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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정부
로스차일드 왕국
로스차일드 왕국
금권정치를 실현한 M. A. 로스차일드 및 그의 가문을 알아볼 차례다.
18세기 중반 프랑스혁명이 시작될 때까지 유대인은 재력을 쥘 기회가
기독교인들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조 M. A. 로스차일드는 174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게토(ghetto)지역인 유대인 빈민촌에서 골동품상 겸 고물상인 암셀 모세스 바우어(Amschel Moses Bauer)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M. A. 로스차일드의 아버지가 하는 가게에는 붉은 바탕에 사자와 유니콘이 그려진 방패모양의 간판이 달려 있었고, 가게이름도 '붉은 방패(Rot-Schild)'여서 후에 그의 성도 로스차일드(Rothschild)가 되었다.
M. A. 로스차일드는 10세 때부터 부모가 시키는 대로 유대교의 랍비(rabbi)양성학교에 들어가 공부했으나, 도중에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가 하던 장사를 하였다. 그는 헌옷, 골동품, 가구 등을 취급하면서 다른 나라나 지역의 돈과 엽전, 그리고 옛날 훈장 등을 사들여 광을 내고 장식하여 귀족들에게 판매하였다. 그러면서 점차 돈을 벌어 귀족들과도 잘 알고 지내게 되었다.
당시의 독일은 여러 개의 작은 독립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프랑크푸르트 지역의 황태자 빌헬름은 20명 이상의 자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돈을 물쓰듯하였다. M. A. 로스차일드는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자신의 힘도 키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황태자 가족의 일에만 극히 충성하여 결국 자기 가게에서 세금을 걷을 수 있는 특별 허가를 얻었으며 소규모 금융사업도 하게 되었다.
이윽고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이 이 지역 헤세하나우(Hesse Hanau)를 점령하자 빌헬름은 처가인 덴마크로 피신하면서 자신의 300만 달러가 넘는 큰돈을 M. A. 로스차일드의 은행에 맡겼다. M. A. 로스차일드는 이 돈을 기반으로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이나 오스트리아에 1억 파운드 이상을 빌려주어 단기간에 큰돈을 벌게 되었다.
그 당시 전비와 군수품 조달로 거대한 부를 쌓은 유대인 가문으로는
로스차일드가(家)외에도 오펜하임가(家)와 하이네가(家), 멘델스존가(家)가 있었다.
이 막대한 돈을 M. A. 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첫째아들 암셀(Amschel)은 독일에서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다가 나중에 통일독일의 재무장관이 되었으며,
둘째아들 살로몬(Salomon)은 오스트리아,
셋째아들 나탄(Nathan)은 영국,
넷째아들 칼만(Kalmann)은 이탈리아,
다섯째아들 야콥(Jacob)은 프랑스로 보내 경제권을 장악하게 했다.
이전부터 유대인들은 각 지역의 상황을 알기 위해 서로 정보를 교환
했으므로 다른 민족들에 비해 장사에 필요한 기회를 빨리 잡을 수 있었다.
이제 로스차일드 가문은 막대한 금력을 이용, 적국에까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으며 유럽 각 나라에 분산되어 있는 형제들간의 긴밀한 연락을 위하여 잘 훈련된 비둘기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로스차일드 가는 서로 빈번하게 정보를 교환했으며, 그 정보의 양과 속도는 한 나라의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 정보망으로 한 순간에 큰 돈을 번 대표적인 예가 1815년의 워털루(Waterloo)전투였다. 나탄 로스차일드는 영국 정부가 연합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파악하기 전에 이를 이미 입수하였으며 나중에 반드시 급등할 공채를 많이 사두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나탄 로스차일드는 런던의 주식 시장에 나타나 ‘팔아라(Sell them)!’라고 외치고는 사라졌다. 그를 주시하던 사람들은 나탄이 팔라고 할 때에는 영국이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라 짐작하고 앞다투어 주식을 팔려고 하였다. 자연 주식가격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나탄은 미리 비밀리에 만들어 놓은 다른 회사의 명의로 그 주식들을 몽땅 사들여 돈을 2천 5백 배로 불렸다.
재미를 본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때부터 항상 전쟁을 일으키려고 돈을 빌려주면서 군대를 양성하게 한 다음, 이웃 국가와 실력 대결을 벌이도록 하였다. 오늘날에는 실제로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가격에 해당하는 증서만 써주어 신용으로 물자를 사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
미국의 독립과 링컨 대통령
M. A. 로스차일드는 미국이 독립하자 미국에도 손을 뻗쳤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자기 집에서 같이 살던 랍비의 손자 야콥 시프(Jacob Schiff)를 뉴욕으로 보내 미국총책을 맡겼다. 야콥 시프는 금융 회사인 쿤롭사와 동업을
한 후 동업자인 솔로몬 롭(Solomon Loeb)의 딸 테레사와 결혼하였다.
그후 철강산업의 카네기(Andrew Carnegie), 철도산업의 해리먼(Edward He
nry Harriman), 석유산업의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등에게 자금을
대준 J. P. 모건(John Piermont Morgan)도 야콥 시프의 지휘 아래 움직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꾼이었다. 그의 소유로 알려져 있던 재산 중 19%만이
그의 것이었고, 나머지는 로스차일드의 것이었다.
1802년 M. A. 로스차일드는 독일계 유대인인 와벅 3형제중, 둘째 폴 와벅(Paul Warburg)과 막내 펠릭스 와벅(Felix Warburg)을 미국으로 보내 야콥
시프의 뒤를 잇게 하였으며 첫째인 맥스 와벅(Max Warburg)은 독일에
그대로 남아 화벤(I. G. Faben: Hoechst, Bayer, BASF의 전신)이란 화학회사의 대표가 되어 나치 독일의 재벌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1800년대 중반 로스차일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
되었다. 이 가문은 각 나라 중앙은행의 주도권뿐 아니라 산업 분야의 주도권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을 대표하는 ‘시프,
와벅, 쿤롭’가문, 미국 출신의 은행가를 대표하는 ‘모건, 록펠러, 올드리치’가문 등이 혼인관계를 맺어 금권주의 황족을 이루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에는 세실 로드(Cecil Rhodes)를 보내 다이아몬드 광을 위주로 막대한 돈과 정치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남미에는 미국 사업가들을 앞세워 각국의 중앙은행을 모두 차지하게 하였다. 나머지 지역은 자원을 공급하고 생산품을 소모하는 지역이 되었다.
미국의 남북전쟁(Civil War)은 독립 이후 가장 큰 시련이었다. 전쟁 전 미국북부 산업가들 은 남부에서 유럽의 값싼 물품을 수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라고 요구하였으며 미국 정부는 그 의견을 반영하였다. 그러자 수출에 큰 타격을 입게 된 유럽은 보복정책으로 미국 남부의 목화수입을 전면 중단했다. 그 결과 남부에서는 수입품의 가격인상에 따라 물가는 상승한 반면, 목화의 수출로가 막혀 수입은 줄게 되었다.
미국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괄목할만한 경제발전을 이루어 나라의
부흥을 즐기던 터였다. 그런 만큼 남부의 일반 대중들은 갑자기 실업자가
늘고 경제가 침체된 이유가 북부의 노예제 폐지 움직임 때문이라는 금융가들의 선전에 쉽게 동요되었다. 금융가 들은 그런 대중을 더욱 부추기고 전의(戰意)를 갖게 하여 자발적으로 군에 지원하도록 하였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 등 국제금융가 들은 링컨이 그들에게 돈을 빌리러 오는 것은 시간문제라 믿었으나 링컨 대통령은 개인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지 않고, 1861년 2월부터 그린백이란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하였다. 링컨의 그린백은 정부가 중앙은행을 소유하고 화폐를 찍어낸다는 것, 돈이 필요할 때에는 무이자로 정부자신이 돈을 만들어 쓰고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원금만 갚는 것이었다.”
링컨은 1864년 재당선되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지 41일 째인 1865년 4월 14일 국제 금융가들의 사주로 극장에서 저격당하였다. ‘링컨의 서거는 크리스텐돔(기독교 세상)의 커다란 재앙이다. 지금 미국에는 그가 짊어졌던 짐을 질만큼 위대한 사람이 없다. 음흉하고 사악한 흉계로 가득 찬 외국 은행가들이 미국을 송두리째 장악하고 미국을 조직적으로 부패시킬까 두렵다.’ 여하튼 그린백은 계속 통용되면서도 그 통화량이 늘어나지 않아 인플레 없이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연방지급준비제도
마침내 1913년 미국 헌법상 보장되는 개인의 사업, 이름하여 연준은(연방지급준비제도: Federal Reserve Bank)이라는 중앙은행이 탄생하였다. 인플레와 디플레, 통화량의 증가와 수축 등 실제로 미국국민의 경제수준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된 이 연준은의 실제 주인은 미국의 록펠러, 골드만삭스,
레먼 등 세 가문, 그리고 유럽의 로스차일드, 와벅, 라자드, 쿤롭, 시프 등
다섯 가문이었다.
미국은 l863년에 마지막으로 '헌법에 의한 정부의 돈(Constitutional Mone
y)'을 만든 이후 연준은의 국제금융가 들에게 미국의 경제 운명을, 아니
미국 국민들의 운명을 맡기게 된 것이다.
연준은 이사회는 이자율을 시계추처럼 약간씩 변동시켜 가면서 경기를
완만하게 올렸다 내렸다 하거나, 이자율을 크게 변화시켜 경기가 격렬하게 변동하도록 조작할 수 있었다. 또 현재의 연방지급준비법에 의하면 연준은이 10억 달러의 정부 공채를 샀다면 150억 달러의 새로운 여신을 만들 수 있으며, 중앙 정부를 포함한 지방 정부와 일반 사업체나 개인에게까지도
돈을 빌려줄 수 있다.
연준은이 진정 미국 정부의 것이라면 결국에는 미국 국민들이 부자가
되겠지만, 실질적으로 미국정부는 연준은의 돈과는 관계가 없다.
미국정부는 오히려 돈을 운영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허수아비 기관이 되어 버렸다.
연준은의 은행가들은 사실상 미국의 주인일 뿐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번 돈으로 석유 회사와 다국적 기업, 언론, 무기상, 마약상, 제약회사, 정치가, 정치 참모 등 자신들이 세계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사들이는 것이다.
한 예로 로스차일드와 록펠러 두 가문이 갖고 있는 은행, 석유 회사, 항공사 등 다국적 기업체의 수만도 엄청나다. 더욱이 이 두 가문이 소유한 체이스 맨해튼 은행은 단독으로 세계적인 경제 공황을 일으킬 수 있다.
1929년 대공황
공황조작의 첫 단계는 연준은이 통화량을 늘리는 것이다. 그래서 1921년
6월 317억 달러였던 통화량이 1929년 6월에는 457억 달러가 되어 44%나 늘어났다. 이렇게 돈이 넘쳐나자 돈벌기가 쉬어졌고 무엇이든 투자하는
대로 이익이 되어 돌아왔으며 특히 주식 매매가 가장 인기가 높아 주식을
사지않는 사람들은 바보취급을 당할 정도였다.
이는 바로 금융가 들이 제도적으로 주식을 사기 쉽도록 만들고 모든 언론
매체를 총동원하여 주식매매를 권장한 결과였다. ‘국제금융가 들과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 대부분의 주요 신문을 소유하고 칼럼니스트들까지
장악했다.
그래서 부패한 그들 일당이 보이지 않는 정부를 조직하여 자신들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는 공직자들을 순종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사회에서 매장시키고 있다.’
이윽고 1929년 10월 24일, 뉴욕의 큰 은행들은 산하 모든 브로커 기관들에게 ‘24시간 이내 지불조항’을 적용하여 융자해준 모든 콜 대출을 24시간
내에 전부 거둬들이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주식 브로커나 주식을 산 모든
사람들이 빚을 갚기 위해 금액에 관계없이 소유한 주식을 몽땅 급히 팔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결과 주식시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에 일어난 악명 높은 1929년의 위대한 몰락(The Great Crash 1929)이며, 그 여파로 전 세계가 공황에 휩싸이게 되었다.
공황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거래 은행으로 달려가, 있는 대로 돈을 찾아 증권 회사에 대출금을 갚으려 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거기에다가 당시 연준은은 무자비하게 통화량을 수축시켜 1929년 457억 달러에 달하던 통화량을 4년 후인 1933년에는 3백억 달러로 만들어 극심한 디플레를 조성하였다.
결국 전 미국에서 1만 6천개의 은행이 도산하고 기업체의 2/3가 파산하였다. 재산을 빼앗겨 가난해진 사람들은 늘고 공장의 생산량은 줄어들어 실업자 수는 급증하였다. 돈이 귀하니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도 어렵다.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르면 모든 물가는 내려가, 돈 있는 사람들은 헐값에 부동산이나 동산을 사들이게 된다.
바로 1929년 대공황은 이렇게 조작되어 실업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다니는 극심한 경제파탄현상을 보였다. 이 대공황으로 잃은 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소수의 부자들에게 들어갔다. 즉 주식파동의 내막을 미리 알고 있던 사람들은 미리 주식을 팔아 안전한 금을 사두었고, 공황이 일어난 다음에는 이전 가치의 불과 몇% 가격으로 자산을 긁어모았다. 어쩐지 우리나라의 IMF사태와 형태가 비슷하지 않은가?
IMF와 BIS 그리고 IBRD
1944년 미국 뉴햄프셔의 브레턴우즈에서 세계적인 경제회의가 열려 IMF(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와 BIS(the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국제결제은행)가 세워졌고, 다음해인 1945년에는 UN(국제연합)이란 세계 정부를 탄생시켰으며, 곧 이어서 국제사법재판소(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까지 설립되었다.
이후 미국의 돈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연준은처럼, IMF, BIS, 그리고 IBRD(the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세계은행)는 전 세계의 화폐공급을 조작하여 세계 경제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그들의 구미에 맞춰 민중들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으며 BIS는 미국의 금융 카르텔(International Banking Cartel)인 연준은 같은 조직들을 도와 미국의 경제와 이자율 등을 결정한다.
한 예로 1988년에 BIS는 전 세계 은행들이 1992년까지 자본금을 늘려 전체 융자액의 최소 8%를 지급 준비금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이들은 부분지준은 제도를 만끽하는 세계의 은행들에게 최소현금준비금과 마찬가지로 자본금과 예금 액수의 하한선을 8%로 잡은 것이다. 이러한
규칙을 정한 결과, 세계에서 가장 지급준비금이 낮았던 일본이 1988년에
가장 먼저 큰 시련을 겪었다.
일본은 거의 즉각적으로 경제 침체를 맞게 되어 1990년부터는 50%나 주식 시세가 낮아졌고, 부동산 가격도 60% 하향 조정되었다. 이를 만회하고자
일본 은행이 1.5%라는 낮은 이자로 (거의 무료로) 융자해 주기 시작했는데도 경제는 계속 침체되기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못사는 국가들이 빚에 쪼들려 곤란해지면 도와주는 기관이 IMF라고 믿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우선 한 국가가 파산지경에 이르면 IMF가 나타나서 구제해 줄 테니 사회에 대한 '구조조정프로그램(Structural Adjustment Program; SAP)'을 이행하라고 한다.
우선 기업체들은 종업원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줄이고 임금을 가능한 한 대폭 낮추며, 노동법을 개조하고, 부실기업들을 정리하라고 하며, 미화(달러)에 대한 환율저하와 무역자유화를 요구하고 정부의 사회복지사업을 대폭 줄이도록 요구한다.
그러면서 IMF는 파산 직전의 국가들에게 경제정책에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주지 않고 대신 몇몇 선진국에서 세금 명목으로 걷었다는 IMF의 자금으로 자기네에게 지고 있는 빚을 대신 갚도록 하여, 도움을 받는 국가의 사회
조건을 더욱 악화시킨다. 결국 이들이 해결책이라고 제시하는 구조조정,
환율조정, 이자율조정, 노동법개조 등을 거치면서 다시 돈을 더 빌려 상환이 완전히 불가능한 지경으로 빠뜨린다.
그런 후 IMF는 더욱 구체적으로 내정에 관여하여 식량공급을 줄여 국민들을 더욱 헐벗게 만들며, 보건복지예산을 줄여 국민 건강을 피폐하게 만든다. 더욱 교육비용을 삭감하여 교육수준이 땅에 떨어지게 한다.
국제 엘리트들의 이러한 소위 '스팅오퍼레이션(sting operation)'에 걸린
국가들은 공유(公有)건 사유(私有)건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외국인에게 팔려고 한다. 돈이 될만한 것은 대개 그 국가의 자주권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기간산업인데, 이들을 판다는 것은 나라를 외국인들에게 내주고 국민들을 하인으로 격하시키는 격이다.
그런데도 소위 지도자라고 하는 현자(賢者)들은 상품과 화폐가 자유로이
교류될 수 있도록 경제적 국경을 없애는 경제적 세계화만이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라고 강조한다. 국민들이 가난하여 배가 고프면
그만큼 통솔하기가 쉽고, 일단 가난하게 만들어 기근이나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인구 조정에도 도움이 된다.
세계 금융 카르텔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정상에는 ‘전시안(全視眼, All Seeing Eye)'에 해당하는 엘리트 13인이 있다. 그들은 데이비드 록펠러가 1972년 스위스 제네바에 조직해 놓은 ‘국제은행위원회(International Banking Commission : IBC)의 대표들이다.
이 위원회는 미국의 연준은, 영국의 영국은행,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의 중앙은행에서 각각 2명씩, 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에서 각각 1명씩 선출된 멤버로 되어있다.
또한 그들은 ‘4 I(Four-I)' 라고 부르는 정보처를 갖고 있다. 4 I의 원래 이름은 국제정보보급연구소로 로스차일드, 록펠러, 빌트, 골드벅 등의 가문이 조종하고 있으며, 스위스의 BIS와도 연결되어 있다. 엘리트들인 국제금융가 들은 세상의 돈을 소유하고 마음대로 조작하며, 여신을 통괄한다.
그 밑에는 삼위일체식의 IMF, BIS, 세계은행과 방계 조직인 OECD가 있으며, 그 산하에 연준은을 위시한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있다.
이렇게 우리의 경제가 빚을 조작하는 개인은행 중심으로 만들어진 경제체제에서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더 빚의 함정으로 빠지게 된다.
엘리트들은 러시아의 황정을 무너뜨리면서 제정 러시아의 금을 훔쳐갔고, 일본에서도 전후에 금을 훔쳐갔으며, 포트낙스 금괴 보관소에서도 금 등을 훔쳐갔다. 이렇게 모은 금이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부근의 멜리놈이라는 미 공군 기지에서 미군 2만 명의 보호하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전후에는 스위스 취리히 근처의 클라우텐 귀금속 보관소와 제네바 근처의 움브레아 귀금속 보관소, 빈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라인 공군 기지 등에 각각 나뉘어 보관되고 있는데, 이 금만도 4천 7백조 달러(4.7 Quadrillion)에 이른다.
아시아의 외환위기
금융계의 컴퓨터화로 이제는 돈 버는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다. 과거의 산업 의존형에서 탈피하여 국제 금융가 들은 국경의 구분 없이 세계 어느 곳이든 재빠르게 돈을 옮김으로써 엄청난 돈을 벌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제 3세계의 산업에 투자하는 돈이 점차 줄어들게 되었고, 은행들은 금융상품을 계속 만들어 투기를 하게 되었으며, 생산회사들도 상품 생산
보다는 부동산 같은 투기에 열중하게 되었다.
1975년 통계에 의하면 세계 환전의 20% 정도가 환투기고 나머지 80%가
산업에 투자되는 돈이었으나, 1997년의 통계에는 97.5%가 환투기고 2.5%가 산업을 위한 환전이었다.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아시아와의 무역
전쟁에서 미국은 참혹할 정도로 패배했다.
일본은 경제대국을 이룩한 미시 경제의 대표적 모델국이 되었다. 결국 무역 흑자로 넘쳐나는 일본의 자본이 온 미국을 휩쓸고 다녔다. 록펠러빌딩은 물론 미국의 상징인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까지 일본에 매각되고, 심지어는 할리우드까지 일본의 자본에 먹히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미국은 무역 전쟁으로는 도저히 값싼 노동력을 기초로 한 아시아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80년대의 엔고조작이 일본의 체질만 굳혀주었을 뿐이라는 사실도 알게된 후, 강력한 달러를 기초로 아시아의 가치있는 기업을 헐값으로 인수하는 것만이 아시아의 강병들을 자기들의 용병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1990년대 초 미국은 국제 금융가등 숨은 실력자들을 모아 강력한 달러를 만들기 위해 일단 주식 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합의를 도출한 후 주식시장에 계속 불을 지르게 하여 주식을 8년 사이에 10배가 뛰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넘쳐나는 달러를 쥔 헤지펀드들은 아시아의 환투기 장으로
역으로 몰려가 아시아의 가치 있는 기업들을 헐값에 인수했다.
이제 일본은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려 그 바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오랜 세월 동안 가난하게 살아온 한국은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에 군대를 보내면서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싸구려가 아닌 정상적인 한국산 상품으로 일본, 홍콩, 대만인 들과 함께 돈 많은 한국인의 인상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국이 부유해진 것일까?
한국인들이 머리가 좋고 열심히 일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한국인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누군가가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일 것이다. 일본을 비롯한 한국, 대만 등 아시아 국가들은
자원이 거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일단 생활
첫댓글 그 찬란했던 로즈챠일드가의 운명도 이젠 서쪽으로 기울어 질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 가문이 기울어 지려면 얼마나 걸릴까여.ㅎㅎ
2~5년정도면 부의 이동은 마무리 되겠지만 저들도 생각이 있다면 가상화폐쪽으로 가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