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롬6:1-11)
갈등
1. 1989년 11월 9일 밤, 독일 베를린 시민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동독과 서독을 가르던 거대한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망치를 들고 콘크리트 벽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울었고-서로를 끌어안고-장벽 위에 올라가 춤을 추었습니다. 그날 이후 동독 주민들이 자유를 얻고 서독으로 건너올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장벽은 무너졌는데도 일부 사람들은 한동안 동독 지역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몸은 자유로워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벽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통제받으며 살다 보니 자유가 낯설었습니다.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자유로운 새 세상이 열렸지만, 옛 세상의 습관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새장 문이 열렸는데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와 같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하늘도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새는 여전히 좁은 철창만 바라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죄의 장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죄가 다스리던 나라의 문을 깨뜨리셨습니다. 새로운 나라가 열렸어요.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 여전히 죄의 나라 시민들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 되었는데, 여전히 죄가 왕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당신은 지금 어느 나라에 살고 있습니까?”
2.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했습니다.“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20절) 죄보다 은혜가 크고, 실패보다 은혜가 크고, 인간의 연약함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고 선언했어요. 바울의 이 말은 오해의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그렇다면 죄를 더 지어도 괜찮은 것인가? 죄가 많을수록 은혜도 많아지는 것인가? 어차피 하나님이 용서하실 텐데 무슨 상관인가?”라고 여깁니다. 감옥에서 막 석방된 사람이,“감옥 문이 열렸으나 다시 들어가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죄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죄 때문에 눈물 콧물을 흘리고-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수없이 반복해요. 목에 묶였던 줄이 풀렸는데도 계속 말뚝 주위를 맴도는 개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이 없습니까? 화를 내지 말아야지 결심했는데 또 화를 냅니다. 용서해야지 다짐했는데 또 미워합니다. 욕심내지 말아야지 했는데 또 욕심을 냅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탄식합니다.“나는 변하지 않는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어.”사도 바울은 오늘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문제는 죄를 이길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정체성)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3. 나라가 이미 바뀌었는데 아직도 옛 나라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왕이 바뀌었는데 옛 왕의 명령을 듣고 따르고 있습니다. 바울은“그럴 수 없느니라!”(2절)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죄의 나라 시민들이 아닙니다. 새로운 나라로 옮겨졌어요. 우리는 죄의 나라를 떠난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왜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습니까?
갈등 심화
4.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장사되었고-살아났다고 합니다.(3-4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죄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탐욕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나라가 바뀐 것이 맞습니까? 죄의 나라를 떠난 것이 맞습니까? 바울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는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보십시오. 번데기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날개가 생깁니다. 정체성이 바뀝니다. 어느 날 나비가 되는데 애벌레 때와 같이 땅을 기어 다닌다면 어떨까요?
나비가 날개가 있는데 날지 않습니다. 꽃이 있는데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늘이 열려 있는데 땅만 바라봅니다. 날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죄의 나라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새 생명을 주셨어요. 우리는 여전히 옛 정체성-신분으로 살아갑니다. 죄가 왕인 것처럼 살아갑니다-죄가 최종 결정권자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감옥에서 나온 사람이 발목에 없는 쇠사슬을 끌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도 그를 묶어 놓지 않았습니다.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죄수처럼 걷습니다. 죄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5. 이것이 죄의 나라가 남겨 놓은 가장 무서운 흔적입니다. 죄의 권세는 우리가 아직도 묶여 있다고 믿도록 하는데 능숙합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속습니다.“너는 변하지 않았어. 너는 여전히 죄인이야. 너는 절대 달라질 수 없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죄는 쉬지 않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너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죄의 몸이 죽었다. 사망이 더 이상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6-7절)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옛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까요? 죄의 나라가 끝났는데도 왜 우리는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는데 우리의 삶은 아직도 전쟁터처럼 느껴집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한 놀라운 답을 제시합니다. 죄의 힘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도 죄의 나라 시민증을 들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이미 시민권을 바꾸어 놓았어요. 부활은 이미 새 나라의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의 나라를 떠나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실마리
6.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죄를 이기라고 말하기 전에, 놀라운 사실을 전해줍니다.“너는 죄의 나라에서 이미 죽은 사람이다.”한 나라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주민등록이 말소됩니다. 투표권을 상실하고, 세금도 부과되지 않습니다. 세상 나라의 법은 죽은 사람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말합니다. 2절,“그럴 수 없느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우리는 죄와 씨름하는 방법만 배우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화를 안 낼까?-욕심을 끊을까?-더 거룩해질까? 바울은 행동보다 먼저 신분을 말합니다.
“너는 이미 죄의 나라에서 죽었다. 너는 그 나라 시민이 아니다.”교도소 문이 열리고, 죄수들이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다음 날 한 사람이 여전히 감옥을 청소하고 있습니다. 교도관이 와서 말합니다.“당신은 왜 여기 있습니까?”그는,“저는 죄수입니다.”교도관이,“아닙니다. 당신은 어제 석방되었습니다.”그런데도 그는 계속 죄수처럼 행동합니다.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이 사람에게서 감옥 문은 열렸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감옥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세례를 설명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3절,“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7. 세례는 단지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는 장례식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옛사람이 관속으로 들어갑니다. 죄의 나라 시민이 죽습니다. 죄의 통치를 받던 내가 죽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 새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새 생명을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접붙인 나무를 본 적이 있습니까? 돌감람나무 가지를 잘라내고 참감람나무에 접붙입니다. 그러면 예전 나무의 수액은 흐르지 않습니다. 새 나무의 생명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5절,“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연합한 자”(σύμφυτοι)는 함께 자란 자-접붙여진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흉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명에 접붙여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됩니다. 죄가 우리를 향해 명령할 수는 있어요. 유혹하고 속삭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죄의 권세는 이제 왕좌에서 쫓겨났습니다. 십자가는 죄의 나라에서 우리의 사망신고서와 같습니다. 십자가는 옛 왕에게 보내는 해고 통지서입니다. 십자가는 죄가 우리를 소유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8. 죄의 나라에서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바울은 부활을 통해 그 답을 들려줍니다. 그리스도인이 죄의 나라를 떠나는 방법은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결심하고-참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나라로 옮기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민을 가서 외국 시민권을 받은 사람을 보십시오. 시민권을 받는 순간 무엇이 달라집니까? 국적이 달라집니다. 소속과 법-자기를 보호해주는 나라가 달라집니다. 그 사람의 얼굴이나 목소리는 바뀌지는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뀝니다. 소속-나라-신분이 바뀝니다. 그런데 새 시민권을 받고도 계속 옛 나라 국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어떻겠습니까? 새 나라의 권리를 누리지 못합니다. 새 나라의 자유와 보호도 누리지 못합니다. 시민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시민권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11절,“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여길지어다’는 단순히 상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없는 것을 있는 척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9.“로기조마이”는“계산하다-장부에 기록하다-사실로 인정하다”는 뜻입니다. 은행 통장에 입금된 돈을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돈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들어와 있는 돈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너는 죄의 나라에서 벗어나기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이미 벗어난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다.”고 선포했습니다.
복음 제시
10. 우리는 죄의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죄는 우리의 왕이었고-우리를 지배했고-사망으로 끌고 갔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나라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결심해도-노력해도-죄의 나라의 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죄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죄와 사망의 권세가 끝났다는 하나님의 승리 선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납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옛 왕의 통치 아래서 살던 사람이 새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1:13-14.“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고 선언합니다.
기대
11.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죄와 싸우는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우리의 정체성을 먼저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나라 시민들이 아닙니다. 죄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살아났고-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의 나라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답게 살아갑니다. 죄가 다시 우리를 향해 명령하거나 유혹합니다.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왕이 아닙니다. 우리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날마다 이렇게 선포하십시오.“나는 죄의 나라 사람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다.”우리 자신의 실패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죄의 권세가 유혹할 때,“나는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다”라고 확신 가운데 선포하십시오! 죄책감에 머물던 이가 십자가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패배감에 묶여 있던 이들이 부활의 소망으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 안에서, 죄의 나라의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용서가 미움보다 커지고, 감사가 불평보다 커지고, 사랑이 이기심보다 커지고, 순종이 두려움보다 커지는 은혜를 경험하도록 이 시간 함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