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03
1월12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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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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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0NvMUJFTNs
(김동현 플로렌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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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교회의 성장 그 이면에 누군가의 노고와 땀방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참으로 재미있을 때가 많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넉넉한 여유와 공간을 제공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시몬의 장모가 출현합니다.
갑자기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수제자이자 초대 교황님이신 시몬 베드로 사도에게 장모님이 있었구나. 그렇다면 당연히 부인도 계셨겠네? 자녀들도 줄줄이...? 그러나 복음서는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다!” 그게 전부입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병으로 누워있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아마도 열불이 나서 걸린 화병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병의 이유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딸을 책임져야 할 사위 시몬이 갑자기 달라진 것입니다. 배도 그물도 던져버리고, 예수란 사람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장모인 자신은 물론이고 애지중지 키워 시집보낸 딸도 갑자기 개밥에 도토리가 되고만 것입니다.
사위가 그길로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차라리 좋았을 뻔했습니다. 사위는 틈만 나면 장정들을 우르르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장모와 딸은 그 장정들 밥해대느라 허리가 다 휠 지경이었습니다. 당연히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고, 그로 인해 열병에 걸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장모의 그런 마음 상태를 어찌 모르셨겠습니까? 미안한 마음, 송구한 마음을 담아 장모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마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장모님! 죄송합니다. 널리 이해해주세요.” 그러면서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니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 성공적으로 전개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주님 뜻에 맞게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노고와 땀방울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어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스무 살의 나이로 꽃 같은 젊음을 활활 불사른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의 배은심 여사의 장례식이 엄수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 중에 하나가 아들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밥숟가락을 드는 일입니다. 금쪽같은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머님은 마냥 슬픔에 잠겨있지 않으셨습니다. 아드님의 장례식에서 당당한 투사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위로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이제 제가 아들 대신 싸우겠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으로 지켜내셨습니다. 그녀는 두 손을 활짝 펼쳐 또 다른 아들들, 열사들을 기꺼이 아들로 맞아들였습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는 자리에는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낸 후 35년 세월을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 따뜻한 의지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이 땅의 민주화의 어머니로 찬란한 별이 되셨습니다.
분신과도 같은 사랑스런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큰 고통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아들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배은심 어머님의 영혼을 자비하신 주님께서 따뜻이 안아주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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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IriWQrhg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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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을 변화시키는 사랑이란? 사랑의 봉사자가 되는 사랑뿐>
오늘도 예수님은 밤낮없이 온종일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고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세례를 받아 ‘사람 낚는 어부’가 된 이들이 따라야 하는 삶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특별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데 사람들이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예수님은 그 부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그랬더니 열이 그녀에게서 떠나갔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이 짧은 에피소드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해 오신 모든 복음선포의 사역을 한순간에 다 설명해줍니다. 당신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몸소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제자들을 당신 복음선포 사역에 초대하셨습니다. 왜 그들을 당신 사랑의 실천에 ‘초대’하셨을까요? 그들 나름대로 하느님을 섬기면 안 됐을까요? 사람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려 해도 명확한 어떤 ‘부르심’에 따르지 않으면 저절로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우리 본성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더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미무라는 36세의 건축 디자이너입니다. 마레히사 씨에게 상담하러 온 이유는 자신은 9개월밖에 안 된 신혼부부인데 아내가 갑자기 이혼하자는 편지만 한 통 남겨놓은 채 집을 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29세이고 이름은 아야였습니다. 아야가 워낙 이혼에 대해 굳은 결심을 하고 있어서 간신히 이혼을 전제로 3번만 함께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일 때문에 매일 거의 새벽 1시에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결혼을 했는데도 줄곧 외롭기만 했어요”라고 말합니다. “나는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남편이 집에 돌아올 때는 웃는 얼굴로 맞이하면서 그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고 계속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지진이 났는데도 집에 바로 오지 않았어요. 남편은 배려가 없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과는 함께 살 수 없어요.”
그녀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남편이 3년 동안 사귀던 약혼녀인 직장 동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약혼까지 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야는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집에서 걱정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도 그녀 밑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서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멋지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에 관해 관심이 1%도 남아 있지 않았었습니다.
이 둘이 합치면 잘 살까요? 당연히 이런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아야는 ‘나를 위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남편도 잘하는 것은 없지만, 어쨌건 사랑을 내가 하려고 하면 상대에게 ‘보상’을 요구합니다. ‘내가 이만큼이나 노력했는데, 돌아오는 게 이거야 결국?’이라고 생각할 때가 옵니다. 이런 사랑은 사랑을 잃은 원죄의 본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리옷 유다처럼 오히려 자신의 본성을 더 타락시킵니다. [출처: 『오늘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 이시이 마레히사, 밀라그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닌 제삼자 때문에 그 대상을 사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한 자살하려던 귀부인을 자신에게 오라고 해서 자신의 일을 돕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녀도 분명 사랑이 삶의 의미인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참사랑을 실천하는 이의 봉사자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주체적으로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해도 우울하기만 한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본성을 회복시킵니다. 그러려면 자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때문에’가 아닌 ‘사랑이신 주님이나,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와 같은 이들 때문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그들에게 시중들었다’라고 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시중들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식탁의 봉사자’라 불리는 ‘부제’(디아코노스)에서 나온 ‘디아코네오’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식탁의 봉사자들에게 퍼서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부제’(디아코노스)들입니다. 곧 사랑은 ‘포도주’입니다. 우리에게서 포도주의 본성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은 곧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우리 사랑은 그 사랑의 흐름에 봉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아의 이기심에서 해방되어 나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미국 동해안 메릴랜드에 병원을 개업한 ‘맥칼리스터 박사’는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의사로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아내를 보내야 했던 심한 자책감과 우울증이 그를 점령했습니다. 그는 중풍을 앓게 되었고 휠체어를 타며 먹고 입고 눕는 것조차 자기 손으로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는 자살할 생각만 했습니다. 세 명의 간호사가 항상 붙어있어야 했는데 그는 죽지도 못하게 하고 자신을 비참하게 하는 그 간호사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해변가 높은 곳에서 바다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간호사에게 말했습니다. 간호사들도 별생각 없이 그를 바닷가로 데려갔습니다. 맥칼리스터는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며 간호사들보고 수영을 즐기라고 하였습니다. 간호사들이 수영을 즐길 때 자신은 벼랑으로 뛰어내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간호사 하나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녀는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맥칼리스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맥칼리스터를 구조원이라 여겼습니다. 맥칼리스터는 간호사를 이른 시간에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중풍으로 인한 후유증과 우울증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 아래]
진정 우리 본성을 변화시키는 사랑은 사랑에 봉사하는 사랑입니다. 맥칼리스터가 중풍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예수님이라면!’, 혹은 ‘의사라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어떤 참사랑 때문에 그것에 봉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을 따르는 것만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병으로부터 회복되는 사랑은 이전에 자기를 위해 아내를 사랑한 그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죽기만을 원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의 방향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포도주가 그 여인에게로 행했고 맬칼리스터는 그저 그 포도주가 그녀에게 향하는 데 봉사한 것뿐입니다. 이런 사랑만이 우리 본성을 회복시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실천을 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랑하는 데 우리도 참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사랑은 다 나의 본성을 더 타락시키는 이기적인 애착에 머물게 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그리스도와 교회에 시중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사랑을 위한 봉사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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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9-39 :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시몬의 장모와 비슷한 상태에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옆에 와 계신다. 아파서 누워있는 우리의 침대 옆에 이미 와 계시다. 그분께서 와 계신데도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믿음으로 그분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분은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이다.
시몬의 장모는 침대에 누워 자기 힘으로는 일어날 수도 없고, 그분을 뵈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자 자비로우신 의사께서 그 침대 곁으로 가셨다.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오셨던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31절) 당신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주셨다. 당신 손으로 그 여인을 고쳐주셨다. 그분이 우리 손을 잡아주시어 우리를 깨끗이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안식일에는 짐을 지거나 가지고 거리를 지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저녁에 해지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율법은 하늘에 별이 3개가 나타나면 그 날이 끝나는 것으로 간주하여 안식일도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해가 지고,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을 예수님은 모두 고쳐주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5절)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항상 기도하셨다. 기도 없이도 거뜬히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기도로써 청하신 바를 얻으셨다. 우리도 늘 기도하면 그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 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고 하셨다. 우리도 그러니 늘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38절) 주님의 빛으로 충만한 교회는 세상 구석구석에 빛을 비춘다. 그분의 구원의 의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며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빛은 곳곳으로 퍼져나가 모든 사람들을 비추어야 하는 빛이기에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면 그 빛을 우리도 전하는 도구가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랑과 감사로 응답을 드리지 않는다면 비극적인 잘못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에서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기억되고 사랑 받으시고 찬미와 감사를 받으셔야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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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병고>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29-34)
여기서 ‘열이 가셨다.’ 라는 말의 원문은 “열이 그녀를 버리고 떠나갔다.”입니다. 이 말은 그 ‘열이라는 것’이 떠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처럼 ‘열이라는 것’을 쫓아내셨다는 표현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루카 4,39)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나중에 어떤 백인대장이 직접 고백하게 됩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7ㄴ-8) 이 믿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믿음과 같습니다. 하느님만이 병을 지배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열이 가신 부인이 사람들의 시중을 들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치유가 완전한 것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시중’이라는 말은, 이웃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집의 안주인으로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일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많은 병자들이 모여드는데, 예나 지금이나 ‘병고’는 인간을 괴롭히는 대표적인 고통입니다. 여기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당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를 못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마귀들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보다는 더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만나야 할 분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마귀들은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때에 진실을(진리를) 그대로 말하지 않고 항상 교묘하게 예수님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말을 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5-39)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나약한 인간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도 아니고, 당신 안에 ‘힘’이 없어서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어내기 위한 기도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은 처음부터 예수님 자신의 것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만 보다가 예수님의 ‘신성’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예수님께서 한곳에 계속 머물면서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만 하시기를 바란 것이고, 예수님을 독점하려고 한 것이고, ‘몸의 치유’만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곳에도’ 라는 말은, “이곳에서 한 것처럼 그곳에서도”인데, ‘모든 곳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한 일도 복음 선포였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런 말씀 없이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만 하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과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함께 하셨을 것입니다.(루카 9,11) 그리고 사실 병자 치유 자체가 복음 선포이기도 합니다.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체험하게 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몸’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라는 말씀은, “복음을 선포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왔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지만, 병 자체를 없애신 것은 아니고, 인간은 여전히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구원’은 ‘몸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이 지금 병고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것과 같은 공허한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질병들과 전염병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가? 이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고통도 '신비'(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라고 말합니다. 병자 자신이든지 병자의 가족이나 이웃이든지 간에, 지금 앓고 있는 병의 치유를 간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로마 14,7-8) 신앙인의 기본자세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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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입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셨습니다. 예전에는 번호가 주로 키순이었기 때문에 저의 번호는 앞 번호였습니다.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다들 큰 소리로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학교에 갈 때는 가져가야 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숙제, 과제물, 육성회비 같은 것입니다. 숙제도 다했고, 과제물도 준비하고, 육성회비도 밀리지 않고 내면 학교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그런데 숙제도 못하고, 과제물도 잊어버리고, 육성회비는 밀려있으면 학교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선생님이 부르시는 것도 무서웠습니다. 숙제를 못했거나, 과제물을 잊어버리면 벌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육성회비를 마련해 주시면 기쁜 마음으로 학교에 갔습니다. 누군가 나를 부를 때입니다. 내가 준비가 잘 되어 있으면 그 부름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내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부름은 부담이 되기도 했고, 피하고 싶었습니다.
1991년 8월 23일입니다.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동창들은 모두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학교의 학장 신부님이 서품 대상자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호명 순서가 가나다순이기에 저는 뒤쪽 번호였습니다. 모두들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주교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주교님의 훈시가 있고, 도유가 있고, 성인호칭기도가 있습니다. 주교님들, 사제들, 교우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서품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서품자들은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기도합니다. 지난 10년간의 신학교 생활이 떠오르기도 하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서품식의 절정은 선배 사제들의 안수입니다.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주교님과 사제들이 안수를 하면 비로소 교구 소속의 사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제서품을 받으면 교구장님께서는 ‘사제들의 특별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첫 소임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간 성당이 중곡동성당입니다. 31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유아세례를 준 아기의 엄마를 뉴욕에서 만났습니다. 저는 기억을 못했는데 아이의 엄마는 할머니가 되어서 저를 기억했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딸을 낳았고,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서울대교구는 1월 28일에 ‘사제서품식’이 있습니다. 후배 사제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멀리 있지만 후배들을 위해서 기도하려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는 너희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 95,7) 사무엘은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온 정성을 다해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고, 주님의 말씀을 왕과 백성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위대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영화 ‘역린’에서 인용되어서 기억에 남은 중용 23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성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임치백 성인은 십계명을 외우지 못할 정도였지만 무식해도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준비가 되어있다면 역경이 닥쳐도, 고난이 닥쳐도 언제든지 “예‘라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말씀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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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가 이어집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신 예수님께서 회당을 나와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곳에는 그분의 도움이 필요한 시몬의 장모가 있습니다.
어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말씀’으로 치유하신 예수님께서, 오늘은 ‘행위’로 그를 치유하십니다. 그분께서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십니다. 치유받고 나서 곧바로 “시중을 드는” 그의 모습은, 하느님께 받은 ‘은혜’가 이웃을 위한 ‘봉사’로 이어져야 함을 묵상하게 합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안식일이 끝나고 사람들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데려옵니다. 그들을 낫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십니다. 이는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분의 능력은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곧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만나는 때인 기도 안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십니다. 모든 이가 열광하며 당신을 찾는 그곳에 머무르시지 않고, 다른 고을을 찾아 나서십니다. 온 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당신께서 오신 목적이며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르코 복음사가는 어제와 오늘 복음에 걸쳐 예수님의 모든 활동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하루에, 그것도 안식일에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셨다는 것은 복음 선포가 그만큼 급하고 중요하였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항해 여정을 기도로 시작하시고, 기도로 마무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믿음은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 안에서 커 나갑니다. 기도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채워 주고, 우리의 분주한 일상을 이끌어 주는 근원입니다. “기도는 노력입니다.” “기도를 가까이할 때에 삶이 바뀝니다.”(기도, 새 생명의 숨결, 16면) 그래서 기도는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희생하고 투쟁하며 기도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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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호 다미아노 신부님]
<새벽에 일어나라>
밀려드는 병자와 마귀 들린 자들을 긍휼히 맞으시고 치유와 구마의 자비를 연일토록 베푸심에 얼마나 피곤하셨을까요? 그럼에도 여명이 밝기 전 일어나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스승 예수님은 하루를 그렇게 시작하셨습니다.
고대 종교사회에서는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 태양이 떠오르도록 치성드리고, 저녁놀을 향해 감사의 예를 드리는 것이 제사장의 임무였습니다. 하루를 열고 닫는 임무는 오늘도 종교인들을 통해 전승됩니다. 범종을 치면서 삼라만상을 깨워 여명을 맞이하고 저녁이면 보금자리에 들게 합니다. 사제, 수도자는 물론가장들도 새벽 기상으로 자신과 가족과 공동체의 평화 강령을 기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루 첫 새벽을 주님께 봉헌하며 청정기운을 받음으로 온종일을 활력차게 만들어야 합니다. 종교인이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그날의 해가 빛을 잃습니다. 자녀들을 일찍 깨우는 일은 가장 중요한 교육입니다.
등교와 출근 때문만이 아니고 인간이 대자연의 질서에 결합하여 천지간 영적인 교류 속에 영성적으로 살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본당 수도원마다 새벽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본당에 새벽 미사가 사라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부들이 오전 미사에 보다 많이 올 수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종교예식이란 다수의 편의보다 변함없는 시간과 거룩한 공간의 옹호가 더 중요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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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병은 몸이 제 역할을 못하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내 몸의 기능들을 방해하는 것은 몸에 있는 병균들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마음의 상처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병이 하느님의 생명과 대항하는 악한 영, 곧 마귀의 힘 때문이라고 여긴 듯합니다. 병자들을 치유할 때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내쫓는 장면이 복음서에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열병은 일종의 ‘화병’이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 악한 영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곧 치유의 과정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치유를 청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신체의 병만이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치유하십니다. 그들이 병으로 겪고 있는 소외감과 상처는 악한 영에 사로잡혀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가 관계의 상실에서 얻은 정신병과도 같은 것입니다.
현대인은 마음이 혼란하면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고 침잠하는 피정의 시간을 갖기보다는,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의 욕구를 즐깁니다.
참된 쉼은 실컷 먹고, 마시고, 영상물이나 오락에 빠져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외딴 곳에서’ 하느님과 만나 기도하며 참된 나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칭송보다는, 하느님과 누리는 자유를 찾으셨습니다. 마귀를 내쫓을 수 있는 힘도 바로 이 침묵의 힘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사람들의 목소리와 우리 양심을 통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세 번째 듣고 자신을 ‘당신의 종’으로 지칭하고 위대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도대체 주님의 부르심을 몇 번이나 외면한 뒤 진짜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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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시몬의 장모가 누워 있던 집에서부터 온 갈릴래아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들은 모두 아픈 이들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십자가가 도시의 야경 속에 뒤엉켜 있는 오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들은 누굴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봅니다.
몸가짐이 단정하고, 생각이 올곧으며, 일상을 성실함으로 꾸며 가는 이들을 볼 때, 참신앙인이라고 칭송합니다. 반면에 괜한 울분으로 세상을 비꼬듯 비판하며, 제 인생조차 남 탓하듯 허투루 대하는 이들의 ‘삐딱함’을 보면서 신앙인의 모범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이들은 모두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복음 선포는, 아픈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지만, 아픈 것도 아쉬운 것도 슬픈 것도 고통스러운 것도 없는 이들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위험한 순간이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되뇌일 때가 아닐까 합니다. 영육으로 ‘결핍’을 느낄 때, 우리는 이웃에게, 하느님에게 손을 내밀 때가 있습니다. 사실 손을 내미는 것도 꽤 힘든 일이지요. 부끄럽기도 하고, 내가 이런 존재밖에 안 되나 싶어, 속상한 마음이 먼저라 손을 내밀기가 힘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되뇌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이들은 모두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잠시만 손을 내밀어 이웃을, 세상을 향하여 도와 달라 외쳐 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리고 그 손을 맞잡을 사람이 바로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자주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으려고 성당에 모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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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않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1,34)
<비움 속에 풍요!>
오늘 복음(마르1,29-39)은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시고, 갖가지 질병을 앓는 사람들과 나쁜 영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고쳐주신 말씀입니다.
요즘 우리의 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곧 물질적으로는 풍요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시대 안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선물로써의 병폐'입니다.
예전보다는 더 풍요 속에 살고는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매우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는 마음이 따뜻하지 못한 때문이고, 마음을 차갑게 만드는 지나친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욕망은 희망과도 같은 것이어서 좋은 것입니다. 절제된 욕망은 오히려 필요하고 우리에게 적당한 에너지를 줍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너무 지나쳐버리거나, 절제되지 못한 끝없는 욕망으로 변질되어 버리면 많은 문제들을 낳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많은 고통들과 아픔들과 질병들 그리고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의 큰 어려움은 우리의 지나친 욕망이 낳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채우기보다 비우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할 때입니다.
지나친 욕망 비우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나쁜 영 비우기 등등
'비움 속에 풍요!'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선물'이고,
그분 안에 머물 때 받게 되는 '선물이자 치유'입니다.
'마음이 따뜻한 벽난로'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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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의 길>
마르코 1,29-39 (시몬의 병든 장모와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전도 여행을 떠나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삶의 길>
나아가기 위한
길이 아니라
멈추기 위한 길
멈추어야
새로 열리어
다시 걸을 수 있는 길
나만의
길이 아니라
벗과 함께 걷는 길
벗과 함께 라야
바르게 열리어
곧게 걸을 수 있는 길
나 살고자
멈춰 선다면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
벗 살리려
멈추어야만
비로소 갈 수 있는 길
길 위에서 멈추고
길 위에서 나아가며
길이신 분 따라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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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매칭 전문 기업 ‘이음 소시어스’는 미혼 남녀 1,145명을 대상으로 ‘돈을 써도 아깝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1위는 무엇이었을까요? 자그마치 33%가 대답한 ‘좋아하는 사람에게 쓰는 돈’이었습니다. 그 뒤를 ‘자기 계발이나 취미에 쓰는 돈’, ‘식비’가 차지했습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게 됩니다. 시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래를 위해 쓰는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지만,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쓰는 시간에 대해서는 아깝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그중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친밀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먼 미래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절대 이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기도하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쓸데없는 낭비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 훗날 할 일 없으면 그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보겠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일과가 얼마나 바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안식일을 보내시는 예수님께서는 오전에 회당에서 설교와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모든 유다인이 안식일을 자기 집에서 지내는 관습대로 시몬 베드로의 집에, 저녁 후에는 베드로 집 문전에 모인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은 아직 날이 새기도 전에 일찍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신 다음 다른 이웃 고을에 가십니다.
하루 내내 바쁘고 지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다음날 새벽에 먼저 기도하십니다. 종종 우리는 피곤하면 기도를 뒤로 미루기도 합니다. 또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첫 번째 원칙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의 대화인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의 힘이 곧바로 다른 이웃 고을로 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또 그곳에서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너무나 바쁘고 지친 가운데에서도 절대로 놓치지 않았던 기도를 우리 역시 놓쳐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을 다 마친 후에 할 일이 없어야 하는 기도가 아니라, 모든 일의 시작에 두어야 하는 기도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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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남>
인간의 세포는 수명이 있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새롭게 태어난 새로운 세포로 교체가 됩니다. 이렇게 끝없이 분열과 재생을 평생에 걸쳐서 반복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재생 기간이 늦어지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늙어 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재생되는 세포는 지방세포로 한 8년 걸린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파괴된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되는 시간은 8년 정도 걸리는 것입니다. 8년이 지나면 8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포로 구성된 전혀 다른 ‘나’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종 “다시 태어나고 싶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다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포를 이용해서 다시 태어나는 삶을 멋지게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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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고요함이 있는 곳>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지니고 마귀를 쫓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고 관철하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외딴곳에서 빈말을 되풀이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보십시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 1,35) 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하셨기에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합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골방은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함께 있지 않은 곳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할 때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고요 속에서 외딴곳을 찾아 기도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는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기도에 몰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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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외딴곳>
-주님과 만남의 자리-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치열했던 하루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 삶의 요약같은 하루입니다. 하루하루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하느님의 전사로서의 예수님 삶이었습니다. 그대로 우리 하루 삶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복음입니다. 하루 삶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예수님의 기도의 자리, 외딴곳이요 더불어 떠오른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이란 시입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이런 갈망이 있습니다. 일상에 매몰되어 살면서도 때로는 고독과 침묵의 외딴곳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구체적으로 외딴곳이 있습니까? 하루 중 어느 때, 어떤 곳에서의 외딴곳인지요. 토마스 머튼은 현대인들에게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설파했습니다. 나름대로 참으로 영적 삶을 위해 구체적 기도의 자리, 외딴곳은 필수가 되었습니다. 오래전 써놨던 제 '메꽃'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이 가지 저 가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의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하늘 사랑 꽃 피워내며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메꽃!”-1997.8.27
누구나의 내면에는 이런 메꽃처럼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내재해 있는 법입니다. 이런 갈망이야말로 영성생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의 하루의 전 삶이 마치 한 곳으로 향하는 듯한 구절입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분명 하늘 아버지와의 깊은 관상적 친교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앞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자 그녀는 곧장 예수님 일행의 시중을 들었다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라 있는 건강이요 몸임을 깨닫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섬김의 배움터’라 정의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삶도 섬김의 삶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어 안식일이 끝나는 저녁이 되고 해가지자 예수님이 계신 곳은 문전성시를 이룬 듯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로 가득했고 예수님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이런 번아웃 상태에서 새벽 캄캄할 때 곧장 외딴곳의 기도처를 찾은 예수님이십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는지, 바로 여기 위험이 있습니다. 군중의 인기에 현혹되어 떠나야 할 자리에서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외딴곳의 자리에서 영육을 새롭게 충전시키면서 분별력의 지혜를 새로이 했음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기도와 삶, 관상과 활동의 균형과 조화는 영성생활의 필수조건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섬김의 전사로서의 하루의 전 삶을 떠받쳐 준 외딴곳에서의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의 관상기도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대화보다는 깨어 침묵중에 마음의 귀를 활짝 열고 침묵을 통해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귀기울여 경청했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참으로 외딴곳에서의 아버지와의 만남으로 깊고 넓고 긴 영적 시야를 확보한 주님이요, 사명을 새롭게 확인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어느 사람이나 장소에 집착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자유로이 강물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며 하늘 나라 복음을 선포하며 병든 이들을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내 주신 하느님 사랑의 전사, 예수님이셨습니다. 이 모두가 외딴곳에서의 기도의 힘이었음을 봅니다.
모든 수행이 훈련이지만 침묵의 경청 또한 훈련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경청의 훈련이요 일상화되고 습관화되어야 할 경청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외딴곳에서의 기도시 깨어 온전히 경청했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이 참으로 경청의 사람이자 기도의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스승 엘리의 부르심으로 착각한 사무엘은 잠자는 중에도 즉시 일어나 스승 엘리를 찾아 묻습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얼마나 아름다운 제자와 스승의 장면인지요! 잠자는 중에도 영혼은 환히 깨어 있던 사무엘이었습니다. 세 번째 반복되자 엘리는 친절히 주님의 부르심임을 일깨워 주었고 마침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주님은 얼마나 사무엘을 신뢰하고 사랑하셨는지 참 정답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주님과 사무엘의 관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필시 외딴곳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의 장면도 이와 흡사했을 것입니다.
“예수야, 예수야!”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참된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늘 깨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은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합니다. 바로 사무엘이 한 말은 다 이루어 주셨다라는 참 은혜로운 말씀으로 경청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사무엘이나 예수님처럼 거룩한 침묵중에 들려 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외딴곳이 아니더라도 순간순간의 침묵의 시간과 장소가 마련되면 깨어 귀기울이는 습관을 지니시길 바랍니다. 미국의 시복된 하느님의 종 도로시 데이가 그랬습니다. 하느님 현존의 거룩한 침묵을 사랑한 언젠가 시성될 현대판 미국의 성녀 도로시 데이입니다. 어제 집무실에 써 붙여 놓은 영어 글귀입니다.
“거룩한 침묵(Holy Silence)!”
어제 아침 하얀 순수의 눈덮인 산야였습니다. 마침 예전 눈덮인 산야를 보면서 ‘하얀 침묵(white silence)’이라 명명했던 테제의 마르코 수사의 기발한 언급이 생각났습니다.
주님은 외딴곳 거룩한 침묵의 성전에서의 날마다 미사은총으로 하루하루 충만한 삶을 살도록 우리 모두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다음같은 자세로 사시기 바랍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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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7PajeyHl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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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 38)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사랑이다.
사람을
움직이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하루가
다시
밝았다.
사랑과 나눔
봉사와 기도로
우리를
깨우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예수님의
오늘이다.
하루 내내
하느님을
향해 계시는
사랑 가득한
예수님의
일상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당신의
하루를
놓치지
않으신다.
오늘 우리의
시간은
어떠한지를
다시금
성찰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안을
치유하신다.
우리의 하루를
헤아려주시며
우리의 삶을
어루만져 주신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치유의 축제가
펼쳐지는
오늘이다.
아픈 우리를
데리고 업고
걸어 가신다.
사랑하기 위해
떠나오신
예수님의
삶을 만나는
사랑의 눈부신
오늘이다.
우리는 과연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하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사랑의 일은
가장 분명한
주님의 뜻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치유하는
우리의
오늘이다.
오늘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오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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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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