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현감으로 있을때 이미 고인이 된 두형들의 자녀들을 데리고 살게 되었는데, 거느리는 식솔들이 많으니 그만큼 공유물을 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들이 많자)
바다로 침입하는 왜적을 저지하는 데는 수군을 따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수군이나 육군은 그 어느 쪽도 없앨 수 없습니다.
(당시 왜구의 침입전에 갈팡질팡한 조정에 아예 수군을 없애자는 의견이 나오자)
자기 한 몸만 살찔 일을 하고, 이런 일은 돌아보지 않으니 장차의 일도 가히 짐작된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이순신이 나태한 관할 장수들을 보며)
배들을 정돈하고 무기들을 엄히 갖추는 한편, 각처의 망봉의 꼭대기에 망장을
파견하여 멀지 적선을 살피고 즉시 보고하라!
(1594년 3월 10일 당항포해전의 승리를 보고하는 장계에)
무릇 살피고 망보는 일들을 각별히 단속하고, 남아 있는 전쟁 기구와 여러 가지
비품을 아울러 더욱 철저히 정비하여 사변에 대비하도록 하라.
(1592년 4월 16일 [사변에 대비하는 일을 아뢴 장계])
우리가 각각 책임을 맡은 경게가 있는데, 명령이 아니고서 어떻게 임의로
경계를 넘을 수 있겟는가?
(경상우수사 원균이 그의 군관 이영남으로 하여금 원군을 청하자)
『공께서는 임금의 명령을 받아 수군절돠가 되었는데, 이제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간다면 뒷날 조정에서 문죄하게 될 때에 무엇으로써 해명하겠습니까?
전라도에 구원병을 청하여 적과 더불어 한 번 싸우는 것만도 못합니다.
이기지 못하면 그런 뒤에 달아나도 늦지 않습니다.』
-옥포만호 이운룡과 이영남이 원균에게 구원을 요청하라고 간곡히 청하는 글-
적의 기세가 마구 뻗쳐서 국가가 위급한 이 때에 어찌 다른 도의 장수라고
핑계하고서 물러나 제 경계만 지키고 있을 것이냐! 내가 물어본 것은 우선
여러 장수들의 의견을 들어 보려고 시험삼아 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나가서 싸우다가 죽는 것 밖에 없다. 감히 반대하는자가
있다면 목을 베리라!
(결국 경사우수영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이며)
-당시 원균의 구원요청에 대한 좌수영 장수들의 반응
낙안군수 신호: 본도를 수비하는 것이 옳고, 경상도 등지의 출전은 우리책임이
아닙니다.
군관 송희립: 많은 적들이 국경을 치고 들어와 그 형세가 마구 뻗쳤는데, 가만히
않아서 외로운 성만 지킨다고 혼자 보전될 리 없으니, 나가 싸우는
것만 못합니다. 그래서 다행히 이기면 적들의 기운이 꺾일것이고,
불행히 전쟁에서 죽는대도 신하된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녹도만호 정운: 신하로서 평소에 국은 입고 국록을 먹다가 이런 때에 죽지 않고서
어떻게 감히 앉아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이오!
적의 세력이 이처럼 확대되어 큰 진영을 연이어 함락하고 또 육지 안으로 침범한다고 하 는 바, 몹시 원통하고 울적하며 쓸개가 찢어지는 듯하여 아뢰올 바를 알지 못합니다.
신하로서 누구나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라의 수치를 씻기를 원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같이 출전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엎드려 기다리오며, 소속 수군과 각 관 포에 전선을 정비하여 주장의 명령을 기다리라고 공문을 급히 돌렸습니다.
(1592년 4월 27일의 장계에서)
한 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 범의 굴로 바로 두들겨 요망한 적들을 소탕하여 나라의
수치를 만 분의 일이라도 씻으려 하는 바, 성공하고 실패하고,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제 가 미리 생각할 바 아닌 것임을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경상도로 출전 지원 나간다는 의지가 담긴 1592년 4월 30일 「구원하려고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
모두 격분하여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니 과연 의사들이라 하겠다.
(경상도로 출전계획을 잡은후, 방답첨사 이순신, 녹도만호 정운, 흥양현감 배흥립등이
목숨을 걸고라도 싸워야 한다며 분격하자)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1952년 5월 7일 경상도로 출전, 처음 전개한 옥포해전을 치르면서)
적이 만일 바다로 본도(전라도)를 침범해 온다면, 제가 해전으로써 죽음을
결단하고 담당하려니와, 육지로 침범해 오면 본도의 장수들이 전마 하나없이
대응할 도리가 없사오니, 저의 생각으로는 돌산도의 백야곳과 흥양의 도양장의
목마중에서 전쟁에 쓸 만한 말을 쓴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옥포왜병장)
적병을 사살만 하라! 전선은 깨뜨리기만 하라! 힘써 싸우는 여부는 내가 직접
눈으로 보는 바가 아니냐!
(사천.당포.당황포 해전에서, 여러 장수들이 적의 수습을 배는것으로 전공을 올리려고 하 는 것을 보며, 왜적도 사람인데 이미 죽은 사람의 목까지 배어버리는것은 옳지 않다고)
한 번 승첩하였다 하여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위무하고 전선을 다시 정비해 두었다가
변보를 듣는 즉시로 출전하여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도록 하라!
(1592년 6월 14일 당황포 승첩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은 삼가 적을 쳐서 무찌른 일을 아룁니다.
(장군께서 승첩의 장계를 올릴때 주로 쓰던 형식이다.)
저는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함을 만들었는데..
적선이 수백 척이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1592년 6월 14일 당포왜병장)
지금 상감께서 용만(의주)에 파천해 가 게신데, 저 기성(평양)에 있는 적이
만일 서쪽으로 쳐들어 가면, 임금의 수레가 장차 바다(압록강을 말함)을 건너서게 될 것 이다. 그러면 내 직책으로서 마땅히 배를 가지고 바다로 올라가 그 수레를 모셔야 할 것 이다. 그 때 하늘이 만일 저 중국을 망하게 하지 않는다면 임금과 신하가 함께 우리나라 안에서 죽는 것이 옳지 않느냐? 더구나 내가 죽지 않는 동안에는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할 것이다.
(전라도 순찰사에게, 여도,사도,발포,녹도,등에 쌀 1300섬을 쌓아두라고 공문을 보내자, 어떤이가 그 쌀을 무엇에 쓸거냐며 묻자)
어허, 인생이란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나니, 사람으로서 한 번 죽는 것은 진실로 아까울게 없건마는, 오직 그대 죽음에 마음 아픈 까닭은, 나라가 불행하여 섬오랑캐 쳐들어와 영남의 여러 성들 바람 앞에 무너지고, 몰아치는 그들 앞에 어디고 거침없이 우리 서울 하루저녁에 적의 소굴 이루도 다. 천리 관서로 님의 수레 옮 기시고, 북쪽 하늘 바라볼제 간담이 찢기건만, 슬프다! 둔한 재주 적을 칠 길 없을 적에 그대와 함께 의논하자 해를 보듯 밝았도다.
계획을 세우고서 배를 이어 나갈 적에 죽음 무릅쓰고 앞장서서 나가더니, 왜적들 수백 명이 한꺼번에 피 흘리며 검은 연기 근심 구름 동쪽 하늘 덮었도다.
네 번이나 이긴 싸움 그 누구 공로런고! 종사를 회복함도 날 받을만 하옵더니, 어찌 뜻 햇으랴. 하늘이 돕지 않아 탄환에 맞을 줄을. 저 푸른 하늘이여, 알지 못할 일이로다!
돌아올 제 다시 싸워 원가 갚자 맹세터니 날은 어둡고 바람조차 고르잖아 소원을 못 이 루었으니, 평생에 통분함이 이 위에 더할쏘냐! 여기까지 쓰고 나니 살 에이듯 아프구나! 믿느니 그대더니 인제는 어이 할고! 진중의 모든 장수 원통히도 여기지만 늙으신 저 어 버이 그 누가 모시리오! 황천까지 미친 원한 눈을 언제 감을런고! 어허 슬프도다!
그 재주 다 못 펴고 덕은 높되 지위 낮고, 나라는 불행, 군사 뱅석 복이 없고, 그대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거니, 나라 위해 던진 그 몸 죽어도 살았도다. 슬프다! 이 세상에 누가 속 알아 주리. 극진한 정성으로 한잔 술을 바치노라.
어허! 슬프도다!
(임진왜란 해전 초기에 네번의 대첩에 그 공로가 컸던 녹도만호 정운 장군이 부산포 해 전에서 전사한것을 너무나도 애통한 나머지 제문을 써서 위로하시며.)
(정운은 꼿꼿한 사상과 정의로 일관된 50년의 일생을 사신분이며, 정충보국을 칼로 새겨 살았을 뿐만 아니라 물러나 욕되게 사는 것보다 나아가 영광스럽게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곤 하셨다. 그 강직한 성겨과 청렴한 성품때문에 번번히 파직당하고 했다가 녹도만 호로서 충무공이 승첩하시는데 공이 컸으며, 평소에 올바르고 참된것을 따르며, 싸움에 있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충무공과 일치하므로 공의 동지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분이다)
적을 업신여기면 반드시 패하는 것이 원칙이다.
(안골포와 제포에 정박해 있는 왜적들을 수륙으로 동시에 공격하기로 하고
작전을 짜고 시도하였다. 일본 수군들은 조선 군사가 수륙으로 공격을 해 오니
겁을 내고 울부짖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떄 이응개와 이경집 등이 이긴가운데 더하여 서로 돌진하며 적선을 쳐부수고는 배를 돌리다가 두배가 충돌하여 그만 전복되자. 이에 이순신은 전투의 책임을 진 작전지휘관 으로서 4월 6일에 사나이 답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신이 재주도 없이 무거운 소임을 외람되게 맡아 밤낮으로 근심하여 조그마한
공로라도 원수를 갚고자 했더니, 작년 여름 가을에 흉적을 쳐부순 터라 군사들은 번 번이 이겼으니, 교만한 생각이 날로 더하여 서로 앞 다투어 돌격하면서 그저 남에게 뒤떨어질까 걱정하므로, 항상 신은'적을 업신여기면 반드시 패한다'는 이치를 들어가 며, 두번 세번 당부했건만, 오히려 경계가 부족하여... 지휘하는 것이 방략에 어긋났기 때문에... 죄 주시기 기다립니다』
이런 병들고 굶주린 군졸을 거느리고서는 도망가는 적들을 막고 섬멸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번차례로 돌아가 농사짓게 하며, 겸하여 병든 군사를 간호하고 군량을 준비하고 전선을 정비하면서... 기회를 타서 전쟁에 나가도록 약속하겠습니다.
(1593년 4월 6일 웅포해전 결과를 써 올린 장계에서)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 홀로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에 닭이 울어서야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1593년 5월 13일)
국가가 위급한 때를 당했는데도 미인을 태우고 놀아나니, 그 내심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1593년 5월 30일의 일기에, 남해현령 기효근이 배안에 어린 색시를 싣고 있는것을 보며)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라,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입니다.
(삼도 수군 통제영을 한산도로 옮기고자 한 이유를 밝히며)
이제 적을 상대하여 승패의 결단이 호흡 사이에 걸렸다.
장수된 자가 죽지 않았으니 누울 수가 있겠느냐!
(1593년 3월경 남해 연안에는 번졌고, 공께서는 염병에 걸려 병세가 위중하였다.
하지만 하루도 눕지 않고 여전히 사무를 보셨고 이에 보다 못한 아들이 휴양하기를 청 하자)
조선의 신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삼가 명나라 선유도사 대인 앞에 답서를 올리나이다.
왜적이 스스로 트집을 잡아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죄없는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또 서울로 쳐들어가 흉악한 짓들을 저지른 것이 말할 수 없으니,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의 통분함이 뼈 속에 맺혀 이들 왜적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각 도의 배들을 정비하여 곳곳에 주둔하고 동서에서 호응하면서 육지에 있는 장수들과도 의논했는데, 수륙으로 합동 공격해서 남아 있는 왜적들은 한 척의 배도 못 돌아가게 함으로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이달 초사흗날 선봉선 200여 척을 거느리고 바로 거제도로 들어가 그들의 소굴을 무찔러 씨를 없애고자 하였던 바, 왜선 30여척이 고성 땅 진해 지역으로 들어와서 여염집들을 불태우고 우리 백성들을 죽이며, 또 사로잡아 가기도 하고, 기와를 나르며 대를 찍어 저희 배에 가득 실어 가니, 그 정상을 생각한다면 통분하기 그지 없습니다.
적들의 배를 쳐부수고 놈들의 뒤를 쫓아 도원수에게 보고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여 나서는 이때, 도사 대인의 타이르는 패문이 뜻밖에 이르므로 받들어 두 번 세 번 읽어보니 고이 타이르신 말씀이 간절하고 곡진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다만 패문의 말씀 가운데 "일본 장수들이 마음을 돌려 귀화하지 않는 자 없고, 모두 병기를 거두어 저희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니, 너희들 모든 병선들은 속히 각각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진영에 가까이하여 트집을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 고 하였는데, 왜놈들이 거제,웅천,김해,동래,등지에 진을 치고 있는바! 거기가 모두 다 우리 땅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더러 일본 진영에 가지 말라 하심은 무슨 말씀이며, 또 우리더러 속히 제 고 장으로 돌아가라 하니, 제 고장이란 또한 어디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고, 또 트집을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니요 왜적들입니다. 또한 왜적들이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은 들은적이 없습니다.
흉악하고 교활한 적도들이 아직도 그 패악스런 행동을 그 치지 아니하고 바닷가에 진을 친 채, 해가 지나도 물러가지 아니하고 여러 곳에 쳐들어와 살인하고 약탈하기를 전일보다 곱절이나 더하니 병기를 거두어 바다를 건너 돌아가려는 뜻이 과연 어디 있가고 하겠습니까?
이제 강화한다는 것은 실로 속임과 거짓뿐입니다. 그러나 대인의 뜻을 감히 어기기 어려워 잠깐 얼마쯤 시간을 두고 보려 하며, 또 그대로 우리 임금께 아뢰려 하니, 대인은 이 뜻을 널리 살피어 놈들에게 역천과 순천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 균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 삼가 올림
(명나라 담도사의 왜적을 치지 말하는 금토패문을 받고서는 7일에 답사를 써보내며, 이 글을 쓴날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맑음. 몸이 몹시 불현하여 움직이기조차 어렵다. 아랫사람을 시켜 패문의 대답편지를 지어 오라고 했더니, 글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우수사 원균이 손의갑을 시켜서 지어 온것도 역시 마땅치 않아 부득이 내가 앓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몸소 글을 지어서는 정사립에게 발송하고, 오후 2시경 발선하여 한산도 본영에 도착하였다")
농사를 권장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일들에 정성을 다해서 보살피되, 다시 전령이 있으면 곧장 달려오라!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상황을 고려해 가며 번갈아 휴가를 실시하며)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맹세하고 원수 갚을 결심을 하고 나날을 보내지마는,
적이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소굴 속에 들어 있어 경솔히 나가 칠 수도 없도다.
하물며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던가?
(1594년 9월3일 새벽에 선조가 보낸 밀지-거기에 있는 육해여러 장병들이
한 가지 계책이라도 세워 적을 칠 생각은 않고 팔짱만 끼고 서서 서로 바라만
본다는내용-를 받고서는 수군들이 3년동안이나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고 고생하고
있는데, 언짢고 섭섭한 마음을 난중일기에 적으며)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힙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띄어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 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론 교서를 외우나
얼굴에는 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계속 퍼부은 1595년 5월 29일 난중일기)
지나온 지역이 온통 쑥대밭같이 폐허가 되어 그 참상한 꼴을 눈으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우선 전선을 정비하는 것이라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피로를 풀어 주어야 하겠다.
(폐허가 된 지역을 둘러보며)
죄없음을 굽어 살피소서-伸救箚
(조정에서 공을 사형시키려 할때, 우의정 정탁이 결정적으로 백의종군을 하게만든 상소문)
『우의정 정탁은 엎드려 아룁니다. 이모(순신)는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겁건마는 성상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두남두어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야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이는 다만 감옥 일을 다스리는 체모와 순서만으로 그러심이 아니라 실상은 성상께서 인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기어이 그 진상을 밝힘으로써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성상의 호생하시는 덕이 자못 죄를 짓고 죽을 자리에 놓인 자에게까지 미치시므로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 벼슬을 받아 죄수를 문초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얼추 죄인들이 한 번 심문을 거치고는 그대로 상하여 쓰러져 버리고 마는 자가 많아 설사 좀 더 밝혀 줄 만한 사정을 가진경우가 있더라도 이미 목숨이 끊어진 뒤라 어찌할 길이 없으므로 신은 적이 이를 늘 민망스레 여겨왔습니다.
이제 모(순신)가 이미 한 번 형벌을 겪었는데, 만일 또 형벌을 하게 되면, 무서운 문초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여 혹시 성상의 호생하시는 본의를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바입니다.
저 임진년에 왜적선이 바다를 덮어 적세가 하늘을 찌르던 그날에 국토를 지키던 신하들로서 성을 버린 자가 많고, 국방을 맡은 장수들도 군사를 그대로 보전한 자가 적었으며, 또 조정의 명령조차 사방에 거의 미치지 못할 적에 모(순신)는 일어나 수군을 거느리고 원균과 더불어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나라 안 민심이 겨우 얼마쯤 생기를 얻게 되고, 의사들도 기운을 돋우고, 적에게 부었던 자들도 마음을 돌렸으니, 그의 공로야말로 참으로 컸습니다.
조정에서도 이를 아름다히 여기고 높은 작위를 주면서 통제사의 이름까지 내렸던 것이 실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을 무찌르던 첫 무렵에 뛰쳐나가 앞장서는 용기로는 원균에게 미치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이 더러 의심하기도 한 바는 그렇다고 하겠으나, 원균이 거느린 배들은 마침 그 때에 조정의 지휘를 그릇되이 받들어 많이 침몰된 것이니만큼, 만일 모(순신)의 온전한 군사가 없었더라면 장한 형세를 갖추어 공로를 세울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모(순신)는 대장이라 나갈말함을 보고서야 나가므로, 시기를 잃지 않고 수군의 이름을 크게 떨쳤던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에 임하여 피하지 않는 용기는 원균이 가진 바라 하겠지만, 끝내 적세를 꺾어버린 공로로는 원균에서 양보할 점이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때에 원균에게도 그만한 큰 공로가 없지 않았는데 조정의 은전은 온통 모(순신)에게만 미치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원균은 수군을 다루는 재주에 장점이 있고, 천성이 충실하며, 일에 달아나 피하지 않고 마구 찌르기를 잘하는 만큼, 두 장군이 힘을 합치기만 하면 적을 물리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라 신이 매양 어전에서 이런 말씀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두 장군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원균을 다시 쓰지 않고, 오로지 모(순신)만 머물러 두어 수군을 맡아보게 하였습니다.
모(순신)는 과연 적을 방어하는 일에 능란하여 휘하 용사들이 모두 즐겁게 쓰이므로 군사들을 잃지 않고 그 당당한 위세가 옛날과 같으므로 왜적들이 우리 수군을 겁내는 까닭도 혹시 거기에 있지 않나 하거니와 그가 변방을 진압함에 공로가 있음이 대강 이와 같습니다.
어떤 이는 모가 한 번 공로를 세운 뒤에 다시는 내세울 만한 공로가 별로 없다고 하여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이도 있으나, 신은 적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댓 해 안에 명나라 장수들은 화친을 주장하고, 일본을 신하국으로 봉하려는 일까지 생기어 우리나라 장수들은 그 틈에서 어찌할 길이 없으므로 모가 다시 더 힘쓰지 못한 것도 실상은 그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요즘 왜적들이 또 다시 쳐들어옴에 있어 모가 미처 손쓰지 못한 것도 무슨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대게 변방 장수들이 한 번 움직이려고 하면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되고, 장군 스스로는 제 마음대로 못하는 바, 왜적들이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조정에서 비밀히 내린 분부가 그때 곧 전해졌는지 아닌지도 모를 일이며, 또 바다의 풍세가 좋았는지 아닌지, 뱃길도 편했는지 어쨋는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수군들이 각기 담당이라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은 이미 도 체찰사의 장계에도 밝혀진 바도 있거니와 군사들이 힘을 쓰지 못했던 것도 사정이 또한 그랬던 것인 만큼 모든 책임을 모(순신)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지난 장계 가운데 쓰인 사실이 허망함에 가까우므로 괴상하기는 하지만, 아마 그것은 아랫 사람들의 과장된 말들을 얻어들은 것 같으며, 그 속에 정확하지 못한 것들이 들어 있지나 않은가 여기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가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감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신으로서는 자못 풀어 볼 길이 없습니다.
만약에 난리가 일어났던 첫 무렵에 공로를 적어 올린 장계가 낱낱이 사실대로 쓰지 않고 남의 공로를 탐내어 제 공로로 만들어 속였기 때문에 그로써 죄를 다스린다 하면 모(순신)인들 또한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을 빼고는 저와 남이 상대할 적에 남보다 높고자 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자가 적고, 어름어름하는 동안에 잘못되는 일이 많으므로, 윗사람이 그 저지른 일의 크고 작음을 자세히 살펴서 경중을 따라 처리할수 밖에 없습니다.
대게 장수된 자는 군사와 백성들의 운명을 맡은 이요, 국가의 안위에 관계된 사람이라, 그들의 소중함이 이와 같으므로 예로부터 제왕들이 국방 책임을 맡기고 은전과 신의를 특별히 보여 큰 무엇이 있지 않으면 간속히 보호하고 안전케 하여 그 임무를 다하게 하니, 큰 뜻이 거기에 있습니다. 므릇 인재란 것은 나라의 보배이므로 비록 저 통역관이나 주판질이나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라도 재주와 기술이 있기만 하면 모두 다 마땅히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하물며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로서 적을 막아내는 것과 가장 관계 깊은 사람을 오직 법률에만 맡기고 조금도 용서 못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순신)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 못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 줄 수가 없다 하고, 공로와 죄를 비겨볼 것도 묻지도 않고, 또 능력이 있고 없음도 생각지 않고, 게다가 사리를 살펴 줄 겨를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내키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저 감정을 품은 원균같은 사람까지도 편안하지 못할 것이며, 안팎의 인심이 이로 말미암아 해이해질까봐 그게 실상 걱정스럽고 위태한 일이며, 부질없이 적들만 다행스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일개 모(순신)의 죽음은 실로 아깝지 않으나, 나라에 관계되는 것은 가볍지 않은 만큼 어찌 걱정할 만한 중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옜날에도 장수는 갈지 않고 마침내 큰공을 세우게 했던 바, 진나라 목공이 맹명장군에게 한 일과 같은 것이 실로 한 둘이 아니거니와, 신은 구태여 먼데 사실을 따오고자 아니하고 다만 성상께서 하신 가까운 사실로써 말할지라도, 박명실이 한때의 명장인데 일찍 국법에 위촉되었으나 조정에서 특별히 그 죄를 용서해 주었더니, 얼마 안되어 충청도에 사변이 일어나 기축년때보다 더한 바 있었는데, 명실이 나가 큰 변을 평정시켜 나라에 공로를 세운 것이야말로 허물을 용서하고 일을 할 수 있게 한 보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모(순신)는 사형을 받을 만한 중죄를 지었으므로, 죄명조차 극히 엄중함은 진실로 성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모(순신)도 또한 공론이 지극히 엄중하고 형벌또한 무서워 생명을 보전할 가망이 없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비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써 문초를 덜어 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을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 않을 것입니다.
성상 앞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공신각에 초상이 걸릴 만한 일을 하는 신하들이 어찌 오늘 죄수 속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상께서 장수를 거느리고 인재를 쓰는 길과, 공로와 재능을 헤아여 보는 법제와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 주심이 한꺼번에 이루어 진다면, 성상의 난리를 평정하는 정치에 도움됨이 옅다고만 하겠습니까?』
(자주 원균을 들먹인것은, 선조가 조종하기 쉬운 원균을 좋아했기 때문에 , 비위를 맞추려고 한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렇게 보고싶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려 했건만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마는 어버이마저 가버리셨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까. 어서 죽느니만 못하다.
(백의종군하고 남쪽으로 가는길에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
고갯길을 타고 오는데, 큰 바위가 천길이나 되고 굽이 도는 강물이 깊기도 하며, 길은 험하고 위태롭다. 만일 이 험고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 명이라도 지나가기 어렵겠다.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가면서, 합천쪽에서 초계쪽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기암절벽을 보고는, 그 순간에도 오직 왜적과 싸울 일을 생각하시며)
왜놈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수군인데, 수군으로써 싸움에 나서는 자가 하나도 없고,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어도 감독할 생각을 가지지 않으며, 군량조차 의뢰할 길이 없어, 온 갖생각을 해봐도 조처할 도리가 없으니, 수군의 일은 부득이 폐하게씀 되었습니다. 순신 저같은 한 몸이야 만 번죽어도 아까울게 없지마는, 나라 일을 어찌하오리까.
(칠천향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합류해 싸우라고 한데에서 매우 비통한 공께서 친분있는 어떤사람에 보낸 편지의 내용)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은 제가 죽지 않은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임진년 이후로 적이 감히 충청.전라 등 남방을 겁탈하지 못한 것은 실상 우리 수군이 세력 을 막았기 때문인데, 이제 만일 수군이 패하면 적이 반드시 호남을 거쳐 한강으로 올라 갈 것이요. 다만 순풍에 돛을 한번 달멸 될 것이니, 그것이 제가 가장 두려워 하는 바입니다.
(수군의 존속과 가치와 그 효용론을 재차 강력히 주장하며)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 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한다" 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 이다. 너희 장수들은 살려는 생각을 하지 마라. 명령을 조금이라도 어긴다면 군법으로 처 단할 것이다.
(명량 해전을 앞두고)
대장으로서 화친을 말할 수 없을 뿐더러 이 원수들을 놓아 보낼 수는 없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서둘러 돌아가려니 왜군들을, 보내주라는 조정의 명령에 반대하며)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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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전 이드라마에 빠졌지요 하여튼 "선조 내지는 조정대신들....기냥 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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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말빨로 먹혀 명언이 된 경우는 많으나 그 던진 말이 실천으로 옮겨져서 명언이 된 경우는 충무공밖에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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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gk님 멋있는 멘트 날리셨네요~^^;; 100%공감합니다.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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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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