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처럼 뚝 뚝… 바람처럼 사르르…
노랫말보다 애잔한 피아노 소리
- 《겨울 나그네》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정명훈·이미주·신수정(위에서부터).
음악회를 알리는 전단을 유심히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악 독주자나 성악 가수가 피아노 1대를 벗 삼아 진행하는
음악회를 영어로 '리사이틀(recital)'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를 '독주회(獨奏會)'로 번역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지요.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 혹은 성악가와 피아니스트 등 2명이 무대에 올라왔는데 '독주회'라고 부르니 피아노 연주자는 아예 없거나,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
'연주회' '발표회' 정도로 하는 것이 좋을 텐데 '독주회'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실수라기보다 뿌리 깊은
편견 때문입니다. 연주자나 성악가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그날의 '주인공'이 되는 데 비해, 피아니스트는 정작 한걸음 뒤로 물러나
'반주자(伴奏者)'에 그치고 마는 것이지요.
하지만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에서 노랫말을 전달하는 가수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악기가 바로 피아노입니다. 전체 24곡 가운데 두 번째 곡 〈풍향계〉에서 피아노는 세찬 바람에 펄럭이는 풍향계처럼 거세게
휘몰아칩니다. 다음 곡 〈얼어붙은 눈물〉에서는 거꾸로 두 뺨에서 떨어지는 눈물같이 피아노 소리 역시 뚝뚝 떨어집니다. 13번 곡 〈우편마차〉에서
행여 내 님의 편지를 싣고 올지 모르는 마차를 따라서 피아노도 달려갑니다.
때로 피아노는 노래보다 한 발 앞서 곡의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이 연가곡에서 가장 친숙한 〈보리수〉에서 연이은 16분 셋잇단음표로 연주하는 피아노는 잔가지를 흔드는 바람처럼 먼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우리 시대 가장 빼어난 가곡 성악가 가운데 한 명인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는 독일 가곡을 부를 때 제럴드 무어를
비롯해 외르크 데무스, 스뱌토슬라브 리히터, 알프레드 브렌델, 안드라스 시프, 다니엘 바렌보임 등 당대의 피아니스트들과 호흡을 맞춘 것으로
유명합니다. 1969년부터 20년 가까이 디스카우를 반주했던 바렌보임은 "독일 가곡을 연주하다 보면, 생생한 단어나 놀라운 생각이 노랫말에 나올
때 음악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가곡이 선율과 가사의 단순한 합계가 아니라, 피아노 연주까지 포함된 총체적
예술임을 말하는 것이지요.
본디 '반주(accompany)'라는 말 자체가 '함께 가다'는 어원에서 비롯했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걷는 동반자이지, 종속적인 관계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연말이면 한국에서도 즐겨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연가곡이 바로 《겨울 나그네》입니다. 이
가곡에서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것은 성악만이 아니라 피아노의 '연주'이기도 합니다.
▶바리톤 정록기와 피아니스트 이미주의 겨울
나그네, 26일 금호아트홀, (02)6303-7700
▶베이스 연광철과 피아니스트 정명훈의 겨울 나그네, 12월 19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02)518-7343
▶바리톤 박흥우와 피아니스트 신수정의 겨울 나그네, 12월
30일 모차르트홀, (02)3472-8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