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준 金珍俊(1896 ~ 미상)】 "대한광복군총영 중앙기관 내무부 기밀과장."
1896년 7월 9일 태어났으며, 본적지는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서천면(西川面) 인흥리(仁興里)이다. 이명은 김진준(金鎭俊)·이인순(李仁淳)·이영걸(李永傑)·송인수(宋仁洙) 등이다.
1919년 만세운동을 전후하여 배일사상이 더욱 깊어져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다. 1920년 (음) 2월 김봉규(金琫奎)의 권유를 받고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가입하였다. 상하이(上海)에서 『독립신문』, 『신한청년보』 등을 입수하여 한기복·김창빈에게 배포하였으며, 노동관·김재덕 등 군자금을 모집할 단원들을 확보하였다. 그 해 9월 이근배·최봉주와 더불어 강서군 반석면의 부호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였고, 김예진·이춘성·이철·김익수와 함께 대동군 용산면의 부호 6명으로부터 현금 1,830원을, 10월에는 조준묵과 함께 1,500원 이상의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9월 하순에는 김좌진의 부하인 강서군 옥석면 출신의 양제과, 청진의 이배근과 함께 옥석면의 부호 세 집을 찾아가 군자금 1,000원을 요구하였다가 평양경찰서에 탐지되어 양제과·이배근이 붙잡혔다.
1921년 1월 조창룡과 더불어 성천군에서 군자금 모금을 하다가 친일분자인 성천군 아파면장 이관종을 처단하기로 뜻을 모으고 1월 12일 거사를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조창룡은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았다. 평남 총령인 김봉규가 대한광복군 이탁(李鐸)으로부터 평남 각지에 광복군 지부를 설치하라는 명령을 받고 국민향촌회(國民鄕村會), 대한독립대동청년회(大韓獨立大同靑年會) 등을 조직하였으나 국내 활동이 점점 어려워지자 김진선·김형원·서달선 등 젊은 청년들을 주축으로 결사대를 구성하였다. 3월에 결사대 제6대장직을 맡아 대동군 이원면 일대의 재산가 10여 호를 조사하고 군자금 모금, 문서 배포, 무기 보관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4월에도 황해 신계군(新溪郡)에 있는 이희도의 집에서 새로운 독립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평양의 광복군 단체를 만나기로 의논하였다. 4월 27일에는 최선식과 함께 성천군 다미면의 부호 집에 잠입하여 군자금 200원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같이 활동하던 조준묵이 체포되자 만주의 관덴현(寬甸縣) 싼다오거우(三道溝)로 피신하였다가 일본군이 독립단을 수색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때 상하이의 김영수에게 권총 5정을 입수하여 가지고 들어와 김봉규·최선식 등에게 건네주었다.
대한광복군총영 중앙기관 내무부 기밀과장(機密課長)로서 만주와 상하이의 독립운동 단체와 통신하며 군자금 모금과 새로운 비밀결사 조직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평남·평북 경찰서의 합동 공격으로 5월 16일 김봉규가 붙잡히는 등 같이 활동하던 단원 29명이 체포되고 2명이 사망, 2명이 감옥에 가는 등 조직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또한 그 해 10월 9~10일 양일간 또 다시 한영수 등 단원 6명이 붙잡히면서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모금한 군자금 2,000원을 오동진에게 송부하고 조원걸·서달선·조병옥·한정렬 등 남은 대원을 데리고 강동군과 성천군 일대에서 수만 여원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지속하였다.
1922년 1월 1일 강서군 동진면 대성리 대동강 부근에서 광복군 단원들과 만나 광복군 중앙기관 조직과 임원을 선정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할 방법을 의논하였다. 1월 7일 주석환의 단원 대부분이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는 것을 보고 피신하였다가, 4월 8일 열차를 이용하여 평양을 벗어나 만주로 건너가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이를 탐지하고 같이 기차에 탑승한 평양경찰서 형사에게 신안주역에서 붙잡혔다.
1922년 11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28년 8월 27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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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준에 대한 구형 보도(『동아일보』 1922. 7. 10)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