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신앙(대산교회)(일기) 23-34, 상황을 해석하는 시선
“사실, 지난주에 일이 좀 있었어요.”
목사님의 눈빛과 어조, 목소리에서 나오는 기운을 느낀다. 예감이 좋지 않다. 그래도 마주한다. 그래야 한다. 이 일을 하다 보면 감동 감사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김민정 씨가 갑자기 예배 시간에 문을 열고 나가더라는 것이다. 예배 중에 어떤 요청이 있으면 사모님께서 응대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마저도 충분하다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급히 따라가니 동네의 어느 어르신 댁에 들어가 종이와 볼펜을 찾았다고 한다. 집주인은 없었고, 마침 주말 맞아 친척 두 분이 놀러 왔다고 한다. 빈집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다. 집에 계시던 분들이 이전에도 김민정 씨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단다. 이 또한 다행이고 감사다.
“그랬군요. 당황스러우셨죠. 사모님께서 함께하며 살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침 집에 있던 친척이 김민정 씨를 알고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지 이해하고 볼펜 주고 나왔다고 해요.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웃어넘기셨다고 하더라고요.”
이어지는 이야기 또한 어려움에 관한 것이었다. 주일에 성도님들이 헌금한 것을 꺼내어 용돈을 달라고 한단다. 볼펜과 종이 못지않게 천 원은 당신에게 있어 소중한 것이라고 헤아린다. 눈에 보이는 것을 참는 것이 몹시 힘들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어느 부분 이해가 되었다. 교회에서 지금까지는 그저 천 원 쥐여 주고 말았는데 매주 이어지니 이 또한 도전이라 하셨다. 헌금의 의미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고 하셨다.
교회에서의 일을 김민정 씨가 지닌 문제로 다루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인사치레라도 힘드셨겠다거나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죄송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신 당사자를 더 이해하고 함께하는 과정이라 여기고 싶다. 두 달에 한 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만난다는 소식을 전했다. 진료를 동행하며 알게 된 것을 나눴다. 원하는 무언가를 볼 때, 그로 인해 어떤 생각이 들 때, 그것을 참는 것은 김민정 씨에게 있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래서 어떻게 도우려 하는지도 덧붙였다. 감정을 담지 않으려 하고, 당면한 순간에 당위를 덧붙이며 이러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뜻을 헤아리려 애쓰고, 도울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을 설명하고, 도울 수 있는 것에 집중해 정성껏 응대하려 한다고 했다. 뜻이 잘 전달되기를 기도하며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말씀드렸다.
이 이야기를 듣고 목사님께서 “그래서 함께 방법을 찾아 나가고 싶어요.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하셨다. 기존에 돕던 방법인 예배 전 생활비를 미리 따로 챙겨 오는 것보다는 교회 안에 김민정 씨 몫의 볼펜과 헌금을 따로 챙겨 두고 요청이 있을 때 도우면 어떨지 제안하셨다. 당신 것이라면 언제든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아니고, 어려울 것도 아닐 것 같다고 나눴다. 목사님께서 “그렇게 감당하면 될 것 같아요.” 하셨다. 사모님께서도 함께 돕고 싶다고 시간 내어 만나서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고 하셨단다. 어려움을 나눠주시고 궁리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어찌할 수 없다면 외면하라 했으나 주변에 피해 입힐 때, 그때는 아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상황을 해석하는 시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목사님의 대답과 방법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먼저 궁리하고 제안해 주시니 감사하다. 교회에서도 잘 응대하도록 노력하겠다 하시니 감사하다. 지역사회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약자를 품을 준비가 되어 있구나.
혼자만의 도전이라 생각했다. 김민정 씨를 돕는 직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설움이라 여겼다. 이해해 주시기 부탁드리는 것도 점점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해 보겠다는 마음을 놓았다지만 그래도 여기저기서 여전히 들려오는 이야기에 마냥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먼저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애써 누르고 있던 설움이 차올라 눈가가 붉어졌다. 애써 태연했다.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데 언제고 좋은 모습, 감동적인 이야기만 있을 수는 없다. 그것만이 삶은 아니라는 걸 우린 다 알고 있다. 어쩌면 서로의 가시와 서로의 모난 부분을 얼마나 감싸주고 묵묵히 감당하는가가 우리가 지닌 성숙함의 척도가 아닐까.
그날은, 태수 씨의 용모가 단정하지 않다고 사장님이 한마디 한 게 발단이었습니다. 사장님 말씀에 화가 났는지 미용실 물건을 발로 차고 던지고, 미용실 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사장님 만류에도 멈추지 않아 시설 직원이 가서 말리고 설득해서 진정되었습니다. 태수 씨는 분이 삭지 않았는지 다시 찾아가서 난리를 피웠습니다. 자기 옷을 뜯고 미용실 물건을 부수었습니다. 시설 직원이 가서 데려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물었더니, 씻으라는 말에 화가 나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미용실 직원으로서 용모를 단정히 하자고 사장님과 시설 직원이 종종 말했습니다. 그간 그 말이 스트레스였고 차곡차곡 쌓였던 모양입니다. 어찌할까요? 어떻게 수습할까요?
시설 입주자에게만 있는 특별한 상황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럴 수 있다며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내쳐질 수도 있습니다. 관계가 회복될 수도 있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내 처지에서 이해해 주기 바라며 분통을 터트릴 수도 있고, 그 사람 처지를 이해하며 후회하고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태수 씨도 이런 상황에 놓인 겁니다. 누군가에게 심판받거나 사례회의에 부쳐질 것이 아닙니다. 문제 행동으로 다룰 것도 아닙니다. 여느 사람처럼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하고 기뻐할 권리가 있습니다.
(중략)
좀 너그러우면 좋겠습니다. 행동 하나하나를 문제 삼아 ‘사례회의’ 테이블에 놀리면 당사자와 직원 모두 ‘문제’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문제’ 삼는 횟수만큼 ‘인정’하려고 노력하면 어떨까요? 문제 삼는다며, 이유가 뭔지 배경이 뭔지 환경은 어떤지 살피면 좋겠습니다. 개인의 문제로만 여기지 않고 환경을 살핍니다.
(중략)
울면 운다고 웃으면 웃는다며, 우울해 있으면 우울해 있다고 들떠 있으면 들떠 있다며 간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뭐랄까, 1년 365일 내내 이성적인 존재로 있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구도 내내 이성적인 존재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직원의 할 일이 많고 지원해야 할 입주자가 여럿이라 시간과 여건이 만만치 않죠. 그러니 지혜가 필요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지나친 감정이 일상이 된 입주자, 자기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 입주자를 돕고 싶다면,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공부하고 궁리해야 합니다. 입주자를 제대로 돕고 싶다면, ‘직원이(내가) 어떻게 해 보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입주자의 감정을 감정으로 맞서면 변화는 없습니다. 감정을 통제하거나 지도하는 것은 임시방편이며, 상황을 지속시키고 악화시킬 뿐입니다. 공부하고 궁리해야 합니다. 어떤 배경과 이유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월평빌라 이야기 2, 불안정할 권리」 부분 발췌
어울려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도전과 어려움이 있으나 그래도 함께하려는 다짐과 의지를 붙들고 궁리하는 중심에 목사님이 계셨고, 잘 응대하기 위한 방법을 먼저 제안해 주심에 한없이 감사했다.
문제가 아니라 감당할 일이라 생각하면 실제로 달라지는 것이 없더라도 모든 것이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보다 삶의 이런저런 순간들을 포용하려는 여유와 앞으로를 기대하는 기다림이 아닐까. 이 또한 시간이 흐르면 지금과는 또 다른 관점으로 해석될 것이다. 정겨운 우리네 삶과 사람살이 이야기로 풀어질 것이다. 그런 기대로 이 일을 마주한다.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당사자를 도우며 마주하는 어려움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활 그 한가운데 있다는 증거일 테니 이마저도 감사하자. 고립된 삶이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하며 살고 있기에 마주하게 되는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가 바라는 사회사업 제대로 하고 있기에 맞닥뜨릴 수 있는 복이라 여기자. 이 가운데서도 진정으로 감사할 것은 함께 감당해 보려는 이들이 김민정 씨의 생활에, 인간관계에 실제한다는 것이다.
이 글을 기록함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붙들고 씨름하기 위함이 아니다. 시설에서 일하는 사회사업가로서 입주자를 도우며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에 관하여 이것을 어떤 시선으로 보아야 하고, 둘레 사람들과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 알아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지역사회의 포용과 관용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어서 기록하는 것이다. 도전은 감추어진 축복이고, 위기는 또 다른 발견이자 기회이고, 벽이 되려 문을 여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는 인생의 신비를 배워 가고 있다.
2023년 7월 23일 일요일, 서지연
민정 씨 상황을 잘 설명해 줘서 감사하고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일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지연 선생님께서도 참 힘들었을 텐데 잘 설명하고 이해해 줘서 감사합니다. 신아름
대산교회 출석하던 초기, 이런 일이 반복되어 허운 목사님과 사모님과 의논하던 게 생각나네요. 그때는 문제 삼았던 것 같아요. 그사이 교회(지역사회)도 월평도 많이 성숙했다고 봅니다. 이런 일을 이렇게 풀어내다니, 놀랍고 고맙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힘일 수도. 목사님, 사모님, 서지연 선생님, 이 분들 덕분에! 감사합니다. 월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