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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장어구이 | 꽃게탕 |
강화도의 먹거리
강화도는 풍부한 먹거리로 인하여 눈과 입이 즐거운 곳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갯장어 구이를 먹었다(1인분 55,000원)
육지에서 먹던 장어와는 차원이 다른데, 쫄깃쫄깃한 식감으로 인하여 황제가 된 느낌이 들었다
마르코 대부님의 조카가 소개해주신 꽃게탕집도 우리의 입맛을 만족시켜 주었다
마니산펜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마니산펜션에 여장을 풀었다
우리는 2층 전체를 사용했는데, 널찍하고 아늑하여 편안하게 쉬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그림 공부와 독한 물을 마시는 바람에 수면 시간이 줄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가자, 마니산으로
아침 8시에 청국장으로 식사를 하고, 펜션 옆으로 나있는 마니산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마니산은 비교적 낮고 수도권에 가까운 거리에 있어 친정을 찾는 기분으로 편하게 찾을 수 있다.
해발이 낮더라도 주능선이 암릉으로 되어 있어서 등산의 묘미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산이다.
동남으로 가느다랗게 뻗은 능선을 따라 오르다 보면 망망한 서해를 조망할 수 있다
행복한 휴식
마니산 정상과 강화도의 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너른 암반 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구한말 서구열강에 맞선 항쟁 유적까지 한반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코끝을 휘감아 도는 짭쪼름한 갯내음과 갯마을 풍경도 도시 먼지에 막힌 숨통을 확 트여준다.
또한 신앙인에게는 구한말 신앙 선조들이 피흘린 '순교의 섬'이기도 하다.
참성단(塹星壇)
참성단은 자연석을 쌓은 것인데, 기단(基壇)은 지름 4.5m의 원형이고 상단은 사방 2m의 네모꼴로 되어 있다.
이 단의 축조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4,000년이 넘는 유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마니산은 성역(聖域)으로 보호되어 있으며, 매년 개천절에는 제전이 올려진다.
그리고 1953년 이후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매년 채화(採火)하고 있다.
참성단은 단군왕검이 백성들에게 삼신(三神)을 섬기는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의 아들로 하여금 직접 쌓게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단군이 이곳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해서 ‘제천단’이라 부르기도 한다
새로 반듯하게 복원한 참성단은 예전의 모습과 달리 신비스런 느낌이 사라져버려서 많이 아쉬웠다
마니산(472m)
8명의 회원 모두가 무사히 정상에 올라서 상쾌한 바닷바람에 몸을 의탁하였다
마니산의 원래의 이름은 두악(頭嶽)으로 마리산, 머리산이라고도 부른다
특히 ‘마리’란 머리를 뜻하는 고어로, 강화도뿐 아니라 전 민족의 머리로 상징되어 민족의 영산으로 숭앙되어왔다.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 산정 부근은 경사가 심하며, 서해안에 산재한 섬과 김포평야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참성단 소사나무(천연기념물 제502호)
참성단의 소사나무는 우연히 씨가 날아와서 자랐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의미를 부여할만한 이유가 있어서 심고 가꾸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우리의 옛 자료에서 이름 없는 이 작은 나무에 관련된 기록은 만날 수 없다.
소사나무는 신에게 올리는 깨끗한 징표 같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소사나무를 심은 뜻은 소사나무를 통하여 신과 소통하려는 바람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마니산의 고양이들
마니산 정상에 잇는 헬기장은 여러 마리의 고양이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생김새와 색깔이 각양각색이며, 매우 귀여워서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우리가 당도하자 우르르 몰려들었는데...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것은 고양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산이다
올라갈 때는 능선길을 이용했는데 하산은 지독하게 힘든 계단길을 선택하였다
강화도는 고려, 조선의 도읍지와 가까웠고, 섬이었던 관계로 여러 차례 천도(遷都)와 몽진(蒙塵)의 땅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화도 곳곳에 진보(鎭堡)와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진보가 12개, 돈대가 53개나 되었다
바람은
나무들이 끊임없이 떨구는 옛기억들을 받아
저렇게 또다른 길을 만들고
홀로 깊어질 만큼 깊어져
다른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우리들 그 헛된 아우성을
쓸어주는구나
혼자 걷는 길이 우리의 육신을 마르게 하는 동안
떨어질 한 잎살의 슬픔도 없이
바람 속으로 몸통과 가지를 치켜든 나무들
마음 속에 일렁이는 잔등(殘燈)이여
누구를 불러야 하리
부디
깊어져라
삶이 더 헐벗은 날들을 받아들일 때까지.............................................박영근 <11월> 전문
전등사(傳燈寺)
꽃게탕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강화도의 명찰 전등사에 입장하였다
전등사는 창건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후기 정화궁주(충렬왕의 원비)의 원찰(願刹 :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산성과 사고(史庫)를 수호하는 임무를 지닌 중요한 사찰이었다
나부상에 대한 아쉬움
전등사의 대웅전은 보수공사 중이라 가림막이 둘러져 있었는데, 나부상을 보지 못해 매우 아쉬웠다
전등사 대웅보전의 네 귀에서 추녀를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의 전설은 유명하다
광해군 때 전소된 대웅전을 다시 지을 때 이 공사를 맡은 도편수가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와 정분이 났다
노임을 받은 돈을 주모에게 맡겨 놓았는데 주모는 공사가 끝나기 전에 이 돈을 몽땅 갖고 도망가 버렸다.
이에 앙갚음을 할 요량으로 네 개의 나체상을 만들어 대웅전 네 추녀를 떠받치게 하여 날마다 죄를 뉘우치게 하였다 한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도종환 <담쟁이> 전문
갑곶순교성지
돌아오는 길에 인천교구에서 성지로 조성한 갑곶순교성지를 참배하였다
갑곶(甲串)은 조선시대 수군 진영이 있던 자리로 구한말 신앙 선조들이 이곳에 잡혀와 순교의 피를 흘렸다
천주교인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이 갑곶돈대에서 효수되었다는 문헌에 따라 이곳을 성지로 조성하였다.
이분들은 세례명, 후손, 생애 등의 기록도 없는 성인들이다
온전한 믿음 그 하나를 지켜낸 것만으로도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게 된것이다
성지순례의 의의
믿음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를 사랑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나약한 신앙의 상태는 종종 우리의 십자가를 포기하게 한다.
그러나 성인들의 신앙을 돌아봄으로써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되고, 표양을 따라 살아 갈 때 성지순례는 큰 의의를 갖는다.
성지 순례는 하느님께 대한 흠숭의 의미뿐 아니라 회개와 성인에 대한 존경의 행위를 뜻한다
성지순례는 영적인 은혜를 받기 위함과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행위로 가톨릭 교회 안에 전래되어 왔다.
첫댓글 연산군에게서 '흥청망청'이란 말이 유래되었다는걸 첨 알았습니다
연산군은 각지에서 미녀를 구해오게 해서 음탕한 연회를 즐겼습니다
이때 조달한 흥청들로 인하여 국가경제가 피폐해진다 하여 흥청망국이란 말이 나왔다네요
이 말은 곧 '흥청망청'의 어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미쳐 날뛰며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간 연산군을 보니 측은지심이 들더군요
옛사람들 말은 다 일리가 있지요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깨달으며 삽시다
일신 우 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