복기라는 걸 알고 있을까
눈썰미만 예민해진 사춘기
주거가 일정치 않는 바람의 명찰을 눈여겨 보아두는 것은
비상착륙을 위해 나비 날개의 골격을 해독하는 일
건널목에서 푸른 신호등이 켜지면 왼발부터 나가자고,
엇갈리는 머리와 발걸음을 번갈아 쳐다본다
자꾸 어긋나기만 해봐라, 기어코 나는
먹이사슬
김겨리
벌레들은 왜 밤에만 식욕이 왕성해지는 걸까
퇴화된 후각과 청각 대신 예각豫覺이 발달된 족속들은
침묵으로 사냥하고 발자국으로 먹이를 씹고 냄새로 소화시키고 입덧으로 배설한다
바퀴벌레가 나타날 때마다 어둠이 조금씩 부서진다
이제 부서진 베란다는 용한 돌팔이 처방전을 받고 통원치료 중이다
밤이 길어지는 것은 야행성 파수꾼들이 어둠을 파종하고 수확하기 때문
벽지를 갉아먹고 벽을 갉아먹고 가족사진 속 미소까지 갉아먹는 벌레가 똥을 싼다
검은 내장에 하얀 똥, 발목이 하얘 발자국도 하얗다
깨금발로 지나가는 달의 옷깃이 빨래 건조대에 걸려 바둥거린다
묵음의 비명은 중심이 하얗고 모서리가 붉은 일식日蝕
몇 년 몸을 불린 밤의 보시布施,
한때의 먹이사슬의 최정점이었던 일식이 이젠 벌레의 간식이 되었다
배부른 거미가 하품을 쩍 벌릴 때마다 입냄새가 흩어졌다 다시 모인다
돈벌레가 조정 경기하듯 그 사이를 헤엄쳐간다
밤의 후렴같다
식욕의 공전주기가 정해지면
어둠에 그늘이 지지 않게 커튼을 친다
그늘 속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나간다
직박구리 한 마리 퍼드덕 날아간 자리에 의태어가 뒹군다
의태어는 생태계의 플랑크톤
밤을 갉아먹으며 바퀴벌레가 지나간 발자국마다 아침이 삐뚤삐뚤 찍혀 있다
쇠비름
김겨리
뗏장 떼어낸 자리 툭 끊어진 붉은 사지
낮은 포복으로 구릉을 오르는 팔꿈치가 쓰리다
일어서기도 전 주저앉히는 오류들
꽃잎 떼어 내며 그리움 묻는 시간까지는 참 짧은데
미납으로 동봉된 계절만 무혈의 상처가 된다
수면제 향 그윽한 계절
잠 깨면 자멸할 자색 목련 무덤까지
이 악물고 친친 동여맨 씨방인데
조반월*만한 잎사귀로 품은 꽃잎, 달과 내통한
바람의 갈래머리 같아 코피 내며 울겠다
잇몸이 닳도록 앙다문 환절기의 간극 사이로
봉분 닮은 바람이 불어도
종말 같은 몰골로도 직립만은 끝끝내 놓을 수 없다
뚝뚝 끊어져도 엇결은 마디의 악착,
기억상실처럼 해빙된 척추로 부력을 움켜쥔다
잠행을 들킨다는 건 얼마나 찬란한 통곡인가
꼿꼿이 서도 앉은키인 이파리 몇 장
칸칸의 마디에 쟁여 넣고 나비의 기척은 모른 체하자
딱딱한 어둠을 베고 잠들다 깬 후라야
구겨진 갈피를 펴 향기를 담을 수 있을까
허수애미
김겨리
훌렁 벗어버린 고쟁이가 논두렁에 누워있다
먹기를 대고 베껴 쓴 일기처럼 드문드문 받침이 빠진 여자의 일생
뼛속까지 달을 키워
일 년에 아이를 세 번 낳는데, 초승딸, 보름딸, 그믐딸
입덧이 안개비 같아 딸만 점지 받는 그녀
낡은 부라자 끈 같은 울음의 뒷면이 축축하다
바람이 지나간 길을 뒤밟아 가본다
나뭇잎의 앞과 뒤, 또는 맨발의 발가락 사이
지도에도 없는 낯선 협곡이 친정이라는데
시집 온 날부터 지게에 거름을 져 나르는
젊은 아낙이 이 마을의 지주라는데
남정네를 여럿 거느린 그녀
파밭에 앉아 사색하는 시간은 태교하는 시간
살이 매운 것은 뿌리가 단단하기 때문이라고
복대를 질끈 동여맨 채
왜가리처럼 한 발로 서서 산통을 견딘다
무게 없는 난산 끝에 바람 하나 낳는데
이번엔 아들이려나
애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이 악물고 뒷바라지 한 빈 들
새 떼를 불러 배뷸리 선행을 베푼다
허리띠 바짝 조여 매는 가을, 그 지독한 입덧 뒤
잘 여문 새끼들 바글바글 황금 들녘은
풍년, 또 딸이다
울음의 바탕
김겨리
누구나 다 울음 주머니 하나씩 달고 산다는 걸 안 것은
생의 밑줄 같은 어머니의 하지정맥류를 보고 나서부터였다
툭 튀어나온 종아리의 푸른 심장을 볼 때마다
역류하는 눈물샘이
기도를 꽉 막아 목젖이 부어오르곤 했다
울음이 우물이 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저 우물은 얼마나 깊길래 수심이 저렇게 퍼럴까
우물은 넘치거나 가물어도 울음의 바탕이었다
고여 있는 것들은 다 울음의 혈족이었다
나도 유전된 울음 주머니가 있다
내 울음 주머니는 밥때처럼 끼니가 있고
울음을 비우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았다
투석은 돌을 던지는 게 아니라
피를 바꾸는 거라고, 우물을 걸러내는 거라고, 울음을 비우는 거라고
붉은 동맥에 귀를 대고 가만히 맥박을 엿들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신발을 꺼내기 위해
돌을 던져 담장 너머 장독을 깨뜨리는 날엔
당산나무 아래서 온종일 손을 들고 벌을 서기도 했다
벌을 설 땐 잡념이 떠오르는 법, 그래야 울음을 잊을 수 있기에
나는 외부로 난 장기를 생각하곤 했다
머리가 콩팥 옆에 달리거나 심장이 손톱과 자리 바꾸는 일,
내가 울음을 호주머니에 넣다 꺼냈다 하는 것처럼
왜, 어머니는 우물을 꺼내 발톱처럼 자라게 하지 않으신 걸까
그러나저러나 하지정맥류에 카누를 띄우는 일은 슬픈 일
그 카누를 타고 떠내려가다 수심을 헤아려 보는 일은 더 아린 일
수심이 깊어질 때 나는 몽돌처럼 물방울인 척 울음을 비운다
울음은 언제나 불시착, 불시착이란 착불着拂 같아서
배송료는 언제나 미납이었다
검은색 바탕에 투명한 부피는 부력의 무게
지금 나는 사력을 다해, 어머니의 무게처럼
익명의 울음이 개봉되지 않은 우물로 진화되는 중이다
통뼈
김겨리
틈이 자라 붕괴가 된다는 말, 믿지 않는다
뙤약볕 작열하는 언덕을 닮은 어머니의 등
언제나 모락모락 김이 서려있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통뼈란 말이 떠오르곤 했다
통뼈란 거,
강단지고 당돌한 허우대를 떠올이겠지만
협심증으로 호흡이 짧은 어머니의 등은
물렁하지만 평평한 언덕이면서 비탈이었다
물집으로 굴곡이 진 능선에
틈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난청이면서도 귀가 밝은 어머니는
어금니가 제일 먼저 빠졌다
얼마나 오래 이 악물고 버티셨기에
이리도 일찍 입 안에 허공 하나 키우셨을까
허공 속에 가득 찬 어둠이 굵은 마디가 되어
완강한 생의 단면은 골다공이 되었나
오지랖에 만개한 개망초 꽃처럼 다소곳한 어머니의 들녘엔
수많은 미로가 엉켜 있고
미로에서 뿌리가 무성한 고사목을 본다
제 몸을 뿌리에 내어주고 탯줄로 묶어
아무데나 꽂아도 가지를 뻗는 통뼈의 생명력
잎이 질 때마다 한 마디씩 뻗어가는 뿔의 굴성,
집요한 인내란 몸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임을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알았다
가장 강하면서고 가장 연약한 등,
늘 젖어 있어 젖을 날이 없는 몸돌처럼 반들반들한
마모된 면의 모서리처럼 살아도
그것이 복판이란 믿음,
틈이 자라면 통뼈가 된다는 말, 알 것 같았다
탱자꽃
김겨리
혓바늘이 돋으면 티눈 같은 환부에 젖이 도는 사월
커피처럼 인증에 낭자한 물쑥숙 향은
급성 홍역이 되어 아랫도리부터 적신다
우두 자국이 태胎인지라, 그믐이 되면 번지는 황달
기적 소리같이 가뭇한 어머니 냄새 휘몰아쳤고
산 빛 젖은 듯 숨 멎은 복사꽃 향기가 폐부에 가득 차면
늑막염처럼 봄병이 도졌다
봄볕이 핥은 자리만 푸른 동맥이 팔딱이는 벼랑에서
투신하면 다시 부유하는 화상花傷은
즉사해야 몽정 앓는 기슭으로 다시 피는가
가시 한 칸 꽃 한 칸, 가시에 찔린 만삭의 바람도 한 칸
발 시린 탱자나무 가지가 산 빛을 끌어당겨 덮는다
마루에 앉아 빨래를 개키시던
어머니의 굽은 잔등에 햇살 눈부신 어느 봄날
빨랫줄에 널린 봄볕을 다 걷지도 못하고
탱자나무 울타리 바람소리가 되신 어머니
쪽진 머리 닮은 꽃 한 송이씩 밤마다 내려놓는 나무가
달빛을 잘라 제 동맥을 쓰윽 긋는다
사절 가시만 무성한 탱자나무, 그리움을 독소로 견디듯
젖몸살이 울타리에 울긋불긋 열린다
삭정이 아문 자리에 가시 다시 돋으면
탱자꽃 진 자리 탱글탱글 여물어가는 바람소리
손끝에 물혹이 잡히면
뽀얗게 찔린 물컹한 향기가 닥지닥지 열렸다
검버섯
김겨리
해토한 담장 에두른 개나리 틈에 핀 진달래꽃
마당을 기웃대는 뭉근한 볕을 끌어당겨 덮는다
하초를 데운 바람이 바지춤을 추키면
툇마루에 앉아 쑤시는 사랑니를 잘근잘근
다독이는 어머니, 머리에 쓴 흰 수건 속으로 스멀스멀
봄볕은 철부지처럼 드나들고
욱신거리는 치통을 달래려고 뻐끔담배를 피우시는
연는 아지랑이로 피어올랐다
어금니 다부지게 깨물고 한세상 살아 보자던
아버지는 봄볕의 추억처럼 생을 질러갔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오지랖엔
진달래꽃 무덕무덕 피기 시작했는데
나는 부랑아처럼 철마다 갓 피기 시작한 진달래
꽃모가지를 톡톡 분질러 먹은 붉은 입술로
차라리 어머니니 울음을 터트리세요, 말하고 싶었지만
담장 아래 꽃받침을 활짝 펴고 손사래를 치는 진달래꽃이
붉은 한 쪽 눈을 찌긋해 보였다
담장 너머 대나무가 굵은 흉터를
마디 속에 허공을 쌓듯 하나씩 쟁여 나갈 때
옷고름에 꽂힌 바늘로 어머닌 평생 무엇을 봉인하려 했을까
지금, 어머니 하늘하늘한 건화乾花가 되어
방풍으로 버틴 오랜 세월을 추슬러
거뭇거뭇 얼굴에 핀 진달래꽃 한 다발
부드러운 킬러
김겨리
안개가 주식인 굴뚝들이 오늘은 포식하는 날
굴뚝이 없는 집들은 안개의 먹이가 된다
거미줄이 버젓이 버티고 있는 골목을 통째로 삼키는 대식가
그들이 과감해지기까지 겪었던 수많은 오류란
햇살 퍼지기 전에 모든 거사를 다 치러야 한다는 교훈,
삼신할미에게 점지 받은 아무하고 흘레붙는다
파밭에선 매운 향기를 받고 고추밭에선 붉은 심장을 닮고
무밭에선 열무를 솎는 벌레와 흘레붙기도 하는데
무통분만으로 나온 새끼들
가로수신호등건널목전봇대행인폐지자전거호프집약국로또판매점,
모두 성은 달라도 한 배에서 태어난 동복同腹들
개헤엄으로 안개를 건너오는 개가 제일 막둥이다
양수에 젖은 햇살이 뜸 들이는 밥처럼 불그스름해지면
안개를 듬뿍 담아 고봉밥 한 그릇 내놓은 조반
늙은 황구의 쩍 벌린 잇새에도 안개가 끼어 있다
오체투지가 종족번식의 의식인 안개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앉은 사내는
군불 땐 아궁이에서 재를 긁어낸다
밤새 홀로 탄 까만 어둠의 속내, 그 새까만 씨가
안개의 씨앗
낮달은 산달처럼 지붕 위에 떠 있는데
재를 뒤적이며 파종을 준비하는 사내의 손톱 밑만 까맣다
황구가 침을 잔뜩 바르고 낮달을 핱는다
늙은 안개의 잔해들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지
비릿한 바람이 갓 친 거미줄에서 버둥거린다
그믐치*
김겨리
계절에 따라 언어가 다른 말을 하는 허공은 달변자
감정과 색깔이 있는 수화를 유리창에 낱낱이 옮겨 적는다
비문처럼 탁본을 떠야 하는 문장들은 고증을 거친 유언들
절취선이 담장인 기와집 와생초는 달의 씨앗이다
단단한 발아였다는 풀은 언재부터 공중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걸까
허공을 경작하는 생의 고랑엔 풀 아닌 풀과 같은 풀도 자라는 법
흑백의 꿈을 색칠하는 사내의 손톱이 알록달록한 건
흉몽과 길몽 사이에 물감을 엎질렀기 때문,
이걸 가위눌림이라 하는 걸까
절벽에 뿌리 내린 해국 닮아 바다향이 진한 어족 같다
안티프라민 냄새로 눈이 시린 경련은 잦고
창문으로 들이치는 투명한 언어를 꾹꾹 눌러 적으니
제 복부를 부욱 찢듯
쓸쓸함으로 봉한 문장들은 오타의 뼈대까지 드러나는데
수직의 말은 비, 수평의 말은 눈
독작하는 오늘밤 속옷울음 같은 저 진눈개비
감정이 없다는 유리창이 촉촉이 젖는 밤이다
*그믐치 : 음력으로 그달의 마지막 날에 가까운 무렵 비나 눈이 내림.
사과를 깎는 각도
김겨리
대기권으로 쏘아 올린 위성이 붉은 과육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 붉은 의태어를 해독하려고 중력을 벗겨내자
바깥을 꽉 움켜쥔 단내가 진동한다
끊어질 듯 말 듯 궤도를 벗는 행성의 허물은
외곽에 뿌리를 둔 껍질의 중심부
껍질이 벗겨질 때 잘린 향기는 제 뿌리를 기억할 수 있을까
집착이란 껍질이 움켜쥔 알맹이였다는 사실.
껍질을 벗겨낸 알맹이에는 또 다른 집착이 생기기 마련이다
모든 것들은 깎아 내거나 깎이는 제각각의 방식이 있다
보름달을 그믐달로 깎기까지 어둠의 날은 얼마나 무뎌졌을까
칼날의 기울어진 각도와 방향에 따라
깎인 껍질의 운명이 바뀐다
안쪽을 향하면 먹기 위해 깎는 껍질, 바깥쪽을 향하면 도려내는 껍데기
안쪽을 향하는 날은 예각이라 향을 발라내지 않고
바깥쪽을 향하는 날은 둔각이라 깊은 흉터가 남는다
안쪽으로 깎아야 향과 맛을 유지할 수 있다
아직 깎이지 않은 영역과 깎여나간 경계에 칼날이 멈춰 있다
팽팽한 긴장이 더 예리하다
몸은 둔각으로 하되 칼날은 항상 예각을 지향할 것
사과꼭지에서 늙은 벼랑의 냄새가 나는 건
각도 없이 도려내야 할 영역이기 때문이다
산수유, 듣는다
김겨리
야트막한 능선에 나뭇가지 부글부글 끓는다
지금은 입산금지, 산통이 심한 곳은 곁눈질만 해도 눈이 데인다
토압을 견디는 뿌리의 하지동맥이 도드라진다
관절에 힘이 빠진다, 씨앗들이 귀를 찢는 중일 거야
오줌을 누고 돌아서면 다시 느껴지는 요실금도
씨앗들이 귀를 찢는 중일 거야
고샅길 모퉁이에 길게 흘러내리는 지린내
엄마 나 쉬마려, 이미 축축해진 아랫도리
모든 강의 발원도 처음은 한 줄기였을 거야
충혈된 잇바디, 부력이 혈액이 되는 나무의 내부
허공에 붉은 심장을 다는 씨앗이
우곽에 유기된 혀 짧은 노래 같다
시어를 표절한 새순들, 귀를 찢는 중일 거야
시어를 따다가 장에 내다 팔 순 없을까
쓰다 만 문장은 피다 만 꽃으로 분류되어야 하나
흘끗 본다 흘끗흘끗 보다가 잘 안 보이면 눈을 감는 것도
귀를 찢는 중일 거야
어둠의 반대편으로 누워 자는 날은 입이 돌아간다
소금물로 입을 행군 부위가 온통 상처였다면
고로쇠는 짤까, 산수유 꽃은 왜 노랗게 질려 있을까
머리를 붕대로 질근 동여맨 산수유나무 몸을 활짝 열고
꽃 하나에 상처 하나, 꽃 둘에 상처 둘,
꽃 우수수에 상처 우수수, 귀를 찢는 중이다
벙어리 장갑
김겨리
입을 봉하진 않았지만 퇴화되었다고들 합니다
부드러운 외모가 우유부단한 듯 보이나
손목을 으드득 깨물어먹고 슬그머니
부르튼 입술을 세상 밖으로 드러낼 줄도 압니다
과식한 듯 보이나 식도가 없어 삼키진 못합니다
원래 눈은 퇴화된 채로 태어났습니다
대신 예민해진 귀로 360도를 다 봅니다
동그라미가 들어 있는 수화만 읽을 줄 압니다
발음이 달팽이처럼 느릿느릿해서
말을 끝까지 다 해본 적이 거의 없지만
굳이 할 말을 다하고 살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눈물의 각질 같은,
허공에 의태어만 남기고 자맥질하는 새 같은,
흠집만 삼켜 상처로 배부른 고양이의 헛배 같은,
입 돌아간 시간의 점괘 같은,
동그라미로 진화되는 과정이기에
생애는 굵직굵직한 마디 같습니다
둥근 뼛속을 열면 둥근 우물이 보입니다
아, 하고 소리쳐봅니다
되돌아오는 건 소실점의 마지막 점.
아득한 같아서 찔끔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만
체온이 빠져나간 후 남겨진 괄호,
온몸을 돌아다니는 상처를 다시 품을 때까지
따뜻한 수화를 오래도록 조몰락거려봅니다
구름을 넘기며 오는 바람의 거친 손을 잡아봅니다
그의 풍화된 손이 참 따스합니다
손톱자리
김겨리
손톱을 깎으며 잘려나간 손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은하로 손톱을 별자리로
손끝에 정박한 조반월의 개기월식을 본다
잘린 각질이 톡, 몸에서 튕겨 나갈 때
정수리에서 발톱까지의 짜릿한 감전 같은
그 톡, 소리가 참 경건하다
뒤뜰 채마밭 상추가 파릇파릇한 독을 품듯
잘려 나간 손톱 자리에 뽀얀 햇달이 솟으면
창문과 손가락과 벽의 삼각형 속이 환하다
삼각형의 가운데에 앉아 손톱을 깎는 저녁은
동맥을 끊고 서산으로 넘어간 노을의 뒤끝, 참 긴데
반달이 되었다는 손톱의 전설을 믿으며
눈썹을 밀고 온달이 되려한 애호박이 담장을 기웃거린다
빈손에 익숙한 것들은
수중을 털어서라도 성찬을 차려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법
밀주를 담가 찬 광에 묵히길 석 달 하고도 열흘
다리 풀린 지네만 혀를 깨물고 문지방에서 자진을 한다
한날한시에 뎅강뎅강 목이 잘린 것들
봉하고 봉해도 삐져나오는 응어리,
촛불을 켜놓고 혓바닥에 생긴 물집을 딴다
생채기가 난 자리에
말 수 적은 수화 한 마디 점지하고
톡, 손톱이 잘린 자리에 부화 중인 별자리 하나
스카이 댄서
김겨리
바람이 악보고 허공이 무대인 무명배우의 팬터마임
허파에 바람이 기득 차면 자동적으로 흔들리는 관절,
텅 빈 주머니엔 박자 조절용 공복이 불룩하다
옆구리에 낀 시집을 펴면 와르르 쏟아지는 초록 입 냄새
녹물 든 뻐드렁니는 살짝 뿌리가 드러나 있다
풍향 따라 둔각으로 휘어지는
그의 등엔 얼마나 많은 울음이 고여 있을까
허공의 여백을 찾아 시선을 끌어야 하는
무직이 직업인 자영업자
혼잣말로 엽서를 쓰고 중얼거림으로 답장을 쓰지만
항상 편지는 반송된다
그이 특기는 수취인 불명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배달부
더러 미납으로 부친 웃음이 수금되지 않는 날에는
밤새도록 춤을 추며 야근을 한다
막다른 골목 전등이 나간 전봇대가 집인 그를
바람 빠진 가족들이 허기처럼 기다린다
야광을 임신한 아내와 항상 통화 중 같은 아이들은
누전으로 대화한다 잘 들리지만 동문서답하는
그들의 대화는 허공적이고 공간적이고 공개적이다
그들의 가장은 백댄서
헛배가 계약서고 공복이 계약기간인 그는
중력의 반대편으로 뿌리내리는 법을 안다
낙엽의 의식
김겨리
낙엽의 행간을 옮겨 적다보면 잎맥은 모두 비문非文이다
보폭과 받침이 일정하지 않은 건 중력과 부력의 알력 때문
나무의, 밖은 안으로 안은 밖으로 서로 옷을 바꿔 입는 게 보였다
알몸에 분홍 반점이 있는 걸 보면 이복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개칠한 그늘을 헐어내면 구름 행색의고양이 그림자가 드러나는데
꼬리를 흔들어 미끼를 놓는 고양이의 감정이 둥실둥실하다
이빨 자국이 드문드문 난 사과 한 알, 단물이 쏠린 면이 심장이다
입술에 콧등에 볼 언저리에 심장을 뜯어먹은 티를 꼭 내야만 했을까
나뭇가지는 공복인 제 마디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춥겠다, 읽어도 해독되지 않는 나무의 심장에 바짝 귀를 대본다
바람소리를 지날 때마다 한 마디씩 떨어지는 관절,
달빛이 느슨한 재 괄약근에 힘을 줘보지만 요실금은 어쩔 수 없다
창틀에 쌓이는 고적의 두께에 대해선 어떤 색을 칠해야 하는 걸까
제 몸을 빠져나온 나무의 허물이 벗어놓은 영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수화樹話가 끝난 뒤에 물음표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내는 것
쉿,
읍내 삼거리
김겨리
고무 함지박엔 고사리 한 무더기 한 움큼 청국장 세 덩이가 단출하다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흑백 희망이 인화되는 동안
노파가 참지 못하는 건 팔자보다 모진 졸음
꿈의 모서리는 푸석푸석하다
오일장이 아니라도 시장 어귀 노점은 매일 열린다
고사리 쪽파 마늘 청국장 두부 묵 얼갈이 상추 고추 콩나물
온갖 푸성귀들이 활짝 피어 있는 보도블록,
발육이 더딘 가로수는 자신이 매물인 줄 알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흔드는 그늘에서 젖내가 난다
차도로 밀려난 사람들은 느리게 걷는다
차들은 불법주차처럼 중앙선을 따라 어기적거리고
눈총을 받으며 스쿠터 한 대가 소음을 흘리며 지나간다
가려운 뒤통수로 햇살이 쨍쨍 내리쬔다
무질서가 질서고 차례가 흠이 되는 일방통행로,
사진관 앞에서 반명함판만큼의 좌판을 펼쳐 놓고
오지랖으로 틀니를 닦으며 옥수수를 파는 노파
모두 그녀를 오드리 될뻔*이라 부른다
그윽한 눈매가 그녀의 소싯적 행적이 궁금해지지만
치렁치렁 귀고리를 한 늘어진 귓불로 더 그렇지만
삶의 궤적은 수더분해진 입담에 비례한다는 듯
먼지로 덮인 양은솥 술빵이 김을 모락모락 내뿜고 있다
좌판은 농익은 냄새로 진동하고 고막은 색맹이라 투명하다
데면데면한 말투로 흥정하다가도
떨이처럼 한꺼번에 다 팔려나가는 좌판,
찰랑찰랑한 전대 속 지폐 몇 장으로도 오늘은 행복하다고
왕복 1차선이 희망인 보도블록에
날마다 내일이 희망인 장다리꽃이 피었다 지고 다시 활짝 핀다
*오드리 햅번
돼지굽밥집
김겨리
잔술 한 잔으로 불콰해진 횡설수설 위에 눈이 쌓이고
부서진 입간판 불빛처럼 웅크려 있는 돼지국밥집
청테이프로 오려 붙인 유리창 실금으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으로도 뜨거워질 줄 아는 골목
빙점이 종점인 사람들이 빙하처럼 떠돌다
항로를 수정하기 위해 닻을 내리지도 않은 채 정박한다
구겨진 항해일지를 탁자 위에 펴놓으면
난파되었던 날들이 홀로그램처럼 드러나고
손금에 잔뿌리가 많은 까닭에
헝클어진 이정표를 수습하는 날들이 많을 뿐이라고
딴청 피듯 문드러진 지문으로 턱을 괴어보지만
촉촉이 젖는 눈빛 따라 촉 낮은 불빛만 흔들거린다
회덕에 둘러앉아 불콰해진 얼굴로 묵묵히 나눠 마시는 연탄가스가
폐부 깊숙이 쌓이는 동안
역마살의 종지부 같은 눈발이 밤의 눈금 위에 소복이 쌓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빛을 던져 서로의 환부를 덮어주었다
골목의 지분을 조금씩 나눠 갖고 사는 사람들
노점상 박씨는 호적까지 파서 옮겼다는 돼지국밥집
그리움처럼 파먹는 국밥 한 사발
떨어뜨린 콧물도 간간힌 간이 되고
유리창에 핀 성에도 한식구가 되어 윗목에 뿌리를 내린다
골목에 꽃이 핀다
꽃들은 시들지만 시들어 더 그윽한 향이 되기도 한다
가끔씩 웃풍 멱따는 소리로 골목은 긴장하기도 하지만
국물 우러나는 냄새로 찌든 막다른 골목,
적적한 삶도 함께 우려내는 돼지국밥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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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백태를 걷어내니
혀에 뿔이 돋았다
어떤 맛이 예민한 감각이 돋았다
상처의 멋,
불면의 맛,
젖은 맛,
2016년 6월, 김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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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시
여백의 모서리에 앉아
일몰에 구멍을 내고 안을 들여다본다
햇살 한 움큼과 어둠 한 움큼이 서로 하락하고 있다
잘 안 보이므로 입김을 훅 불어 닦아내고
몇 마디의 각주를 달기로 한다
노을 주위로 어둠이 밑줄을 긋기 시작한다
하루를 밀어내는 일이 저런 거구나, 오후 7시
빈칸처럼 지긋한 저녁은 그림자들의 문장
의태어로 된 비문非文 투성이,
여백의 산란 이 그렇다
여백은 참, 모질다
채우고 채워도 여백뿐
차라리 다 비우는 게 채우는 것
여백이 그득하다 어느새 자정이다
웅크린 등을 펴는 편린의 검은 백지 한 장
또박또박 써내려간다
검은 바탕에 검은 글씨들,
눈 감고 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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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겨리 詩集 [※분홍잠※]
[ 해설 ] -
창조적 상상력과 치유의 시학
송 해 일 시인. 문학박사.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
1. 들어가면서
김겨리 시인의 첫 시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문인들에게 첫 시집 또는 첫 작품집은 등단의 벅찬 기쁨을 바탕으로 필자의 역량과 정성을 다한 필생의 성과물이다. 이번 김겨리(본명 김학중, 이하 김시인 호칭)시인도 마찬가지 감회일 것이다. 일면식도 없던 김겨리 시인과의 인연은 2015년 격일간 <농민신문>신춘문예 공모에서 심사위원으로 위촉 받은 필자가 수천 편의 응모작 중 김겨리 시인의「분홍잠」을 당선작으로 뽑으면서부터이다. 이 작품해설을 수락한 것 또한 김시인에 대한 믿음과 격려, 문단 선배로서의 책임감 때문이다.
김시인이 본명 김학중을 필명 ‘김겨리’라 한 것은 소 두 마리가 멍에로 끄는 쟁기 즉, ‘겨리’처럼 문학과 인생을 성실하고 우직하게 정진하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넓게 보면 고도의 형이상학적 언어예술행위이면서 시인에게는 가치 있는 자기체험의 기록이요, 존재확인이다. 또한 무심한 듯 존재하는 우주 삼라만상 즉 객관적 상관물에 대해 인간의 의식작용과 언술을 통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인간의 행위와 의식세계의 심층에는 초자아와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심리학적으로는 시를 분석하고 해설하는 자체가 문자로 구현된 표층적 작품을 통해 작가의 심층에 자리한 무의식을 파헤치고 들여다보는 일종의 내시경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하게 얽히고 왜곡돼 나타나는 현상적 꿈을 심층적으로 해부하고 분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김시인에 의하면 이 시집의 작품 54편을 주제별로 제1부(삶, 철학, 고뇌, 자아), 제2부(어머니, 희생, 소멸, 생명), 제3부(계절, 자연, 섭리), 제4부(희망, 절망, 허무, 그리움)으로 나누었다고 하므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유추할 수 있다.
2. 창조적 상상력과 의미의 재발견
인간의 지적, 정서적 활동의 본령인 예술창작분야에서 상상력의 중요성은 재언할 여지가 없다. 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아이디어가 첨단 발명품과 뛰어난 예술 작품을 낳게 한다. 무심한 객관적 상관물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재발견하는 것이 문학이요 예술 아닌가.
상상(상상력)에 대한 코울리지나 존러스킨 등의 다양한 이론을 상론한 지면은 없다. 편의상 일별하면 상상력想像力은 진전 정도에 따라 첫째: 사물의 최초 감각 경험이 기억으로 나타나는 재생적 상상reproductive imagination, 둘째: 원물의 모양이나 기억에 유사한 대상, 관념, 정서를 연합하는 연합적 상상association imagination, 셋째: 선행의 경험을 해체, 분리, 첨삭하고 종합하여 새롭게 재구성하는 창조적 상상creative imagination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김시인의 두드러진 강점의 하나가 풍부한 지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기발한 착상과 시적 이미지 창출능력이다. 여기서 특히 ‘창조적 상상력’이라 한 것은 옛날 고전시가나 흔히 연애시 풍의 낭만주의 시에서 보는 감성 과잉이나 뜬구름 잡는 식의 진부한 재연이 아니라 이성적, 과학적으로 해체 분석하여 재구성하는 기발한 착상을 의미한다. 이는 공학도인 김시인이 태생적으로 “사물과 정물과 관념을 원자, 분자 구조처럼 해체해 보며 글을 쓰는 편”이라고 언급한데서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김시인의 시는 산문형으로 약간 사변적이지만 진부하지 않고 신선하다.
김시인은「서시:여백의 모서리에 앉아」에서 “일몰에 구멍을 내고 안을 들여다본다//햇살 한 웅큼과 어둠 한 움큼이 서로 허락하고 있다//잘 안보이므로 입김을 훅 불어 닦아내고//몇 마디의 각주를 달기로 한다//노을 주위로 어둠이 밑줄을 긋기 시잘한다…(하략)…”에서 보듯이 김시인은 프리즘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제 이런 논의를 전제로 그의 신춘문예 당선작이자 표제작인「분홍잠」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고수레로 남겨 둔 홍시의 밀린 잠이 붉은 저녁이다
마당을 쓸던 노인이 허리를 굽히자 짧은 옷단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등골
그 깊은 계곡까지 노을이 들었다
무너지는 한쪽 벽에 봉창 달빛을 빚어 얽는 거미가
바람이 들지 않도록 거미줄을 암팡지게 엮는다
명아주 이파리 스적거림으로 창문을 단 집
구절초 꽃대로 세운 배흘림기둥에선 풍경風磬소리가 향긋하다
노인이 굽혔던 허리를 펴면 가을볕이 어리광처럼 달려든다
도돌이표만 있는 가을볕은 노인의 십팔번이다
음정은 새털구름이고 박자는 떨어지는 은행잎
아무나 풍월로 읊어도 진양조장단
지붕엔 말표고무신 한 짝이 노을로 배꼽만 덮고 누워 있다
갈기털 다 빠진 목덜미에 솟대 그림자를 괴고 잠든 말굽은
아직도 따스한 발걸음을 기억하며
지붕에 올라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긴 한숨을 쉬는 노인의 호흡이 가늘게 떨린다
허공에 써놓은 점자로 되짚어가는 길에도
과속방지턱이 있는지 바람도 잠시 주춤하는 법인데
어느새 성성해진 백발과 그믐달만 뜨는 눈썹
슬하에 노을 닮은 은행나무 한 그루만 달랑 둔 노인의 가게
입술에 허옇게 일어나는 각질을 옷소매로 쓱 훔치니
노을이 찍 묻어난다
노인의 등 뒤로 달이 뜬다 어쩌면 오늘밤
은행잎 한꺼번에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뜻
노을의 끄나풀이 길다
-「분홍잠」전문
연 구분 없이 거의 내리닫이 줄글로 된 25행의 이 작품은 형식과 제재 면에서 앞서 언급한 김시인의 작품세계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제재는 한적한 산촌에 독거노인의 쓸쓸한 일상을 스케치하고 있지만 노인의 동작 하나, 주변 풍경과 사물 하나하나가 능란한 어휘구사력과 관찰력으로 인해 한편의 롱샷슬로우 비디오처럼 미세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시의 골격은 노을 녘에 마당 쓰는 노인의 단순한 동작 즉, 허리 굽힘-허리 폄-노인의 한숨-옷소매로 입술 닦음이다. 그 짧은 순간의 간극을 상상력과 언어 스케치로 풍성하게 채우고 있어 이채롭다. 보통이라면 낭만적인 한탄의 몇 마디로 뭉뚱그리고 말 풍경을 김시인의 예리한 관찰력은 장면 하나 동작 하나를 분자 해체하듯 잡아내 감칠맛 나는 어휘로 채색하고 있다.
김시인이 체험하고 기억에 담았던 한 산촌 독거노인의 안쓰러운 일상을 순간 포착하듯이 해체, 분리, 첨삭하여 새롭게 재구성하고 있다. 이른바 앞서 언급했던 창조적 상상력에 능란한 언어구사로 이미지를 더함으로써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일이 무성하던 나무에 그늘이 앙상해진다
밑동에 드러난 하지정맥류가 심장 같다
우듬지가 간지러우면 바람의 손을 빌려 등허리를 긁는다
재채기할 때마다 나무의 한 생애가 온통 흔들리고
요실금인 듯 뜨거운 그것, 시들수록 싱싱해지는 나무의 언어를 생각한다
목젖까지 뱉는 그늘, 외부가 하염없이 젖는다
내부가 조금씩 여백으로 남는 동안
외부를 공고히 다지는 그늘의 모서리
우리는 그걸 나무의 폐경이라 부르지만, 혹은
무덤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의 여생일지도 모르지만
모다깃비 지나간 뒤 아무렇게나 내지른 나무의 새끼들처럼
붉고 푸르고 늙고 앳된 낙엽들
탯줄도 안 자른 난태생의 옹아리로 길은 젖는다
발자국이 짝짝이인 소멸의 뒤태
그윽하고 이슥하게
詩드는 꽃잎들, 아슴아슴
-「시들다」전문
이 시집의 첫머리 작품인「시들다」는 잎이 무성하다가 단풍 들고 시들어가는 나무의 연륜을 상상력과 인생론적 비유로 감칠맛 있게 빚은 작품이다. 연구분 없는 16행의 작품이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이미지가 선명하다. 나무가 시들자 그늘도 앙상해진다. 나무밑동 줄기의 울퉁불퉁한 하지정맥류, 우듬지가 간지러우면 바람의 손을 빌려 등을 긁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재채리, 요실금, 시들수록 싱싱해지는 나무의 언어, 목젖까지 뱉는 그늘 등 능숙한 언어구사력이 신선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나무는 늙고 시들수록 연륜이 쌓여 詩가 된다는 의미로 ‘시들다’를 ‘詩들다’로 치환한 언어유희가 재치 있다.
나무가 시들면서 내부가 조금씩 여백으로 남는 것을 “나무의 폐경” “무덤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의 여생”으로 비유하고 있다. “붉고 푸르고 늙고 앳된 낙엽”은 “모다깃비 지나간 뒤에 아무렇게나 내지른 나무의 새끼들”이며, “탯줄도 안 자른 난태생의 옹아리로 젖는다”는 표현 등이 압권이다. 긴 문장으로 발화가 넘치는 가운데도 깔끔하게 정리된 이미지가 시를 벗는 솜씨와 내공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수작이다.
거울 속 사내의 눈썹 언저리가 흐릿하게 희끗했다/끝 부분만 흰 눈썹 한 올이 설핏 보인다/
엄지와 집게 손가락 손톱으로 끝을 잡고 뽑아내려 하지만/
잡히면 놓치고 다시 잡아 힘껏 뽑으면 잡혔다 놓친 흰 부분만 곱슬하게 꼬이고/
머리가 꼬리가 되어 좀체 뽑히지 않는다
-(중략)-
하얀 올 한 가닥 잡는 일도 쉽지 않지만/잘못 뽑힌 검은 눈썹의 황당함도 어쩔 수 없지만/
뽑으려는 악착과 뽑히지 않으려는 암팡짐 사이에서 사시가 되어가는 눈/
-(중략)-
흰 눈썹만 한 가닥이 뿌리를 뻗고 견디는 저 악착/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내 안부를 자문해 본다/
-(하략)-
- 「백미白眉」부분
어느 날 눈에 띤 휜 눈썹 한 올을 뽑으며 느낀 감회와 동작 하나하나를 리얼하게 스케치 하며 의미를 잡아내고 있다. 잡힐 듯 잡히지 않아 몇 차례 뽑기에 실패한 흰 눈썹 한 올에서도 “내 생이 얼마나 꼬이고 굴곡진 탓”일까 자문한다. 흰 눈썹 한 올을 잡으려 사시가 된 눈을 보고 “우리 생에서 한 쪽으로 쏠리거나 치우친 부분은 얼마나 되며”“잘못 뽑혀도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될까”생각한다. 뽑으려는 악착과 뽑히지 않으려 버티는 암팡짐 사이에서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내 안부를 자문한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일상에서 의미를 찾는 남다른 관찰력과 분석력이다. 이 시가 예시하듯 “분자구조처럼 미세하게 해체하며 글을 쓴다”는 김시인의 창작 태도에서 이상 시인의 ‘거울’처럼 자의식이 충일함을 느낀다.
대기권으로 쏘아 올린 위성이 붉은 과육으로 말을 걸어온다
-(중략)
껍질이 벗겨질 때 잘린 향기는 제 뿌리를 기억할 수 있을까?/
집착이란 껍질이 움켜쥔 알맹이였다는 사실/
껍질을 벗겨낸 알맹이에는 또 다른 집착이 생기기 마련이다/
모든 것들은 깎아 내거나 깎이는 제각각의 방식이 있다/
보름달을 그믐달로 깎기까지 어둠의 날은 얼마나 무뎌졌을까
칼날의 기울어진 각도와 방향에 따라/깎인 껍질의 운명이 바뀐다
안쪽을 향하면 먹기 위해 깎는 껍질, 바깥쪽을 향하면 도려내는 껍데기/
안쪽을 향하는 날은 예각이라 향을 발라내지 않고/
바깥쪽을 향하는 날은 둔각이라 깊은 흉터가 남는다
안쪽으로 깎아야 향과 맛을 유지할 수 있다//
아직 깎이지 않은 영역과 깎여나간 경계에 칼날이 멈춰 있다
팽팽한 긴장이 더 예리하다-(하략)-
-「사과를 깎는 각도」부분
사과를 깎는 단순한 동작에서도 시인은 특유의 상상력으로 의미를 천착한다. 사과는 대기권에 쏘아올린 붉은 위성이다. 알맹이를 싼 껍질의 생태를 ‘집착’이라 가정하고 보름달을 그믐달로 깎는 칼은 어둠이라 상정한다. 사과를 깍는 칼은 어둠이라 상정한다. “사과를 깎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껍질의 운명이 바뀐다. 칼날이 안쪽을 예각으로 향하면 먹기 위함이고, 바깥쪽을 둔각으로 향하면 도려내면 먹기 위함이고 바깥쪽을 둔각으로 향하면 도려내는 것이라 단장한다. 칼날이 안쪽을 향해야 향과 맛을 유지할 수 있다. 깎인 쪽과 남은 쪽의 경계에는 팽팽한 긴장이 있다. 사과를 깎으면서 고향 추억이나 여인 생각 등 낭만적인 상상이 아니라 단순히 사과를 깎는 각도 하나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는 건 공학도다운 김시인의 지식과 날카로운 관찰력 덕이다.
3. 소외와 상처 치유, 모성회복
프로이트S. Freud 정신분석학 이론의 두 가지 기본개념으로 첫째, 인간의 행동은 우연이 아니며 선행하는 무엇이 있다는 심적 결정론의 원리principle of the psychic determination, 둘째, 구 행동의 출처가 무의식이라는 무의식의 원리principle of the unconscious를 들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의식, 전의식, 무의식의 3중 구조로 파악하고 인간의 성격을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 ego로 나누고 있다. 우리 몸 속에 질병에 대한 면역체계가 있듯이 마음에도 면역 체계가 있는데 프로이트는 이를 심리적 방어기제defence mechanism라 했다. 불안, 고통, 부적응, 상처, 갈등을 치유하는 방어기제는 승화, 억압, 투사, 전위, 합리화, 퇴행, 반동형성 등 6가지가 있다.
잠시 프로이트 이론을 상기한 것은 김시인 자신이 창작태도나 시적 분위기, 제재 등을 “상처받고 소외되고 잊혀진 것들, 사회적 모순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구제의식, 무의미한 것들에 대한 부여”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난과 고생과 희생의 대명사로 빈번히 등장하는 어머니 소재의 시편들은 상처 치유와 모성 회복은 물론 사실적인 비유와 묘사를 통해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시집 서두의 짤막한 ‘시인의 말’에서 김시인은 “상처, 불면, 젖은 맛”으로 이런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고 작품 도처에서 ‘상처’라는 시어가 보인다. 일례로「산수유, 듣는다」마지막 부분에서는 산수유 꽃 하나에 상처 하나라고 산정하여, 노랗게 질린 산수유 꽃이 우수수 질 때마다 상처도 우수수 쏟아진다고 상정하고 있다.
백태를 걷어내니
혀에 뿔이 돋았다
어떤 맛에 예민한 감각이 돋았다
상처의 맛
불면의 맛
젖은 맛
(2016년 6월 김겨리)
소금물로 입을 헹군 부위가 온통 상처였다면
고로쇠는 짤까, 산수유 꽃은 왜 노랗게 질려 있을까
머리를 붕대로 질끈 동여맨 산수유나무 몸을 활짝 열고
꽃 하나에 상처 하나, 풀 둘에 상처 둘
꽃 우수수에 상처 우수수, 귀를 찢는 중이다
-「산수유, 듣는다」부분
시인의 작품 중에는 모성회복을 통해 상처와 소외의 치유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 특히「장미의 자세」「허수애미」「울음의 바탕」「통뼈」「꽃피는 장롱」「탱자꽃」「검버섯」등은 어머니를 제재로 한 작품들이다. 특히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어머니를 제재로 한 이 작품들은 특유의 절절한 사연과 함께 시인의 어머니를 향한 모성과 그리움 안타까움 등이 능숙한 표현과 함께 버물어져 울컥 감동을 주는 빼어난 수작들이다.
야트막한 담장 위에 오늘 장미 몇 송이가 더 피었다
담장 아래엔 밤새 거리를 쓸고 다니다가 불시착한
부딪고 쓸리고 차이고 짓밟힌 상처들
수북하다란 말이 상처의 대명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무작정 상경한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본 적이 있다
굴곡진 삶의 대목에선 잉크가 번진 채 끊어진 문장들
뿌리까지 붉을 거란 장미처럼
아픔이 있는 것들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습성이 생겼다
담장보도 웃자란 엄마가 심어 놓은 장미
장미가시는 단지 뾰족한 손톱일 뿐인데
허공이라도 움켜쥐려는 암팡진 본능일 뿐인데
-(중략)-
좀 더 충혈되는 장미의 핏대, 저토록 이를 악물게 한 것은 무엇일까
오버랩되는 엄마의 협심증도 붉어서일까
-(하략)
-「장미의 자세」부분
이 작품에서는 엄마가 심어 놓고 담장보다 웃자란 장미의 가시를 보며 온갖 역경을 이기고 억척스럽게 풍파를 견뎌 온 강인한 모성을 반추하고 있다. “수불하다는 말을 상처의 대명사처럼 느끼며” 무작정 상경한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본 뒤 잉크가 번진 채 끊어진 문장들로 환치된 장미가시는 “부딪고 쓸리고 차이고 짓밟힌 상처들”이다. 장미가시는 험난한 세파 속에서 가족의 생존을 위해 허공이라도 움켜쥐려는 암팡진 본능이요 뾰족한 손톱이다.
“틈이 자라 붕괴가 된다는 말. 믿지 않는다/
뙤약볕 작열하는 언덕을 닮은 어머니의 등/…/
통뼈란 거/강단지고 당돌한 허우대를 떠올리겠지만/협심증으로 호흡이 짧은 어머니의 등은/
물렁하지만 평평한 언덕이면서 비탈이었다/…/
난청이면서도 귀가 밝은 어머니는/어금니가 제일 먼저 빠졌다/얼마나 오래 이 악물고 버티셨기에/이리도 일찍 입 안에 허공 하나 키우셨을까/…/
아무데나 꽂아도 가지를 뻗는 통뼈의 생명력/집요한 인내란 몸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임을/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알았다“
-(하략)-
-「통뼈」부분
흔히 통뼈라 함은 허우대 크고 당찬 남성상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통뼈는 온몸으로 굴곡진 세상을 살아낸 연약하지만 장한 어머니를 반어적으로 지칭한 듯하다. “뙤약볕 작렬하는 언덕을 닮은 어머니의 등”“협심증으로 호흡이 짧은 어머니의 등은 평평한 언덕이요 비탈” “난청이면서 귀 밝지만 어금니가 먼저 빠진 어머니”는 아무데나 꽂아도 가지를 뻗고 뿌리 내리는 강인한 생명력의 표상, 즉 ‘통뼈’다. 세상풍파에 맞서 강인하게 살아낸 노쇠한 어머니를 바라보며 느끼게 연민과 감사, 모성의 위대함에 대한 헌사이다.
김시인 작품의 다른 특징은 소외되고 핍박받는 인간 군상과 잊혀져가는 하찮은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온정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처지가 크게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누군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고 상처도 치유될 것이다.
김시인은 가끔 신설동 풍물시장을 찾으며 중고품과 왁자한 시장 풍경에서 생의 애환과 삶의 에너지를 느낀다는데, 자신도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을 그런 시를 쓰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막다른 골목은 늘 누군가의 아지트다
거기는 공터가 있지만 여백으로 항상 북적인다
나무의 여백 그늘의 여백 바람의 여백 여백의 여백/…/
정년퇴직자 명예퇴직자 무직이 직업인 사람들
보폭이 울퉁불퉁하고 신장이 앉은키인, 여백氏
내가 그들을 여백氏라 부르는 건
그들의 오랜 공백이 직업병이 아니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쌈짓돈 몇 푼 걸고 주사위를 던진다/…/
분주한 듯 삼삼오오씩 진지하지만 하릴없다
잃은 자도 딴 자도 없이 개평을 나눠 갖고 자비로 일당을 벌어 귀가하는 길…/
통계조차 잡히지 않는 바닥이 드러난 생의 여백들
발자국소리만 돌림 노래가 되어 골목이 왁자하다
-「여백氏」부분
이 시는 막다른 골목공터에 모여드는 무직자들의 하릴없는 일상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뒷골목에는 현실에서 소외된 실직자, 무직자, 명예퇴직자들이 모여 푼돈내기 윷놀이로 왁자지껄하지만 귀가하고 나면 빈공간만 남는 스산한 여백일 뿐이다. 그들은 여백을 잠시 메우는 매개물에 불과하다. 손창섭의 소설「잉여인간」의 인물들처럼 주류에서 벗어나 소외되고 존재감이 희미한 짜투리 인생들이다.
이파리가 앙상한 나뭇가지 하나가 지휘를 하듯 흔들리면
골목을 헤엄치듯 공명하는 음계들
오카리나가 된 콜라병과 바이올린이 된 빨래판…/
골목의 입소문은 빠르기도 해서
불닭발 돼지껍데기 떡볶이 오뎅 김밥천국 순대, 빨주노초파남보
밤새 가다듬은 목청을 쿵쿵거리며
한 음절씩 따라 부르면 어느새 합창이 되는 골목의 주주들…/
낮이면 득음을 위해 목청을 가다듬는 음악 지원생들로 북적이고
밤이면 별자리를 악보삼아 희망을 연주하는
노천극장/버려진 폐지도 하나의 음표가 되고
애끓은 기침도 한 소절의 가사가 되려 음정을 고른다…/
찬조 출연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노파가 지나갈 때
모든 청중들이 경건하게 기립을 하고
폐지가 맨땅에 질질 끌린 채 골목을 쓸고 가면
연습으로 너덜너덜해진 악보가 깨끗이 펴지는 골목으로
후렴처럼 달이 뜨는 앵콜, 앵콜
-「골목 오케스트라」부분
이 작품 역시 뿌리 잃은 서민들의 왁자지껄하지만 을씨년스러운 골목 풍경을 그렸다. 나무 이파리와 달빛과 길고양이도 거들어 한판 고적한 삶의 질펀한 오케스트라가 되는 현장을 스케치했다. 불닭발집 오뎅집 포장마차 군상과 음악지망생들과 폐지를 주워 끌고 가는 늦저녁에 노파의 찬조출연으로 골목오케스트라는 끝난다. 소외된 인간 군상들의 시끌벅적한 삶 자체가 오케스트라다.
김시인의 프리즘은 소외계층이나 뿌리 뽑힌 인간군상, 폐품, 고물, 길가에 버려진 가구 등 하찮지만 다 존재가치가 있다는 물상物象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4. 언어구사력과 연금술 “시중화詩中畵”
시가 언어 예술일 진대 언어 조탁과 구사 능력은 시인의 필수 자질이다. 이 점에서 김시인은 탁월하다. 우리의 현대시가 아직도 영탄조의 감정 과잉이나 사회 비판의 성명서 같은 생경한 표현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전시가 낭만적인 감성과 진술을 중시한다면 현대시는 언어로 이미지를 창출하는 시중화詩中畵를 지향한다. 예부터 “화중시畵中詩 시중화詩中畵” 논의도 이런 맥락이다. “말하기와 보여주기”의 방법 차이이다. 우리 현대시 100여 년을 돌아보건대 시의 내용을 중시하는 ‘역사주의’와 표현과 형식을 중시하는 ‘형식주의’의 대립 가운데서 역사주의가 우세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21세기 첨단시대를 구가하는 요즘에 우리 시도 구태를 벗고 현대적으로 변모해야 할 것이다.
앞서 주제별로 김시인의 특징적인 시세계를 살펴보았지만, 무엇보다 김시인의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언어 구사능력과 적재적소에 맞는 시어를 택해 이미지를 빚어내는 솜씨일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현란한 수식어를 동반한 풍경과 사건 사물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평소 학창시절부터 갈고 닦은 꾸준한 습작과 내공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시의 본령이 ‘생략과 응축’의 짧은 형식이지만, 최근의 산문시 선호 경향과 맞물려 이런 언어구사능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소외된 인간 군상과 사회 현상을 고발한 몇 작품의 경우 이것저것 다 언급하고 그림처럼 보여주려다 보니 산문시 수준을 넘어 수필처럼 길어지고 군더더기로 중언부언하는 요설투도 있음을 지적해둔다.
혓바늘이 돋으면 티눈 같은 환부에 젖이 도는 사월/…/
기적 소리 같이 가뭇한 어머니 냄새 휘몰아쳤고
산 빛 젖은 듯 숨 멎은 복사꽃 향기가 폐부에 가득 차면
늑막염처럼 봄병이 도졌다/…/
발 시린 탱자나무 가지가 산 빛을 끌어당겨 덮는다
마루에 앉아 빨래를 개키시던
어머니의 굽은 잔등에 햇살 눈부신 어느 봄날
빨랫줄에 널린 봄볕을 다 걷지도 못하고
탱자나무 울타리 바람소리가 되신 어머니
쪽 진 머리 닮은 꽃 한 송이씩 밤마다 내려놓는 나무가
달빛을 잘라 제 동맥을 쓰윽 긋는다
사철 가시만 무성한 탱자나무, 그리움을 독소로 견디듯
젖몸살이 울타리에 울긋불긋 열린다
삭정이 아문 자리에 가시 다시 돋으면
탱자꽃 진 자리 탱글탱글 여물어가는 바람소리
손 끝에 물혹이 잡히면
뽀얗게 찔린 물컹한 향기가 닥지닥지 열렸다
-「탱자꽃」부분
시골집 담장을 대신한 탱자울타리의 탱자 꽃에서 어머니를 반추한다. 이 시 전체가 김시인의 언어 다루는 솜씨를 돋보이게 한다. 사물을 빗대어 이미지를 만드는 기술이 탁월하다. “티눈 같은 환부에 젖이 도는 사월” “기적소리같이 가뭇한 어머니 냄새” “발 시린 탱자나무 가시가 산 빛을 끌어당겨 덮고”“마루에 앉아 빨래를 개키시던 어머니는 봄볕을 다 걷지도 못하고 탱자나무 울타리 바람 소리가 되셨다” “탱자꽃 진자리 탱글탱글 여물어가는 바람소리… 뽀얗게 찔린 물컹한 향기가 닥지닥지 열렸다”는 표현들이 빼어나다. 김시인의 작품 전편에 이런 맛깔스런 표현들이 산재되어 있다.
5. 맺는말
지금까지 김겨리 시인의 첫시집『분홍잠』의 세계를 살펴보았다.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김시인은 2015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늦깎이 신인임에도 학창시절부터의 부단한 습작과 동인 활동 등으로 노력함으로써 언어구사력과 기발한 착상 등 내공이 깊다.
필자 나름대로 김겨리 시인의 작품 특징을 요약하면 첫째, 시적대상 즉 ‘객관적 상관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창조적 상상력으로 분석 해체 변용해 구성함으로써 의미를 재발견하고 있다.
둘째, 제재나 주제선택에 있어서는 상처 받고 소외된 인간 군상이나 주류에 끼지 못한 하찮은 물상들을 택해 따뜻한 시선으로 포용해 치유하고 궁극적으로는 모성회복을 바라고 있다.
셋째, 기법면에서는 능란한 언어구사력과 상황 전개로 “시중화詩中畵”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늘어진 장시형보다는 ‘응축과 생략’으로 시적 긴장을 높이는 노력도 병행하길 바란다. 앞으로 더욱 ‘절차탁마’하고 정진해 문학사에 남는 큰 시인으로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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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그가 바라보고 체험한 일상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것들은 “굴곡진 삶의 대목에서 잉크가 번진 채 끊어진 문장들”(「장미의 자세」에서)이다. “장미의 가시로 손끝을 딴 ” 것처럼 그는 세상의 아픈 것들을 얼마나 피나게 터뜨렸을 까. 그가 시의 대상에서 끌어낸 것들은 스스로 부활하듯 생명력을 갖는다. 그리하여 시인이 본래 의도한 의미망은 무언가를 깨우친 듯 새롭게 재구성된다. 그것은 통찰이며 연륜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나 사실은 “발자국이 짝짝인 소멸의 뒤테”(「시들다」에서)를 걸어온 까닭이다.
그의 첫 시집이 이리 여백을 중시한 것은 “여백은 참, 모질다/채우고 채워도 여백뿐/ 차라리 다 비우는 게 채우는 것”(시인의 말 중에서)에서 엿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의작품 여기저기서 아주 자연스럽게 스치듯 스며 있는 행간의 폭에서 느낄 수 있다. 그의 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산문투의 문장들도 어쩌면 그가 가진 여유로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좀 더 느긋하게 바라본 시력이 그의 넉넉한 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시인의 특징을 여백으로 본다면 그 또한 비우는 연습일 것이다. 이런 첫 시집의 여유는 두 번째 시집에 이르면 사유의 깊이로 연결될 것이라 본다. 시인의 천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꾸지 말고 그 하나에서 더 깊어지라 말하고 싶다.
- 문정영 시인. 계간『시산맥』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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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겨리 시인∥
∙ 본명 김학중
∙ 경기 안성 출생
∙ 홍익대학교 졸업
∙ 201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 한국현대인협회 회원, 한국문협 당진지부 회원, 시산맥 특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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