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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 가문(The House of Rothschild)
로스차일드는 "붉은 방패"를 뜻하는 독일어 '춤 로텐 실트'(zum rothen Schild)를 영어식 발음으로 바꾼 것인데, "붉은 방패"라고 하는 그 뜻은 그들의 문장에서 따온 뜻이다. 고철 쓰레기를 팔던 천민 출신으로 19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이후 현재까지도 천문학적인 재산을 소유한 가문이다. 주된 사업 분야는 금융업이고, 그외 석유, 금, 레저, 와인, 광산업, 호텔 등 각종 분야에서 활동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떠오르게 된 사건들과 비밀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각종 음모론과 서브컬처에서는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등의 방법으로 비밀스럽게 세상을 지배하는 흑막으로 자주 지목받는다. 사실 이런 이미지가 생긴 이유는 현재까지도 미국 내에서 정치, 금융 등 큰 영향이 있고, 중요한 것들은 유대인들과 유대자본이 모두 한손에 쥐고 있으며, 실제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적어도 근대 초까지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밸푸어 선언이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와 로스차일드 가문 사이의 뒷거래로 성사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규모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금융 감독 시스템은 전례 없이 정교해지고 있다. 록펠러 가문이 쪼개지면서 과거의 영향을 상실하였듯 로스차일드 가문도 긴 세월동안 대규모 전쟁과 재산 분할 등으로 그 영향력이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2019년 1월 25일에 블룸버그 통신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오스트리아에 있던 토지를 프란츠호른에 매각했다고 보도했다.
3. 재산
로스차일드 가문 재산 규모는 관련 기업들이 상장을 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무엇보다 19세기 후반부터 가문에서 소유했던 토지와 성들, 그리고 다수의 미술 작품들을 팔았기 때문에 재산을 측정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대중의 눈을 피해 사업의 규모를 차근차근 축소해온 정황을 고려하면 과거 전성기에 비해 재산의 규모가 줄어든 건 확실해 보인다. 무엇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7세기부터 시작해서 내려온 가문이기 때문에 재산이 100명이 넘는 후손들 사이에 나뉘었고, 각 국가마다 당주가 따로 존재한다. 여러 가문들 중 현재 가장 영향력이 강한 곳은 영국과 프랑스로, 영국 지부의 당주였던 에블린 드 로트실드(Evelyn de Rothschild)의 사유 재산은 2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에서는 미국 지부의 사유재산이 150억 달러(약 18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는데, 많긴 하지만 마치 세계 경제의 숨겨진 지배자처럼 알려진 세간의 이미지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액수다. 물론 음모론자 등은 포보스지의 발표를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다. 참고로 페이스북 회장 마크 저커버그의 2017년 재산이 70조 원 가량이었고, 세계 최고의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우드 왕가의 재산이 약 1.5조 달러, 그리고 아부다비 왕가의 재산을 1조 달러 가량으로 추정한다. 외신에서는 로스차일드 가문 전체의 재산을 3500억 달러(약 400조 원)에서 2조 달러(약 2300조 원)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모든 로스차일드가 성공한 것은 아니다. 나폴리의 로스차일드는 이탈리아 통일 이후 쇠락하다 1920년대 은행업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의 로스차일드는 철도 산업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안슐루스 당시 나치에 의해 재산이 몰수당하고 당주 루이 나탈니엘 폰 로트실트 남작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들이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1999년에 돌려받은 미술품의 가치만 1억 달러 이상. 못 돌려받은 현금과 현물이 얼마일지는(...). 또한 프랑스의 로스차일드의 은행업은 1981년 미테랑 정부의 은행 국유화로 큰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영국의 로스차일드 가문과 다시 합류하면서 프라이빗 뱅킹에 눈을 돌렸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848년 혁명, 1930년대 대공황, 1940년대 나치즘이 전 유럽의 로스차일드에게 큰 타격이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야말로 로스차일드의 원수 중의 원수인 셈.
비밀주의
가문의 모든 요직은 반드시 가문 내부에서만 맡고, 철저한 기밀 유지가 특징.
그러나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원이 아닌 CEO가 임명되기도 하는 등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역사
유대인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공작이면서, 프랑스의 유력가이며, 영국의 세습남작인 매우 특이한 가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미지와 달리 본래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고물상을 하던 가문이었다.
원래 유대인들은 유럽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금융업 뿐만 아니라 고물상(물론 꽤 값진 물건을 거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등을 했다. 고물상의 경우는 물건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주고 본 가치에 비하면 똥값이지만 여전히 막대한 액수에 해당되는 금액을 부르는 이미지가 있지만 유대인들은 우리가 지금 아는 그런 이미지와 달리 겸손하고 정직하며 신뢰할 수 있는 상인으로써 활동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 살 돈을 벌긴 커녕 지나가던 귀족에게 밉보여 감옥행 혹은 추방이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부르주아이긴 했지만 바로 이런 흔한 유대인 상인중 하나에 불과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진짜 "Great House"라는 명칭을 쓸만한 수준으로 격상된 것은 18세기 중반 마이어 로트쉴트가 환전상을 하고 프로이센 왕과 거래하게 되면서 은행 가문이 된 이후부터이다. 여기에 한가지 일화가 있는데, 마이어의 일솜씨를 마음에 들어한 프로이센 왕은 그에게 장부관리 업무를 맡겼다. 그러나 1806년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이 입성하자 프로이센 왕은 국외로 도피했다. 마이어는 자신의 가산이 프랑스에 의해 몰수당하면서도 '왕의 재산은 철저히 숨겨놓았고', 훗날 복귀한 프로이센 왕은 동전 한닢까지 빼먹지 않고 보관해 놨던 마이어의 진실성에 감동하여 가문의 재산관리자로 임명한다.
마이어 로트쉴트는 다섯 아들들을 각각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스트리아 빈, 이탈리아 나폴리로 보내 국제적인 금융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것이 지나가던 유대인 가문 R 따위에 불과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아 세계의 금권을 재패할 수 있게끔 한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로스차일드 가문은 "뭔가 이상하게 유럽 어딜가도 등장하는 좀 특이한 유대인 가문 R" 에 불과했다. 당대의 최고 금권은 베어링 가문, 베어링을 대표주자로 하는 영국 토호들에 비하면 로스차일드는 여전히 금수저 반열에도 못 들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 때에 와서는 오히려 잠깐 날아오르나 했더니 지하실로 처박힐 뻔했다. 나폴레옹 전쟁때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한 것을 보고 영국 금을 밀수해서 파는 사업을 했는데 나폴레옹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다시 망하면서 파산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이때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가문의 운명을 건 승부수를 띄웠는데, 좀 늦었지만 나폴레옹의 몰락이 확실하다 판단하고, (미래의) 승전국들의 국채를 가문의 자본을 모조리 끌어모아 싹 매수해버린 것이다. 이게 성공하면서 로스차일드는 간신히 파산 위기를 넘기고 이전보다 훨씬 많은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된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여전히 뭔가 좀 성공한 로스머시기하는 유대인 가문 수준에 불과했다.
진정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흥은 왕의 재산을 철저히 지켜낸 진실성을 또 다시 빛낸 사건으로, 신성로마제국 해체후 망명한 한 귀족 헤센가의 재산을 철저히 보호했다. 이로인해 큰 신뢰를 얻어 이전처럼 재산 관리를 전적으로 위임 받았다. 그리고 예전부터 그러했듯 재산을 한 번도 까먹은 적이 없으며 제대로 불려서 주인에게 돌려줬다.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로 세력을 불리면서도 그 재산을 절대로 까먹지 않기 위해 뼈저리게 노력했으며, 여러 유력 가문과 경쟁해야 했지만 기어코 성공하여 제대로 재산을 불려서 되돌려줬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근대사의 대부분을 동인도 회사로 대표되는 영국내 타 세력과 싸우는 것으로 보냈다. 거기다가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 전역에 퍼져있었고 큰 분파를 봐도 영국과 프랑스로 나뉘어진 상당히 희한한 형태였기 때문에 각 가문 분파들은 각 분파들의 현실에 맞춰 처신해야했고 그러다보니 분파별로 정책이 충돌하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를 찾아볼때 매우 햇갈리기 쉬운 이유가 이것. 로스차일드 가문이 진정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던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세포이 항쟁으로 인한 동인도 회사 해체 때 정도는 가야한다.
이후 런던이 국제적인 금융 중심지가 되고, 베어링 가문으로 대표되는 영국 토호들의 구심점이었던 동인도 회사를 끝내 격파하고, 영국과 프랑스 양쪽 모두에서 세습가능한 귀족 작위까지 받으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되었다.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스식으로 '로쉴트'라 표기하는 경우가 많고, 와인 사업으로 현재도 유명하다.
체 게바라는 반자본주의적, 반미주의적인 그의 사상답게 로스차일드 가문을 악마라 칭했다고 전해진다.(...)
긴 시간을 동인도 회사 세력과의 경쟁으로 보낸 탓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과 일본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상당히 많은 문제점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이후 록펠러 가문 대두와 함께 금본위주의 체제의 붕괴로 가문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역설적으로 세계의 금권을 장악한 전성기때, 과거의 교훈을 잊은 당대 당주 빅터 로스차일드의 독단적 행동이 이 쇠퇴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다만, 카길이나 코크 인더스트리처럼 비상장 기업임에도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존재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들이 과연 쇠퇴했는지는 아직도 알 길이 없다. 세계 각지의 광산이나 유전 등을 비공개기업으로 돌려서 운영할 수도 있고, 로스차일드의 총본부나 마찬가지인 영국 런던에는 시티 오브 런던이라는 치외법권 지대가 있어서 영국 정부조차도 세무조사를 할 수 없기 때문.
2019년 1월 25일, 오스트리아의 로스차일드 가문은 로워 오스트리아(Lower Australia) 지역에 약 7천 헥타르(1만7천300 에이커)의 숲을 소유하고 있는 2개의 신탁을 현지 주요 제지회사 '프린츠호른'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200년에 걸친 오스트리아 내 도약과 추락, 도산, 전쟁 등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워털루 전투 음모론
나폴레옹 전쟁의 워털루 전투 결과에 대해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패밀리 네트워크를 통해 정부 전령보다도 빠르게 영국군의 승리 소식을 입수하여 정보를 교란해 시장에서 이득을 취했다"는 음모론이 있다. 대중에는 흔히 로스차일드가 영국 귀족들한테서 주식을 사다가 떼돈 벌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로스차일드를 연구했던 하버드의 교수 니얼 퍼거슨 같은 저명한 학자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
원래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이 내려진 사이 영국의 금을 프랑스로 밀수출하는 일을 해서 이득을 취했고,(프랑스로써도 영국의 금이 빠져나가면 이득이라 생각해서 막지 않은 모양) 나폴레옹 전쟁이 터진 이후로는 패밀리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금을 영국군의 군자금으로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이후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 잘못 예상하였다.
그리고 금을 대량으로 매입하였는데, 워털루 전투로 인해 전쟁이 금방 끝나버리자 금값 폭락을 통해 손해를 크게 볼 위기에 처했고, 이때 로스차일드 가문이 아주 제대로 망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정도였다.
이때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영국 국채를 떼거지로 매입하는 최후의 승부수를 띄웠는데, 전후 영국 정부 차입이 감소해서 국채가 폭등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었다. 이 예상은 다행히도(?) 들어맞아 채권 가격이 폭등하여, 40% 쯤 상승한 고점에서 채권을 매각해서 현재 가치로 6억 파운드를 넘는 거액을 벌어 위기를 모면했다.
애초에 로스차일드는 정보를 조작한 적도 없고, 조작은 커녕 예상을 잘못해서 금으로 돈 벌려다가 엘바 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이 다시 빠르게 망해버린 바람에 가문 전체가 망할 뻔했다. 결국 음모 같은 것은 없었고, 예측 가능한 경제적 흐름을 절묘하게, 그것도 뒷북으로 (...) 이용하였을 뿐이라는 것이 음모론에 대한 퍼거슨의 반박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정보 조작을 했다는 "주작"을 벌인 당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음모론도 있다. (...) 음모론에 대한 음모론인 셈. 이 경우 나치 독일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깎아내리려는데 국채 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아 주식으로 슬쩍 바꿔놓은 것이라 주장한다.
어쨌든 로스차일드 가문 대박 사건은 여러모로 제대로 잘못 알려져 있어서, 주식이 아니라 국채였음을 아는 사람들도 로스차일드 가문이 정보 조작을 했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근현대 역사 내내 베어링 가문으로 대표되는 동인도 회사 투자 세력과 대립했고,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동인도 회사가 공중분해 되기 전 까지는 대중이 흔히 상상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은 커녕 영국 내부 유력 세력들, 특히 베어링의 연고지인 스코틀랜드 쪽 인사들과 권력투쟁을 하던 판이다.
Fed(연방준비제도) 음모론
로스차일드 가문이 미국 달러를 생산하는 것에 개입하며 아직도 세계 경제와 정치를 좌지우지한다는 음모론이 있다. "1971년 닉슨 대통령 금태환 제도 폐지를 혜지하면서 기축통화는 달러가 되었는데, 이 달러를 생성하는 것이 바로 FRB(Federal Reserve Board/Banks)이다. 이곳은 미국의 중앙은행이지만 민간은행이고, 이 민간은행의 최대 주주들이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매우 우호적인 기업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미국 대통령도 어쩌질 못하며, JFK 대통령이 이를 바로잡으려다 암살당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초기 FRB의 주주(총20만)
록펠러와 쿤롭의 뉴욕내셔널시티은행 3만
폴와버그의 뉴욕내셔널상업은행 2만1천
JP의 퍼스트내셔널은행 1만5천
로스차일드의 하노버은행(1만2천),체이스은행(6천),케미컬은행(6천) 총 2만4천
후에 이들 은행의 연준 지분은 조정되어 53%에 이르게 되고 현재는 약 70%대로 추정.
에이브러햄 링컨 - 중앙은행 시스템을 거부하고 그린백을 발행. 1865년 4월 15일 암살.
앤드루 잭슨 - "내가 은행을 죽였어"라는 유언을 남긴 대통령, 중앙은행 시스템을 거부. 암살시도가 있었으나 암살자의 권총 2발 모두 불발로 겨우 암살당하지 않는다.
존 F. 케네디 - FED를 배제하고 재무부에 화폐발행권을 넘겨줌. 1963년 11월 22일 암살.
그렇지만, 은행의 주주들이라고 해도 배당금은 화폐발행액수의 겨우 3퍼센트에 불과하며 97퍼센트의 수익은 미국 재무부로 환수된다. 때문에 경제위기 때처럼 화폐를 마구 찍어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큰 수익은 얻지 못한다는 것.
하지만 달러발행 외에 금리조정, 양적완화등을 통한 통화팽창 등 FRB의 권한을 통해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의 시기를 정할수 있기에 투자할 시기를 정하기에는 용이할 것이다.
비밀결사
음모론의 대부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에 엮이지 않으면 섭섭할지경. 비밀결사 음모론이 다 그렇듯 중구난방 날뛰는데, 비밀결사의 창설자이자 지도부라는 주장, 지도부의 일부라는 주장, 비밀결사의 하수인이라는 주장등 다양한 주장이 혼재되어있다.
하지만 정작 로스차일드 가문과 프리메이슨의 관계는 영 좋지 않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숙적이었던 베어링 가문의 연고지가 스코틀랜드 이고 베어링 파벌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것이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이다. (...) 일루미나티의 경우 프랑스 로스차일드 세력과 관계가 있긴 하나 이것 또한 여러 지역의 서로 다른 프리메이슨 세력들과 주변국 세력가들과 이해관계가 꼬여있어 딱히 로스차일드 가문에 일루미나티와 친했던 것도 아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본래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의 자금을 철저히 지킨 충의를 인정받아 출세하여 유럽 전역에 진출, 크게는 영국과 프랑스 분파로 구성되어있었기 때문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런 저런 세력과 조직에 어설프게 얽었다간 커다란 모순점이 생겨 뒤통수를 얻어맞기 쉽다.
그리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동인도 회사가 세포이 항쟁으로 완전히 망하고, 대중국 아편무역을 사순 가문이 독점하면서 경쟁 세력의 구심점이 깨지기 전까지는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고, 이후 브레튼우드 체제로 대표되는 금본위주의를 밀다가, 엄청난 역풍을 맞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누린 황금기는 정말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