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對曰 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대답하여 말하길, “저 賜는 어찌 감히 안회와 같기를 바라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一, 數之始. 十, 數之終. 二者, 一之對也. 顔子明睿所照, 卽始而見終; 子貢推測而知, 因此而識彼. “無所不悅, 告往知來”, 是其驗矣. 하나는 숫자의 시작이고, 십은 숫자의 끝이다. 둘이라는 것은 하나에 대한 상대다. 안자의 밝은 슬기로움이 비추는 바는 처음에 나아가면 곧 끝을 보는 반면, 자공은 추측하여 아는데 이로 인하여 저것을 아는 것이다.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고(안회), 이미 지나간 것을 고하면 다가올 것을 안다(자공)”는 것이 바로 그 증험(본보기, 입증사례)이다. 胡氏曰 十者數之終 以其究極之所至而言 二者一之對 以其彼此之相形而言 호씨가 말하길, “십이라는 것은 숫자의 끝이니, 그 끝까지 궁구하여 이른 바로써 말한 것이다. 2라는 것은 1의 맞상대이니, 피차간에 서로의 모습을 이루어줌으로써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子貢之知 亞於顔子知至 而未至之也 정자가 말하길, “자공의 앎은 안자의 앎이 지극한 것에 버금갔지만, 아직 그에 이르지는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明睿所照 推測而知 兩句當玩味 明睿所照 如明鏡在此物來畢照 推測而知 如將些子火逐些子照去 주자가 말하길, “밝은 슬기가 비추는 바와 추측하여 안다는 이 두 구절은 잘 음미해야 마땅하다. 밝은 슬기가 비추는 바라는 것은 마치 밝은 거울이 여기에 있어서 사물이 오면 죄다 비추는 것과 같고, 추측하여 안다는 것은 마치 약간의 횃불을 붙잡고 조금씩 쫓아서 비추어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聞一知十 不是知一件限定知得十件 只是知得周徧始終無遺 聞一知二 亦不是聞一件限定知得二件 只是知得通達無所執泥 知得周徧始終無遺 故無所不悅 知得通達 無所執泥 故告往知來 然思與睿亦非兩事 但有生熟之異 始則思而通 久則明睿生而物無遺照矣 又曰 惟是生知之聖人 則全體昭著 不待推廣 若夫學而知之者 則須居敬窮理 漸漸開明 固不能無淺深之異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것은 한 건을 알면 열 건을 알게 되는 것에 한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두루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아서 남김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안다는 것도 역시 한 건을 들으면 두 건을 아는 것에 한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는 것이 통달하여 집착하거나 사로잡히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두루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아서 남김이 없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다. 아는 것이 통달하여 집착하거나 사로잡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지난 일을 알려주면 다가올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과 슬기로운 것은 또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일이 아니다. 다만 날 것과 익은 것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다. 처음에는 생각하여 통달하게 되지만, 오래되면 밝은 슬기가 생겨나서 사물 중에 남겨놓고 비추는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오직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성인만이 온전한 體가 밝게 드러나서 미루어 넓히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만약 저 배워서 알게 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敬에 居하며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점점 개명해야만 하므로, 본래 얕고 깊은 차이가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顔子之於吾言無所不說 可爲知十之驗 子貢之告諸往而知來者 可爲知二之驗 又曰 聞一知十 豈有事可指哉 亦以況顔子明哲 擧首見尾 而己所不及耳 호씨가 말하길, “안자가 ‘내 말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는 것은 열을 안다는 징험이 될 수 있고, 자공의 ‘지나간 것을 알려주면 다가올 것을 다’는 것은 둘을 안다는 징험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고 하였는데, 어찌 가리켜서 말할 만한 일이 따로 있겠는가? 또한 이로써 안자의 명철함에 견준다면, 고개를 치켜들고 꼬리를 내보이며 뽐내더라도, 자신이 미치지 못할 바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
3 | 子曰 弗如也 吾與女弗如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같지 않을 것이다. 네가 같지 않다고 나도 인정한다.” 與, 許也.
○ 胡氏曰: “子貢方人, 夫子旣語以不暇, 又問其與回孰愈, 以觀其自知之如何. 聞一知十, 上知之資, 生知之亞也. 聞一知二, 中人以上之資, 學而知之之才也. 子貢平日以己方回, 見其不可企及, 故喩之如此.夫子以其自知之明, 而又不難於自屈, 故旣然之, 又重許之. 此其所以終聞性與天道, 不特聞一知二而已也.” 호씨가 말했다. “자공은 남과 비교하길 좋아하였는데, 공자께서는 이미 그럴 겨를이 없다고 말씀하였고, 또 다시 자공이 안회와 더불어 누가 나은지 물음으로써, 자공이 스스로를 아는 지혜가 어떤지 살펴보았다. 하나를 듣고 열을 안다면, 이는 상지(上知)의 자질로서 생지(生知 :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의 버금이다. 하나를 듣고서 둘을 안다면, 이는 중인 이상의 자질이고, 학이지지(學而知之: 배워서 아는 사람)의 재목인 것이다. 자공은 평소 자신을 안회와 비교하면서, 자신이 그에 미치고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비유한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자께서도 자공이 자신을 분명하게 알고 있고, 또한 스스로를 굽히는 것에 어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그렇다고 한 후에 다시 그것을 인정해준 것이다. 이것은 자공이 결국 성과 천도를 들을 수 있었던 까닭인데(자공은 이것 때문에 결국 성과 천도를 들을 수 있었다), 단지 하나를 듣고서 둘을 알 따름은 아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凡人有不及人處多不能自知 雖知亦不肯屈服 如子貢自屈於顔子 可謂高明 夫子所以與其弗如之說 주자가 말하길, “평범한 사람은 남에게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대부분 스스로 알 수가 없을 것이고, 비록 안다고 할지라도 또한 굴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자공 같은 경우는 스스로 안자에게 굽혔으니, 고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공자께서 그의 ‘나는 안회만 못하다’는 말을 인정해주신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自屈生於自知 自知之明 則不容於不自屈也 且自知之明 則不安於已知 不難於自屈 則不畫於已知 此夫子所以許之 경원보씨가 말하길, “스스로 굽히는 것은 자기를 아는 것에서 생겨난다. 자신을 아는 밝음이라면, 자신을 굽히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을 아는 밝음이라면 이미 아는 것에 안주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굽히는 것에 어려워하지 않는다면, 이미 아는 것에 한계를 긋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공자께서 그를 인정해준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聖人之道大段用敏悟曉得底 敏悟曉得時 方擔荷得去 如子貢雖所行未實 然他却極是曉得擔荷得去 使其見處更長一格 則所行自然又進一步 聖門自曾顔而下便用還子貢 如冉閔非無德行 然終是曉不甚得 擔荷聖人之道不去 所以孔子愛呼子貢而與之語意 蓋如此 주자가 말하길, “성인의 도는 대단히 민첩하게 깨닫는 방법을 사용하여 깨우쳐 터득해야 하는 것이니, 민첩하게 깨달아 깨우쳐 터득할 때에 비로소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자공 같은 경우는 비록 행하는 바가 아직 실질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오히려 지극히 깨우쳐 터득하여 짊어지고 갈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알아본 곳이 한 단계 더욱 성장한다면, 행하는 바도 자연히 또 한 걸음 나아가게 될 것이었다. 성인의 문하에서 증자와 안자로부터 내려가면 곧 역시 자공을 썼는데, 염옹이나 민자건 같은 경우는 덕행이 없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결국은 매우 잘 깨우쳐 터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인의 도를 짊어지고 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공자께서 자공을 사랑스럽게 불러다가, 그와 더불어 나눈 말의 뜻이 대체로 이와 같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孔門穎悟莫如顔子 子貢可以亞之 所以終得聞性與天道 與一以貫之 豈局於聞一知二者哉 신안진씨가 말하길, “공자의 문하에서 穎悟(깨달음의 싹, 촉)가 안자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자공은 그에 버금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끝내 性과 天道, 그리고 一以貫之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니, 어찌 그저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 자에 국한되겠는가?”라고 하였다.
○ 『論語集解』曰: “包曰: ‘旣然子貢不如’ 復云: ‘吾與女俱不如’者, 蓋欲以慰子貢也.” [논어집해]에 이르길, 포씨가 말하길, “기왕에 자공이 그와 같지 않다고 한 다음 다시 ‘나와 너 모두 그와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로써 자공을 위로하고자 한 것 같다.”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