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믿고 삽니까? 나름대로의 신들의 이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신을 왜 믿는가 질문해봅니다. 역시 각자 나름의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 신을 택한 이유와 동기가 있습니다. 설령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해도 사람은 무엇인가 의탁하는 대상이 있게 마련입니다. 오로지 인간의 이성이나 인간이 쌓아올린 과학을 믿고 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주먹만 믿고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직 돈만 의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떠하든 사람은 무엇인가 믿고 의지하려는 대상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러저러한 대상이 많아도 세상에 있는 3대 종교에 속해 있는 신자가 전체 인구의 2/3 정도는 됩니다. 그만큼 사람은 종교적인 동물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다급하면 자기도 모르게 들어봤던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본능이기도 하지요.
옛날 로마인은 주변 여타 나라나 민족들 가운데 비교적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이 지혜를 찾는 민족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고전 1 : 22) 한 호민관이 유대인 폭도들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아직 전투로 인한 피투성이 몸도 씻기 전에 바로 빌라도 총독의 부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진행되고 있는 죄인들의 처리를 맡깁니다. 세 사람이 십자가형을 받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유대인의 왕’이라 불리는 ‘예수’를 주목하라 합니다. 현장에 가보니 주변이 소란스럽습니다. 두 죄수가 십자가에 달려있고 예수는 중간에 있습니다. 여자들이 흐느끼고 있고 몇 사람은 안쓰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그 순간 호민관과 예수의 눈이 서로 마주칩니다. 가시관으로 말미암아 흘러내리는 피에 젖은 눈빛이 조요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유대인이 총독의 허가서를 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신을 달라합니다. 상관의 허락을 받은 것이니 확인하고 내줍니다. 요셉은 동료 니고데모와 시신을 수습하여 돌무덤에 안장합니다. 상황 끝, 호민관은 관저로 돌아옵니다. 얼마 후 유대 제사장과 어르신들이 총독을 찾아옵니다. 새로운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가 살아생전 부활을 얘기했다 합니다. 허튼 소리에 불과하지만 행여 그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가서 부활하였다고 떠들고 다니면 이전보다 더 큰 혼란이 야기될 테니 무덤을 확실하게 봉인해달라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이 듣기에는 말도 안 되는 허튼 소리입니다. 그러나 곧 황제의 방문을 앞두고 있으니 혼란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호민관에게 지시합니다. 봉인하고 지키라고.
사흘째 아침에 관저에 보고가 들어옵니다.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이지요.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행방불명입니다. 알고 보니 제사장들이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제사장들이 조처를 다 해놓았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보초서다 술 마시고 잤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그들에게 돈을 주고 자기네 각본을 주었습니다. 결코 죽지 않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자기네가 마련한 소문을 퍼뜨리라는 것이지요. 자는 사이에 그 제자들이 와서 예수의 시신을 도적질했다고 말입니다. 총독에게도 그렇게 해야 혼란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 근무태만으로 보초들을 처형하면 증인들이 죽는 꼴입니다. 그래서 살려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받은 대로 떠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들도 목격자입니다. 목숨도 구하고 돈도 생겼지만 자기들이 직접 본 사실에 대하여 두려움에 떱니다. 결국 호민관도 정신 나간 녀석들이라고 치부하고 내버려둡니다.
문제는 시신을 찾아내야 확실하게 끝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호민관의 부하들이 근무태만으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니 호민관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시간 내에 찾아오라는 명입니다. 온 성내를 뒤집니다. 사람을 사서 정보를 얻어냅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찾으려 들쑤십니다. 수상한 연루자들을 검거합니다. 그리고 조사합니다. 실제 목격자인 막달라 마리아도 잡혀 옵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나간 것인가? 귀신이 들렸나? 부활? 분명 자신도 죽은 것을 확인하고 시신을 넘겨주었는데, 다시 살았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제자들의 거처를 알아냈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그 집의 대문을 박차고 들어갑니다. 방안의 눈들이 자기를 향합니다. 동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바로 그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자기를 바라보았던 그 눈입니다. 섬뜩합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이것을 믿어? 내 눈이 이상한 건가? 그런데 서로 보고 있습니다. 그 분은 미소까지 지으며 바라봅니다. 일단 물러나옵니다. 다른 병사들이 들이닥치려는 것을 막습니다. 혼란에 빠진 모습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지? 설명한들 누가 믿어줄까? 총독이 이 사실을 보고하면 사실대로 인정해줄까?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나 자신도 믿지 않았는데.
예수님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가 대부분 십자가 사건으로 막이 내려집니다. 부활의 장면이 나온다 한들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부활 후부터 승천까지의 사건을 조금 더 각색하여 첨가했습니다. 합리적 사고를 가진 로마인의 시각에서 보고자 했습니다. 인간의 사고와 나타난 기적과의 관계를 접목하고자 한 듯합니다. 우리가 늘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집니다. 부활하셨으면 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으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오래 생각했습니다. 제가 찾아낸 답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았다고 해서 꼭 믿는 것은 아닙니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 16 : 31) 영화 ‘부활’을 보았습니다. 2016년 작품이네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