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산 밑 묵호항 앞에 짝궁댕이 처녀가 살았다.
그녀는 소아마비여서 궁댕이가 짝짝이었다.
어릴 때 묵호 초등학교를 등교 할 때, 동문산을 넘어 가자면 동네 아이들과 일본 아이들이 짝궁댕이라 놀림을 당하면서 다녔다.
그 당시 묵호항에서 묵호초등학교를 가자면 동문산 양쪽 봉우리 사이의 산길을 넘어야 했다.
북쪽 봉우리는 높고, 남쪽 봉우리는 낮았다. 그녀의 궁댕이를 닮아 있었다.
높은 북쪽 봉우리는 묵호항을 내려다 보고 있었고, 남쪽 봉우리는 묵호중앙시장 뒤에 버티고 있었다.
혼기가 차도 그녀는 시집을 갈 수 없었다. 궁댕이가 짝짝이었고, 게다가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소문이 돌았다.
궁댕이가 짝짝이라서 오입 할 때 거기서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소리를 들어 본 사람은 없었지만, 처녀로서는 시집을 갈 수 없는 엄청난 소문이었다.
스무살 중반에 들어서자 그녀에게 남자가 찾아왔다.
일본인이었다. 묵호읍장이면서 묵호항을 책임지고, 묵호항역의 관리를 도맡아 하는 者였다.
일본인들은 오입을 할 때 소리나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었다.
짝궁댕이 그녀는 일본인의 현지처로 시집을 갔다.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일본인은 그녀를 애지중지 하면서 아꼈다.
묵호항 축조 과정에서 항구가 완성 되기도 전에 정어리가 엄청나게 잡혔고, 일본인은 묵호 해변가에 정어리 기름 공장을 차리고 그녀에게 맡겼다.
해방이 되고 그녀는 남편을 따라 일본에 가지 않았다. 일본에 따라 가봤자 일본인 본부인이 버티고 있으니 재간이 없었다.
대신 그녀는 일본인 남편에게서 어선 10척과 정어리기름 공장을 물려 받았다.
625 때 잠시 힘들기는 했어도 그 후, 오징어 풍년으로 그녀는 묵호의 최고 부자가 되었다.
짝궁댕이 그녀가 남자를 밝히는 것이 사실임이 증명이 되었다.
자신의 오징어배 선원 중에 잘 생긴 기관장을 애인으로 둔 것이다.
그녀의 애인은 그녀의 배 사업을 더욱 발전 시켰다.
그녀의 배는 묵호항 뿐만아니라 삼척항 까지도 있었다.
그녀는 묵호 삼척 오징어 생산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동문산에는 그녀의 덕장이 널려 있었다.
모든 것이 동문산을 닮은 그녀의 짝궁댕이 때문이었다.
얼마후, 그녀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일본으로 갔다고 했다.
그녀의 일본인 남편을 찾아서.
동문산은 여전히 그녀의 짝궁댕이를 닮은 채로 버티고 있다. 동문산의 짝궁댕이는 작년에 난 산불로 더욱 적나라하게 알몸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