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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쪽을 보니, 오(吳)·제(齊) 두 나라는, 나의 손에 닿을 듯
열하일기(熱河日記)속의 조선왕조(朝鮮王朝)
○ 오늘날 우리가 참고(參考)하고 있는 연경(燕京)으로 가는 사신단(使臣團) 소속(所屬)의 관리(官吏)들이 기록(記錄)해 놓은 연행록(燕行錄)은, 일제(日帝) 식민통치(植民統治) 시절(時節)에, 일인(日人) 어용(御用)사학자(史學者)들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 재편찬(再編纂)되었거나 교열(校閱), 검열(檢閱)등을 마친 것들이 대부분(大部分)이라는 사실(事實)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특히 여정(旅程) 곧 「역(驛)과 역(驛)의 리수(里數)」는, 축소(縮小)되었을 가능성(可能性)이 많다고 보아진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반도(半島) 한양(漢陽)으로부터, 심양(瀋陽)과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북진(北鎭)으로, 다시 산해관(山海關)으로, 연경(燕京)까지의 거리(距離)에 딱 맞게끔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필자(筆者)는, 이를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이라고 한다.】에 의하면 :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는 ‘한성(漢城)’으로부터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까지를 가려면 : 방향(方向)은 언제나 똑같을 수밖에 없다.」
➊ 한성(漢城)∼압록강(鴨綠江)∼심양(瀋陽)까진 죽으나 사나, 북행(北行)일 수밖에 없다. 북북서(北北西)이니 북행(北行)과 뭔가 다른가.
➋ 심양(瀋陽)∼신민(新民)까지는 서북행(西北行)이요,
➌ 신민(新民)∼의무려산(醫巫閭山)∼금주(錦州)∼산해관(山海關)은 서남(西南)이다.
➍ 산해관(山海關)∼북경(北京=燕京)은 정서(正西)이다.
이런 방위(方位)를 나타낸다. 압록강(鴨綠江)을 도강(渡江)한 후에, 심양(瀋陽)을 향(向)해 가는 여정(旅程)에서, 「동(東)쪽의 용만(龍彎)이니, 철산(鐵山)이니 하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용만(龍彎)과 철산(鐵山)등은 남(南)쪽에 있기 때문이다.
지형지리(地形地理) 측면(側面)에서 바라 볼 때, 남(南)쪽과 동(東)쪽은 전혀 다르게 위치(位置)해 있을 수밖에 없다. “당시(當時)나 오늘날이나 압록강(鴨綠江) 북(北)쪽에서 반도(半島)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남(南)쪽에 있지 동(東)쪽에 있을 수 없다.”
서론(序論)이 긴 것은 아래 글을 보충(補充)하기 위한 사전(事前)지식(知識) 때문이다. 또 좌(左)는 동(東)쪽을, 우(右)는 서(西)쪽을 말하는 것인데, 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 호우(湖右)란 말은 호수(湖水)의 서(西)쪽, 호좌(湖左)란 호수(湖水)의 동(東)쪽을 뜻하는 말이다.
우(右)는 서(西), 좌(左)는 동(東)쪽을 말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주제(主題)로 넘어가고자 한다.
○ 고전번역원 DB 해제(解題) 인용(引用) : 《열하일기(熱河日記) 26편은, 정조(正祖) 때 수많은 실학파(實學派) 학자 중에서,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거성(鉅星)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1737~1805)의 명저이다. 그는 정조(正祖) 4년, 곧 1,780년에 그의 삼종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隨行員)으로, 청(淸) 고종(高宗)의 70수를 축하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가, 성경(盛京)ㆍ북평(北平)ㆍ열하(熱河) 등지를 역람(歷覽)하고 돌아와서 이 책을 엮은 것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오늘날 반도(半島) 땅에서 하북성(河北省) 땅으로 가는 길(道)은, 거의 대부분(大部分) 같을 수밖에 없다. 비상상황(非常狀況) 예(例)를 들면, 내란(內亂) 또는 전쟁(戰爭)이 났다거나, 황제(皇帝)가 붕어(崩御)했다거나, 사신단(使臣團)의 주요인사(主要人士)기 위급(危急)한 병(病)이 생겼다거나 하는 등의 일이 없다면 여정(旅程)은, 거의 같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열하일기(熱河日記)속에서, 반도(半島)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 바라볼 때, 지세(地勢)나 방위(方位)등으로 도저히 이해(理解)불가(不可)한 몇 가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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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하일기(熱河日記) : 도강록(渡江錄) / 도강록(渡江錄) 6월 24일 신미(辛未) [6월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하여 7월 9일 을유(乙酉)에 그쳤다.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이 걸렸다.]
《東 望 龍 鐵 諸 山, 皆 入 萬 重 雲 矣. : 동(東)쪽으로 용만(龍灣)ㆍ철산(鐵山)의 여러 산을 바라보니, 모두 만첩의 구름 속에 들어 있구나.》하였다. 이 구절(句節)은 틀림없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솜씨일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이해(理解)할 수 없는 것은 : 「의주(義州)에서 압록강(鴨綠江)을 도강(渡江)하였으니, 그곳은 압록강(鴨綠江)의 북안(北岸)이다. 이곳에서 의주(義州)는 남안(南岸)에 있는 국경(國境)도시(都市)요, 철산(鐵山)은 또 그 남(南)쪽에 있다.」
이러한 형편(形便)에 있을 때에, 「도강(渡江)한 후에 동(東)쪽으로 바라보니, 용만(龍彎)과 철산(鐵山)의 여러 산을 바라보니, 모두가 만첩(萬疊)의 구름 속에 들어있다」고 한 것이다. 이게 과연(果然) 올바른 지세(地勢)일까? 누누이 말하지만 지세(地勢)는 누구도 속일 수 없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심양(瀋陽)을 향해 가는 여정(旅程)에, “그 동(東)쪽에 용만(龍彎)과 철산(鐵山)의 여러 산(山)들이 보였다.”는 말은,
박지원(朴趾源)이 건넌 압록강(鴨綠江)은, “남(南)쪽에서∼북(北)쪽으로 흐르는 하천(河川)【또는 북(北)에서 남(南)으로 흐르는 하천(河川)】이었다” 는 결론(決論)에 도달(到達)할 수밖에 없다.
●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말대로라면 :
〈용만(龍彎)은, 압록강(鴨綠江) 동안(東岸)에 있었던 국경도시(國境都市)였다.〉
〈압록강(鴨綠江)은, 남(南)쪽에서 북(北)쪽으로 흘러가는 강(江)이었다.〉
이건 팩트(Fact)며, 역사적 사실(史實)일 수밖에 없다. 곧 반도(半島) 땅에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없었다는 것을 후인(後人)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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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강록(渡江錄) / 도강록(渡江錄) /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遼東左挾滄海,前臨大野,無所障礎,千里茫茫,以白塔,乃得野勢三分之一. : 요동(遼東)은 왼편에 창해(滄海)를 끼고(左挾滄海), 앞으로는 벌판이 열려서, 아무런 거칠 것 없이, 천리(千里)가 아득하게 틔었는데, 이제 백탑이, 그 벌판의 3분의 1을 차지하였다.》하였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후, 심양(瀋陽)까지에 이르는 도중(途中)이다. 이 여정(旅程)은 북행(北行)과 같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심양(瀋陽) 곧 성경(盛京)”은 압록강(鴨綠江)의 북(北)쪽 지방에 있기 때문이다.
지형(地形)지세(地勢)를 살펴보면 : 남(南)쪽에서 북(北)쪽을 향해 가는 도중(途中)이라면, 우(右)는 곧 서(西)쪽으로 발해(渤海)가 있고, 좌(左) 곧 동(東)쪽은 곧장 가면 요녕성(遼寧省)을 지나,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지방에 이른다. 그렇다면,
위의 글을 보면 :《遼東左挾滄海,前臨大野,無所障礎,千里茫茫,以白塔,乃得野勢三分之一. : 요동(遼東)은 왼편에 창해(滄海)를 끼고(左挾滄海), 앞으로는 벌판이 열려서, 아무런 거칠 것 없이, 천리(千里)가 아득하게 틔었는데, 이제 백탑이, 그 벌판의 3분의 1을 차지하였다.》하였다.
➊ 「遼東左挾滄海 : 요동(遼東)은 왼편에 창해(滄海)를 끼고(左挾滄海)」라고 하였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남(南)에서 북(北)쪽을 바라보고 가는 여정(旅程)이라면, 창해(滄海)를 발해(渤海)라고 한다면 : 〈이는 우측(右側)에 있지, 좌측(左側)이 아니다.〉 지세(地勢)를 보면 : 요양(遼陽) 또는 요동(遼東) 정도에서 발해(渤海)는 정확(正確)하게 서남(西南)쪽에 있다. 그 남(南)쪽은 요동(遼東)반도(半島)이고, 이곳을 지나면 황해(黃海)에 임한다.
➋ 글자는 ‘여섯 글자’로 아주 간단(簡單)한 구절(句節)이지만, 아주 난해(難解)한 구절(句節)이라고 생각된다. 도대체 어느 방향(方向)으로 바라봐야 적절(適切)한 것일까? 북행(北行)하는 길이니 이곳이 요동지방(遼東地方)인데, 「遼東左挾滄海 : 요동(遼東)은 왼편에 창해(滄海)를 끼고(左挾滄海)」라고 하였으니 참… …답답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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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신수필(馹汛隨筆)/ 일신수필(馹汛隨筆) 7월 15일 신묘(辛卯)에 시작하여 23일 기해(己亥)에 그쳤다. 모두 아흐레 동안이다.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 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5백 62리다. / 북진묘기(北鎭廟記)
《東面以視,尺吳寸齊,在我指端,而但恨目力有窮耳. : 동(東)쪽을 바라보니, 오(吳)ㆍ제(齊) 두 나라는, 나의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이나, 내 안력(眼力)이 미치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하였다.
북진묘(北鎭廟)는 의무려산(醫巫閭山)【해발고도 867m】에 있고, 저자(著者)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북진묘(北鎭廟)에 와 있다. “북진묘(北鎭墓)에서, 동(東)쪽을 바라보니, 오(吳)나라와 제(濟)나라 등의 두 나라는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보이는데, 내 눈이 미치지 못하니 어찌 한스럽지 아니한가!” 말하고 있는 거다.
오(吳) :〈오(吳 ? ~ 기원전 473)·오(吳 기원전 195 ~ 기원전 154)·오(吳 229 ~ 280)·오(吳, 902 ~ 937)〉등이다. 오(吳)나라는 강동(江東)지방의 강소(江蘇)·절강(浙江) 일대(一帶)가 거점지(據點地)다.
제(齊) :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옛 왕조(王朝)다.
이로 미뤄보면, 북진묘(北鎭墓)에서 이들 오(吳)와 제(齊)나라의 옛 땅은, 서남(西南)지방(地方)이다. 동(東)쪽이란 말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실학자이자 사상가, 외교관, 소설가”로 평가될 정도로 훌륭한 학자(學者)로써의 면모(面貌)를 보여줬다. 헛소리를 지껄일 분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 이를 역설적(逆說的)으로 바라보자. 오(吳)나라 땅과 제(齊)나라 땅이 동(東)쪽 방향에, 손에 잡힐 듯한 곳은, 영하성(寧夏省)을 남북(南北)으로 관통(貫通)하는 하(河)의 서(西)쪽이고, 아주 높은 산(山)인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북진묘(北鎭墓)앞에 와 있다는 이야기다.
이럴 때는, 위의 본문(本文) 말처럼 「동(東)쪽을 바라보니, 오(吳)ㆍ제(齊) 두 나라는, 나의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인다.」는 말을 할 수 있고,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이와는 반대(反對)로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의무려산(醫巫閭山) 북진묘(北鎭墓)에서 동(東)쪽이라면 심양(瀋陽)쪽이고, 또 동진(東進)하면, 압록강(鴨綠江)에 닿고, 더 동진(東進)하면, 함경도(咸鏡道) 땅에 닿을 것이다.
요녕성(遼寧省)의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있는 북진묘(北鎭墓)에서, 산동성(山東省)이나 강소(江蘇), 절강(浙江)은 서남(西南)쪽 바다 건너 수천(數千)리에 있다.
➊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대로라면 : 용만(龍彎)에서 압록강(鴨綠江)을 도강(渡江)한 후(後), 심양(瀋陽)까지 계속(繼續) 북행(北行)이어야 올바른 이야기가 된다.
심양(瀋陽)에서 서(西)쪽으로 길을 잡아 서진(西進)을 계속하면 의무려산(醫巫閭山)에 닿는다.
➋ 그러나 연행록(燕行錄)의 저자(著者)는 말하기를 :〈용만(龍彎)에서 압록강(鴨綠江)을 도강(渡江)한 후에 동(東)쪽을 바라보니 “용만(龍彎)과 철산(鐵山)이 바라다 보인다.”〉고 하였으니, 도강(渡江) 이후(以後) 계속(繼續) “서진(西秦)”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반도(半島) 땅과 그 북(北)쪽 땅의 지세(地勢)로 보면 : 압록강(鴨綠江)을 도강(渡江)한 뒤에, 서(西)쪽으로 가면, 사신단(使臣團) 수백(數百)명은 바닷물 속에 “수장(水葬)”되고 말았을 것이니, 지금 보고 있는 연행록(燕行錄)은 존재(存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쓴 연행일기(燕行日記)를 보고 있다는 것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후, 서(西)쪽으로 계속(繼續) 전진(前進)했지만 바다(海)는 없었고, 이곳은 청(淸)나라 땅이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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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에서 말하는 여정(旅程)에 대해서 또 다른 연행기(燕行記)인 호조참판(戶曹參判) 강선(姜銑)【1,645~ ?) 】의 일기(日記)를 보자.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1,780년의 것이고,
강선(姜銑)의 연행록(燕行錄)은, AD1699년∼1700년의 것이다.
➊ 연행록 / 기묘년(己卯年, 1699) 12월 18일 임오(壬午) / 망해정(望海亭)과 심하역(深河驛), 망자점(網子店), 유관(楡關), 백석포(白石鋪)를 경유하여 무녕현(撫寧縣)에 도착하였다.
삼가 부친의 시에 차운하다〔敬次家尊韻〕:《朔漠胡天竟日風 : 오랑캐 사막 땅에 종일 바람이 부는데》라고 하였으며,
➋ 연행록 / 기묘년(己卯年, 1699) 12월 / 22일 병술(丙戌)
풍윤현에서 월사의 고시에 차운하다〔豊潤縣次月沙古詩韻〕: 《茫茫大漠浩無際 : 망망한 사막은 넓어 끝이 없는데》하였다.
➌ 연행록 / 경진년(庚辰年, 1700) 정월 / 12일 병오(丙午) : 《遙 知 薊 北 月 : 계북의 달빛은 아마도 / 同 照 洛 東 天 : 낙동강의 하늘도 함께 비추리.》
➍ 연행록 / 경진년(庚辰年, 1700) 정월 / 20일 갑인(甲寅) / 흐림. 그냥 머물러 있었다. 서장관이 와서, 만나보았다.
동악의 시에 차운하다〔次東岳韻〕: 《滄 溟 連 渤 碣 : 푸른 바다 발해와 갈석산(碣石山)에 이어지고 / 楡 塞 亘 幽 燕 : 느릅나무 변방은 유연으로 뻗어있네 / 偶 作 西 河 縶 : 우연히 서하에 붙들려 있노라니》하였다.
➎ 연행록 / 경진년(庚辰年, 1700) 2월 / 15일 기묘(己卯) / 계주(薊州)에 도착하여 독락사(獨樂寺)에서 잠을 잤다.
또 동악의 시에 차운하다〔又次東岳韻〕: 《窮磧春回靑入柳 : 사막에 봄이 돌아와 푸른빛이 버들에 드는데》하였다.
➏ 연행록 / 경진년(庚辰年, 1700) 2월 / 29일 계축(癸丑) / 흐림. 바람이 불었다. 신점(新店)을 지나 50리 더 가서 이도정(二道井)에서 조반을 들었다. 조반을 든 후 일판문(一板門)을 지나 50리 더 가서 백기보(白旗堡) 손씨(孫氏) 성의 사람 집에서 잠을 잤다.
이도정 도중에 동악의 시에 차운하다〔二道井道中次東岳韻〕 : 《滄 溟 渤 灪 連 窮 磧 : 발해 큰 바다 넘실넘실 사막으로 이어져 있는데》하였다.
➐ 연행록 / 경진년(庚辰年, 1700) 3월 / 초1일 갑인(甲寅) / 아침에 비가 오고 저녁에 개었다. 대황기보(大黃旗堡)와 소황기보(小黃旗堡)를 지나 주류하(周流河)의 찰원에서 저녁을 먹었다. 15리를 더 가서 강을 건너 고가자(孤家子)에 있는 장씨(張氏) 성의 사람 집에서 잠을 잤다.
백기보 도중에서 동악의 시에 차운하다〔白旗堡道中次東岳韻〕 : 《絶 漠 還 愁 盡 日 風 : 사막에서 도리어 종일 부는 바람이 걱정이네》하였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는 “각 개인(個人)의 사고(思考)역량(力量)에 달린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역사통설(歷史通說)논자(論者)들의 막무가내(莫無可奈)식 조선사(朝鮮史)이야기가 귀에 박혀버린 많은 국민(國民)들에게는, 이해(理解)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버리고, 진실(眞實)된 조선사(朝鮮史)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국민(國民)들 손에 달린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와 정치세계(政治世界)는, 신(新)사대주의(事大主義)【친일(親日)과 친미(親美)로 대표(代表)되는 사대주의(事大主義)를 말한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지금 사대주의(事大主義)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의 만연(蔓延)으로 인한 폐해(弊害)가 워낙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 십 수년(十 數年)사이에 이를 혁파(革罷)한다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하다고 보아진다.
2019년 03월 0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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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의 대부분 연행록은 현 서울에서 현 북경까지의 구간별 거리가 맞추어저 있어 믿을수 없습니다. 즉 거리가 왜곡된 것이죠.... 방향 역시 대부분이 현 여행로에따라 맞추어저 있어 방향 역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현 여정의 방향과 맞추어저 있지 않은 기록도 많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역사적 사실 방향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노릇입니다. 왜곡자들은 의도적으로 방향을 틀었을 수도 있지만 일괄적으로 바꾸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기록은 맞는 방향도 있고 틀린 방향도 있단 생각에 방향으로 풀기가 난해 합니다.
문무님께서 추적하신 서쪽으로의 여정이 역사적 사실(fact)과 맞다면 청나라는 현 중국 서부나 중앙아에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향이 왜곡된 것이라면 가령 西자가 실제는 北자 였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니 신중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더구나 거리와 방향이 왜곡된 마당에 현 강단사학의 방향과 다르다 하여 진실된 방향이라 결정하고 결론을 내린다면 난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거리와 방향은 믿지 않고 다만 참고만 합니다...
조선의 연행사들이 갔던 곳에 대한 많은 정보는 그래도 연행록에서 얻을수 있고 특히 변하지 않는 산 하천 사막 지형지세 기후 동식물의 생태계모습 등등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더하여 당시 사람들의 문화 풍속 유물 그림 등 다양한 소재를 접목시켜 추적해 보아야 더 정확성이 있다 할 것입니다.
압록강이라는 큰 강을 건너갔다는 것은 누구도 인정하는 사실(fact)일 것입니다. 강 폭이 커서 소서강 중강 상강을 차례로 건너가는데 중간에 있는 큰 섬(?)은 십리나 되어 파시가 열리기도하고 기생들이 말타고 놀 정도입니다.
<요동 왼 편으로 창해를 끼고 있다.>...이 말은 현 반도사관에 맞춰진 느낌이 농후 합니다 현 발해(뽀하이만)를 끼고 도는 형국과 너무 유사하여 왜곡의 냄새가 물씬 풍김니다... 그렇지만 발해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도 없읍니다. 발해나 북해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요동 진펄에 길을 잃을까 버드나무를 북경까지 심었다( 이 말도 사실(fact)일 것입니다.) 했으니 이러한 생태를 무시할수 없죠... 지금의 반도사관 여정과도 안맞죠...
더욱더 중요한 것은 유주는 모래개천의 불모지라 했고, 물맛도 형편없고, 길을 잃을까 버드나무(혹은 느릅나무)를 북경까지 심었다 했으니 (특히 버드나무는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연행사들은 지대가 낮은 하천 주변으로 쭉 여행을 한것으로 보입니다.
‘의무려산과 북진묘’도 중요한 몇가지가 보입니다.
의무려산의 醫는 육체의 치료를, 巫는 정신적 치료를 한다 하니 황제내경을 썼다는 헌원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헌원씨가 현 만주에 있는 의무려산과 관계있다 한다면 부적절해 보이니 반도사관에 의한 지금의 의무려산은 맞지가 않죠...북진묘도 鎭이 北쪽에 있다는 말이니 즉 북진묘를 만든나라의 궁궐은 북진묘의 남쪽에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조선 연행사들이 곧장 북경을 향하여 의무려산을 거치지 않아도 될 것을 거처간 것이기에 의무려산 가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북경에 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반도사관의 여정처럼 빙 돌아서 가는 로정은 아닐 것 같습니다.
(등에 내리쬐는 했볓이 따갑다.)...이런내용도 나오는데, 가장 더울때를 오후 2~3시로 본다면 이들은 북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 라고 생각되죠...(북쪽으로 여행을 해야 등뒤에서 했볓이 내려쬐니......너무 디테일 한가요...?)
<발해 큰 바다 넘실 넘실 사막으로 이어저 있는데>...
이 말에 발해가 현 바다가 아닌 내륙호나 내륙의 강(요하)을 낀 넓은 강으로 생각됩니다(‘발해가 넘첬다’...등의 기록으로 보아)..사막은 검은 모래이고 석탄 분진이라 여러번 나와 이 또한 fact일 것입니다. 석탄을 빼 놓을 수가 없죠...이 검은모래 사막이 비가 오지 않는 겨울에서 봄까지 노출되어 있고 했볓에 말라서 사막이 된 것이죠.. 이러한 모래 사막이 태양의 열을 받아 신기루 현상(계문연수)이 나타난 것이죠...(운전할 때 아스팔트길에 자주 보이는 현상과 같이...)
그 외 여러 유물 유적 문화(탑이나 사찰 묘(관제묘 낭랑묘...) 등도 함께 고려해 보면 연행사들이 갔던 땅의 대략적 모습이 그려집니다.
안녕하세요. <맑은영혼>님!
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존중하고, 동의합니다.
이런 여러가지 변수 때문에 저자(著者)가 다른 연행기록을 여러 번에 거쳐 소개하고, 그 내용에 대해 다각적으로 고찰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연경(燕京)"의 확정적 위치에 대해서는 '두곳 내제 세곳'으로 압축해 놓고 그 지세와 기후등을 비고해 보는 것입니다.
연행록외 고전의 지리지나 본기, 식화지등에서 말하는 것들도 참고해 봅니다.
더 많은 고전속에서의 연경에 대한 지세를 살펴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관심과 성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더 많은 분들이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것 같아 반갑습니다...저같은 문외한은 그저 님들이 연구한 것을 읽고 감탄하는 일 밖에 하지 못하지만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더 많은 분들이 이 연구에 참여해 주셨으면합니다
문무님도 맑은영혼님도 모두 건강하고시 계속 연구해 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