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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신정근 지음/글항아리 펴냄
이 책은 3천 년 인(仁)의 역사를 다룬 최초의 책이다. 인은 동아시아 사상에서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다. 공자에 의해 유학의 핵심 사상으로 등극한 이후부터 인은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 노자와 장자 같은 ‘안티팬’도 거느리게 되었다. 저자는 이 인을 공자 이전에서 시작해서 근대의 최한기, 캉유웨이(康有爲)와 탄쓰통(譚嗣同)에 이르기까지 11단계로 나누어서 다루었다. 그중 한 단계는 묵자ㆍ노자ㆍ장자 등 인의 강력한 비판자이므로 인의 옹호자는 사실 10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이 3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인을 하나의 유사한 의미로 보는 입장이 아니며 그것과 정확히 반대에 서 있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엔트리가 11명인 축구처럼 11단계의 인이 3000여 년의 역사라는 무대에서 온갖 재주를 부리는 것을 펼쳐내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그간 봐온 골치 아프고 고리타분한 동양철학 서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인은 바다의 고요한 심연처럼 조용하게 흘러온 것이 아니라 바다의 표면처럼 시대와 격랑을 이루며 우당탕 쏟아져 내려왔다”는 사실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원전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현대의 사례와 겹쳐 읽는 저자의 세심한 글쓰기는 이 책의 가장 독특한 미덕이다. 그 외에 이 책의 장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대별로 인의 맥락과 그 의미를 분석하면서 사상사의 흐름과 결부시켰다. 예컨대 한나라의 동중서가 천인감응과 인을 결합시킨 측면을 언급했다. 둘째, 한국적 전개 양상을 최초로 다루어서 보통 인 하면 중국 사상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깨고자 했다. 18~19세기 정약용과 최한기는 중국과의 사상의 동시성 또는 선도성을 보여줬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는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특기할 만한 현상이기도 하다. 셋째, 인 사상의 자료를 망라하여 이를 토대로 앞으로 심화 연구가 가능하게 했다. 개별 사상가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있지만 개괄적이나마 이 책은 한국과 중국의 인을 두루 다룬 통사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넷째, 인을 다루면서 늘 연구 대상, 맥락, 정의를 나누어서 설명했다. 이 부분만을 점검하더라도 인 사상의 흐름을 일별할 수 있다.
저자는 인의 의미를 찾는 여행을 떠나면서 인을 ‘어질 인’으로 풀이하는 관행을 당장 그만두고 그냥 ‘사람다울 인’으로 바꾸어 읽기를 제안한다. 인을 ‘어질다’로 풀면 너무 복합적인 뜻을 지니고 있어서 명확한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질 현(賢)’으로 풀이하는 관행과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을 ‘사람답다’로 옮긴다면 인의 영어 번역어 humanity와 잘 어울린다. 따지고 보면 사람다움이 ‘사람’에다가 성질이나 특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접미사 ‘-답다’의 명사형 ‘-다움’이 결합한 것이듯, humanity도 사람을 가리키는 human에다 추상적 성질을 나타내는 접미사 -ty가 합쳐진 꼴이다. 사전에 보면 humanity를 인간성, 인류애, 자비 등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사람으로서 요구되는 자격을 갖추었다는 사람다움의 풀이가 가장 적합하다.
사람다움은 역사의 단계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원시시대의 사람다움이 현대사회의 사람다움과 같을 수가 없다. 원시시대에는 사람이 자연에 종속되어 지배를 받았지만 반면 현대는 사람들이 자연을 이용하고 자유와 평등을 누린다. 이처럼 삶의 지평이 크게 다르므로 사람다움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仁) 자는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을까? 가장 이른 증거는 기원전 743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시경』과 『서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로부터 200여 년 뒤 공자에 이르러 인은 사상계에서 주목할 만한 개념으로 등장하게 됐다. 저자는 공자가 인을 핵심 가치로 간주한 뒤에 그 중요성이 유학을 넘어서 중국철학의 전역으로 넓혀졌다고 본다. 이 책은 공자 이래로 청나라 말과 중화민국 초까지 인이 그 의미에서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시경』은 전설적 성왕으로 알려진 요임금과 순임금의 시대에서부터 주나라의 사적을 제왕의 언행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고, 『좌전』은 서주의 시대가 끝나고 동주의 시대가 된 이후 역사에 춘추라고 알려진 시기를 기록하고 있다. 공자 이전의 인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화려한 치장을 하고 고결한 신분에 있는 사람과 관련된다. 『시경』에는 인이 「숙우전」과 「노령」에서 각각 한 차례 쓰이는데,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두 번 모두 시적 대상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 정도로 요란하고 화려한 행차로 사냥을 나가는 귀족이다.
공자에 이르면 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공자 이전에 치자는 고귀한 혈통을 가진 가문에서 세습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어떤 필수적인 자격을 힘 들여서 가질 필요가 없었다. 반면 춘추시대라는 약육강식의 경쟁체제에서 치자는 주어진 권력의 남용, 재화의 낭비, 무지의 오류 등으로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하지 않으려면 절제, 절약, 지혜를 발휘해서 권력의 공적 사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공자는 치인이 단순히 세습으로 될 경우 그가 공동체의 운명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며 그 위험성을 피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치인이기에 앞서 도덕적 자기 수양을 해야 한다는 맥락으로 인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인하냐 인하지 않느냐는 것은 사람다운가 그렇지 않는가를 판가름하게 되었다.
『논어』의 인도 철저하게 이러한 맥락에서 쓰인다. 예를 들면 운동선수가 경기에 참여해서 규칙을 지키듯이 “사람은 자신의 세계에 갇히지 말고 더 큰 공공의 세계에 참여해야 한다.” 또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떼를 쓰는 것보다는 “자신이 바라지 않는 일을 주위 사람들에게도 부과하지 않아야 했다.” 이를 종합하면 결국 치자는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자신의 세계를 풍요롭게 가꾸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의 삶을 돌보아야 했다.”(「안연」) 이렇게 되면 사형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치자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라면 구성원들은 두 손 들고 환영하며 함께한다.
이러한 사례는 오늘날 우리가 고위 공직자에게 비교적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고위 공직자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탈세니 투기니 거짓말을 해놓고서 일반 시민더러 그러한 행위를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코미디와 같은 상황이 될 것이다. 자기 스스로 떳떳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떳떳하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는 일찍부터 이 문제를 알아차렸던 까닭에 사회 지도층(고위공직자, 기업의 최고경영자 등)에게 자신의 허물을 짓지 않도록 스스로 성찰하는 수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맹자』의 인은 『논어』의 인과 달리 철저하게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 아무리 위대하고 고귀한 말씀이더라도, 효과적이고 강력한 규범이더라도, 나의 마음에 닿지 않는다면 결국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살벌한 최후통첩과 다를 바가 없다. 맹자는 도덕적 행위라도 진심으로 느껴질 때 비로소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사람과 사람이 사이를 트고 같은 사람으로서 만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 사실을 맹자는 유명한 비유, 즉 앞으로 가면 우물이 있는데도 어린아이가 계속 나아가는 유자입정(孺子入井) 이야기를 통해서 논증하려고 했다. 맹자가 생각하기에 어떠한 사람도 아이를 구하지 않았다는 비난, 구해주고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을 칭찬이나 아이의 부모로부터 받을 대가 때문에 아이를 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어떠한 이익과 손해를 뛰어넘어서 오로지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해야겠다는 순수한 생각에서 아이를 구할 것이다. 이처럼 맹자는 인을 공자 이전의 매력이나 공자의 자기 수양과 달리 도덕 감정(moral sense)으로 간주하고 있다.
한(漢)나라에 이르면 기(氣)와 음양 사상이 모든 분야와 연결된다. 기와 음양 사상에 따르면 사회와 자연은 대립적이면서 보완적인 두 힘, 즉 음양의 교체로 변화가 일어나고 두 힘의 균형으로 질서가 잡힌다. 동중서는 유학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던 자연학 분야를 당시 음양ㆍ오행의 기 철학으로 보완했다. 그는 인과 의를 대칭시키면서, 인이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의는 자아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이라며 영역을 구분하고 인의 근원을 하늘과 연결시켰다. 이로써 인은 비로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넘어서 하늘과 사람의 관계로 올라서게 되었다.
당나라에 이르면 사상계는 유교ㆍ불교ㆍ도교의 삼교가 합일되는 특색을 띠기 시작했다. 불교는 인도로부터 한나라로 전래되어 점차 세력을 확장하다가 당나라에서 선불교라는 독특한 종파가 생겨날 정도로 대중과 왕족,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도교는 노장의 철학과 신선, 불로장생, 무병장수 등의 민간신앙이 결합하여 나타난 형태로 당나라에서 국가의 공적 지원을 받을 정도로 성장했다. 아울러 당나라는 한나라의 팽창 정책의 결실을 이어받아서 중국 역사상 가장 개방적인 국제관계를 유지했다. 당송 8대가이면서 사상가인 한유는 인을 박애로 정의하여 내적 세계에 대해 포용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기독교 등 세계종교가 보편적인 사랑을 말하면서 신과 정의의 이름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과 비슷하다. 한유의 새로운 정의로 인해 유학 또는 인은 가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었다.
송나라와 명나라의 유학은 성리학이라고도 하지만 신유학이라고 하여 이전의 유학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간 유학이 이상적 사회를 위한 정치철학 또는 사회철학의 특성을 지녔다면, 신유학은 그 바탕 위에서 한나라의 자연철학(음양사상)과 도교ㆍ불교의 존재론을 결합해서 형이상학의 특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지금까지 자연과 사회 그리고 심리 현상을 낳은 근원으로 여겨지던 기(氣)를 대체하여 리(理)가 철학사의 주연으로 등장했다. 그들은 기가 현상의 다양성과 관계를 설명할 수 있지만 훼손될 수 있는 가치의 절대성을 굳게 지킬 수 없다고 비판했다. 주희는 도덕의 이상과 현실의 조화에 누구보다도 고민을 많이 했다. 사람이 어떤 도덕적 행위를 할 때 개별 행위는 늘 보편 가치와 연속되어야 하지만, 개인적 욕망을 가진 인간은 실수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따라서 어떠한 개별 사랑은 늘 보편사랑에 의해서 규제를 받아야 하고, 또 사람은 이론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보편사랑이 안내하는 삶을 끊임없이 이루어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인은 개별 사랑을 진실하게 만드는 사랑의 이치이고 개별 사랑을 쉼 없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마음의 총체적 역량으로 파악됐다.
양명학에서 왕양명은 주희가 인의 이론만이 아니라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데도 불구하고 실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인이 요구되는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주희는 내가 어떻게 해야 올바른지 알기 위해서 진리의 결집체로서 경전을 참조하느라 행위가 유보되고 있다. 왕양명은 주희의 사유 방식에 따르는 한 앎과 행위의 간격이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대신에 그는 양지야말로 이미 무엇이 올바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으므로 그에 따라 행위를 하면 충분하다고 본다. 이로써 그는 말과 조련사가 교감하듯이 인을 사람과 사람 사이 또는 만물의 사이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교감 능력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명ㆍ청 교체 이후에 청나라의 유학자, 특히 실학자들은 주자학과 양명학이 모두 유학을 오염될 수 없는 청정한 도덕의 근원을 찾는 것으로 제한시켰다고 싸잡아서 비판했다. 이로써 도덕은 현실에서 악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영혼(심성)을 정화하는 내무(內務)에서 반복과 좋은 습관을 통해 선행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외무(外務)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인도 선불교의 참선 등을 받아들여서 마음 수련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역할 상대를 걸맞게 대우하여 인륜의 화합을 키우는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인은 잘 습관화된 행위와 그로 인해서 늘어나는 공동체의 통합을 가리키게 된다.
근대가 다가오자 지구설과 지동설 등을 알게 되면서 동아시아의 전통 과학 중 천원지방(天圓地方), 음양오행의 지위가 점점 약해지다가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청말 민국초의 지성인들은 세계가 관계가 끊어진 개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원자적 개체주의나 기계론과 물질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세계를 음양과 오행의 틀로 분류하고 인식하는 틀을 버렸을지언정 세계의 존재들이 근원적으로 하나의 연속체로서 소통이 가능하다는 공동체주의를 내버리지 않았다. 탄쓰통과 캉유웨이는 서세동점의 세기에 살면서 세계가 원래 같은 근원에서 상호 교류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나라별로 지역별로 이해관계에 의해서 서로 막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인은 막힌 차별의 벽을 뚫고 소통을 증대시키는 에테르이자 전기이자 심력(心力)으로 간주되었다. 정리하자면 마지막 단계에서 인은 전통적인 만물일체와 서학의 근대 과학(에테르, 전기 등)의 결합을 통해서 사람 사이, 나라 사이의 갈등을 없애 소통을 넓히는 매질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들은 전통적으로 인이 인성의 평등과 연결되면서도 결국 사회 제도의 불평등을 정당화시켜주는 계기를 비판했다. 그들은 사람이 사회 제도의 불평등이라는 장애를 뛰어넘어서 평등의 지평에서 다시 서는 것을 인으로 본다. 이로써 인은 사랑의 단계론에 차별을 용인하는 것을 부정하고 천부인권으로서 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인의 한국적 전개는 중국의 경우와 유사한 특성을 드러낸다. 1단계로 고려시대까지 인 사상은 『좌전』과 『논어』의 인을 인용하거나 원용하는 경우가 많다. 『삼국사기』 『계원필경』 『삼국유사』를 보면 인을 황제를 수식하는 말로서 쓰는 등 왕처럼 고귀한 신분의 특별한 사람의 특징으로 간주했다. 조선전기의 권근 또한 “인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은 이치로서 사람이 이를 타고 나서 마음이 되었다”는 주희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는 등 공자가 말한 인을 소개했다. 이황과 이이 또한 성리학을 훨씬 심화 또는 내재화시켰지만 적어도 인 사상에서는 주희와 차별화해야겠다는 의식을 전혀 가지지 않았고 주희의 언어와 의미를 답습하며 주석을 통해 그것을 한층 더 분명하게 하고자 했다.
인의 한국적 전개에서 주목할 만한 전환점은 18~19세기에 이뤄진다. 이 시기 사상 문화는 더 이상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고 동아시아가 각각 이전의 전통문화를 총체적으로 반성하면서 각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 사상의 전개는 동시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 사상 문화의 흐름에서 볼 때 혁명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신유학에서 강조하는 선험적 도덕의 근원과 구체적인 행위 사이의 연계가 명시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다고 비판한다. 만물일체로서 인이 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효도나 자애를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며 암시적이고 사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의 규범은 사람이 구체적인 인간관계에서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안내할 수 있어야 했다. 그에게는 사람이 구체적인 관계를 제대로 수행해서 서로 사이가 좋다면 그것이 바로 인인 것이다.
최한기는 정약용과 다른 방식으로 보편사랑으로서 인의 지위를 깎아내린다. 최한기는 자연과 사회의 변화, 세계의 가치와 질서를 인ㆍ의ㆍ예ㆍ지가 아니라 기화, 세분화면 활(活)ㆍ동(動)ㆍ운(運)ㆍ화(化)로 설명한다. 이렇게 되면 기화 또는 활동운화가 근원적이고 인의예지는 파생적인 지위로 내려앉게 된다. 지위의 변화에 따라 의미도 달라진다. 인은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운화가 순수하게 일어나게 되는 덕목으로 자리하게 된다. 즉 기화 또는 운화에 의해서 인이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인은 동아시아 사상에서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인에 모이는 만큼 그것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묵자와 노자 그리고 장자는 인이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끊임없이 키우는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먼저 묵자가 인을 비판하는 측면을 살펴보자. 공자의 사랑은 철저하게 가족에서 출발한다. 물론 공자가 가족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고 요구한 적은 없다. 하지만 사람은 현실적으로나 자연적으로 먼저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고 난 다음에 다른 곳으로 사랑을 넓혀갈 수 있다. 그런데 묵자는 사랑이 출발부터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면 결코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보면 내 자식이 1점이라도 더 받아야 한다는 바람과 사랑은 남이 학원에 다니지 않더라도 자기 자식은 학원에 보내게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묵자는 편을 나누는 사랑을 별애(別愛)라고 하고 편을 나누지 않는 사랑을 겸애(兼愛)라고 했다. 묵자의 겸애에는 눈여겨볼 것이 있다. 묵자는 사랑을 바람직한 삶의 자세와 사회질서의 원리로 삼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보편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고 할 수 있다. 학파로 보면 묵자가 유가의 일원은 아니지만 그의 겸애는 공자 이후의 유학자들에게 커다란 고민을 던져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민은 당나라 한유에 이르러 답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인을 박애(博愛)로 정의하여 유학의 인이 가진 가족주의 관점을 탈피하려고 했다.
두 번째 인의 안티 팬으로 노자를 살펴보자. 유학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이야기하는 모든 절차에 예(禮)라는 절차를 마련했다. 사랑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노자는 사랑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사랑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보는 것을 부정한다. 사랑은 꼭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가둘 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의 비판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과연 특정한 방식으로만 표현된다면 그 사랑이 사람 사이의 참다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자는 그것을 오히려 병든 사랑이라고 비판한다. 노자는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참과 거짓이 뒤섞여서 헷갈리는 인 자체를 떠나서 어떠한 틀에 매이지 않는 자연스런 상태, 즉 도(道)와 덕(德)이 지배하던 시절로 돌아가자고 제안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자의 인에 대한 공격을 살펴보자. 장자는 인 또는 인의(仁義)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말을 길들이는 비유를 통해서 설명한다. 말은 원래 야생 상태에서는 고삐가 없고 발굽도 없이 배가 고프면 풀을 뜯고 달리고 싶으면 들판을 내달린다. 사람이 말을 길들이면서 말에 고삐를 채우고 발굽을 박고 낙인을 찍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말은 죽어나간다. 다음에 사람들은 말을 빨리 달리게도 하고 천천히 달리게도 하며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 등 말을 훈련시키면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채찍을 마구 휘두른다. 이 과정을 제대로 거치면 ‘명마’가 태어나겠지만 그 사이에 80퍼센트 이상의 말들이 죽어나간다.
인에 대한 장자의 비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작은 물건 하나를 훔치면 ‘도둑’이라며 손가락질하고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라를 훔치면 도둑이라 말하지 못하고 ‘영웅’이라 추어올리며, 나아가 인의의 수호자로 미화를 해댄다는 것이다. 나아가 도둑들도 남의 물건을 훔치고 생활하는데, 그중에 누군가가 훔친 것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한다면 도둑 집단이 유지될 수 없다. 장자는 훔친 물건을 골고루 나누는 것을 인이라고 말했다. 인은 보편적인 도덕이 아니라 한갓 지배자의 이익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도둑이 자신들의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규칙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이 현대사회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인간다운 사람을 위한 인권의 보장과 복지의 증대, 탐욕스런 경쟁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 인을 통한 상생(相生)의 윤리 회복 등이다. 인의 여러 가지 정의 중에 맹자의 ‘차마 타자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은 시대를 넘어서 폭넓게 주목을 받았다. 이것은 소극적으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 내가 이익을 얻는 것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나에게 커다란 문제가 없다면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 사상과 현대사회가 날카롭게 충돌하는 지점으로 사욕(私慾)을 든다. 하지만 사욕에 가장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신유학도 그것의 완전 정복이 아니라 절제나 조절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사욕이 만물의 상호 소통을 막는 원인이라는 신유학의 관점은 시대적 한계로 수정해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생산력이 낮은 단계에서 전체 소득이 빤한데 누가 더 많이 가지겠다고 바라면 곧 다른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사욕은 탐욕과 약탈로 이어질 여지가 있다. 생산력이 높은 단계에서 는 잉여자원을 통한 재분배로 나아갈 수 있다.
인은 상생의 윤리다. 상인과 농부가 비닐하우스 안의 수박이 다 크기 전에 사고파는 계약을 맺었다고 하자. 수박을 출하할 시점이 되어서 기후 변동으로 수박 값이 평소 가격보다 다섯 배 이상 뛰었다고 하자. 계약에 따르면 상인은 계약한 대로 구입비용을 지불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이는 평소 상황보다 최소 네 배 이상의 마진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때 개인 윤리가 아니라 인의 관계 윤리에 따른다면 상인은 계약금보다 초과하는 일정 정도의 수익을 농부와 나누어 갖게 된다. 둘이 서로 한 번만 거래하고 말 것도 아니고 수박 농사를 짓느라 고생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을 모른 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인과 농부는 한 사람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도움이 되는 길을 갈 수 있다. 이처럼 인은 기본적으로 상생을 전제로 하는 윤리이다.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지다’ 시리즈는 3천년 넘게 이어온 동아시아 사상의 맥을 통시적으로 짚어봄으로써 우리의 삶을 전면 재검토하고자 하는 기획이다. 모래 한 알에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처럼, 우리가 무심코 쓰는 단어 하나가 얼마나 많은 시간의 고민과 사색을 통해 태어나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삶이 아무리 급격히 서양화되었다고 해도, 3천 년 동안 이 땅을 규제해온 정신문화의 질서가 쉽게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을 전면적으로 성찰하지 못하고, 뒤돌아 외면하거나 철학적 장식쯤으로 여긴다면 되돌아 올 것은 뿌리 없는 삶이요, 현실에 기초하지 못한 방향모색으로 인한 괴로움뿐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동양의 자식들’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고 이 시리즈에는 그것을 납득할 수 있게 증명하는 과제도 포함되어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가꾸어주는 ‘사람다움(仁)’의 역사가 그 첫걸음을 시작했다. 이어서 만물의 ‘근원(理氣)’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꾸밈없는 마음씨(四端)’와 ‘인간의 본성이 사물에 접하면서 드러나는 감정(七情)’은 역사적으로 어떤 논쟁을 불러일으켰는지, ‘나와 타인의 관계 질서를 규정짓는 도덕적 규범(禮)’에 대해 옛 성현들은 어떤 실천 방안을 제시했는지, 또 우리 조상들은 ‘부끄러움(恥)’의 미덕을 어떻게 삶 속에서 사유해왔는지 등을 탐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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