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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사회 속의 과학과 종교
과거에 신학자는 철학자이자 과학자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시절, 비록 서양 문화권에서는 신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었지만, 동양적 관점에서는 그러한 분리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덧 세월이 흘러 과학문명과 후기자본주의의 사회인 지금, 이제 과학과 철학, 신학은 각자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과학은 독자의 영역을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계몽주의적 이성은 인간이 지닌 다양한 속성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그 우월적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이러한 이성에 바탕을 두어 17세기에 태동한 근대과학의 발전은 매우 눈부시다. 이제는 거대과학(big science)이라 불리면서 과거에는 생각하기 힘든 규모의 과학기술이 진행되고 있어 이에 대한 성찰이 생길 정도다.
이 과정에서 과학과 철학 및 종교는 서로 수용하며 변화해 왔다. 특히 과학과 신학의 경우처럼 진화론과 창조론의 갈등이라는 구체적인 사안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과학은 합리적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종교는 비합리적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시각에서 ‘이기적 유전자’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자신의 저서 《만들어진 신(God Delusion, 2006)》에서 기독교를 맹공격하고 있다. 심지어 그가 활동하고 있는 영국-인본주의자협회(British Humanist Association)에서는 시내버스 무신론 광고를 위해 약 3억 원을 모금했고, 이 가운데 도킨스 교수는 천만 원이 넘는 금액을 기부했다(〈그림 1〉).
하지만 합리적 이성을 포함해 감성이나 영성이라 불리는 다양한 면을 지닌 것이 인간이기에, 인간 삶의 각 영역을 대표하는 과학이나 예술, 종교 등은 모두 인간이 보다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시간관을 지닌 시대와 문화를 고려한다면, 과학과 종교가 서구에서나 최근 국내의 과학 교과서 진화론 논란에서처럼 소모적으로 서로 대립되는 형태로 부딪힐 필요는 없고, 오히려 서로 통합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여전히 과학과 종교가 부딪힌다면 최소한 그런 대립 상황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양자의 통합적 이해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과학의 세계관과 종교가 제시하고 있는 세계관 사이의 긴장과 혼란이 문제라면 그러한 혼란의 근거를 살펴보아야 인간에게 필요한 서로의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의 합리성과 과학이 지닌 권위의 정당성을 검토함으로써 과학으로부터 탈신화화를 시도하고, 그에 따른 종교적 합리성을 언급하고자 한다.
한편, 이 글에서 합리성은 삶의 현장에서 각 개인의 선택과 행동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합리성에 근거하여 각자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이런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간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은 가치판단을 수반해야 하기에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합리성의 발현은 고정된 형태가 있다라기보다는 늘 가변적인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모습을 반영하게 된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인간의 삶이 합리성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은 누구나 객관적으로 어떻게 보이건 자율적으로 자신에게 원하는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각자의 삶이 자신 나름의 합리적인 형태로 진행된다면, 개인 차원의 합리성과 사회나 집단에서 공유할 수 있는 합리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자를 주관적 합리성이라 한다면, 후자는 객관적 합리성이라고 하고자 한다. 객관적 합리성을 사회적 내지 집단적 규범(norm)으로 작동하는 합리성이라 한다면, 이 글에서의 주관적 합리성은 개인의 사적 경험과 지식 및 정보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자신만의 합리적 사유근거가 되는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통합적 인간을 구성하는 합리성에는 이성, 감성, 영성의 합리성이 있으며, 각각의 합리성은 객관적, 주관적 합리성으로 나뉠 수 있다.
2. 과학과 종교의 합리성
지금까지 과학과 종교 간의 대화는 끊임없이 시도되어 왔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양자의 조화를 이룰 가능성도 제시되어 왔다. 그럼에도 최근 국내에서 벌어진 과학교과서 진화론 퇴출 시도 및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의 유행은 과학과 종교 간의 문제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도 건재함을 말해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사회는 과학문명과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속해 있다. 종교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입장이 있지만 그 역사는 거의 인류 역사와 같이했을 것으로 보이는 것에 비하여 합리적 이성을 앞세운 계몽주의의 역사는 매우 짧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과 이에 수반하여 일어난 사회·경제 구조의 변혁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는 17세기에 시작된 합리적 이성과 이에 바탕을 둔 근대과학의 연장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과학문명은 길어야 3, 4백 년의 역사를 지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21세기에서 과학과 종교 간 세력 싸움의 승자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과학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과학에 바탕을 둔 산업기술 개발이 세계적 무한경쟁 체제 속에서의 생존전략으로 받아들여져 우리 사회의 모든 역량이 집중되고 있다.
한편, 과거 인류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종교는 현재 권력인 과학에 대응하여 그동안 사용하던 자신들의 언어와 논리를 유지하면서 옥쇄를 할 것인지, 아니면 현재 권력에 아부하며 변신하여 생존을 꾀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선 것 같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21세기의 종교에서는, 특히 서구문화의 기반을 만들어 왔던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두 입장이 여전히 공존하고 있다. 구미에서 쇠퇴해가는 기독교가 전자의 모습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고, 후자의 입장을 반영한 시도는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의 대두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삶과 사회를 규정했고 또한 하고 있는 종교와 과학이라는 두 영역이 우리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는 합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체로서 저마다 고유한 삶을 사는 개체 고유성을 지닌 자율적 인식 주체이자,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삶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이라면, 인간의 가치 판단이나 행동 양식의 밑바닥에는 합리성이라고 하는 인식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두 체제 간의 권력 이행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어느 쪽이 합리적인가 판단하고 수용한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이다. 합리성은 인간에게 의미를 만들어 내고 가치를 부여하게 한다. 세상을 인식하는 자율적 주체로서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선택적 정보’는 그에 반응함으로써 의미를 지니게 되고 반응 정도에 의해 가치가 형성된다.
과학이냐 종교냐를 선택하는 문제가 결국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으로서의 합리성 문제이자 이를 통해 창출되는 의미와 가치로 인해 시대를 규정하는 권력을 획득하게 과정이라면, 각각의 영역이 지닌 합리성과 이들이 만들어 내는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과거, 의미와 가치로 가득한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종교적 언어와 설명이 합리적이었다면, 이제는 과학적 언어와 관점이 보다 합리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은 과학이 도그마의 권위를 지니고 세상을 다스리는 맹주의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종교는 살아남기 위해 과학적 시각을 도입해 이 시대의 권력인 과학이라는 맹주의 모습을 흉내 내어 생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두 영역의 합리성을 비교 검토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인간 삶에 자리 잡고 있는 과학과 종교의 모습이자, 그에 기반한 영역과 층위(level)에 대한 고찰이다. 집단만이 아니라 개인의 미시적 차원에서 과학의 합리성과 종교의 합리성을 이들이 위치한 영역에 대한 고려 없이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고, 이 점에 대한 혼란이 과학과 종교의 진정한 만남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1) 합리성으로 본 과학
과학기술, 자연과학, 인문사회과학 등의 명칭이 자연스럽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면 21세기를 규정하는 패러다임으로서 과학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으로서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생명에 대한 입장 역시 신에 의한 창조보다는 다윈의 진화론을 생명에 대한 원리로 생각하며, 현대생명과학의 눈부신 발전 속에 등장한 생명공학은 일반인들에게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종종 사용되는 “그것은 비과학적입니다.” 또는 “비과학적 이야기는 그만 해라.” 등의 표현을 생각해 보면, 그 표현 안에는 맥락에 따라서 비상식적인, 미신적인, 비논리적인, 황당한, 인정할 수 없는 등의 여러 부정적 의미가 담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모 침대회사의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내용의 선전 문구가 일반인 대상의 광고 문구로도 사용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과학은 이미 우리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에게 이유나 근거를 떠나 막연한 신뢰를 주는, 일종의 도그마를 지닌 종교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현대사회에서 근대과학은 정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유물적 토대에서 설명할 수 있음을 천명함으로써 자본을 중심으로 인간의 삶을 주변화시킨 것과 동시에 종교를 인간 삶의 주변부로 옮겨 놓는 데 성공한 셈이다.
서양 중세기의 ‘신의 뜻’이란 기준으로 인해 모든 가치가 기독교 성경에 근거하고 있을 때, 종교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준 합리적 이성은 ‘인간 기준’으로 이 세상을 새로 구성했고, 이에 근거하여 태동한 것이 근대과학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합리적 사고로서 넓은 과학적 전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오래전부터 있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비과학적이란 말이 매우 비합리적이고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과연 근대과학적인 것만이 인간의 합리적 사유를 전적으로 대변하는 것인지 그리고 삶에서 차지하는 과학적 합리성은 항상 참인지를 묻는 것은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생명은 욕망의 발현이며, 인간이나 인간의 삶은 이성적인 사고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많은 이들이 과학적이지 않은 예술이나 문학 등에서도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한 공감과 감동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인간의 삶이 단지 합리적 이성만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공감을 얻지 못한다. 과학과 상관없이 개인 창작력과 상상력에 의한 유명예술가의 작품으로부터 사람들이 감명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란 이성과 감성, 더 나아가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많은 다양한 영역으로 구성되어 존재하며, 이들의 통합적 모습이 인간이자 총체적 삶임을 알 수 있다(〈그림 2〉). 이미 예술과 과학에서의 창조성은 신체 영역에서마저 그다지 다르지 않음도 알려져 있다.
한편, 일반적으로 합리성은 인과율에 근거한 논리성이거나 이성적인 정합성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분명히 합리적 사고체제를 지니지만, 인간의 합리적 사고가 모두 과학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합리적 사고가 특정 조건이나 형태를 취했을 때 비로소 과학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아무리 합리적 인간이라 해도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 훈련과 더불어 학위를 받는 과정이 요구된다. 과학은 인간에게 있어서 이성이라는 특정 틀을 지니고 세상을 해석하는 하나의 문화이다.
과학 또는 과학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합리적 사유의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며, 과학은 이성적 합리성 중에서 주관적 합리성을 제거하고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약속 체제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과정은 문화권마다 다를 수 있음도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 1924~1994, 오스트리아 철학자, 인식론적 아나키즘)가 제시하였다. 사회적 구성 과정을 지니는 과학은 지극히 역사·문화적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만 하는 문화체계이다. 최근 인지과학에서 주로 다뤄진 것처럼 인간은 스스로를 포함하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선별적으로 인식하고, 그 주관적 인식에 바탕을 두어 현실을 바라본다. 이런 주관적 합리성의 근저에는 각각의 개체가 지닌 믿음(faith)이 작동한다. 그러한 믿음은 삶의 경험적 누적으로 형성되고 작동되고 진화하기에 생명체의 삶이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주관성이 늘 작동하기에 각 개인 이성의 합리성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이성이 동물적 감정이나 무의식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합리적이 되지 못한다는 식의 관점이 아니라, 사람의 이성이 구성되는 과정 중에 이미 주관적 인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객관적 합리성에는 비합리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뜻한다. 사람의 이성적 합리성에는 과학적이자 객관적인 합리성과 동시에 결코 합리적이지 않은, 그러나 개인에게는 합리적인 주관적 합리성이 있다.
또한, 인간에게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내는 합리성이란 이성에 근거한 합리성과 감성적 합리성, 그리고 영성에 근거한 합리성으로 나뉠 수 있다. 비록 서로 다른 영역의 합리성이지만 어떤 유형의 합리성도 구성원의 주관적 측면과 집단 내의 객관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합리성은 사람에게 있어서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통합적 합리성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며, 이 통합적 합리성은 인간의 삶을 충만하게 하고, 인간이 행복을 느끼도록 한다. 다양한 형태가 있고 경우에 따라 주관적인 모습을 가질지언정 합리성은 현장에 바탕하는 구체적 삶으로 규정되기에 결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합리성을 객관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각각의 특정문화에서 찾으려 했던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자문화 중심주의와 이를 통한 연대와 대화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를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하는 모든 생명체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비록 인간의 이성을 지니지 못했지만, 각자의 합리적 선택을 통해 생존하고 삶을 유지하고 있기에 이러한 합리성은 본능이라는 감성과 욕망에 근거한 합리성이다. 이처럼 자연법적 입장의 합리성과 더불어 이성의 합리성이 지닌 제한성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합리적이라는 것이 단지 이성만의 전유물이라는 낡은 생각은 더 이상 자리 잡지 못한다.
결국, 우리가 과학적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유물적이자 기계론적인 합리성 개념은 인간이 자신의 외부 환경과 맺는 관계 양식 중의 하나인 이성적 사유 체제 중에서도 특정 조건을 갖춘 방식일 뿐이다. 과학은 인간의 합리적 시각을 반영하지만 인간의 모든 합리적 사고가 과학은 아니기에 비과학적이지만 많은 합리적 사고가 존재할 수 있다. 또한, 당대의 과학이 다루지는 못하지만 훗날 인정될 수 있는 합리적 사유와 더불어 감성 영역 및 인간의 언어화된 생각이나 감각을 뛰어넘은 언어도단의 영성은 진리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최소한 누구나 알고 있듯이 과학이 끊임없이 발전하며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간다는 것은 현시점에서 우리의 과학적 이해가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며, 앞으로 과학에 의해 밝혀지고 얻게 될 많은 합리적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비과학적인 내용 중에는 많은 부분이 합리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2) 과학적 사실과 종교적 진실
인간이 삶을 이루고 있는 합리성 중에서 이성적 합리성,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객관적 합리성이라는 한정된 관점에 근거하고 있는 근대과학은 사물의 이치를 밝힌 지식(knowledge)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과학은 사물의 이치인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사실(事實, fact)을 밝히는 앎의 세계이다.
한편, 과학과는 달리 영성의 합리적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종교는 진리를 말하며 이를 위한 지혜(wisdom)를 추구한다. 따라서 진리(眞理)에 의한 진실(眞實, truth)이 중요하며, 욕망의 비움 내지 열린 욕망을 통해서 행복이라는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한다는 점에서 욕망 만족을 위한 근대과학기술의 모습과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리와 진실이란 시대나 문화를 넘어 항상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다. 반면, 사실이란 특정 집단이나 문화권에서 다수(majority)의 구성원 간의 합의된 내용이자, 믿음(faith)이다. 사실은 당대의 과학자가 제시한 결과를 사회집단이 믿는 내용이고,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적 사실이란 행위자에게나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반인에게나 모두 그 시대의 문화적 모습이다. 또 역사성을 지니고 있어서 과학적 사실은 새로운 발견에 의해 역사화된다. 사실이란 우리의 집단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객관적 합리성이 표현된 하나의 형태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실과 진실이라는 것은 행위 주체자인 인간을 전제로 한 개념이란 점에서 과학 행위의 주체로서 과학자 역시 관찰자로서의 상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담겨 있는 주관적 합리성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성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믿음에 의해 펼쳐지는 종교처럼 이성의 합리성에 근거하여 발전하는 과학은 인간이 무언가를 믿는 행위와 기본적으로 다를 바 없으며, 이때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합리성이다. 이처럼 삶을 구성하는 우리의 믿음과 합리성은 상호작용하며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내고 각자의 행동 양식을 규정하기에 믿음과 합리성은 앎이나 이해보다 더욱 깊은 인간의 속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믿음은 각자 나름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또한 믿는 것이 합리적으로 인지되기에 믿음은 이성적 합리성, 감성적 합리성, 그리고 영적 합리성이 통합된 모습으로 한 개인에게 발현된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유형의 합리성에는 서로 우열은 없으며, 단지 서로 다른 영역을 대변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양한 층위의 합리성이 모여 믿음이란 형태로 우리의 삶을 통합적으로 규정하고 만들어 간다는 점이다. 비록 사람마다 이성적, 감성적, 영적 합리성의 비중이나 분포는 다양하겠지만 이들의 통합된 조합이 한 개인의 충만한 삶을 위한 생명의 표현형이고, 이들은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3) 과학주의로의 개종
근대과학이 종교로부터 권력을 빼앗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근대과학이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근대자본주의 확립, 유지 및 확장에 필요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과학 지식에 의한 기술 발전은 생산성과 효율을 높임으로써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고 욕망의 만족을 가능하게 하여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그 결과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잉여가치 창출이라는 방향성과 목적 속에 자연스레 자본주의의 도구화로 전락하였다.
특히 지난 1970년대 이후 경기침체와 더불어 중앙정부의 만성적 재정 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시카고학파에 의해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소위 자유 시장, 정부 규제 완화, 재산권의 중시라는 이름으로 강대국들에 의한 세계화로 나타나면서 국제금융의 자유화, 공공복지의 축소, 노동시장의 유연화 및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태생적으로 실업과 양극화 사회를 잉태하고 출발한 셈이며, 특히 신자유주의에서 미덕으로 삼는 무한 경쟁은 개인적 삶뿐만 아니라 환경파괴와 더불어 지구 자원의 고갈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생산성을 위한 개발과 무한 경쟁이 자연스럽게 추구되는 과정에서 과학 역시 산학협동이라는 형태로 철저히 잉여가치 창출에 기여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체계 속에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과학에 대한 맹목적 신뢰는 결과적으로 ‘과학주의’라는 과학의 오만함 속에 생명과 생태에 대한 폭력적 모습으로 다가온다. 폭력이란 바람직한 관계의 단절이나 왜곡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만이 존중되는 서양 근대문명에서 근대성이란 그 자체가 자연과의 관계를 무시한 인간 중심의 사고체계이며, 차별과 배제를 담고 있는 폭력적 가치체계이고 현실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과학기술이다.
이렇게 본다면 창조과학과 같이 종교를 굳이 과학의 언어로 풀어가려는 행위가 갖는 의미는 분명해진다. 이는 과학이 바탕하고 있는 이성적 합리성에 맞추어 스스로의 영적 합리성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이것은 삶의 현장 속 실천이라는 진리 구현의 세속화(secularization)와는 전혀 다른,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는 물질적 세속화라고 볼 수 있다. 창조과학과 같은 입장은 지극히 제한적인 합리적 이성에 대한 맹신을 통해 스스로를 제한하고 자본주의의 폭력 체제를 모방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와 결합한 합리적 이성의 한계가 지구차원에서 나타나는 시점임에도, 스스로의 영적 합리성을 버리면서 과학에 개종한 모습이다.
3. 통합된 합리적인 삶
세상은 각자의 시선과 더불어 집단의 시각에 근거한 사실로 구성된다. 개념과 언어를 통해 구성되는 사실을 통해 각자의 존재와 삶은 제한되고 규정된다. 그렇기에 사실과 진실 간의 차이는 특정 집단이나 문화권에서 언제나 존재하며, 이때 힘을 발휘하는 쪽은 진실이 아니라 구성원 간의 합의된 내용인 사실이다. 따라서 권력과 자본의 영향 속에서 사실을 창출하는 과학은 자본주의 시대의 힘이자 권력이다. 이 시대의 과학은 권력의 대상이자, 동시에 권력의 생성자이기도 하다.
사실은 과학적 사실이건, 사법적 사실이건 받아들여지고 해석되는 데 각자의 주관적 합리성에 근거한 믿음과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르게 재현되어 확인되고 전달된다. 하지만 과학은 끊임없는 반증을 통해 펼쳐지는 열린 모습이기도 하다. 과학이 열려 있지 못하고 다양한 시도에서 배타적이 되어 사회적 맥락과 분리될 때, 과학은 도그마의 형태가 되어 우리에게 다모클레스의 검이 된다.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생명과 삶의 역사성은 사라지고 사실과 진실의 틈새 속에 우리의 삶이 오직 생산성을 위한 권력의 생성 원천이자 그 권력의 희생물이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역사란 단지 철학의 몸종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개선하는 과학이 된다.”라는 미셸 푸코의 말이 있듯이, 근대과학이 우리에게 진정한 삶을 주기 위해서는 역사성을 되찾는 진화가 필요하다. 그것은 생명이 지닌 긴 시간과 공간의 역사와 각 개인의 삶이 지닌 시간의 통합적인 역사성을 인정할 때 가능한 진화이기도 하다. 이러한 삶의 진화를 통해 1%와 99%의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서 진정한 치유의 과학으로 변화할 수 있다.
이 시대의 과학이 지닌 권위와 권력은 욕망의 만족을 만들어내는 이성적 합리성에 대한 맹신으로부터 창출된다. 이성의 합리성 외에도 인간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모습의 합리성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통해 과학에 독점적으로 부여한 권력을 되찾아 와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이성만이 강조되어 파편화된 삶을 되찾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우리의 삶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이미 도그마를 지니고 신격화된 이 시대의 과학에 대한 탈신화화가 요구된다.
이와 동시에 과학에 부여된 권력에 굴복하여 개종한 일부 종교는 본래 위치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 종교의 탈과학화는 종교인 스스로가 내재화해서 지니고 있는 과학이라는 신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의 탈과학이라는 말이 탈합리성이 아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교는 과학적일 필요는 없지만 보다 합리적일 필요가 있다. 영적 합리성의 회복과 동시에 객관적 합리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주관적 합리성이 보다 강조되어 폐쇄적 권력집단화된다. 마치 한국 기독교의 물신 지향적인 형태처럼 말이다. 이렇게 되면 종교는 또 다른 인간 삶의 피폐함으로 이어진다. 종교는 스스로의 언어인 영적 합리성과 객관적 합리성을 되찾을 때 오히려 과학의 무의미한 공격이나 불필요한 대립관계에 당황할 필요 없이 스스로의 본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어쩌면 삶이 파편화된 과학시대에 합리적 신앙은 과학 지식보다 훨씬 강력할 수 있다. 인간에게 충만한 삶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대와 문화를 떠나 삶의 본질이 변하지 않음을 생각해 볼 때 자신의 삶을 시대나 문화에 따라 변하지 않는 진실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는 사실적 시각으로 풀어가야 하느냐는 자명하다.
영적 합리성은 무시된 채 이성적 합리성에 의한 ‘앎’만이 강조될 때, 통합적 ‘삶’을 상실된 건조한 종교나 신학으로 전락할 수 있다. 또 주관적 합리성과 믿음만이 강조될 때 맹목적 신념과 열정으로 인해 삶은 피폐해진다. 비록 과학을 신봉하며 종교를 비판하는 이들은 후자만을 비난하지만, 진정한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전자도 비난받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건전하게 통합된 다양한 합리성은 ‘앎과 삶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통해 삶의 건강함으로 발현된다.
한편, 과학은 합리적 사고 중에서 특정 체제를 지니고 있는 분야이자 문화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과학이 방법에 의존해 끊임없이 그 경계를 넓혀가는 지식 체계임을 인정하고 다른 층위의 여러 합리성에 대하여 오만하지 않아야 한다. 과학과 자본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일부분임에도, 이들을 모든 가치의 최상위에 둠으로써 과학과 자본은 과학주의와 자본주의가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이 지닌 다양한 합리성이 무시되고 근대 이성과 욕망에 종속된 우리들의 삶을 되찾는 것은 결국 과학의 탈신화화와 삶의 협동성을 강조하는 종교의 탈과학화를 통해 얻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과학적 이성이 강조된 이 시대에 통합적인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감성의 합리성과 더불어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영적 합리성임은 분명하다. ■
우희종 /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졸업, 일본 동경대학교 약학부, 생명약학 협동과정 석사, 박사. 미국 Wistar Institute 겸임연구원, 하버드대학 의대 연구강사 등 역임. 〈불교신문〉 논설위원, 한국수의면역학협의회(KVIC)와 민교협 회장 등을 맡고 있음.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