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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어린 욕망의 족쇄에서 풀려나는 길은 죽음
6·25전쟁 후 먹고살기 팍팍한 시절에도 한국산악인들은 히말라야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 당시 8,000m 봉우리는 시샤팡마를 빼고는 모두 등정되었다. 한국원정대가 히말라야로 첫 도전한 산은 다울리기리Ⅱ봉(7,751m) 정찰대로 1962년이었다. 아무도 오르지 못한 히말라야의 정상에 태극기를 꽂으려는 한국인의 꿈은 20년이 흐른 1982년 대전쟈일클럽의 김영한 등반대장과 2명의 셰르파가 고줌바캉(7,806m) 정상을 등정함으로써 이뤄졌다.
초오유 동쪽에 고줌바캉이 바라보인다. 어려운 시절 히말라야에 온 열정을 불태웠던 선배들. 이후 한국등반대는 지금까지 7,000m급 이상의 봉우리 초등정은 총 8개 봉우리를 기록했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는 인간과 산이 만날 때 위대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했다. 위대한 일에는 많은 희생도 따랐다. 히말라야를 오르다 생을 마감한 선후배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또 내가 만났던 세계적 등반가들 토마스 휴마르(Tomas Humar)는 랑탕리룽에서, 세르게이 사모일로프(Sergei Samoilov)는 로체에서, 오사무 다나베(Osamu Tanabe)는 다울라기리1봉에서 죽었다.
산악인들이 끊임없이 한계상황을 추구하고픈 광기어린 욕망의 족쇄에서 풀려나는 길은 죽음뿐이라고 누군가 말했던 기억이 난다. 루클라에서 만났던 오영훈 대장은 이번 에베레스트에서의 조난사고를 목도하고는 “경험이 많고 실력이 뛰어난 등반가라 할지라도, 또 자신의 팀이 무사히 정상 등정을 하고 죽음의 지대를 벗어나 베이스캠프로 되돌아오기까지는 자신이 모르는 그 무엇이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고줌바빙하를 타고 밀려온 구름이 산을 숨겨버렸고, 곧 우리가 선 곳도 화이트아웃이 되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쪽 고줌바캉과 캬충캉의 상부 빙하에서 세락이 무너져 우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산은 산 자신의 생각, 산 자신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산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