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4.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아모9,11-15 마태9,14-17
분별의 지혜
-예수님의 사랑과 시야를 지녀라-
‘분별의 지혜-예수님의 사랑과 시야를 지녀라-’,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이런 경우 어떻게 하셨을가?’ 깊이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시야를, 안목을 지닐 때 저절로 지혜로운 분별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과 시야를 지닙니까?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부 베네딕도 성인도 그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얼마전 써놓은 빨간 접시꽃을 보고 써서 나눴던 ‘사랑은 저렇게 하는 거다’란 시가 바로 예수님 향한 사랑을 상징합니다.
-“사랑하고 싶다
사랑은 저렇게 하는 거다
접시꽃 빨간 사랑
마음은 늘 하늘 사랑 꿈꾸는 사춘기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아래서 위로
땅에서 하늘로
끊임없이
송이송이 폈다 지며 하늘님 향해 오르는
접시꽃 빨간 파스카의 사랑
사랑은 저렇게 하는 거다”-
물론 ‘하늘 사랑’이 상징하는 바 지칠줄 모르는 예수님 향한 열정의 사랑, 파스카의 사랑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가족 사랑으로 이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함은 우리에게 참으로 우리의 부모와 자녀들을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만일 가족에 대한 관심을 첫째 자리에 놓으면, 이것은 언제나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끈다’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첫째 자리에 놓고 분별의 잣대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예수님의 사랑과 시야를 지닙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예수님의 사랑과 시야로 올바른 분별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모든 것은 때가 있음을 압니다. 단식이 분별의 잣대가 아니라 예수님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예수님 제자들은 어찌 단식하지 않는가 항의성 질문을 합니다.
수행은 경쟁이 아니라 자발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인즉 단식에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당신과 함께 하는 축제의 때이니 단식의 때가 아니고 당신이 죽게 되면 그 때 단식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 가톨릭 교회는 공식적으로 재의 수요일 아침과 성금요일 아침에 단식을 합니다. 100년경에 쓰인 디다케에 따르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했다 하며 우리는 단식이 아니고 금육을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단식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단식 자체를 비판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예언자들처럼 그 의미의 상실을 나무랄 뿐입니다. 단식은 본디 모든 구원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온전히 여는 것입니다. 참으로 제때의 올바로 된 참된 단식은 과시성이 전혀 없는 하느님 향한 겸손한 개방을 뜻합니다. 예전 아빠스님의 진정성이 담긴 유머가 생각납니다.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먹고 겸손한 것이 낫다.”
참된 수행의 특성은 겸손과 개방입니다. 단식뿐 아니라 모든 수행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하느님과 이웃에 활짝 열려 있는 겸손한 사랑의 개방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지는 새것과 헌것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어리석게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도 않을 것이며,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 분별의 지혜를 지닌 이들은 사고의 전환, 발상의 전환을 시도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한다.”
하여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 분별의 지혜를 지닌 이들은 늘 새롭게 주어지는 삶의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의 사고와 의식,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자기 쇄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작금의 남북관계가 참으로 새 포도주의 현실을 담기 위해 담대한 새 부대로의 지혜로운 발상의 전환이 절박한 때임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면 스스로 물러 나 새 부대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자리를 물려 줄 것이니 참 멋진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은 낙관적 시야를 지닙니다. 그날이 오늘이요 그때가 지금입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이 좋은 날이라 하루하루 지족知足의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삽니다. 오늘 제1독서 아모스서는 마지막 결론 부분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주제로 해피엔드로 끝납니다. 낙관적 긍정적 전망으로 가득합니다. 언젠가의 그날의 희망을 앞당겨 살았던 ‘희망의 예언자’ 아모스입니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 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 넘치리라.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라.”
오늘이 그날입니다. 삶은 고해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바로 아모스처럼 이런 궁극의 희망을 앞당겨 오늘 여기서 축제의 현실을 살았던 예수님이셨고 그 제자들인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축제의 행복한 현실은 언젠가 그날의 그 때가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바로 이런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사고를 지닌 이들이 예수님처럼 지상에서 천국을 살아가는 ‘분별의 현자賢者들’이요 저절로 다음과 같은 고백도 나올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참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새 마음의 새 부대에 새날의 새 포도주의 은총을 가득 담아 주시며 당신을 닮아 분별의 지혜를 지닌 겸손한 수행자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