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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한국사 | 세계사 | 비고 |
1945년 | 8.15 광복, 38도선 분할 (8월.25일), 조선 인민공화국 성립 (9월 6일) | 얄타회담 (2월 4일~11일), 포츠담 선언(7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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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 대한민국정부 수립 (8월 15일) | 제1차 이랍‧이스라엘 전쟁 발발, 세계 인권 선언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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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 6.25 전쟁 (~19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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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 4.19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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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 5.16 군사정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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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성립 (1월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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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적십자 회담 (8월 20일~1992년), 10월 유신 (10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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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 6.23 평화 통일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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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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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 6월 민주 항쟁, 대통령 직선제 헌법개정(12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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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
| 독일 통일 (10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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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 남‧북 유엔 동시 가입 (9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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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 김대중 정부 수립 (2월 25일~20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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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6.15 남북 공동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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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
| 미국 뉴욕 세계 무역 센터 테러 (9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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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
| 미국‧이라크 전쟁 발발 (3월 20일) |
개인선정 5 대5대 중요 사실
우선순위 | 중요사실 | 선정이유 | |
1 | 1950~1953 | 6.25 동란 | 6·25전쟁은 우리역사에 있어 가장 가슴 아픈 역사이다. 3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우리민족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전쟁고아, 이산가족이 발생하였으며,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남북 사이에는 불신과 적대 감정이 높아져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큰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는6·25전쟁을 통해 오늘날 남북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해야 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
2 | 1945 | 8.15광복 |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는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동시에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독립 투쟁을 전개한 결과였다. 그러나 광복을 맞이하여 자주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던 우리의 소망과는 다르게 한반도에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이 대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극적인 6·25 전쟁을 겪었다. 왜 광복이후에 우리는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였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3 | 1960 | 4.19혁명 |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 정부의 부정부패에 항거하여 발생한 민주화 운동이다. 4·19 혁명은 3·15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발생하였으며, 결국 이승만 독재정부가 물러나는 계기가 된다. 안타깝게도4·19혁명이 바로 민주주의 건설로 이어지지는 못하였으나, 4·19혁명은 우리민족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
4 | 1987 | 6월 민주항쟁 | 6월 민주항쟁은 5·18민주화 운동에 대한 유혈 진압, 권력형 비리와 부패 사건, 언론통제,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강경 탄압 등을 배경으로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며 일어난 거국적인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은 4·19혁명 이후 가장 규모가 큰 민주화 운동이었다. 그리고 국민의 힘으로 반민주적 헌법을 개정하여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기틀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5 | 2000 | 6.15남북공동선언 | 2000년 3월에 김대중 대통령은 베를린 선언을 통하여 남북경협을 통한 북한 경제화복지원 등을 골자로 남북한 대화 추진들을 밝혔고,같은 해 6월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정상인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게 되었다. 615남북공동선언을 남북관계의 진일보한 발전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첫째, 대화와 협력·평화와 공존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남북문제를 미국이나 일본 등 주변국이 아닌 당사자끼리 해결하자는 의지를 확실히 했다는 점이다. |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201419514 윤리교육과 이다솜
1. 광복 후의 상황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립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독립을 하게 된다. 그런데 독립의 기쁨도 우리나라는 미소 간의 이념대립, 의견차이로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된다. 남한은 미군이 진주해 직접 3년간 미 군정을 실시하고 소련은 북한에 진주해 김일성 정권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군정을 실시한다. 그 덕분에 전권을 위임받은 김일성은 지주들과 친일파를 숙청했지만 미국은 그대로 친일세력을 남한에 남겨두게 된다. 미군정이 시작될 때부터 김구, 김규식 등은 남북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했으나 1949년 김구가 안두희로부터 피살됨으로써 그 세력은 없어지게 된다.김일성은 소련을 찾아 탱크 등 많은 군수물자를 지원받고 조국통일이라는 명목 하에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남침을 개시한다. 6.25의 원인이라고 따진다면 정확히 말해서 당시의 국제사회(자본주의 VS 공산주의의 대립)의 상황, 이데올로기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전쟁의 과정과 결과
1) 전쟁의 과정
① 북한의 남침: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기습적으로 남침을 감행하였다. 당시 남한은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많은 시민들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게 되었다. 라디오에서는 이미 피난을 떠나고 서울에 없던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된 목소리로 곧 적을 물리칠 테니 안심하라는 방송만이 계속 흘러나왔다. 북한군은 유엔의 철수 요구에도 불구하고, 전쟁 발발 삼 일 만에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내며 서울을 함락하고 3개월 만에 낙동강이남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장악하였다. ② 국제 연합군 파병: 1950년 7월 7일 국제 연합은 미국 중심의 지휘 하에 세계 16개국의 군대로 편성된 국제 연합군을 창설하고 한국에 파병하였다. 미군이 지상군을 투입하였고, 유엔군도 지원을 시작하였지만, 아직 전세는 불리하기만 했다. 미군은 천안, 금강 방어선에서 계속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했다. 반면 한국군이 전선은 상황이 달랐다. 그들의 땅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록 장비 면에서는 북한에 열세였지만 미군보다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중에 ‘동락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데 이때 노획한 무기가 모두 소련에서 제작된 신제품임을 확인했고 이것으로 소련군이 북한군에 막대한 지원을 했다는 증거를 잡았다.
③ 낙동강 방어선: 금강 전선과 대전이 함락당하고 병력이 거의 없었던 호남지방도 쉽게 북한군에게 장악됐다. 대구에 있던 수도도 부산으로 긴급히 이전되었으며 이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끝에 있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줌도 안 되는 땅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사투를 벌여야 했다. 당시 미군 사령관은 낙동강을 따라서 방어선을 설정하고, 미국 장병들에게 "우리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라고 연설하였다. ④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고 성공하였다. ⑤ 서울 수복: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전세는 우리에게 기울었고 1950년 9월 28일 열 흘 간의 전투 끝에 결국 수도 서울을 탈환한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행사가 열렸고 한국 정부도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하여 말문을 쉽게 열지조차 못했지만, 서울을 되찾도록 열심히 싸운 유엔군과 한국군 모두를 치하하였다. 모든 국민도 다시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해 주었다. 하지만, 서울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폐허가 된 서울, 사람들이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비참함 뿐이었다. ⑥ 중국군의 개입: 한국군이 가장 먼저 한반도 꼭대기에 있는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곧이어 11월, 동부전선의 미군도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압록강은 한반도의 북쪽 끝에 있는 강으로 그들은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동원해 밀고 내려오는 인해 전술을 쓰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말 그대로 "인해(사람의 바다)"의 공격 앞에 유엔군과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였다.
⑦ 국군과 유엔군의 후퇴: 중국군은 수도 평양을 점령했고 UN군은 계속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이 북진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전세는 다시 역전된 것이다. 중국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고 서울이 중국군에게 곧 함락당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자, 서울 시민들 대부분이 피난길에 나섰다. 두 번째로 서울을 떠나는 피난길이었다. 얼어붙은 한강 위로 사람들의 물결이 이어졌고 그들이 떠난 서울은 적막의 도시로 변했다. 1월 4일 리지웨이 사령관도 남쪽으로 후퇴결정하고 금강까지 후퇴하였다. ⑧ 치열한 전투 전개: 전쟁의 주인공인 대한민국과 북한을 합쳐 모두 25개국이 이 전쟁에 관련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남한과 북한의 내전적 성격이 짙었지만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제는 국제전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반도는 마치 이들에게 전쟁터를 빌려주는 것으로 보였다. 1951∼1953년 동안 38도선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⑨ 휴전 협정 체결: 전쟁이 장기화되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2) 전쟁의 결과
전쟁 기간 중 한국은 산업시설의 43%와 주택의 33%가 완전히 파괴됐고 그 피해는 약 22억 달러, 약 2조 5천억 원에 달하는 비용이다. 전 후 1인당 국민 소득은 8만 원 대를 맴돌았다. 전쟁이 끝난 후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후 현재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휴전선은 고착화 되었고 남북 간은 대립과 완화를 반복하는 긴장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3. 6.25 동란을 통해 이끌어 낼 수 있는 공동 삶의 원리
준비하는 자세: 북한의 남침 당시 남한의 군사병력은 고작 탱크 5대와 연습용 전투기뿐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전쟁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순식간에 낙동강하구 까지 밀려난 것이다. 미리 준비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해: 6.25동란은 이념 대립으로 인해 민족애를 상실하고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아 일어난 전쟁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하며 바꾸려는 태도가 만연하다. 이해라는 중요한 공동 삶의 원리를 생각하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양성을 인정하고 맞춰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첫댓글 * 이다솜 : 퇴고하세요.
수정했습니다.
6.25가 왜 발발 원인에 왜 주목해야 하는 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어 굉장히 뜻깊습니다. 민족 최대의 과제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처음 왜 서로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게 되었는 지 그 원인을 찾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폭력성에 대한 시각에서도 그 원인을 찾는 일이란 아주 중요합니다. 6.25는 정말 일어나서는 안될 전쟁이고 당사국인 한국에게 상처와 아픔만 남겼습니다. 6.25 한국 전쟁의 현재까지도 영향을 끼칩니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의 국제 관계면에서도 앞으로 한국의 처사에 대해 큰 교훈을 주는 전쟁입니다. 전쟁이란 것은 윤리교육과 학생으로서 더 비참한 해결책으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서로를 잘 알고 김일성의 생각을 앞서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 피를 흘리며 싸웠던 6.25전쟁은 되돌릴 수 없는 우리 역사 최대의 비극이다.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폭력까지 당했으며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이러한 6.25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우선 우리나라는 뚜렷한 목표가 없어 외세에 휘둘렸으며 경제적인 힘과 능력, 군사력 모든 면에서 뒤처졌다. 또한 그 당시 공산주의, 자유주의 등 세계정세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 그렇기에 오늘 강의에서 가장 첫 번째로 배운 목표 설정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방향을 잡고 그대로 나아가야 함을 알게 되었다.
또 경제, 군사의 불균형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국제 정세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6.25전쟁은 이념이 사람을 단순화시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며, 그 즉시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결국, 우리나라의 민족분열은 이념의 대립으로 인해 일어났습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이해하지 않은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기 때문에 돌이키기 어려운, '분단'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 이념이 외세의 이념을 그대로 받아들여 대립하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없었던 사실로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김일성이 남침을 했을 때에도 우리는 공산주의의 이념이나 체제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이에 맞게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무엇이든 정확하게 잘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합니다. 즉,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 힘을 길러 다른 사람이 나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가 끝난 후 자주독립을 이룩할 줄 알았던 우리민족에게 6.25라는 시련이 닥쳐왔다. 우리 민족의 역량이 조금더 강했더라면 분단이 일어나지도, 전쟁이 일어나지도, 외세에 휘들리는 일이 이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국가의 역량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 개개인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힘들이 뒷받침될 때 자주적인 힘으로 우뚝설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번장을 통해 알게 되었다.
* 과제 수행 : 이다솜 임선영 이송민 장세연 이종덕 이상 총5명
일제강점기라는 긴 민족의 시련의 계절이 끝난 후 우리 민족에게는 또다시 6.25전쟁이라는 큰 시련이 다가왔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련을 겪은 우리 민족은 다시 김일성의 야욕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다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지만 이러한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한가지 목적을 위하여 뭉쳤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들 일들이 많다. 이러한 일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여러 구성원들이 하나로 뭉쳤을 때에 발휘되는 힘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세계화 시대에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가치로 뭉쳐야 될 것이다.
6.25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8.15해방 이후 외세인 미국과 소련에 의한 조국의 분단이 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2세대가 넘는 65년이 지난 현재까지 고착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혈육의 정이 남아있는 이산가족 세대들도 자연의 이치에 의해 이제 사망하여 줄어들고 있기에 민족의 끈끈함이 더 사라지기 전에 민족의 분단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숙제일 것이다. 또한 아무런 대책 없이 있다가 그날에 무기력하게 당한 것을 기억하며 언제든 전시 상황에 놓일 수 있는 현실을 직시하며 준비하는 자세도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