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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물기 어린 계단이 겁나요”
“다리에 힘이 없어서 자주 넘어져요. 비 오는 날, 계단 오르내릴 때는 겁 나요. 바닥에 물기가 있으니깐. 그래도 지금은 활동보조인이 같이 다니니 예전만큼 넘어지진 않는데 학교 다닐 때는 활동보조가 없어 많이 넘어지고 쓰러지곤 했어요. 그때는 사람들이 도와주거나, 아파도 혼자 참았죠.”
정주현 씨(32세)는 ‘걸어 다닐 수 있는’ 뇌병변장애 1급이다. 정 씨는 현재 경기도 용인에 있는 수지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정 씨를 만났던 19일 이른 8시, 정 씨는 이날도 활동보조인의 보조를 받으며 센터로 출근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두 손 사용이 자유롭지 않은 정 씨는 눈이나 비가 와서 우산을 들어야 하는 날이 반갑지 않다.
“손이 불편해서 우산 못 들어요. 답답하죠. 우산 보조기구가 있으면 좋겠어요.”
정 씨의 활동보조인은 오른손으론 정 씨를 부축하고 왼손에는 우산을 든 채, 정 씨와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정 씨는 출·퇴근 시 항상 버스를 이용한다. 정 씨의 집에서 센터까지는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가량 걸린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한다.
첫 번째 버스는 계단버스였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없는 정 씨에게 출입구가 계단인 버스가 힘겹다. 활동보조인의 부축으로 정 씨는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버스 계단을 오르내렸다. 두 번째 온 버스는 다행히 저상버스였다.
정 씨는 “센터까지 가는 810번 저상버스는 몇 대 없다.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라면서 “2008년도부터 센터를 다녔는데 버스 이용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정 씨 활동보조로 3년째 일하고 있는 김 아무개 씨는 “예전에 주현 씨가 혼자 다닐 때는 무릎과 얼굴에 크게 상처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라면서 “비장애인은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지면 자기 방어를 할 힘이 있는데, 주현 씨는 다리에 힘이 없어 나무 쓰러지듯 푹 쓰러진다”라고 말했다.
한 달에 93시간 활동보조를 지원받는 정 씨는 활동보조 시간 대부분을 출·퇴근과 외출할 때 사용한다. 그러나 한 달 93시간은 정 씨에게 많이 부족하다.
“출·퇴근이 제일 문제고, 외출할 땐 따로 활동보조인을 호출해요. 그런데 활동보조인이 어디 가셨거나 하면 못 오죠. 활동보조인이 못 온다고 하면 외출을 취소하는 때도 잦고…. 꼭 가야할 땐 넘어져도 그냥 혼자 가요. 아파도 참고 가야죠.”
두 손 사용이 불편한 정 씨는 활동보조 시간을 외출할 때 대부분 사용해 식사 보조는 받지 못하고 있다. 정 씨는 “반찬을 집어먹을 수 없어 다른 사람들이 밥 위에 반찬을 올려줘야 먹을 수 있다”라고 답했다.
정 씨의 활동보조인은 정 씨를 사무실까지 보조한 후 돌아갔다. 활동보조인은 정 씨의 퇴근 시간에 맞춰 다시 온다. 자리에 앉은 정 씨는 서둘러 업무를 처리했다. 정 씨는 오른손 약지와 왼손 검지를 이용해 컴퓨터를 사용한다.
“이십 년 전엔 유모차 데리고 버스 탈 생각? 아예 하지도 못했어!”
11시 죽전역. 수지센터는 지난주부터 죽전역 앞에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저상버스 100% 도입을 위한 용인시민 서명전'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에 정 씨도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장애가 있는 정 씨가 시민에게 선전물을 나눠주고 이에 대해 설명하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제가 (언어장애로) 말을 잘 못해서 그냥 종이만 나눠주니 사람들이 거의 안 읽고 지나가는 것 같아요. 그게 마음이, 참 불편해요. 설명해도 사람들이 잘 못 알아들으니 답답하고…. 말을 잘한다면 사람들한테 더 잘 전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깝죠. 손도 불편하니 나눠줄 때도 자꾸 떨어뜨리고.”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오른손에 꼭 쥔 선전물들의 맨 위 장이 구겨져 있었다. 활동보조인이 없어 자신의 다리 힘으로 온전히 혼자 걸어야 하는 정 씨는 휘청거리며 시민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갔다.
한편에서는 수지센터 이도건 소장이 저상버스에 대해 지나가는 시민에게 알리고 있었다. 이날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주최하는 '저상버스 100% 도입 전국동시다발 버스정류장 1인시위’가 열리는 날이다
이 소장은 “턱이 없는 버스, 저상버스는 모든 교통약자가 이용할 수 있다”라면서 “법에 따라 용인시는 올해까지 전체 버스의 40%를 저상버스로 도입해야 하지만, 현재 4% 정도만 도입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이 소장은 “시민의 참여로 제도를 개선할 수 있다”라며 지나가는 시민의 참여를 촉구했다.
중증장애인들의 오랜 투쟁 끝에 2005년 제정된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에는 장애인과 교통약자의 이동권 보장을 위해 저상버스, 특별교통수단(장애인콜택시)의 도입을 의무화하고 있으나, 현재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2차 편의증진 5개년 계획(2012~16년)에서 경기도와 광역시의 저상버스 도입률을 40%로 정했다. 그러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배포한 보도자료를 보면 현재 경기도 전체 저상버스 도입률은 8.7%에 그치고 있다. 열 대 중 한 대도 되지 않는다.
이날 서명에 참여한 이상래(48세) 씨는 “지금은 아이들이 다 커서 대학생이지만, 아이들이 유모차 타고 다닐 땐 버스 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라면서 “그런데 버스만 세우면 뭐하나. 장애인들이 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버스 기사들이 너무 빨리만 간다.”라고 꼬집었다.
비장애인과 휠체어 이용 장애인 사이에 있는 ‘걸을 수 있는 장애인’
“엄청 넘어져서 오른쪽 무릎은 상처도 많이 나고 붓기도 많이 붓고. 걸으면 아프니깐 제대로 못 걸어요. 집으로 가는 길이 오르막길인데 이젠 오르막길도 잘 못 오를 정도로 힘들고, 아파요.”
정 씨는 “거리의 턱들이 제일 불편하다”라면서 “(걸으면서) 넘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다리에 힘이 없어 자주 넘어지는 정 씨는 계속되는 부상 때문에 다리 상태가 더욱 악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 씨의 어려움은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저는 걸어 다니니까 사람들이 '쟤는 별로 안 심해 보이는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 생각이 그런 것 같아요.”
비장애인과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사이에 ‘걸을 수 있는 장애인’이 있다. 그래서 정책이나 담론에서도 배제되고 소외되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계단 있는 버스는 차별 버스”라고 외치며 “장애인은 계단 버스를 타지 못한다”라는 이야기에서도 주어는 늘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의 이동권이 보장되면 이들의 이동권도 보장되는 걸까. 아니, 어쩌면 이들 또한 시각이나 청각, 발달 장애인처럼 독립적으로 이들의 불편과 욕구를 파악해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과는 별도의 대안과 정책이 필요한 걸까. 어쨌거나 정 씨는 오늘도 ‘넘어지고 다칠까 봐’ 걱정이다.
“부모님은 제가 외출할 때마다 넘어질까 봐 걱정이 커요. 어렸을 때도, 지금도. 넘어지지 않고 잘 다닐 수 있게 거리 턱도 없어지고, 저상버스도 도입되면 좋겠어요. 혼자서도 잘 다닐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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