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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현진입니다.
이번 여름 쾌속 바람이 부는가 하더니, 연이은 텁텁한 습도에 습격?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더위에, 장마에 피해 없으시길 기원합니다.
인천 책사넷 7월 모임 잘 진행되었습니다.
오랜만에 황희수 선생님께서 와주셔서 더 좋았습니다.
송현진, 법륜 스님의 행복, 법륜 지음
요즘은 나라는 육체의 그릇에 무엇을 담을까 라는 고민보다, 그릇을 어떻게 만들어나갈까를 고민을 더 합니다. 그래서 법률 스님의 책을 꺼내 읽었습니다.
‘좋고 싫음의 감정에서 자유롭기’
나와 사고방식과 관점이 다른 사람이 있을 때 굳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사귀려고 할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을 회피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상대방을 내 마음에 맞게 고치려고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됩니다. (중략) 따라서 어차피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이라면 상대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나를 편안하게 하는 길입니다. ‘내 성격도 못 고치는데 내가 어떻게 남의 성격을 고치겠나!’ (중략) 좋고 싫음의 감정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중략) 상대가 좋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고 싫지만 함께 있을 수 있을 수밖에 없을 때는 그 좋아하고 싫어함에 내가 속박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문득 당사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삶의 목표와 지향점을 함께 정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리고 다시금 새겨넣습니다.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수선하려고 하지 말 것, 당사자를 만나 ‘문제’가 보이거든 직접적으로 콕 집어 말하거나, 변화해야 할 점을 말해주거나, 내가 혼자 판단하여 진단하려 들지 말 것. 당사자의 삶에 대해 경청하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관계가 시작되는 것임을 잊지 않을 것. 변화와 실천 목표를 세우고 그것만으로 관계를 구축하려고 하면 자칫 당사자는 변화하지 못하면 나는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인가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마라’
이 말의 의미는 가족과 세상일에 무관심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그 대상이 자식이라도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중략) 지나치게 간섭해도 안 되고 너무 무관심해도 안 됩니다. 애정을 갖고 지켜보다가 상대가 도움을 요청할 때 적절하게 도와주는 게 좋습니다. (중략)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자꾸 붙들고 귀찮게 하고, 정작 도움을 요청할 때는 안 도와주면 신뢰감이 떨어져요. 도와주고 싶지만 상대가 어떻게든 혼자 해보겠다고 할 때는 지켜보는 게 좋습니다. (중략)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 유의할게 있어요. 상대를 내 기분대로 불쌍하다고 판단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필요로 할 때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를 자초할 수 있어요. (중략) 우리가 남을 도와줄 수 있다거나 내가 남을 가르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내가 어떤 말을 해줘야 저 사람에게 위로가 될까 하는 마음도 잘 살펴보면 내 욕심입니다. 따라서 남을 돕고자 할 때는 먼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경험이 있으면 그것을 들려주는 가벼운 마음이 좋습니다.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갖은 어려움에 놓여있는 당사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사회에 다양한 자원들을 알기에 때때로 적절한 자원을 연결해주고는 합니다. 밑반찬이 될 수도 있고 병원 동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당사자와 깊이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당사자가 혼자 해보려고 할 때는 그것이 느리더라도 반드시 지켜줘야 합니다. 복지는 효율이 먼저가 아니라, 당사자의 기능을 살리는 일입니다. 가령 몸이 불편하여 식사가 한 시간이 걸리는 당사자가 있더라도 스스로 하고 싶다면 그대로 두는 겁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화를 다스리는 부분을 더 감명 깊게 읽었지만 위에 발췌하고 생각을 적은 부분은 선생님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김상진 [어쩌면 스무 번] 편혜영, 문학동네
주인공은 정신적 어려움을 겪어 실직했고, 치매에 걸린 장인어른을 아내와 함께 모시고 살아요. 아내의 오빠와 언니가 장인을 돌보는 명목으로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세 식구가 다같이 연고가 없는 시골로 내려가요.
이사 온 첫날 지역유지 찜질방 사장님이 찾아와 옥수수를 가져다 주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근데 나중에 장보러 읍내에 갔더니 이곳 사람들 다 부부를 알고 있는 거예요. 찜질방 사장님이 동네에 다 이야기한거죠.
“옥황상제는 우리 생활을 자세히 관찰하십니다. 매년 행실을 평가해 상을 내리세요. 행태를 다 보고 벌도 내립니다. 전부 지켜보고 계십니다. 옥황상제는 언제나 그렇게 하십니다.” (중략)
“식구들은 서로서로 행태를 관찰하지요.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죠. 그것이 매년 황제의 귀와 눈에 들어갑니다. 황제는 보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우리는 고객을 지켜드려요.”
“지켜요?”
아내가 되묻자 남자가 대꾸했다.
“재산과 목숨이요. 우리 회사에서 하는 일이죠.”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이 아니라 목숨이라니. 절박하고 간절해 보여서 웃음이 났다.
아내가 내게도 명함을 보여주었다. 생소한 이름의 보안 회사였는데 낯선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유니폼에 붙은 촌스러운 알파벳 로고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소형차에도 로고가 붙어 있었다.
전도사들에 비하면 보안 회사 직원은 무해해 보였다.
이후 여러 사람이 집에 찾아옵니다. 먼저 찜질방 사장님이 조심하라고 일러준 사이비 종교 전도자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고 얼마간의 헌금을 이야기하지만 주인공은 적절히 돌려보냅니다. 다음으로 보안업체 직원이 찾아와요. 주인공 집은 큰 옥수수밭을 지나야 가장 가까운 이웃집이 나오는 외진 곳입니다. 그러니 보안서비스가 필요하다고 하죠.
사이비 종교도 보안업체도 모두 외딴 곳에 살게 된 사람 그것도 중증 치매노인을 모시는 사람의 불안, 어찌보면 현대인의 불안에 대응하는 존재입니다. 먼저 옥황상제는 늘 지켜보고 상이나 벌을 내리는 존재이니 관찰자이자 심판자예요. 늘 지켜본다는 점에서는 보안업체의 CCTV와 같죠. 하지만 보안업체는 심판자가 아니라 보호자 역할을 자처합니다. 물론 둘다 돈을 요구하는 공통점이 있지요.
누가 더 무해한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소설 속 사이비 종교는 다시 찾아오지 않지만 보안업체는 다시 찾아오고 주인공 부부의 불안을 점층시킵니다.
“길거리에서 49,527건, 단독주택에서 19,515건, 아파트에서 14,333건 발생했습니다. 단독주택이 아파트보다 무려 1.36배나 많지요. 이게 다가 아닙니다. 강도, 살인, 강간 등의 범죄도 길거리에서 4,469건, 단독주택에서 2,487건 발생했습니다.” (중략)
“길거리에 나서면 각종 범죄에 쉽게 노출됩니다. 그다음이 단독주택이고요. 단독주택에서 위험을 겪을 확률은 이웃이 누군지 모르는 아파트보다 1.36배, 별의별 사람이 모이는 유흥업소보다 1.4배, 누가 묵는지 모를 숙박업소보다 2.9배 높습니다. 집에 있다가 범죄를 당하는 거죠. 이런 골짜기 외딴집은 단독주택이 아니라 길거리로 보는 편이 낫습니다. 잠금장치가 허술한 모텔이나 폭력배가 드나드는 읍내 노래방이 이 집보다 안전합니다.”
보안업체 사람들은 통계를 계속 들먹입니다. 통계와 확률로 주인공 부부의 불안을 자극하지요. 다음으로 이들은 이 집의
원래 주인이었던 어르신이 도둑들에 의해 구타 당했고 꽁꽁 묶여 있다가 2주 뒤에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사회사업가로서 혹 내가 당사자의 이야기를 다른 곳에 전하는 찜질방 사장님, 관찰자이자 심판자 역할을 따르는 사이비 종교 전도자, 여러 논리로 당사자를 문제시하고 필요한 것은 대신하고 대행하는 해결사처럼 구는 보안업체 사람 같지 않을까. 아니면 당사자의 문제와 불안을 드러내어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사람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현환, 장애의 역사, 킴 닐슨,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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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요?
장애의 개념을 몸의 손상, 혹은 정신의 손상으로만 봐야 할까요? 손상되었으면 장애라고 해야 할까요?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할 때 장애 개념을 궁리했습니다.
일하다 보면 장애를 15개의 범위로 나누고 일반화했던 적이 적잖습니다.
당사자를 만나다 보니, 공부하다 보니 장애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장애 개념이 사회사업 실제를 얼마쯤 규정한다고 합니다. 장애의 보는 관점에 따라 지원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하지요. 장애 개념이 당사자를 대하는 마음 태도 언행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고 합니다. 마음 태도 언행이 사회사업 과정과 성과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장애개념, 머리말)
이런 궁리가 있을 때 우연히 만난 책입니다.
장애의 역사에서 보는 장애의 개념은 자본주의에서 사람의 가치를 어떻게 보고 있고,
이 관점에서 장애가 어떻게 정의되고 다루어졌는지 설명합니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장애를 다루는 것에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발췌 (쪽수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 본래 모습이 그러하듯,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 의존하여 살아간다. (…) 우리는 상호 의존하는 존재다.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 북아메리카 토착민에게 ‘장애’는 신체의 손상이 아니라 공동체와 관계가 약하거나 없어지는 경우에 생겨나는 것이었다. 공동체의 다른 이들과 호혜활동을 하며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한, 다양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의 가치는 폄하되지 않았다. (...) 조화 속에서 사람들은 호혜관계를 맺고 살아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재능을 타인과 나누고 타인의 재능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자본주의가 유럽을 지배하기 시작한 17세기, 장애를 정의하는 일차적 기준은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여부였다.
장애는 스스로를 경제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뜻으로 정의되었고, 그들은 북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탈 수 없었다.
1818년 제정된 미국 독립전쟁 연금법 법적 사회적 복지의 범주에서 장애를 정의했다. 이 법에서는 19세기 초 장애의 정의에 따라 실명, 다리 절단, 마차 사고로 인한 소 부상 등의 손상으로는 장애인이 되지 않는다고 정했다. 연금법에 따르면 장애는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을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했다.
대다수 농인 노동자들과 농인 단체들은 장애인이 고용될 수 없는 범주로 분류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농인은 장애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 농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언어를 쓰는 공동체라고 주장했으며 온전한 시민으로서 자신들의 가진 잠재력과 자신들의 정상성을 강조했다.
스트래챈은 장애를 사회복지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로 이해했다. 당시 떠오르던 재활전문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장애에 감정적, 신체적으로 적응하는 것보다는 장애인을 배제하는 사회구조와 행태를 바꾸는 정책과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스트래챈은 장애가 계급과 노동 문제라고 주장했다.
장애인은 사회정책, 고용 관행, 건축, 문화적 태도, 교육 등 사회 전 분야에 깊게 스며든, 장애인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고, 결핍된 사람으로 바라보는 비장애중심주의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편견과 차별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 장애인이 모두 재활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집 밖으로 나가 직장을 구할 수 있는 기회다.
장애인 운동은 여러 장애인들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다. 장애인들은 미국의 역사에서 자신의 자리에 대한, 그리고 누가 그 자리를 정의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천 책사넷 모임 잘 마쳤습니다.
8월 모임 안내합니다.
- 일시: 2026. 8. 26.(수) 19:00
- 장소: 투썸플레이스 제물포점
- 도서: 자유도서
- 함께 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언제든지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송현진 선생님 고맙습니다.
세 분 선생님의 발췌문과 적용 말씀을 잘 읽었습니다. 참 좋습니다.
8월 모임도 잘되기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늘 응원 감사드립니다. 8월 모임도 잘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