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재李道宰는조선말의 관료이고, 경상도 암행어사 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성일, 聖一, 심재, 心齋, 운정, 篔汀
출생 1848(헌종 14), 서울
사망 1909
국적 한말, 한국
필자 조사한 이도재의 흔적을 글을 써본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일(聖一), 호는 심재(心齋)·운정(篔汀). 아버지는 명익(溟翼)이며, 건익(建翼)에게 입양되었다.
강위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882년(고종 1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부수찬으로 등용되었다. 이듬해 6월 경상좌도암행어사로 나갔다 와서 진결(陳結)·은루결(隱漏結)을 색출하여 징수한 수입으로 양전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 동부승지·참의군국사무·이조참의·성균관대사성 등을 지냈다. 1886년 호군으로 있다가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1894년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자 풀려나와 군국기무처의원이 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이 확산되자 전라도 위무사 겸 순찰사로 나가 김개남(金開南) 부대를 격파하고 그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1895년 군부대신을 거쳐 학부대신이 되었으나 유길준(兪吉濬) 등이 단발령을 강행하자 반대상소를 올리고 사직 후 귀향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 새 내각이 구성되자 각처에서 봉기한 을미의병을 해산시키기 위해 동로선유사(東路宣諭使)로 특
파되어 강원도 의병의 선유에 나섰다. 1898년 외부대신으로 있을 때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가 절영도(絶影島) 조차를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친러파 김홍륙(金鴻陸)의 조작으로 파면되었다
. 그해 10월 다시 학부대신이 되어 지석영(池錫永)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성의학교의 설치를 인가했다. 그뒤 내부대신서리·법부대신·의정부찬정 등을 지냈다.
1904년 6월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강요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김종한(金宗漢) 등과 함께 농광회사를 신설하여 개간사업을 하고, 광업 등 국내의 모든 이권에 대한 외국인의 침탈을 막으려 노력했다.
1907년 시종원경으로 있을 때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의 양위를 결정하는 어전회의가 열리자, 병을 이유로 입궐하지 않았다.
고종이 결국 양위하게 되자 박영효·남정철(南廷哲) 등과 함께 평양에서 올라온 시위대 제2연대의 호응을 얻어 그해 7월 20일 고종의 양위식을 기회로 매국 각료들을 모조리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탐지되어 미수에 그쳤고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시호는 문정이다.--다음백과에서 발췌 하였다.
조선말의 이도재는 곳곳에 흔적이 남겼지만 충청도는 없다.
그리고 동학혁명의 지도자 김개남을 아무런 보고 없이 처형하여 전라도에서 안 좋은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앞의 자료에는 통도사 각자는 빠졌으며, 다른 지역에도 암각자 있다고 하지만 아직발견 하지 못하였다.
이도재를 공부 하는 사람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옥산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