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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김인선
01-04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이상과 현실
인고 발터 지음 / 유치정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삶 자체인 그림 : 생레미와 오베르 시절 1889~1890
고흐는 1889년 5월에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이런 생활에서 배워야 하는 유일한 교훈은 불평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으 운명을 비난할 만한 이유들이 많았다. 서른 여섯의 나이에 스스로 들어간 생폴드모졸 정신병원은 생레미 근처, 아를에서 27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살믜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 고흐은 병이 깊어진 데다, 아를 사람들이 그를 감금해달라고 했던 사실에 깊이 상처 받아서 자신이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고 느꼈다. 사랑하는 동생 테오가 결혼을 하게 되자 경제적 도움이 끊어질까 겁이 났고, 그이 열렬한 소망이었던 화가들의 공동체라는 꿈도 고갱이 떠나면서 사라져버렸다.
“마을 교회를 그렸어. 교회 건물은 순수한 느낌의 보라색인데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창문의 스테인드그라스는 깊고 푸른 바다의 색을 점점히 찍어놓은 것 같고, 지붕은 보라색인데 군데군데 주황색이 칠해져 있어. 그림의 전경에는 물오른 초록색과 태양에 빛나는 분홍빛 모래가 보여. 이것은 내가 전에 뇌넨에서 스케치했던 묘지와 오래된 탑과 거의 똑같아. 단지 더 풍요롭고 표현력이 두드러진 색채가 다를 뿐이야.” - 빈센트 반 고흐
“나는 이제 화가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불가능하고, 아를에서든 다른 어느 곳에서든 혼자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내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나 잠시 병원에 들어가 있는 편이 낫겠다.”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관례에서 벗어나 살아온 그였지만, 이런 결론을 내리기는 몹시 힘들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내게 그럴 힘이 남아 있진 않지만, 나는 이미 미친 사람 노릇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절망적인 심정이 된 그는 동생에게 의지했다. “너의 우애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아무런 후회 없이 자살을 했을 것이다. 비겁해진 지금의 나라면 결국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고흐가 일 년 가까이 지낸 병원은 생레미에서 3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방에 있었다. 고흐의 그림에 계속 등장하는 모티브들이기도 한 밀밭과 포도밭, 올리브 재배지로 둘러싸인 곳이다. 어두운 복도와 단색도의 방에 난 창문의 창살들, 남자들만 지내는 공간이 고흐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병원장인 페이롱은 엄격하고 인색하게 병원을 운영하면서 그저 환자들이 생존하는 일에만 신경을 쓸 뿐, 실제로 그들을 보살펴주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는 정신병 전문가도 아니었다. 고흐도 일주일에 두 번 목욕하는 것 말고는 어떤 치료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생활은 불행하고 가난한 다른 사람들의 생활보다는 견딜 만한 것이었다. 그는 혼자 떨어져 지내면서 작업을 하거나 보호자와 함께 시설을 잠시 벗어날 수 있었고,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
“우리 시대으 부르주아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빈센트 반 고흐는 너무나 소박하고 예민하다. 그의 형제들이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예술가들만이 그를 제대로 이해할 것이다.” - 알베르 오리에 『메르퀴르 드 프랑스』(1890)
그는 간질 발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것은 잠시 감각의 마비 상태에 빠져드는 병인데, 발작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지극히 정상으로 지낼 수 있다. 발작은 갑작스레 시작되고, 2주나 4주 정도 꽤 긴 시간의 차이를 두고 다시 이어진다. 발작을 하는 동안에는 폭력성을 띠기 쉽고 끔찍한 환영으로 고통을 받는다. 이럴 때에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의 정상적인 활동이 모두 불가능하다. 고흐는 자신의 병을 잘 알고 있었고 거리를 두고 이해했다. 그근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나는 광기도 다른 병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병일 뿐이라고 이해하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런 관점이 내게 위안이 된다.”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정신병과 망상에 시달리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일에 얼마나 크게 상심하고 있는지를 감추려고 애썼다.
그러나 시설에서 단조롭고 엄격한 생활을 하는 동안 고흐는 서서히 자존심을 되찾아갔다. 그는 이제 보호자와 함께 야외로 나가 그림 그리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고흐는 주위의 풍경을 그렸고 그림 그리는 일에 모든 희망을 두었는데, 그것만이 그를 깊은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림에는 그가 앓는 병의 흔적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고, 병을 앓는 시기와 작품 활동을 하는 시기는 확실하게 구분되었다.
고흐에게는 그림만이 그를 삶에 연결하게 하는 유일한 끈이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은 병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는 격렬한 창조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런 상관없이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는 격렬한 창조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의지로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고, 그도 그런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 그림들은 고통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이고, 지속적인 작업으로 발작을 막아보려는 시도이며, 자신이 격렬한 감정들을 배출시킬 안전핀이기도 했다.
《붓꽃》은 생레미에서 처음 그린 그림인데, 아를에서 그리던 꽃의 연작과 비슷하다. 이 모티브는 그가 가셰 박사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보았던 화려한 꽃들을 연상시킨다. 그림은 자연이 풍요로움으로 넘친다. 짙푸른 색으로 섬세하게 그려진 꽃부리는, 뾰족한 침 같기도 하고 혀 같기도 한 잎의 과감한 초록색과 대조를 이루면서 커다란 수평의 띠를 만들고 있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땅의 색깔은 그림 아래쪽 식물들이 뿌리를 잘 내리고 있을 것처럼 보이게 하고, 배경 위쪽에 칠한 옅은 초록색은 꽃들을 돋보이게 한다. 그림의 왼쪽에는 커다랗고 흰 붓꽃 한 송이가 오른쪽 끝에 있는 흐릿한 파란색 꽃에 응답하듯 피어 있으면서, 동시에 다채로운 색의 다른 꽃들과도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그림은 구성이 대단히 뛰어나다. 색에 따라 나눈 그림의 공간은 피어 있는 꽃들을 더욱 멋지게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이 그림을 안에서부터 환히 빛나게 만들고 투명한 여름을 연상시키는데, 그 결과 평온한 느낌의 조화가 이뤄지고 있다. 다양한 색채와 형태가 혼란스럽지 않게 사용되면서 자연의 생기가 솟아나고 있다. 마치 화가가 꽃 앞에 무릎을 꿇고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어 이런 인상을 더욱 강하게 한다. 전체는 그 일부로도 충분히 표현된다. 여기에서 생명의 원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나는 항상 사이프러스 나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내가 그린 해바라기 그림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려보고 싶다. 내가 그것들을 본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린 그림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선과 비율을 보면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답다. 나무의 초록색은 대단히 세련된 느낌이다. 찬란한 햇빛 속에 서 있는 사이프러스는 검은 점 같은데, 그것은 가장 흥미로운 검은색이다. 그런데 이 검정을 표현해내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파란색과 대비된 상태으 더 정확히 말해 파란색 ‘속’에 있는 사이프러스를 보아야 한다.” - 빈센트 반 고흐
“많은 화가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정말로 맞는 말이다. 그 화가들을 미치게 ksem는 것은, 완곡하게 말해 이 세계의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삶 자체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일에 깊이 몰두할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 때 나는 언제나 반쯤 미친 상태일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
가능한 한 가까이 자연에 다가서는 것이 고흐의 관심사였다. 자연을 향한 고흐의 관심은 일생 동안 지속되었고 거의 관능적인 사랑에 가까웠다.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림의 언어라기보다는 자연의 언어이다.” 그림을 그릴 때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사물의 근원, 혹은 뿌리’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생기를 포착하는 일이다. 고흐는 가능한 한 깊이삶 속으로 내려가서 그 맥박을 느껴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색채와 그것이 지닌 특성은 그가 발견한 이상적인 표현 수단이었다. 그는 색을 현존하는 그대로 사용했는데, 그것은 생명의 원리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 그가 색을 가지고 씨름을 했던 것은 기법이라는 단순한 이론으로서 아니라. 자신의 내면 상태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수단을 추구한 것이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삶의 비유와 같았고, 그가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색은 존재와 삶 자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의미가 되었다.
고흐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진실, 그것도 먼 과거의 것이 아닌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진실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현실을 모방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에게 더 결정적인 것은 현실 뒤에 가려진 것들이었다. 그는 “불가사의한 모든 현실은 동시에 상징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제 그의 그림에는 종교적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불평하고 비판하고 풍자하는 태도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림에 나타나는 삶에 대한 그의 태도는 현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인,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이다. 그는 자연, 사물, 사람, 고통, 기쁨, 지속 덧없음 같은 삶의 기본적인 주제들을 받아들인 동시대 사람들에게 그림을 통해 다가서려고 했다.
여기에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생겨난다. 그것은 삶을 ‘눈물의 골짜기’로 보는 것도 아니고 내세의 드높은 가치에 대한 단순한 부정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연 상태에서 발견한 존재의 원초적 힘과 직면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연의 신비로움을 추출해 자기 나름의 신비주의를 형성했는데 그의 그림도 그런 울림을 낳는다. 그것을 통해 고흐가 나타내려 한 것은 스스로를 자연에 일치시키고 거기에 전념했던 방식이다. 자연에 대한 완전한 헌신은 《사이프러스가 있는 푸fms 밀밭》이라는 그림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초록이 도는 노란색을 띤 잘 익은 밀 이삭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큰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그림의 가운데를 향하고 있다. 우리는 이 노랑을 그림 뒤쪽에 초가집 지붕에서 다시 볼 수 있는데 오른쪽 위의 구름과 작은 나무들도 같은 색이다.
그림의 전면에는 어두운 풀숲이 오른쪽으로 부는 바람을 따라 넘실거리고 있다. 이것과 대척점을 이루는 곳에는 한 그루의 진초록 사이프러스가 하늘을 향해 도약하듯 수직으로 뻗어 있다. 사이프러스의 강렬한 색은 그림 전체에 넘치는 역동성의 핵심이 된다. 노란 밀밭을 에워싸고 있는 초록색은 이제 하늘의 투명한 푸른색과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이런 대조는 일 이삭과 구름에 칠해진 하얀색으로 부드러워지고, 그림의 역동성과는 별개로 조화로움과 유기적인 통일성을 보여준다.
“흐린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밀밭이 있고, 나는 감히 슬픔과 극한에 이른 고독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 그림들이 내가 너에게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 전원생활을 하면서 건전한 시선으로 본 것들과 내게 힘을 준 것들에 대해서 말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 빈센트 반 고흐
고흐에게 색은 항상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아를에서 그린 그림들에서처럼 주도적인 힘을 지니지는 못한다. 커다란 면에 색을 가득 칠하거나 보색을 사용해서 강렬한 대조를 보여주는 그림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색에 대한 강한 고집은 이제 형태,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형태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으로 옮겨갔다. 이 그림은 그런 경향을 알리는 전조가 된다. 여기에서 처음 사이프러스라는 새로운 주제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이후 그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주제가 된다. 《사이프러가가 있는 밀밭》도 그 한 예이다. 그림의 오른쪽 끝에 있는 두 그루의 사이프러스는 시커멓고 거대한 형태를 드러내며 기묘한 형태의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향해 수식으로 뻗어 있는데, 이것은 그림에서 유일하게 강조되고 있는 수직선이기도 하다. 너무 익어버린 밀은 파란 바위 아래 있는 초목들 사이에 뾰족한 모양으로 끼워져 있다. 밀밭에서 언덕이 나무로, 그 나무에서 구름으로 대각선을 그리며 상승하는 움직임을 볼 수 있다. 발작적인 느낌을 주는 형태들이 여기서는 희미하게 드러날 뿐이지만, 나중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그래서 이 작품을 ‘폭풍 전의 고요’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림을 가득채운 고요한 느낌조차 거친 붓자국이 예고하는 폭풍 같은 움직임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너무 빨리 작업을 한다고 네게 말하겠지. 그 말을 믿지 말아라. 나는 자연에 대한 성실한 감정으로 감동받은 대로 그릴 뿐이다. 이런 감동은 때로는 의식도 못할 만큼 강해서 붓놀림은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나 편지에서처럼 쉴새없이 빠르게 이어진다. 하지만 언제나 이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는 이 모든 영감이 사라져버리는 괴로운 날들이 올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
이처럼 언제나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나무는 그림의 독특한 소재가 되는데, 《두 그루의 사이프러스》에서는 그림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흔들리는 커다란 붓자국은 초록 불꽃처럼 퍼져나가면서 위로 뻗어가고 풍요로운 나무의 모습은 그림의 틀을 넘어서는 느낌을 주는데, 두 그루 중 더 큰 나무의 꼭대기는 잘려 있다. 순순한 자연의 모습, 성장과 운동, 넘쳐나는 에너지, 이 모든 것이 우주적인 현상일까?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떠오르는 달을 보면서 이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1889년 여름에 고흐는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항상 사이프러스 나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내가 그린 해바라기 그림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려보고 싶다. 내가 그것들을 본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린 그림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니다. 그 선과 비율을 보면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답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 내 삶을 전부 걸었고, 내 정신은 그로 인해서 심한 괴로움을 겪었다.” -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가을 빈센트는 밖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다시 발작을 하게 되는데, 이전에 아를에서 일으켰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그를 괴롭히는 병적인 생각과 끔찍한 환상은 아주 더디게 사라졌다. 그리고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들었는데, 이렇게 재발했던 것으로 보아 병세가 만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병원의 다른 환자들을 무서워하기 시작하면서 자기 방에서만 지냈고 6주 동안 병원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병원 안에서만 그렸다. 당시 고흐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픈 뒤로는 병원 밖에서도 심한 고독을 느끼기 때문에 병원 밖으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라고 썼다.
“오늘 너에게 내 자화상을 보냈다. 시간을 가지고 그것을 연구해주길 바란다. 비록 시선은 전과 다름없이 무기력해 보이지만, 내 표정이 훨씬 차분해진 것을 봐줬으면 좋겠구나.”- 빈센트 반 고흐
그가 고른 색을 보면 이런 심리 상태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전의 눈부신 색은 조금씩 사리지고, 가라앉은 느낌의 색들이 강렬한 대도도 없이 어둡게 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네덜란드 시절의 어두운 그림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파리와 아를에서 발견했던 다양한 색조들 위에 자신의 우울한 마음에 부합하는, 독특하고 단절된 느낌을 주는 색들을 더해서 썼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그린 《올리브 재배지》를 보면 나무라는 주제를 다시 취했지만 사이프러스를 그리던 것과는 다른 방식임을 알게 된다. 그림의 표면은 독특한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태양과 나무와 하늘이 물결치는 붓자국을 따라 그려져 있고, 이 공통된 흐름이 작품 전체에 통일성을 준다. 황갈색과 초록과 파랑, 그림에 사용된 세 개의 주요한 색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면서 색의 대비를 약화시킨다. 나뭇가지의 강한 선은 좀더 부드러운 느낌의 하늘과 어우러져 아라베스크풍의 우아한 곡선을 이룬다. 하늘은 다시 나무의 초록색 잎과 회색 줄기를 만나 섞이고, 나무의 잎과 줄기는 땅을 만나 섞여 들여가면서 연속적으로 아라베스크풍 무늬를 만들어낸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따뜻하고 차가운 느낌의 색조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균형은 차분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올리브 나무들의 기묘한 윤곽은 검은 테두리를 두른 선으로 강조되고 고통을 상징하는 것처럼 심하게 휘어져 있다. 이나무 그림에는 말없이 고통이 스며 있고, 그림 전체에서 불안이 느껴진다.
고흐가 생레미에서 그린 그림에는 역동성이 있다. 그런데 생레미에서 그린 그림과 오베르에서 그린 그림을 보면 선에서 두 가지 뚜렷한 차이가 보이는데, 이들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선은 사실 그의 그림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경향이기도 하다. 하나는 계속되면서 굽이치는 곡선이고, 다른 하나는 짧고 힘차게 끊어지는 선이다. 이 두 요소는 극도의 흥분과 긴장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역동적이고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을 주는 형태를 낳았고 작품의 본질적 특성을 이룬다.
이러한 두 종류의 선은 《별이 빛나는 밤》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이지만 이전에 그린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는 이전에 파리나 아를에서 그렸던 것처럼, 다시 밤 풍경이라는 주제를 취했지만 작품이 놓인 상황은 전혀 달랐다. 이것은 그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자연에 대한 세밀 묘사가 아닌 추상을 시도한 것으로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색채와 형태를 자유롭게 상상해서 표현했다. 그것은 대단히 극적으로 펼쳐지는 우주의 사건이다.두 개의 커다란 소용돌이가 서로 감겨 있고,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열한 개의 커다란 별들이 둥그런 테를 두른 모습으로 빛난다.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오렌지색 달은 마치 해와 결합된 것 같고, 은하수 같은 넓은 리본 모양의 빛이 지평선을 향해 흐른다. 흔들리는 소용돌이 속에 깊고 푸른 하늘이 있다. 이 작품이 지닌 표현력과 직접적인 인상은 격렬하고 충동적인 붓놀림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이번에는 그저 내 침실을 그렸을 뿐이다. 이 작품의 미학적 효과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색이고, 사물의 형태를 단순하게 만들어서 보통 잠을 연상하면 떠오르는 평화로움을 암시하려고 했다. 즉 이 그림은 우리 생각을, 더 정확히 말해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
그러나 고흐가 이런 환상을 무조건 따른 것은 아니다. 땅 위의 풍경을 그릴 때에는 하늘의 풍경과 대조적인 요소들을 선택해서 자신만의 기법을 가지고 그림의 효과를 증대켰다. 그림의 전경에 그려진 조그만 도시는 소용돌이치는 하늘의 풍경과 달리 정확한 선으로 묘사된다. 집에 켜진 조그맣고 노란 불빛들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모양으로 하늘의 별들과 전혀 다른 형태를 갖고 있다. 북프랑스를 추억하는 듯한 뾰족한 종탑은 강렬하게 타오르는 사이프러스처럼 지평선을 뚫고 치솟아 있는데, 이것은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는 별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 대조적인 힘들은 초월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항하는 인간의 노력과 고통(별에 다다르려는 노력)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그림의 진정한 이야기는 땅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펼쳐진다. 고흐는 묵시록의 관점을 가지고 초자연적인 감정과 무한에 대한 추구를 표현하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석 달 후인 1889년 9월에 그린 《자화상》은 마지막 자화상이다. 파랑, 초록, 회색으로 소용돌이치는 바탕위에 그려진 화가는 반신상의 4분의 3 크기이다. 깃이 없는 하얀 셔츠 위에 양복을 입고 있는 고흐는 비슷한 색의 배경 속으로 사라지는 느낌을 준다. 붉은 수염과 긴장된 얼굴에 스면 기묘한 생기가 어둡게 응시하는 시선과 대조를 이루고, 그 시선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자의 시선”(앙토냉 아르토)이라는 인상을 준다.
“나는 너무나 내 세계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그림을 그리면서 직접 만나는 농부들 이외에는 다른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한다.” - 빈센트 반 고흐
배경의 물결치는 형태는 동요으 순간을 포착해서 그린 것으로, 특별한 리듬이나 모티브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감정들은 견고한 틀 속에 머무르는 것이고, 작품 전체로 통합되기 위해 정확하게 선택된 역동적 요소들이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불안감을 주면서도 확고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 그린 것은 꽃이 핀 나무인데 잘 그려졌다. 이 그림을 보면 너도 내가 뛰어난 솜씨로 대단한 참을성을 가지고 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에 나타나는 붓의 움직임은 아주 침착하고 확고한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
1889년이 저물 무렵에는 고흐의 영감도 점점 줄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책을 읽기는 했어도, 저녁이면 병원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더 이상 밖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병원에 머물면서 전에 자신이 그렸던 작품들을 다시 그렸다. 그중 몇 작품은 어머니나 누이를 위한 것으로 《아를의 반 고흐의 침실》이 그 한 예다. 고갱이 아를에 오기 직전에도 같은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때 그린 그림은 이동 중에 훼손되었다. 이번에는 기억에 의존해 같은 소재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같은 소재의 세 작품 중 색채가 가장 풍요롭다. 고흐는 편지에서 “이번에는 그저 내 침실을 그렸을 뿐이다. 이 작품의 미학적 효과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색이고, 사물의 형태를 단순하게 만들어서 보통 잠을 연상하면 떠오르는 평화로움을 암시하려고 했다.”라고 썼다. 그러나 작품은 고흐가 원한 것처럼 완전한 평화로움에 이르지 못했다. 사물들은 서로 어떤 연관도 없다. 게다가 모든 사물들을 응축시키는 시각은 불안감을 만들어낸다. 마루는 앞쪽으로 기울어지는 느낌이고, 창문은 반쯤 열려 있고, 의자와 침대 옆에 있는 세면용 탁자는 비슫듬한 느낌을 주고, 벽에 걸린 그림들도 비스듬하다. 이 그림을 낯설게 만드는 모순된 분위기는, 고흐가 처한 현실과 정반대 되는 충족과 아늑함, 온정과 환영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런 갈망보다는 버려짐과 고독과 방황이 더 강하게 표현된 것이다.
“나는 모든 것에서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이 모든 것을 모든 이의 영혼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품는 가장 끔찍한 의심에 대해 답이 되는 존재로서, 무수한 시간의 파편 속에서 내가 글을 쓰는 바로 이 순간의 높고 낮음, 안과 밖, 부분과 전체를 온전히 느끼고, 알고, 이해하고, 음미할 수 있다. - 휴고 폰 호프만스탈, 1901년 5월 26일 편지
1889년 겨울에는 풍경화를 그리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병원 안에서 이전의 자신의 작품이나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했다. 고흐는 테오가 파리에서 보내준 흑백의 석판화와 목판화를 이용해 렘브란트와 들라크루아, 밀레의 작품을 베낀 다음 색을 칠해 변형했다. 특히 밀레가 뛰어나게 간결한 솜씨로 그린 농부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89년 가을과 1890년 봄 사이에 밀레를 모방해 작은 크기로 그린 작품은 스물세 점이나 되었다. 고흐는 그해 9월 동생에게 “(밀레의) 《밭일하는 사람들》에 색을 칠해서 어떤 효과를 얻게 되었는지 알면 놀랄 것”이라고 썼다. 밀레의 작품을 베껴 그린 후 색을 칠해 얻은 작품 중 가짱 뛰어난 것은 《낮잠》이다. 베어서 단으로 묶거나 높이 쌓아올린 주황빛 감도는 노란 밀이 작품의 3분의 2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밀짚의 색은 하늘의 파란색과 대조를 이루고, 그늘에서 낮잠을 자는 농부의 옷도 파란색이다. 이 잠 속에서는 하늘과 땅, 사람과 자연이 일체를 이루고 있다.
“희미한 빛을 뿜는 달이 있는 밤하늘, 땅의 어두운 그림자를 비추지 못하는 가느다란 초승달, 그리고 짚푸는 바다 빛깔의 하늘에는 지나치게 밝게 빛나는 초록과 분홍 빛깔의 별이 있고, 구림이 몇 점 떠 있었다. 아래쪽 길가에는 옷자란 갈대가 있고, 그 뒤에는 낮고 푸른 산맥이 있다. 낡은 여관집 창에서 오렌지 불빛이 새어나오고, 어둡고 곧게 뻗은 커다란 사리프러스 나무가 있다. 길에는 한 마리 흰 말이 끄는 노란 수레가 있고, 그 앞에는 늦게 길을 나선 두 사람이 있다. 정말 낭만적이지‥‥. 그러나 이게 바로 전형적인 프로방스의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 빈센트 반 고흐
고흐의 그림 가운데 가장 강렬하며 발고 눈부신 파란색의 《꽃이 핀 아몬드 나무》의 배경을 이루는 파란 하늘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1890년 1월에 태어나 그를 따라 빈센트라는 이름을 지어준 조카의 탄생을 맞이하여 그린 작품이다. 가지 끝에는 아직 겨울의 황량함이 남아 있지만, 눈부시게 흰 아몬드 꽃은 분명 봄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고흐는 끈기와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작품을 그려가지만 작품을 만드는 동안 지나치게 자신을 억제한 나머지 병이 들고 말았다.
그의 조카이자 대자인 빈센트가 태어나던 무렵인 1890년 1월에서 2월 사이에는 다른 중요한 사건도 있었다. 미술잡지에 그에 관한 장문의 기사가 처음으로 실렸다. 또한 브뤼셀 그룹인 ‘뱅’의 전시회가 파리에서 열리고 있었는데 거기에 고흐도 작품을 전시했고, 동시에 예전에 참여했던 ‘앵데팡당’전에도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시인 외젠 보흐의 여동생인 안나 보흐가 브뤼셀전에 전시했던 《붉은 포도밭》을 400프랑에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고흐가 살아 있으면서 팔았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그러나 세간의 주장과는 달리, 고흐가 살아 있는 동안 필린 유일한 작품은 아니다.
몇 주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그에게 지나친 부담이었다. 다시 발병을 했는데 이번엔 거의 2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는 다시 환각과 격분을 동반한 끔직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정신착란 상태가 되었다. 몇 주가 지나서야 그는 겨우 동생에게 편지를 쓸 수가 있었다. 고흐는 생레미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동생과 동생 가족을 보기 위해 파리에 잠깐 들렀다가, 자기를 돌봐주겠다고 제안한 아마추어 화가이자 의사인 가셰 박사를 찾아 1890년 5월에 오레르수르우아즈로 갔다. 거기서 그는 시청 맞은편에 있는 라부 여관에 방을 하나 얻었다. 그리고는 다시 주위에서 주제를 찾아내 그림을 그렸다. 《초가집》은 새로운 창작 욕구의 반영이다. 개방적인 형태와 윤곽, 느슨한 붓자국은 빠르게 작업을 한 결과이다. 낡은 초가집과 채소밭, 울타리는 전원적인 모티브이지만 어두운 느낌의 나무와 덤불로 인해 작품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가장 위대한 색채 화가인 들라쿠루아는 왜 남쪽으로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갔을까?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 아프리카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아를에서도 그랬는데 - 빨강과 초록, 파랑과 주황, 노랑과 보라 같은 아름다운 보색들을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마음의 동요에 빠져든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그의 그림에서 색은 어둡고 흐릿한 느낌마저 주고, 선이 두드러지는 특성을 보인다. 이런 특성은 《사이프러스가 있는 길》에서 분명해지는데, 분출하는 급류처럼 혹은 쏟아지는 눈사태처럼 거침없는 선들이 작품 전체를 메우고 있다. 아를 시절의 그림에서 색채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붓놀림의 경쾌함이 극단적인 느낌을 준다. 사물은 고정된 형태를 잃어버렸다. 작품에 나타난 모티브들이 지니 윤곽은 세로로 길게 늘였거나 안으로 접혀 들어간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모디브들을 연결하는 선은 흘러가는 느낌의 수많은 작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윤곽선의 움직임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색은 흐릿하고 생기가 없는데, 이것은 색에 대한 에너지가 선에 대한 에너지로 옮겨간 결과다. 선에 대한 에너지는 밀고 당기는 연인들처럼, 서로 스며들고 투쟁하면서 그림의 핵심적인 힘이 된다.
이 같은 방식 때문에 현실의 풍경이 비현실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작품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어두운 사이프러스 나무이다. 해와 달이 반짝거리는 하늘 아래 두 글의 나무가 서러 얽혀(온 힘을 다해 하늘로 오르려는 것처럼) 수직으로 뻗어 있다. 땅 위에도 비슷한 형태가 넘쳐난다. 노란 들판, 아래로 흐르는 것 같은 길, 그림 후면의 낮고 푸른 산맥은 길가의 초록 띠 같은 수풀과 조화를 이룬다. 이런 움직임과 대조되는 것이 길 위에 있는 두 사람, 노란 수레를 끄는 말, 그림 오른쪽 되에 보이는 불 켜진 집이다. 하늘과 땅 각각의 영역에서 중심을 향해 집결된 모슴을 보이는 붓자국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마치 그림 전체가 약동하면서 굳어져가는 듯하다.
몇 주 동안 작업에 몰두하면서 고흐는 자신의 병을 잊을 수 있었다. 그에게 그림은 단순한 치료 수단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 오베르에 머무는 70일 동안 그는 미친 듯이 작업을 했고, 80점 이상의 작품을 완성했다. 이 가운데 뛰어난 작품이 《오베르 교회》인데, 형태를 정확하게 그린 교회는 자연과 유기적 일체를 이룬 치밀한 조각품 같은 인상을 준다. 밤하늘의 짙푸른 색과 어두운 주위로 인해 빛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지닌다. 이와 비슷하게 어두운 하늘과 빛을 그린 작품으로서, 더 나중에 완성된 것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다. 그림의 앞부분에서 V자 형으로 갈라지는 길이 공간을 더욱 넓어 보이게 한다.
고흐는 생레미에서 이미 종교적인 생각에 빠져들었고 성서를 주제로 한 작품을 몇 점 그리기도 했다.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성서의 인물을 그리는 일에는 신중했다. 성서의 인물을 멋대로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고흐는 고전적인 거장들의 작품을 보기로 삼았다. 그가 고른 주제들은 종교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를 밝혀준다. 어머니인 마리아의 팔에 안겨 있는 죽은 예수, 화가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은 부활한 나사로, 착한 사마리아인이 그가 그린 주된 인물이다. 그들은 모두 미래의 구원에 대한 희망 때문에 고통 받는 존재들이다.
“나는 백 년이 지난 후에야 계기사 드러날 초상을 그리고 싶다. 그렇지만 이것을 사진처럼 충실하게 그려서 얻어내고 싶지는 않고, 인물을 넘어선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색에 대해 지니고 있는 감각을 이용해서 나만의 정열적인 관점으로 그려내고 싶다.” - 빈센트 반 고흐
《피에타》와 《착한 마리아 사람》은 틀라크루아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고흐에게 색채에 대한 이론에 영감을 들라크루아와 밀레는 고흐의 예술을 지켜주는 수호성인 같았다. 이 작품에 나타난 풍요로운 색감은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고흐가 사용하고 있는 색은, 들라크루아의 개성적 색이기도 한 파랑과 빨강보다는 중립적인 느낌으로 갈색 색조를 띠고 있다. 그것은 조금씩 단계를 바꿔가며 따뜻함과 차가움, 투명함과 불투명함을 능숙하게 붓자국을 더한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에 나타난 아라베스크풍의 둥글고 우아한 곡선 형태들이 고흐의 작품에서는 불연속적인 선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고전적인 작품을 ‘근대적’ 이미지로 변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고흐는 종교화나 풍경화를 그리는 일 이외에는 거의 대부분 초상을 그리는 일에 빠져 있었는데, 그것은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닌 인간성에 있었다. 고흐는 그들을 언제나 전면에 두드러지게 그렸는데, 그들에게는 어딘가 신비롭고 평범하지 않은 모습이 있었다. 예전에 그렸던 초상들에서 볼 수 있었던 단순한 매력은 사라졌다. 두껍게 칠한 색 때문에 얼굴은 풍경의 일부처럼 보이고, 거친 느낌으로 표현된 피부는 자연을 닮았다. 그 전형적인 보기가 《밀짚모자를 쓴 농부 아낙》이다. 잘 익은 밀 사이에 다소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젊은 여자의 뺨은 곁에 있는 양귀비처럼 붉다. 오렌지빛 작은 물방울무늬가 찍혀 있는 파란 블라우스는 밀과 앞치마의 노란색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다시 사실주의의 궤적과, 초기작에서 볼 수 있었던 갈색조로 거칠게 표현한 농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부인할 수 없는 걸작 《가세 박사의 초상》의 전조이다. 기이하고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인 박사 역시 그림을 그렸고, 고흐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가셰 박사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우울함과 슬픔과 체념은 그대로 그림의 분위기가 되기도 하고, “우리시대의 절망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선과 색은 모두 이런 우울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일체를 이루고 있다. 선은 주로 인물의 우울한 성향을 좇아서, 예민하고 상심한 사람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림 후면의 선들은 그가 쓰고 있는 모자와 얼굴, 어깨와 조화를 이룬다. 그가 입고 있는 짙푸른 옷은 창백한 얼굴을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비탄에 잠긴 희미하고 파란 눈은 먼 곳을 응시한다. 채도를 달리하며 나타나는 짙은 파랑(하늘, 배경의 언덕, 옷)이 작품 전체를 덮고 있고, 이 파랑은 앞에 놓인 꽃과 박사의 눈동자에서도 볼 수 있다.
고흐가 가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둘 사이는 더욱 친밀해졌다. 가셰는 이 그림을 너무 좋아해서 하나 더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을 모델로 그릴 수 있다는 것에 대단히 기뻤했다. 긴 시간 동안 고독하게 지낸 끝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걱정이 늘면서 이런 새로운 감정이 사라져갔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언제나 그가 의지해왔던 동생의 상황이 여러 가지로 나빠졌던 것이다 동생의 아이가 몹시 아팠고, 아내는 불면증으로 지쳐갔으며, 화랑 주인들도 더 이상 테오를 신뢰하지 않아서 그들 사이에 언쟁이 잦아졌다. 고흐는 동생이 몹시 걱정스러워서 7월 초에 파리행 기차를 탔다. 테오가 겪는 어려움은 그의 생활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해서 신경이 돈두셨다. 그는 애초에 계획했던 만큼 무르지는 않고 오베르로 돌아와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이곳으로 돌아온 후 난 몹시 슬펐고, 너에게 닥친 불행에 끝없이 상심하게 되었다. 내 걸음걸이조차 불안정하다. 형인 내가, 네가 보내주는 돈으로 살아서 너에게 부담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여기에 더해 가셰와의 사이도 나빠졌다. 테오에게 쓴 글에서도 그에 대해 언급했다. “가셰 박사를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 보기에 그는 나보다 더 병든 사람이고, 아니면 적어도 나만큼은 아픈 사람이다. 만약 장님이 다늘 장님의 길을안내한다면 둘 다 도랑에 빠지기밖에 더하겠니?” 고흐는 가셰와의 불화로 몹시 동요되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극심한 고독에 처했지만, 그로선 이것을 피해 달아날 의도 전혀 없었다. 가셰가 그를 찾아오거나 초대하지도 않게 되자 그는 더욱 고립된 채 재냈다.
“가셰 박사는 너와 나만큼 예민하고 아파 보인다. 게다가 그는 우리보다 훨씬 나이도 많다. 그의 아내는 몇 년 전에 죽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의사이고, 자기 직업과 신념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주 가깝게 지내는데 지금 그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그는 아주 밝은 금발에 흰 모자를 눌러 썼다. 파란색 옷을 입고 있는 그는, 노란 책과 자주색 디기탈리스 꽃이 있는 탁자에 기댄 모습인데 배경도 짙푸른 색이다.” - 빈센트 반 고흐
그때부터 오직 일을 통해서만 삶에 매달릴 수 있었다. 그는 종종 지칠 때까지 그림을 그렸고, 하루에 한 작품, 심지어 두 작품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가 죽기 한 달 전에 그린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당시의 심리 상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슬픔과 지독한 고독감”이었다. 고흐로서는 드물게 폭 넓은 들판을 가로로 길게 그린 것인데, 그림의 전면에는 세 갈래로 길이 나 있다. 그림을 마주하면 어디가 지평선이고 어디까지가 길인지 명확하지 않은데다, 그 길도 그림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아 불안한 느낌을 받게 된다. 넓게 펼쳐진 들판을 그릴 때 나타나는 관습적인 원근법적 구조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나타난 공간에는 원근법적 중심이 없는 것이다. 파란 하늘과 노란 밀밭이 교차하면서 길이 갈라져 나오고, 그 경계에서는 한 떼의 까마귀들이 불분명한 전경을 향해 다가오듯 날고 있다. 그의 격렬한 느낌의 그림들과는 달리, 이 그림의 공간의 단순하고 간결한 장엄함을 지니고 있다. 파란 하늘은 표면적인 두 배에 이르는 노란 들판과 대비되고, 세 갈래로 난 붉은 길은 그 옆의 초록 수풀과 대비된다. 색의 사용을 보색을 이루는 세 개의 기본색으로 제한한 결과, 그림의 틀로 표현된 것이라기보다는 화가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파노라마처럼 사용된 것이 아니고 강한 제어력을 지닌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여기에서는 어떤 수직적 의미도 찾아볼 수 없다. 결국 그림에서는 부분과 전체, 가깝고 먼 것을 결정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자연이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졌을 때 나는 놀랍도록 투명한 한순간을 체험했다. 나는 더 이상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그림은 꿈결처럼 다가온다.” - 빈센트 반 고흐
이 작품은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주제, 즉 세상의 근본원리를 반영한 듯한 주제를 풍경으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그후에도 열두 점의 작품을 더 그렸다. 그중 하나가 《샤퐁발의 초가집》이다. 그러나 이후의 작품들은 어떤 jrt도 이 밀밭 그림과 같은 힘과 개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이 그림을 그의 가장 완벽한 유작 중 하나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빈센트는 1890년 7월 27일 테오에게 쓰다가 만 편지에서 작별을 고하듯 말한다.
“이제 와 생각하니 쓸모없는 일 같지만, 나는 너에게 정말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내 작품에 삶 전체를 걸었고 그런 과정에서 내 정은 무수히 괴로움을 겪었다. 다시 말하지만 너는 내게 그저 평범한 화상이 아니었고 항상 소중한 존재였다.”일생 동안 빈센트를 도왔던 동생이 없었다면 그의 그림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늘은 온통 경이로운 파란색이고 태양은 희미한 유황색으로 빛나는데, 하늘의 파란색과 노란색을 나란히 놓는 것은 베르메르의 그림처럼 멋지고 매력적이다. 나는 그처럼 훌륭하게 그림을 그리지는 못하지만, 어떤 규칙에도 구속받지 않을 정도로 그리는 일 자체에 몰두하게 된다.” - 빈센트 반 고흐
그런데 삶에 버팀곡이 되어준 동생이 곤궁에 처하자, 빈센트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파국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기셰와 고흐의 관계도 끝이 났다. 모든 관계가 무너져 내렸고 작품에 대한 희망만이 그를 살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발작은 끝내 미쳐버릴 것이라고 위협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고흐는 인생에 완전히 실패했다. 이제 출구는 단 하나뿐이었다. 1890년 7월 27일 저녁, 그는 어두운 들판에 나가 권총으로 가슴 한복판을 쏘았다. 간신히 몸을 이끌고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이틀 후 급히 달려온 동생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예술가의 삶이 끝났다. 고흐는 자신의 예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웠고 그의 인생을 대가로 치르면서까지 예술과 인생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는 삶과 예술을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단지 보이는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삶으 원리를 그려 보임으로써, 삶 자체를 그린다는 화가의 오래된 꿈을 실현한 셈이다.
고흐는 색, 선, 구성이라는 회화의 세 가지 근본요소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는데, 그것을 단지 예술양식으로서만이 아닌 새롭고 독특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했다. 색은 모든 사물에 생명력을 주는 생명의 숨결로, 선은 생명의 원동력이자 불멸의 에너지를 지닌 운동의 원리로, 구성은 세상에 대한 견해와 감정을 담아내는 공간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는 한 인간이자 화가로서 성취와 고독, 그리움과 환멸, 사랑과 혼란, 현실에 대한 애착과 도피, 조화와 무질서,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 지속하는 것과 스쳐가는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가 자신의 그림으로 위로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세상과 삶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런 세상에서 고통스러워했고 파멸했다. 그는 색과 움직임으로 가득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담은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신만의 새로운 세상을 창조했다.
“내 그림이 팔리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그림들이, 거기에 사용된 재료를 구하기 위해 쓴 비용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
붓꽃(Irises 1889년) 로스엔젤레스, 폴케티 미술관
사이프러스가 있는 푸른 밀밭(Green Wheat Field with Gypress 1889년) 프라하, 국립 미술관
두 그루의 사이프러스(Two Cypresses 188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올리브 재배지(Olive Orchard 1889년) 오테를로, 국립 크뢸러뮐러 미술관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1889년) 뉴욕, 근대미술관
론강 위의 별이 빛난는 밤(Starry Night over the Rhone 1888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자화상(Self Portrait 1889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아를의 반 고흐의 침실(Van Gogh's Bedrooom in Arles 1889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낮잠(Noon Rest 1890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꽃이 핀 아몬드 나무(Branches of Almond Tree in Bloom 1890년)
암스테르담, 국립 반 고흐 미술관
초가집(Cottage with Thatched Roofs 오베르쉬르우아즈 1890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걷는 사람, 수레, 사이프러스가 있는 길(Road with Man Walking, Carriage, Cypress, Star and Crescent Moon 오베르쉬르우아즈 1890년) 오테를로, 국립 크뢸러뮐러 미술관
착한 사마리아 사람(The Good Samaritan(들라크루아 모방) 생레미 1890년)
오테를로, 국립 크륄러뮐러 미술관
밀짚모자를 쓴 농부 아낙(Peasant Woman with Straw Hat 오베르쉬르우아즈 1890년 6월) 베른, 한로서 컬렉션
가셰 박사의 초상(Portait Dr. Gachet Seated at a Table 오베르쉬르우아즈 1890년 6월) 개인 소장
가마귀가 나는 밀밭(Wheat Field with Crows 오베르쉬르우아즈 1890년)암스테르담, 국립 반 고흐 미술관
오베르의 마을 길(Village Street in Auvers 오베르쉬르우아즈 1890년) 헬싱키, 국립 아테나움 미술관
샤퐁발의 초가집(Cottages at Chaponval 오베르쉬르우아즈, 1890년) 취리히 쿤스트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