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군 안의면에는 소갈비찜 식당이 일고여덟 곳 있다. 이 식당이 내는 음식을 '안의 갈비찜'이라 한다. '안의 갈비찜'이라 간판을 단 식당도 전국에 많다. 안의 것이라 하여도 여느 갈비찜과 맛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간장을 기본 양념으로 소갈비를 조리듯 푹 삶고 채소와 버섯 따위를 더한 음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안의 갈비찜에 특별난 무엇이 담겨 있는 듯이 여긴다. 갈비찜을 먹기보다 그 갈비찜에 담긴 '스토리'를 먹는 것이다. 안의 갈비찜은 간장을 기본 양념으로 조리듯 삶는 음식이다. 당근, 양파, 버섯, 파 등이 곁들여진다. 푹 삶아야 하는 소갈비 한반도에서 소를 키우게 된 것은 신석기시대 농경의 시작과 함께였을 것이다.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경남 김해의 유적지에서 소뼈가 나왔으며, [삼국지] 동이전에 부여의 관직명으로 우가, 마가, 저가, 견사 등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전문적 소 사육도 일찌감치 발달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니, 소고기를 오랜 옛날부터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먹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한반도의 소는 근대 이전까지는 일소였기 때문이다. 논밭을 갈아야 하는 ‘일꾼’이었으니 일을 할 수 있는 소는 잡아 먹지 않았을 것이다. 늙거나 병들어 죽은 소는 그게 일소였다고 하더라도 안 먹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굽거나 삶았을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콩으로 만든 장이 있었으니 그 장을 더한 소고기 요리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갈비찜은 먼 선사시대부터 있었던 음식일 수 있다. 그 양념이 다를 뿐 소갈비를 푹 삶는 음식은 세계 여러 민족에게 있다. 소갈비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푹 삶는다'는 조리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소갈비의 특징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의 상업적 축산이 발달하기 이전 소고기는 대체로 질겼다. 방목을 하고 사육 기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덜 질긴 안심이나 등심 부위는 간단히 구워 먹을 수 있었지만, 그 외 부위를 조리하는 데에는 꽤 많은 신경을 써야 했을 것이다.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는 푹 삶는 방법이 있는데, 그 조리법도 모든 부위에 다 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방질이 없고 가는 섬유조직을 가진 살은 퍽퍽해질 수 있다. 갈비는 운동을 많이 하고 늙은 소의 것이라 하여도 지방질이 웬만큼 붙어 있다. 또 살의 결이 큼직하다. 그러니 푹 삶으면 부드럽다. 살을 얇게 발라 칼집을 내어 굽는 것이 아니면, 푹 삶는 방법이 갈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조리법인 것이다. 특별날 것도 없는 갈비찜이지만 갈비찜은 한반도 전역에서 먹었다. 지자체 단위로 자신들의 향토음식이라고 정리해놓은 자료를 보면 특정 지역의 음식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지역에서 이 갈비찜을 향토음식이라고 내놓는다. 조리법도 비슷하다. 또, 제사 음식으로 이 갈비찜은 흔하다. 제사 음식으로서의 갈비찜도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안의 갈비찜도 전국의 그 여러 갈비찜 중의 하나이다. 이 특별날 것 없는 안의 갈비찜을 사람들은 특별나게 먹는다. 관광철이면 안의면의 갈비집 앞에는 이를 먹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안의를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하여도 섭섭할 것은 없다. 전국에 안의 갈비찜을 낸다는 식당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안의는 지금은 면 단위의 작은 지역이지만 조선에서는 제법 큰 행정구역이었다. 거창의 일부까지 포함하여 안의현이라 하였다. 북쪽으로는 덕유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지리산을 두고 있는데, 서쪽으로는 전북 장수, 임실, 남원으로 통하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합천, 산청, 진주로 통한다. 영남 서북부의 경계이면서 교통 중심지 노릇을 하였을 것이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안의에는 오일장이 제법 크게 섰다. 그 오일장 한 켠에 우시장도 있었다. 안의 안에 도축장도 있었다. 소고기를 많이 먹을 수 있는 환경으로 보이지만, 소고기 음식점이 흔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농촌에서 소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명절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안의에는 1967년에 개업했다는 갈비찜집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 당시 이 식당이 유일한 갈비찜집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2곳의 식당에서 갈비탕과 갈비찜을 내었다. 장소는 안의 시외버스 터미널 인근이었다. '안의 갈비찜'이라는 말도 없었다. 갈비탕이 더 많이 팔렸다. 안의 사람들은 갈비탕 안의 갈비찜이 외식 사장에서 급부상을 한 것은 1990년대 말이다. 도시 곳곳에 '안의 갈비찜'이란 간판이 붙었다. 그런데, 그 소갈비는 대부분 수입 갈비였다. 당시 IMF 구제금융 상황에서 소비자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틈을 타 수입 소고기가 급격하게 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 수입 소고기 중에 갈비살이 특히 인기가 있었다. LA갈비는 가정용으로, 갈비살구이는 식당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여기에 갈비찜이 외식 아이템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다. 수입 갈비는 한우에 비해 기름기가 적고 특유의 누린내가 짙다. 그래서 외식업체들은 갈비찜에 고추장을 더하였다. 안의 갈비찜도 고추장으로 버무려져 나왔다. 안의에는 없는 갈비찜이었으나 도시 소비자는 여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수입 갈비이기는 하지만, '안의'라는 시골의 지명이 붙었으니 향토성 짙은 어떤 음식으로 여기고 이를 즐겁게 먹었다. 이미지 목록 안의면에는 덕유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물이 흐르고, 그 천변에 광풍루라는 조선의 누각이 있다. 그 누각 뒤로 갈비찜집이 여럿 있다. | 안의 갈비찜 식당에는 갈비탕도 있다. 안의 사람들은 이 갈비탕을 더 많이 먹는다. | 도시에서의 안의 갈비찜 붐이 역으로 안의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 안의에서 갈비찜이 유명하게 된 스토리가 필요하였다. 안의에 우시장이 있었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또, 안의에 양반이 많이 살아 그 갈비찜에 조선의 양반문화가 곁들여 있는 듯이 꾸몄다. 그 스토리 중의 백미는 거창 군수(부군수라는 말도 있다) 퇴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30여 년 전 거창 군수가 안의의 갈비찜 맛에 반하여 매일같이 안의를 들락거리다가 거창군민들이 들고일어나 그를 쫓아냈다는 일화이다. 거창 식당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이다. 이 일은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어찌 되었든 안의 갈비찜이 맛있다는 증거로 이 말은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안의 사람들이 갈비찜 먹는 일은 많지 않다.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다. 특별히 어느 식당의 것이 맛있다 여기지도 않는다. 안의면사무소 등 여러 곳에서 맛있는 식당을 확인하려 하였으나 갈비찜 그 자체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격이 저렴한 갈비탕은 자주 먹는다고 하였다. 식당들도 안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보다는 외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에 더 집중을 하고 있었다. 점심 먹을 때인데도 식당들은 두루 한가하였다. 겨울이라서 그렇지 여름이면 어느 집이든 줄을 서야 한다고 하였다. 여름이면 자동차로 면소재지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용추계곡에 사람들이 가득하고, 이들이 안의 갈비찜의 주요 고객이 되는 것이다
. 야ㅣ곱ㅣ의ㅣ우ㅣ물ㅣ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