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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의 시대에 십여시와의 관계는?
"거대담론과 소담론의 변주곡!"
한달전쯤 마이웨이님께서 질문한 사항입니다.
아주 중요한 시기에 탁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시간을 갖고 답변하여도 좋다고 하여
미력하나마 지금 답변드립니다.
요즘의 시대를 다양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항상 어떤 개념을 명확히 알려면 그 상대되는 뜻을 알면 됩니다.
이 다양성의 반대되는 개념은 “일원성” “동일성”입니다.
이 다양성과 반대되는 동일성의 원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잠깐 철학이야기를 전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렵더라도 대성인님의 불법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두어야 합니다.
철학하면 어렵게 들리고 절복하러 나갔을 때 철학이야기만 나오면
막히는 경우가 있는 데 이것을 공부하면 상대방이 입을 다물것입니다.
이야기는 한참 거슬러 올라가서 그리스 고대 프라톤의 시대부터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세상이 아무리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근원의 진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이 진리는 성격상 “영원한 고정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였는데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데아”를 중심축으로하여 생각해본면 “본체”가 있으면 현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세상의 모든 현상은 그 본체로부터 모방되어 나타난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그 무엇이 있는데 보편으로부터 파생되어 나타난 것이
개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데아에 속하는 “본체”와 “보편”은 유일 무이한 동일성(일원성)으로
이것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개별이고 현상인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다르면 본체와 보편은 유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밖으로 밀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강력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체와 보편들은 이데아에 속하는 중심축으로써
영원한 고정불변의 진리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별적인 현상들은 그 본체와 보편으로부터 나온
자식과 같은 것으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개별과 현상들은 부단히 노력하여 이데아 속하는
유일성(동일성)인 본체와 보편으로 초월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든 근원이 무엇일까
이런 현상의 근원은 무엇일까를 번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개별적이고 현상적인 개체였기 때문입니다.
그 유일한 근원을 자신의 것으로 하면 세상을 전부 지배 할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도 개별의 현상이기 때문에 부단히 노력하여 근원성(동일성)으로 초월되면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 보고 자신의 말에 복종하고
모든 개별적인 현상을 초월한 근원에 가있기 때문에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고 정확한 판단을 하여
모든 것을 손에 쥘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모닥불을 피워논 술자리에서 소크라테스와 지식인들이들이 과연
에로스라는 "이데아"가 무엇일까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하고 열띤 존쟁을 벌입니다.
이 시대에는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고정불변의 진리"이데아"를 찾고자
무척 애를 쓰는 시대입니다.
이제 중세로 넘어갑니다.
중세로 넘어가서 이데아는 바로 “신(GOD)”으로 대체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로 이분되고 모든 피조물은 유일성(동일성)인
창조주에 의해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반드시 초월하여 신의 세상인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동등하게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고 살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의 몸도 영혼과 육체를 이분화 시킵니다.
육체도 영혼밑에 있어서 육체를 초월하여 영혼으로 승화하여야
그는 위대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금욕주의가 등장 합니다.
이시대에는 이렇게 신이라는 동일성을 중심축으로 초월과 지배의 이중주에 의해서 끝임없는
십여시(변화하여 여러가지로 모양을 달리하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중세의 암흑기를 지나 인본주의 시대인 르네상스를 지나
산업화된 근대(모더니즘)시대로 넘어갑니다.
근대는 신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을 중심축으로 하여 주체와 객체 정신과 물질,
이성과 감성으로 이분화 시키고 객체,물질,감성은
근원을 초월하여 그것보다 상위에 있는 주체, 정신,이성으로
초월하려고 노력하여야 된다고 철석하니 믿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계몽주의, 합리주의가 판을 칩니다.
위치적으로 중심과 주변이 이분화되어 중심이 주변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대인 것입니다 중심의 제국주의가 주변의 식민지를
억압하는 시대가 되어 비인간주의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아울러 2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가 “신”으로부터 탈피하여 달성해온
그토록 신뢰하여 왔던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 가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합리적적인 이성은 과학의 발달을 가지고와 종국에 가서는 가공할만한 전쟁을 일으키고
환경오염등 여러 가지의 폐해를 가자고 왔다는 것을 크게 반성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인류가 추구해온 이데아, 신, 합리적인 이성이라는
영원한 불변의 진리”는 이 세상에 유일한 것으로
하위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을 밀어내고 수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불변의 진리”는 절대적이어서 하위의 것하고는 섞이는 것을
꺼려하고 끝까지 동일성을 유지하여야 하고 동일성을 유지하기위해서는
배타성, 획일성, 폐쇄성을 갖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크게 발심하여 "중심축"이라고 했던
것으로부터 탈피하여야 행복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까지 “이데아”나 “신”이나 “이성”이나 하는 것들을 중심으로
한 동일성(일원성)에 대한 경도된 시각이 얼마나 허구였는가를
알게 된것입니다. “
이제 “고정불변의 진리(동일성)”라는 실체를 통해서
세상을 해석해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대등한 관계속에서
조화롭게 파악해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상기의 대별된 양자가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억압과 굴종의 관계를 거부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시각을 바꾼 것입니다.
이렇게 시각을 교정한 시대가 된것이 모더니즘(근대)다음인
“후기(포스트)모더니즘시대”라고 합니다.
* 김정일 다음시대를 포스트 김정일이라고 하듯이
모더니즘시대를 넘어서 포스트 모더니즘시대로 들어오면서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이제 고정된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변화라는 것은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방금 전 것과 달라지기 때문에
변화 속에 전제되는 “차이”를 인정하게 되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드디어 마이웨이님이 말씀 하시는 "다양성" :다원성"이 탄생됩니다
이와 같이 프스트모더니즘이 만들어낸 혁명적인 시각에서는
모든 것이 대등한 관계에 있는데 어떻게 세상을 조화롭게
운영해 나갈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전부 대등하면 제각각이 되고
혼란스럽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더니즘시대까지는 힘의 논리가 확실해서 중심(동일성)이 주변(다양성)을 확실하게 지배하고
주변은 중심으로 초월하려고 하니 그 곳으로 집중하는 긴장성이 있었고
모든 것이 중심축(동일성)으로 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만 ( * 이것 일본이 매우 잘함.)
모든 것이 대등할 경우 통제도 안되고 혼란스럽게 될 것이니까요
그래서 대등한 다양성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어 잘 나가자라는
“관계성”이라는 키워드가 탄생됩니다.
이것이 최근 자주 사용되는 “네트워킹”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의 진리는 합리적인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사람이 모여서 결론을 내는 그때 그때의 합의구조속(담론)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키워드가 “담론(서로 이야기 함)”입니다.
이제 포스트 모더니즘시대인 현시대는 거대담론(grand story)과 소담론(small story)이
대등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거대담론과 억세게 많은 소담론들이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그러니 다양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 거대담론 : 보다 큰 것이나 큰 무리를 짓고 있는 것들을 지침하며 그것의 주장, 논리, 특성, 본질 (매조리티)
+ 소담론 : 하나거나 작은 무리를 짓고 있는 것들로 그것의 주장, 논리, 특성, 본질(마이너리티)
포스트모더니즘이 무르익지않았던 1970년대 80년대만 해도
누군가(소담론)를 훈계를 할 때
"요즘세상은 이런 것이 도리(거대담론)이다 그러니 따라라
하면 예! 했습니다.
왜냐 하면 거대담론이 소담론을 충분히 지배할수 있었던 시대이니까요
그런데 최근에 누구를 훈계할 때
"예야(소담론) 이러는 것이 좋지 않겠니
그런 것이 세상의 이치(거대담론)다."
그러면 " 바로 왜 그래야 되는 데요?"
"저는 저의 감정(소담론)이 소중해요 필요없어요!"라고
답변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바로 소담론과 거대담론이 대등한 시대가 된것입니다.
거대담론의 지배와 억압 그리고 그에 대한 굴종의 시대는 이미 끝이 난 것입니다.
보편적이성(거대담론)도 중요하지만 감성(소담론)도 중요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모더니즘시대에 남자가 여자를 상위에 있으면서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이제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남녀역학관계가 크게 전환되면서 이혼율이 상당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소담론 혁명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반증해주는 통계치입니다.
이께다 선생님께서는 1992년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하셨는데 바로
“소프트파워의 시대”입니다. 이것은 소담론의 파워입니다.
이제 전제주의, 획일주의, 배타주의는 전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포스트모더니즘시대와 동떨어져 있는
동네가 어디일까 바로 북한입니다.
바로 공산주의라는 거대 담론으로 소담론은 깔아뭉개고
있는 집단입니다. 밥굶기가 제일 심한나라가 되었습니다.
시대를 뒤따라가지 못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이 일본입니다. 아직도 위에서 거대담론을 내걸며 누르면
찍소리 못하는 소담론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일본인 한사람 한사람은 힘을 내지 못합니다.
전체로는 힘을 잘냅니다. 이것이 시대에 뛰떨어진 근성입니다.
그래서 세계제일의 채무국이 된 것입니다.
다음은 마이웨이님이 질문하신 "십여시"와의 관계 입니다.
대성인께서는 <제법실상초> 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 내지(乃至)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 운운(云云).....
또 가로되 「실상(實相)은 반드시 제법(諸法)이요,
제법(諸法)은 반드시 십여(十如)요, 십여(十如)는
반드시 십계(十界)요, 십계(十界)는 반드시 신토(身土)라」.
제법실상 여시상(如是相)․여시성(如是性)․여시체(如是體)․
여시작(如是作)․여시인(如是因)․여시연(如是緣)․
여시과(如是果)․여시보(如是報)․여시본말구경등문(如是本末究竟等文)을
설명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제법이라는 것은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삼라만상 하나하나가 십여시에 의해서
작동되는 실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모더니즘 시대까지 인류가 바라본 시각이 모든 사물 현상들의 뒤에는
별도로 고정불변의 진리가 있어서
그 진리가 뒤편 어딘가에서 현상을 설명하고
지배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이데아“”신“합리적 이성”과는
근본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법화경은 실상이 현상과 떨어져 있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자체가 십여시의 변화상을 하고 있는
실상이다라고 탁월하게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배할 것도 억압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중생하나 하나가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부처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신을 전지전능하신 실상으로 본것과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중생하나하나가 전지전능하신 실상이다입니다.
그러므로 평등대혜의 불법입니다.
근대에는 감정과 반대되는 합리적인 이성을 실상으로 본데 반해
법화경은 여시성으로 감정과 이성을 전부 싸잡아서 실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은 "제법실상"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십여시라는 것으로 파악하여 인연과보의 “변화”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라만상이 전부 하나 하나가 실상이고 만상이 변화하듯이
그 실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석가불의 지도중에서 흙을 손톱위에 올려놓고 흙은 고정되어 있지않고 내려간다.
그러므로 이세상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실상을 변화로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중생들 전부가 실상이기 때문에 부처이며
인간을 너는 "그런놈" 이라고 고정된 실체로
무자비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실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이 포스트모더니즘시대를 보다라도
인류는 점점 법화경이 추구하는 것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듯 보입니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말입니다.
이런 십여시의 변화상을 통해서 나타나는 무수히 많은 소담론이 힘을 내는
다양성의 시대에 불교회는 대성인의 법만 무너트리지 않는 다면
보다 큰틀에서 여러차원들을 동등하게 바라볼수 있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네트워킹의 구조로 화합해가야 합니다.
지금처럼 법중심이 아닌 인을 중심으로 동일구조만을 강조하는
일본의 문화코드는 시대에 뒤쳐진 저급한 코드인 것입니다.
이런 코드로는 아무리 세간장엄의 미사여구를 늘어놓아도
종교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그 구성원들은 힘들게
종교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학회시스템과 같은 동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소담론인 마이너리티가 힘을 낼수 있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살려낼수 없는 상황입니다.
반드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2000년 당시 만약에 한물간 모더니즘시대 였더라면
신한위도 선의연대도 5.3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참의 권력(거대담론)으로 소담론들을 억압하고 지배하였더라도
바로 우리가 졌다.하고 수긍하면서 거대담론속으로 흡수 지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다양성의 시대에 들어갑니다
이혼율이 상당히 많아지고
자신의 감성이 소중하다고 크게 외쳐대는 하이틴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 10대들의 문화 아이콘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하는 문화현상이 나타남)
* 지금은 김연아가 그 문화아이콘을 대신해주고 있음
상기에 언급한바처럼 학회에서는 "소프트파워 시대(1992년/하버드강의)를 예고하면서
"한사람을 소중히"라는 모토가 등장하게 되며
21세기 밀레니엄을 맞이한 2000년도는 지식경제시대, 다양성을 중시하는
문화콘텐츠의 시대를 벅차게 맞이할때 입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문화코드가 만개할 때 입니다.
"소프트파워시대의 도래" 소담론의 시대라는
선생님의 지도를 제대로 십여시화( 철학화 ) 시키지못하고
(* 주: 이것을 말로만 사제불이, 프로파간다식 사제불이라고 할수 있음.)
한물간 모더니즘의 시각으로 박참의 지배구도를 적용하려 하였으니
소담론들은 "제가 왜그래야 되는 데요?"
라고 항거하며 집(본부)을 박차고 나간 것입니다.
이런 집단들의 움직임은 그 시대의 문화코드를 잘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란 집단구성원들의 공유된 의식의 흐름을 말합니다.
그 당시 시대의 공유된 의식이 겉으로 들어난 모습입니다.
전부 제법실상의 모습입니다.
신한위도 선의연대도 본부도 전부 다양성의 하나하나입니다.
전부 위대한 실상들입니다. 그리고 변화하는 실상입니다.
본부가 거대담론이라면 신한위 선의연대는 소담론입니다.
전부 대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서로의 네트워킹을 통해서
고정된 거대 진리(그런 것은 세상의 어디에도 없음)를 인정하지 않고
협의를 통한 결론이 바로 위대한 진리, 실상이라고
확신하며 실행에 옯기는 것입니다.
본부가 조직이 크고 선생님과 직결(?)이니 거대담론이다
그러니 소담론들은 나를 따라야 한다는 지배의식은
그것은 한물간 모더니즘시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폐기 처분되어야 할 의식입니다.
그러면 시대의 문화코드를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의식 일경우는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본부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이웨이님이 질문 하신 다양성시대에 십여시는
이것으로 결론을 내야 할 것 같습니다.
[소담론들은 10여년전의 거대담론의 모습을 마음속에서 지울 것
왜냐 하면 “변화”하는 것이니까!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이것은 무자비한 자세
대담론은 소담론을 내편으로의 흡수, 지배, 억압이라는 동일성(권력)을 버리고
대등한 위치에서 협의를 통해 결론을 도출할수 있도록 마음의 자세를 가질 것“입니다.]
긴글, 어려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참고자료
각시대별 중심축 및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끝없는 중심의 추구/지배와 피지배의 이중주/제법실상에 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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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
중세 |
근대 (모더니즘) | |||||||||||||
동일자(중심축)각시대의 지배자 |
이데아 |
신 |
인간 | |||||||||||||
지배 상위) |
본모양 |
본체(본질) |
추상 |
불멸 |
유일 |
보편 |
진선미 |
창조주 |
영혼 |
자아 |
주체 |
정신 |
이성 |
의식 |
인간 |
남성 |
피지배(하위) |
겉모양 |
현상 |
구체 |
가멸 |
다양 |
개별 |
위추악 |
피조물 |
육체 |
타자 |
객체 |
물질 |
감성 |
의지 |
자연 |
여성 |
첫댓글 마음으로 좋은글 읽고 갑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정중한 반론은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저 의식 하지 마시고 반론글 쓰십시오....
맞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는 각오하고 올린것 아닐까요. 그러나 감정은 다 좋은 데 부탁이 있다면 저는 좀 색다릅니다. 급진적이지 말것, 천편일률적이지 않을 것 등입니다. 그리고 무슨말인지 알수 있게 올려주시면 저도 그렇게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을 중심으로 동일구조만을 강조하는, 시대에 뒤쳐진 저급한 코드....” 이게 창가학회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문 문제도, 한국 불교회 문제도 근본원인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게 개선되지 않으면 창가학회는 보편적인 세계종교가 될 수도 없고, 니치렌 불법을 신봉하는 단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조금 비판적인 글을 올렸다고 해서 다른 회원들이 안부를 걱정해야 하는 종교는 보편적인 종교라고 할 수는 없지요.
옛날에 일본에서는 창가학회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크레믈린’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는데......
토라님! 제글에 댓글을 올려주셨으니까 저도 토라님께 답을 하여야 할것 같습니다. 제가 쓰는 글들은 저는 정말 32년이라는 세월을 죽기 살기로 수행을 하여 온 사람입니다. 입신초기 3달동안은 대학휴학중이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매일 불교교리에 매달리다 시피하여 불교의 근본원리를 깨치고나서 거의 수도승 처럼 수행을 해왔습니다. 토라님이 이제까지 보아왔던 그냥 학회원(폄하하는 것이 아님 오해하지 마시기 바람)들 처럼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수도승들이 도닦는 것처럼 아마도 장년부들중애서 저만큼 제목을 많이 부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보고 활동도 저처럼 한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위치(중앙일간지 인사동정란에 항상 게재)나 경제적으로나 별로 꿀릴게 없습니다. 동양의 불교선배천재들이 저에게 물려준 불교를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몸으로 실천해보고 그것이 어떻게 생활적으로 맞아떨어지나 그리고 어떻게 정신이 고양되어 가는 지 그리고 마음에서 어떤 깨달음이 어떤 "니르바나"가 어떤 청정함이 오는 지 항상 확인 해오고 있는 사람 입니다. 이 불교철학을 가지고 종교쟁이로써가 아니라 불교수행자로써 저는 좀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 삶속에서의 글입니다. 토라님의 댓글에 대하여 초기에는 진진하게 대하다가 어느 순간 토라님이 불교의 초입에서 왔다 갔다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대답하지 않는 것이 자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이 싸이트에 관심이 있어서 들어오시는 것을 보면 불교에 인연이 많은 분 같으신데 이 불교와 창가학회가 등식관계로써가 아니라 법화경자체를 원리적으로 공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창가학회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너무나 학회만을 바라보는 것에 가려 불교의 깊은 철리를 보지 못하고 "수행"성이 없는 가운데 학회를 보니 서로 이견이 큰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가치적이지도 않고요. 이것은 제가 잘났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제 경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토라님 정도이면 불교수행을 순수히 잘 하실것이라고 보입니다. 아침과 저녁에 근행요전을 펼치고
법화경 자체를 원리적으로 공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참 공감.......저 또한 공부를 하고 있고 흐름님 말씀대로 학회만 바라보다 불교의 깊은 철리를 보지 못하고,,
수행성 없는,,,
불도"수행" 저포함 회원들 대다수가 그 과정인 수행이라 인식하는 것보다 그 결과인 공덕만 오로지,,저또한 이런 말 하면서 사실,,,수행하는 것 자체가 공덕이라 머리속으로 생각하지만
내공, 경애라고 해야 되나 여기 댓글 다신분들 경애가 높으신 듯
공자께서 세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이 까페에는 참고할 만한 스승이 아니라 훌륭한 스승, 선지식인 분들이 많네요,
수천년의 불교역사속에서 선배들이 하였던 대로 한번 독경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독경책의 의미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원래의 뜻과 보다 더 깊은 뜻(문저) 원래 대성인님의 원래의 깊은 뜻은 일본이나 한국에서도 정평이 나있습니다. 한국의 천태종에서도 대성인님의 해석방법을 끌어다가 쓰고 있습니다. 법화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까지 주변에서 귀따갑게 들려주던 "남묘호렌게교"를 한번 새로운 시각에서, 관점에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이렇게 하시고나면 분명히 몸에서 무언가 달라지는 게 느껴 질 것입니다. 분명 불교는 "외도"가 아니라 "내도"이기때문에
추상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감하게 되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실감하면서 주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창가학회만 이런 것이 아니라 불교 3000년의 역사가 다 이래왔습니다. 토라님께서 이것을 해보시고 불교단체인 창가학회를 이야기하면 저는 언제나 환영합니다. 이런 불도수행위에서의 창가학회이야기라면 무엇이든지 서로 이야기 할수 있습니다. 인중심의 학회도 언제인가는 법의 혈맥을 쫏아서 바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인프라(infrastructure)가 너무나 아깝고 회원들이 너무나 불쌍 합니다.
흐름님께서 종교적으로 30여 년간 수행하고 공부해 온 불교에 대한 깊은 조예(造詣)나, 사회적으로 이루신 위치를 제가 무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고 또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런 깊은 지식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이른바 “그냥 학회원이 아닌 그런 사람들”의 견해도 중요하겠지만, 평범한 필부의 입장에서 보는 ‘그냥 그런 사람들’의 견해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얘기 한 것입니다.
흐름님께서 30여 년간 학회내에서 수도승처럼 수행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학회 밖에서 수십년간 학회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게 “수행성이 없이 학회를 본다”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저는 신앙적인 체험으로 학회나 불교의 교리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연구가가 모든 종교를 믿어보고 신앙적인 체험을 해야만 종교를 연구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종교적인 체험을 온몸으로 느껴서 알려는 태도와 그런 사람들 또는 그런 조직에 대해서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살피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겠지요.
따라서 몸으로 실감하지 않고 얘기한다고 해서 가치가 없고 추상성에 그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문가(거대담론)의 말도 중요하지만, 비전문가(소담론)의 말도 흘려 듣지 않는 것이 다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중심의 학회도 언제인가는 법의 혈맥을 쫏아서 바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인프라(infrastructure)가 너무나 아깝고 회원들이 너무나 불쌍 합니다>>>
글쎄요. 그렇게 되어야 겠지만, 저는 회의적인 생각이 강합니다. 지금의 학회는 회원들을 위한 인프라 보다는 ‘인중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인프라가 훨씬 더 견고하고, 점점더 강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불교사에 있어서 인중심체제가 오래 간적을 듯도 보도 못했습니다. 이 정상적이지 못한 도에 지나친 시스템은 언젠가는 법중심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먼저 흐름님께 감사 드립니다. 시간도 흘러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긴 답변의 글에 입을 다물지 못하겠습니다.
물고기가 자신이 살아가기 알맞은 수온으로 이동하며 살아가듯 저도 그랬어야 하거늘 뭐한말로 번지수 잘못 짚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불쑥 던져는 놓고 답변에 답을 못하는 어리석음에 이틀밤을 보낸 뒤에야 용기를 내어 드릴수 있는 말이
"답변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 와 한편으론 "어려워서 혼이 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벌써 세번째 넘게 읽고 있는중인데 오리무중 이 솔직한 흐름님의 답변 에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군요?
두고 두고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중 "거대담론 소담론 "생소했지만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리고 (소담론들은 10여년전의 거대담론의 모습을 마음속에서 지울 것 왜냐 하면 “변화”하는 것이니까! )이 말씀도!
大와 小는 항상 존재 하겠지만 담론에 입각해서는 대.소를 배제시킨 담론이 가치있겠군요?
가장 최소의 집단 이랄수 있는 저의 가정사 애기 간단히 할께요!
아내와 아들딸 며느리 손 7~8명중 제가 거대담론 이되고 각자가 소담론으로 볼때 다양성 시대의 개별은 흐름님께서 말씀하신 일원성에 복종내지는 따라만 하는 세간은 아니다고 보면 맞는 말이되나요? 개인적으로 동의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사실 제글은 쉽게 쓸려고 부던히 애썻지만 철학이 가미되어서 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것을 심도있게 건드리려면 어쩔수 없이 여러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웨이님께서 힘들게 읽으셨지만 정확히 이해를 하셨다니 매우 반갑습니다. 언제 기회있을때 님께서 질문하신 남묘호렌게교는 발견인가 발명인가 재발견인 가도 다른 것과 함께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스모그 품어댈려구 밖에나가 바람좀 쐬고 왔는데 !!!
흐름님 다녀가셨군요! 에~구 바쁘실 터인데 또... 네 ! 감사드리며 천천히 기다겠습니다 .
흐름님 글 무척 잘 읽었습니다. 깊이 공감하고 많이 와 닿는데 뭔가 전 한가지...글쎄 일부러 표현하시지 않으셨는지는 몰라도 그 다양성 개개의 다양성을 언급하시면서 그 다양성이 다양성으로서 본질인 동일성과 대등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개개인의 생명속의 불계의 발견과 현현이 아니겠습니까...급히 흐름님의 글을 읽고 일순 드는 생각임더 혹시 결례가 되었다면 용서하시고 담에 시간있을때 깊이 숙독하고 이글 정정토록 하겠습니다. 다만 경솔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흐름님의 글에 너무도 공감하기에 그 말씀을 꼭 전하고자 한 것이 본지인데 그에 저 개인적으로 좀 아ㅜ쉬운 부분이 생각나서...암튼 감사드립니다^^
맞습니다.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바로 그부분이 현시대의 흐름인 포스트모더니즘과 제법실상이 맞나는 부분입니다. 포스트모더님즘 관점에서 보면 거대담론인 동일성과 소담론인 개별성이 서로 동등하게 협력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제국주의 관점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인류가 이것을 깨닫기 까지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희생이 있었지만 불법은 3000년전에 이미 직관한 것입니다. 전체인 나의 몸도 실상이고 내몸속의 하나의 세포도 실상이다라고 그 석가불의 천재적인 직관으로 그 대등성을 알게된 것입니다. 개별도 실상이고 본질도 실상이라고 개별도 불성이 있고 전체도 불성이 있다는 것 역할만 달랐지 모두가 대등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