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규 시인의 시집 『커플은 14캐럿이다』(푸른사상 시선 231).
시인은 인간애와 운명애를 자연과학적인 상상력을 토대로 추구하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모음이나 자음을 변주시켜 시어의 의미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언어 감각으로 시 읽기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2026년 8월 28일 간행.
■ 시인 소개
서울에서 출생했다. 『동양일보』 신춘문예, 기독 신춘문예,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국민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전태일문학상, 산림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현대시문학상, 해양문학상, 최충문학상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철새의 일인칭』이 있다.
■ 시인의 말 중에서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인으로 사약을 받는 사인(死因)이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작품 세계 중에서
그는 지금 모종의 시학(詩學)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개별적 시인으로서 자신의 인생론적 성찰을 표명하는 것인가 하면, 보편적 시인으로서 서정시가 딛고 있는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시는 따뜻하고 밝고 높은 데 있지 않습니다. 춥고 어둡고 낮은 데서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과 함께합니다. 그들의 신산고초를 고스란히 자기화하는 데 서정시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중략)
서상규의 시집에는 인간애와 운명애의 깊은 성찰이 담긴 시가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생활인들의 교통수단인 전철에서 “너랑 나랑을 용접한 우리랑/명랑을 아우르는 받침 ‘ㅇ’을/열차 바퀴로 회전시킨다”는 「전철에서 장미꽃을 용접한다」에서부터 “청빈한 허기를 채우는 풍성함”이라며 “절약하여 양심을 양육하는 일에/사랑을 가락으로 풀어낸 육신이/신(神)처럼 거룩해져/경배하는 까닭”이라는 「당신을 감상하여 아름다운 감성을 키웠다」에 이르기까지 57편에 이르는 작품이 여일합니다. 그는 시적 기율의 측면에서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인생론적 차원에서도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매우 개성적인 시인입니다.
― 김재홍(시인·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 추천의 글
서상규의 시들은 시인은 플롯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강조한 본보기이다. 칼 맑스와 국수, 경차와 낙타, 꽃과 유서, 개펄과 천민 등의 연결에서 보듯이 시인은 먼 거리에 있는 존재들을 주지적으로 융합한다. 계단과 계란, 감자와 감사, 멜론과 멜로, 과육과 정육, 전화와 진화, 피망과 희망 등의 연결에서 보듯이 존재들의 거리를 즐기기(pun)도 한다. “서로 이름을 선물로 내준/무명(無名)에서 애칭으로 부르는 우리”(「커플은 14캐럿이다」)가 그 궁극한 표상이다.
― 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 시집 속으로
커플은 14캐럿이다
서상규
주기율표 79번과 29번
원소 기호로 금과 구리가 합금된 커플이다
24/14
연금술이 빚은 순금으로 연애를 몽상하는 분모에
너와 내가 마음을 섞은 분자로
0.5833333333, 사랑의 비율이다
청춘은 가난하고, 가난은 불순하기에
약속은 순수하다. 내일을 높은 순도로
네가 나를 가슴에 품었기에 아기이고
네가 내 심장이므로 자기인 호명으로
아기자기한 소꿉놀이를 꿈꾼다
감상적인 신파이고
감동이 태어나게 도와주는 산파이며
감정선에 뿌리 내린 실파다
실선으로 마음을 잇고
실금으로 서로를 받아쓴 가슴에 밑줄을 긋고
실을 꼬아 묶은 현을 조율한
때때로 불협화음을 연주한다
리듬에서 떨어지는 비듬 한 조각을
첫 눈꽃으로 해석해 선율을 맞춘다
정열을 바꿔 써도 열정이므로
끝말잇기 놀이로 순환 궤도를 도는
햇빛이 약지에 감긴다
서로 이름을 선물로 내준
무명(無名)에서 애칭으로 부르는 우리
무명지가 허전하다
무명실을 바늘귀에 꿰어서
조침문을 수필로 써간다
바늘 끝에 찔려 맺힌 핏방울로
반짝 빛나는 14K
종로 3가 환승역에서 만나
금은방에서 커플링으로 실반지를 맞춘다
청춘은 아직
서울특별시 시민이 되지 못하지만
수도권에서 희망을, 꿈꾸는 새날로
너는 경의선인 금촌역으로
나는 중앙선인 구리역으로
각자 집으로 헤어질 때도
한 몸으로 언약한다
14/24
닦으면 순금보다 빛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