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두 마리가 코코피트를 깔아 놓은 집에 들어앉았다. 코코넛 껍질을 굳혀 만든 둥근 이엉을 은신처로 두었는데도 제 몸을 숨기려 축축한 바닥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수분이 부족하면 물그릇에 몸을 적신다. 아래에 호흡공이 있어 자칫 물의 양이 많으면 질식할 수도 있기에 야트막한 정도로만 준다. 큰 더듬이 끝에 달린 눈을 길게 빼어 두리번거리고 먹이 앞에서 짧은 촉수로 톡톡 건드린다. 자연에서 풀숲을 밀고 나갈 때처럼 달팽이의 배발은 내 손에서도 천천히 움직인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들어 아는 듯 쳐다본다. 그럴 때마다 애완용임을 실감한다. 튼튼한 패각을 유지하기 위해 칼슘을 흩뿌려주고 사료는 물에 불려서 소화를 돕는다. 치설로 채소를 갉아 먹는 소리는 의외로 커서 놀랍다. 자웅동체지만 두 마리가 암수의 역할을 정해야 수정란을 만들 수 있다. 난자를 만들어 임신과 산란을 겪는 암컷이 정자를 주입하여 수정시키는 수컷보다 에너지가 많이 든다. 험한 자연 상태에서 운신이 버겁고 힘들다 보니 서로 수컷 역을 맡으려고 싸운다는데 짝을 이루어야만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롭다.
상자 위에 부직포를 덧대어 뚜껑을 덮어두면 날벌레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 뚜껑의 숨구멍으로 드나드는 벌레 때문에 느리게 움직이는 달팽이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게다가 어두운색의 천이라면 야행성에는 금상첨화다. 아침과 저녁에 한 번씩 뚜껑을 열어 물을 뿌려 주면 습도가 유지된다. 어느 날 눅눅한 코코피트 아래 노란빛의 동글동글한 알 덩어리가 보였다. 살짝 건드리는데 쿠키 속 크림처럼 뭉그러지는 질감이 낯설다. 토착종이 아닐 경우 생태계를 어지럽힐 수 있어서 부화시키는 양을 정하고 나머지는 냉동 후 폐기해야 한다. 초식동물이지만 갓 부화한 새끼를 먹는 일도 있어 낳은 즉시 따로 두고 일주일 보살폈다. 작은 집의 환경도 큰 집과 같이 맞추고 지켜보았더니 알 속에 거품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다리면 적당히 공급되는 수분과 최적 온도에 맞물려 곧 새 생명이 태어날 것이다.
초조하게 결과를 바라는 시간은 더디게 간다. 신경을 쓰느라 덮개를 습관처럼 여닫았다. 이레 동안 작은 집 앞을 지키며 오늘일지 내일일지 궁금해했다. 식구들은 누구에게 몇 마리를 분양할지 분주하다. 개중에 기회가 좋으면 입양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래를 알지 못한 채 상자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 생명에게 마음을 기대어 본다. 껍데기를 깨는 일이 내 안의 나를 깨는 것인 양 숨죽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나의 글은 언제쯤 깨고 나올 수 있을까. 퇴고를 위해 수필장에 부려 놓은 글을 정성껏 매만지다 뭉개는 일도 있다. 그러고는 몽땅 덜어내고 다시 쓰기가 예사다. 눈에 불을 켜도 명확하지 않아 그림자만 그릴 때도 있고 정면으로 맞서기 불안하여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한다. 글이 짧아서 공들여 나아가도 깊이 파고들지 못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발을 굴려 보지만 커서는 자꾸 뒷걸음질을 친다. 한참을 더듬어 글거리를 구해도 제대로 다듬지 못하면 불리지 않은 달팽이 사료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다.
글감을 찾기 위해 울타리 밖으로 나선다. 보는 눈이 어수룩하여 허투루 보기 일쑤다. 하지만 때때로 맨홀 뚜껑 아래에 집을 짓는 말벌을 찾아내고 이른 낙엽이 바닥에서 거뭇해지면 애잔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다 뿔을 다듬은 듯 반드럽고 단단한 먹잇감을 구하기도 한다. 쓰임이 좋은 재료인지 다가가 더듬이를 세운다. 의식을 깨지 않고서는 그 쓰임새가 다용도일지 장식용일지 알 길이 없으니 함부로 욕심부리지 않는다. 실마리를 찾기 위해 박물관을 가기도 하고 책을 톺아보며 기성 작가를 흉내 낸다. 어려운 말을 쉽게 풀어쓰려고 노력하고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사전을 뒤진다. 문장을 이을 때는 같은 문단에 둘 것인지 따져 보고 문맥이 닿도록 옮기며 눈을 크게 뜬다.
풀어 놓은 글 중에는 있었던 일만 장황하게 설명해 놓고 해석을 담지 못해 폐기될 것도 있다. 또 공모전 날짜에 맞추어 급하게 제출한 경우는 매끄럽지 않아 반려되기도 한다. 한자를 남발하거나 평상시의 입말로 촌스럽게 만들어 기어이 고배를 마신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 끄적거렸더라도 다시 들여다보면 무슨 말인지 생소하다. 하물며 결론짓기는 어떤가. 하룻저녁에 뚝딱 써질 리 만무하니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가다 덧붙이는 말이 길을 잃을 수 있다. 조각나면 잇는 수고까지 덤으로 해야 하니 잘 살펴봐야 한다. 글을 쓰는 데 재능이 없더라도 때가 되면 달팽이가 알을 깨고 나오듯 성과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오늘도 자판을 두드린다.
한 주일이 지났을 즈음 작은 집 안의 달팽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껍데기가 반쯤 벗겨진 것부터 아직 둥근 모양 그대로인 것까지 제각각 시간을 다투고 있다. 탈피한 달팽이들은 너무도 작아 패각의 모양이 보이질 않는다. 부화 후 자신의 알로써 영양분을 섭취하게 되는데 아직 웅크리고 있어서인지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에 눈을 의심한다. 선택받은 달팽이는 이제 곧 더듬이를 내보일 것이다. 그러나 얼어버린 수백 개의 다른 개체들은 쓰레기통으로 버려진다. 과연 애완용으로 뽑힌 것은 잘된 일인가. 성체 두 마리의 색이 달라 예쁜 색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야욕가를 방불케 한다. 처음 산실을 차리느라 층의 두께를 가늠하지 못해 한 마리가 아래로 숨어 보이질 않는다. 놔두면 보이겠지만 모두 덜어내서 간택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채롱에 담아 주어야겠다.
나의 글도 반질반질하게 만들고 싶어 다시 꺼냈다. 그런데 바라보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글귀를 가다듬으려 모니터를 쳐다보면 볼수록 수렁으로 빠진다. 감정이 되살아나지 않아 어렵고 손을 댈수록 산뜻하지 않다. 어느 수필가는 모자란 듯 보이지만 초반에 쓴 글은 노력한 흔적을 볼 수 있어 더욱 애정이 간다고 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 한꺼번에 고치려 하지 말고 당시에 매매 고치라 이야기한다. 모계를 닮은 패각의 방향처럼 그 말을 닮아 잘 쓰인 글이 독자의 심신을 달래주는 양식이 될지도 모른다. 나아가 청탁을 받아 지면에 실리면 나를 위로하는 치료용으로 쓰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바람에 몇 번이고 고쳐 써 본다.
달팽이가 바다를 건넌다는 말이 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말할 거리도 안 될 때 사용한다. 그러나 달팽이가 고래등에 올라탄다면 천길이라도 건너지 못할 바다가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