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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13)】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13
잘못된 복음주의
문학을 말하는데 인생의 실 목적에서 유리된 예술이 있을 수 없다고 그랬습니다마는, 종교도 그렇지. 종교라는 게 개인이요, 단체할 것 없이 인생을 살리자는 게 목적이지. 그러니까 그렇다면 어떠한가 하니 이 현실에서 떠날 수가 없어. 그런데 근래에 오다가 이걸 제삼자의 입장에서 될수록 공정하게 비판을 한다면 어떠한가? 냉정하게 비판을 하면 뭔가 하니 한국의 기독교란 대단히 내세적인 종교로 돼버렸어. 내세가 있냐? 없냐? 뭐 그 토론은 별 문제로 하고, 언제나 아주 쉬운 말로 하면 잘 믿어서, 죽어서 천당 가는 게 목적이지. 이 실사회를 어떻게 하냐? 여기 살아가는 이 문제를 별로 전혀 생각을 안 하는 거 아니지만, 거기에 대해 생각이 적어요. 그렇게 되는 데는 다른 원인도 있을 겁니다. 일제시대에 일본 사람의 압박이 우선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압박이 강하니까 엄두를 낼 수 없는 그런 면도 있겠지마는 그러나 산 종교란 그렇지 않아요. 핍박이 오면 올수록 거기 대해서 항거할 수 있는데, 그건 초대교회에서 잘 보지 않아요? 그렇게 잡아 죽인다고 그러고 그랬어도, 그 카타콤 속에 들어가 믿으면서도 군인으로 잡아내 간다고 하면, 자긴 죽을 각오를 하면서도 군인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이러면서 기독교가 올라왔지. 반드시 뭐 밖에서 압박이 심하다고 해서 종교가 줄어들어간다고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이건 아무래도 우리 내부에 무슨 잘못이 있는 게, 이때껏 없던 걸 새로 받아들인 거는 좋았어. 참 감격해 받아들이는 건 좋은데, 그걸 가지고 받아들인 이것을 방법으로 해서, 이 사람에게 말해주고 저 사람에게 말해주고 그러기에 그 분주한 게 남아있어요. 이제도 길가에 오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이제 뭐 칠년인가 구년 있다가 무슨 큰 재앙이 날겁니다, 그러고 이제 하는 사람을 봤습니다만,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는 것도 좋아요. 그러나 참 생명이 되려면 내 속에, 이 체험이,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에요. 생각 중에서도 도덕적인 것이, 인간의 이 기본적인, 기본적인 사람이 산다는 게 뭐냐? 그러면 종교를 믿던지 안 믿던지 간에 뭐 도덕이라는 거 반드시 기독교가 있어서만 있는 거 아니에요. 기독교 있기 전에도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 하고 도덕 하고를 떼어 놓을 수는, 떼어놔서 생각하면 그게 곧 그거지만 말이야. 적어도 기성 제도로 화한 이 종교가 아니고는 도덕이 없거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도리어 종교가 산, 참 산 종교의 힘을 가지려면 역시 윤리적인, 높은 윤리를 가진 종교가 마지막까지 이겨가지고, 그렇지 못한 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만일 윤리적이다, 도덕적이다, 그런다면 그건 내 속에서 여기서 나오는 게, 내가 해서 깨달아서, 자진해서 내 맘에 좋아서 하는 게, 그게 정말 인간다운 가치가 있고 사는 거지. 해주는 게, 나는 이점에서만은 아주 뭐 모가지가 날아간대도, 난 그게 그래도 여기에 대한 확신이 있어요.
그러니까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 얻는다.’ 그렇게 말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더구나 대속해, 대신해 주었다하는 데는 나는 고마운 생각을 아니. 그래 옛날 시절 같으면, 내가 나의 어린 시절 같으면 대신해 주겠다 하는데 고마울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이 자란 다음엔 대신이 그리 고마운 것 아닌데, 내가 빚을 졌다, 친구가 와서 대신 뭐했다, 고맙긴 고맙지만 이렇게 부끄러워. 내가, 왜 내가 벌어서 내 팔다리가 없다면 모르지만 핑핑 살아있는 이걸 둬두고 왜 내가 모르는 친구가 날 대신 물어주게 했나? 그럴 때에, 그러기 때문에 자기로서의 생활능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남이 대신해 주면 아니 그만 둬? 그만둬?
한 선생한테서 시험문제를 받아가지고 재주 있는 애가 먼저 시험, ‘나 문제 풀었다’ 할 때 좀 생긴 놈은 ‘야, 가만있어, 가만있어 말하지 마. 난 나대로 풀어 볼 거야.’ 못생긴 물건, ‘야, 어떻게 했나? 나도 베껴서 좀 내자’ 그러지만. 그게 사람이에요? 적어도 사람인 담엔 ‘야, 너는 너 했는지 몰라 나는 나대로 풀어 볼 꺼다.’ 풀어보고 풀어보다가 안되면 바로 거 어떻게 돼서 어떤 점이냐고 요거 자기가 푸는데 도움 될 만한 점을 물을 런지 모르지만 말이야. 덮어놓고 자기도 베껴서 해내, 그게 무슨 내게 ‘나의 졸업장이라’ 하는 시험에 통과됐다는, 형식은 있지만 나는 나로서 무슨 힘이 생긴 게 뭐냐? 이점은 참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주의적인 신앙이 좋습니다만 복음주의적인 것을 잘못 받아들여.
기성품 받아 입은 종교
복음주의가 본래 그럴 리가 없겠는데, 잘못 받아들인, 우리 속에 있는, 이 스스로 내가 해서 한다는, 해야 된다는 그 점을 약화시켜버렸어. 약화시켜버리면 그담엔 외적조건은 원 천당이라고 하는 델 가서 거길 낼 갖다 놨다 해도, 그것이 어디 천당에 간 거 아닐 거예요.
우리 집에 있는 강아질 거길 갖다놨다고 개가 천당에 갔다고 그럴 순 없어요. 그건 뭐 어디 장소 갔는지 모르지만, 그런 모양으로 이건 구원이라고 그럴 때에는 인간이, 이 윤리적인 스스로 하는, 이 생명이 동물보다 높은 단계니까, 스스로 한다고 하는 점을 무시하고는 도덕도 있을 수 없고, 종교도 있을 수 없고, 그저 그럴 것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실 현장의 종교계를 보면 어떠한가하니 그런 실력이 적어요. 그래서 그게 무엇으로 나타나냐 그러면 사회악과 싸우는데 아주 무력해요. 무력할 뿐만이 아니라 싸우려하는 맘, 열심조차 아니가지게 돼요.
아주 그 점이, 몰라, 제가 잘못 비판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벌써 수십 년 전에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나?’ 할 때 쓴 거고, 그때도 문제가 많이 생겼던 줄 압니다만, 그 점엔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기독교만 그런 거 아니라, 유교도 그랬고, 불교도 그랬고, 우리나라에 옛날로부터 근본적인 결함이 거기에 있어요. 그것이 내 종교가, 나로서 내 종교가 되지를 못하고, 유교가 중국에서 성하면 우리나라도 성했고, 불교가 중국에서 성하면 우리나라도 성했지만, 거기서 오던 그게 끊어지면 또 약해져. 이제 한번 시험을 한다면 서양에서 오는 기독교신학을 싹 한 번 끊어버리면 좋겠어. 그래도 서 가나? 못 서 가나? 지금의 이 상태로는 못 서 갈 겁니다. 난 그거는 봅니다. 그 점이 크게 성하면 그걸 받아 입은, 기성품을 받아 입은 종교지. 어찌 그게 내속에서 자라난 내 이 살이라 할 수 있냐?
그런 점이, 다른 원인이 다른 데도 있긴 있습니다만, 주로 어떠한가 하니 복음주의 잘못 받아들인, 복음주의를 환영을 하게 되는 덴 우리의 역사적인, 사회적인 환경이 그렇게 만든, 무리가 아니에요. 원체 억눌려서 힘이 없으니까 은혜를 준다는데 고맙다고 하는 생각을 하는덴 무리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렇더라도 그러는 걸 가르쳐주면서도 그 목표하는 사람이 반드시 했을 것이, 속에 있는 요 새싹이 자라서, 요것이 스스로 이담엔 이 밖에 원조가 없어. 여기선 어느 때 가서는 내가 스스로 깨달아 갈 수 있게, 그런 점을 남겨서 키워줬어야 하겠는데, 그렇게 아니한 결과가 오늘날 이 상태로 되지 않았나?
이제 그담 하나는 합리주의적인 현대 사람들은 지식, 이성이 발달을 해서, 합리주의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문제는 이 합리주의하고 복음주의하고 둘 사이가 갈등이 생겨서 이제 지금 상태로 됐는데, 벌써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식으로는 어지간히 지내 갔다고 그럴 수 있습니다만, 현대 사람으로 선 이성, 이성이 신앙 상 반드시 반대되는 것 아니야. 어떻게 생각하면 반대되는 것처럼 그렇게 말을 해야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향도 있습니다만, 난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자꾸 반복하는 말입니다만 이성하고 교리하고 문제되는 땐 이성을 살리고 낡은 교리를 버려라! 그리고 지금 있는 이 이성을 살리고, 이 과학 위에 서서 그거를 이렇게 지도해가고, 보다 높은 데 올라갈 수 있는 신앙을 새로 체험을 내어 갖도록 노력을 해라. 전 그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만, 합리주의, 하여간 무시할 수 없어. 물론 합리주의만 가지고는 안 돼!
합리주의가 18세기 이래 발달이 돼서 한동안은 “예수가 어디에 있느냐?” 뭐 종교는 다 나이 어릴 때, 미신에 그런 거 나오는 거 그것도 역시 합리주의의 잘못된 데서 나온 겁니다만, 그러나 이 지금 우리 과학이라고 하는 건 이성, 요거를 둔 학문인데, 더구나 실험에 의해서 되는 학문이니까 이걸 노상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점을 살려보아야 될 거예요. 그런데 그게 이렇게 충돌을 해 문제가 돼. 그 다음 지금 이렇게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회가 문제가 나서 인도주의적인 신앙이라고 그러면 휴머니즘과 원수가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거 아닙니다. 종교가 참 종교 되면 인도주의적인 요소가 있지 없지 않습니다.
그런 점은 우리가 아까도 한 말입니다만, 신비주의에 대한 말을 할 때도 같이 합리주의나 여기 지금 인도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일거에요. 그게 본래 신앙 그 자체에 반대되는 게 아닌데 어느 하나를 강조하는 남아에 다른 건 말이야 원수가 되는 것처럼, 또 사실이야 인도주의적인 서양에 인도주의 발달했다고 그럽니다만, 그게 기독교에서 유래해 나온 거지. 기독교만이라 아마 그러지 않을 런지 몰라요. 하지만 주로 그래도 기독교에서 돼 나온 거지 없이 됐겠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오면 인도주의 같은 거 가지곤 안 되는 걸로 물론 인도주의만 가지곤 안 되지. 아주 우스운 예가 말이야.
“습관이 무슨 선 될 것 있냐?”
저번에 내가 우치무라 선생 얘기 했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그 성경해석은 좋은데 그 무교회라는 것만은 틀려먹었다고. 그건 고추가 좋긴 하는데 매워서 걱정이라고 하는 것 마찬가지야. 매운 데가 고추 되는 것인데, 매운 것 빼놓고, 우치무라의 무교회적인 데가 우치무라의 그 생명 있는 곳인데 말이 돼? 그것과 마찬가지로 슈바이처를 평을 하면 슈바이처나 톨스토이나 간디를 얘기를 하면 뭐라고 그러나하면 ‘그 사람들 인도주의는 좋지만 그것은 신앙은 아니다,’ 그럼 그놈의 신앙은 뭘 하자는 신앙이야. 아프리카에 가서 자기가 그렇게 음악에, 신학에, 철학에, 그렇게 천재적인 그런 걸 가지고 일생을 말하자면 희생이라면 희생이 돼서, 물론 그도 결함도 많이 있겠지 없겠어요?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게 바친 걸 보면 그것이 아무래도 기독교 신앙, 예수를 믿은 거로 나온 거라 그러겠지. 그런데 그게 우리가 그 생각하는 복음주의적이라 하는 그 형에 그렇게 부합되지 않는다 해서, 그거를 신앙이 아니라, 그렇게 그것은 알지 못하는 동안에, 우리가 교파주의적인 데 중독이 돼서 그래. 교파주의라는 거 의식적으로 하는 교파주의만이 교파주의가 아니야. 의식을 못하고도 자기가 자기에 믿는 그 신앙을 자기의 생각을 절대화해서 이것만이 유일에 진리다, 이걸 가져선 못할 것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그게 교파주의에 빠지는 건데, 그 점은 우리나라에서도 조금 이렇게 시기를 지나서 각 종교에 대화라 하는 얘기까지도 나오게 되니까, 좀 달라지는 줄 알기는 압니다만, 그래도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아주 참 골자 되는 교회만이 아니라, 신앙, 기독교계의 일만으로서 그 중요한 자리에 서는 분들한테서 역시 그런 색채가 있지 않아? 합리주의라든지 인도주의적이라고 하면, 어디 그게 신앙이야? 신앙이란 아주 인도주의만 가지곤 안 되지. 하지만 신앙 없는 인도주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인도주의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그런 걸 강조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반대가 되는 것처럼 하는 건 확실히 그건 오해라고.
사람이 참 이상합니다. 그 사람의 이러는 건 하나님의 모습이 있지 없지 않을 겁니다만, 우리가 인간의 본질을 말하면 그게 보편적일 것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사람과도 참 진심으로 앉아 얘기를 하면 말이 통하고, 영국 사람과 아프리카 사람과도 우리 여러 가지 다른 걸 말고 인간적으로 서로 앉아 말하면 말이 통하는데, 이론은 그런데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에, 그 옆에 있는 것에 붙은 습관이 있어. 그 습관이 맞지 않는 고로 인종 문제, 계급 문제 다 그런다, 그 이치에 있는 거 아니에요. 우리 습관에 붙은 감정 때문에, 감정 때문에 그런 것을 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 참 걱정해야 옳을 터인데, 그렇게 못해. 못하는 것이 역시 신앙도 습관이 되 버려서, 알지 못하는 동안에 그렇게 된 데서 나오는 거 아닌가?
저번에도 여기 학생들한테 그 얘기했습니다만, 간디의 말에 그런 말 누가 간디보고 “선생님 선을 행하는 습관을 붙이면 좋습니까?” 그러니 “야, 습관이 무슨 선 될 것 있냐?” 그것 참 좋은 말 아니에요? 그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내 직접은 듣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저 큰 이화대학에서 가르치고 하신 분도 말씀하기를 채플, 학생들이 채플 시간에 나오는 걸 출석을 긋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언제 학생들을 보고 그 출석은 뭐 할라고 긋는다더냐? 출석을 그어서 나오는 게 예배될 것 있냐? 그러니 어휴, 그래도 우리 선생님은 교회 가는 습관이라도 붙여야 된다 그럽디다. 그거 좋은 말씀이에요. 하지만 습관이 돼서 가는 게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그게 과연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될까? 그럴 수 없어요. 그런데 다른 데도 그렇지만 종교에 습관이 붙어 놓으면 더 걱정 아니에요? 왜 가톨릭 하고 프로테스탄트 하고 다 같은 하나님 믿는다 하는데, 그 참혹한 종교전쟁을 했습니까? 다른 것 아니라 성경에 근거 나올게 아무것도 없지. 우리 살아가는 방식과 너 살아가는 사고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그것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면 그 우습고 불쌍할 것 아닐까요? 그런데 이제 인도주의에 관한 것도 그럴 건데, 그런데 이따금 가다가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같은 데는 지금 대체로 보시오. 어떻게든지 인도주의적인 활동을 더 장려해야 될만한데,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럴 필요는 더 느끼고 있는데, 다만 그것이 내세중심에, 거기 하는 그 신앙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 부족하다고 해서 그걸 신앙 아니라고 그러면 그렇게 되면 다른 면에 있어서 잘못되는 점이 생기지 않을까.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자 딴 얘기가 이렇게 길어졌습니다만, 이제 그 네 가지 점에 비유해 보면 우리 믿는 신앙이, 요렇게 네 가지 요소가 다 있어서 잘 조화 돼가야 할 건데, 암만해도 그렇게 못돼. 그래 또 사람으로서는 무리가 아닐 겁니다. 어느 시대엔 어느 면이 또 혹은 어느 사회에선 그 어느 면이 강조가 돼서, 어느 특정한 종교가 돼. 복음주의적인 종교가 되든지, 신비주의적인 종교가 되든지, 합리파가 되든지 혹은 사회사업이라고 하는, 요새 인도주의를 강조하는 사회복음이라고 그렇게 돼버리든지, 이게 온통 하나로 치중이 돼, 기울어져 버려. 기독교로서는 약해. 종교로는 약화 돼버리고 말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점을 우리로선 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까는 제가 말씀을 하다가 거짓말이 되게끔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랬었는데, 지금은 아까 말한 데를 거길 잊어버렸어. 이제 거길 다시 돌아가기는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이제 그만하고. 이렇게 오시면 그걸 보다 보면 이제 나사로 살렸다하는 그 일로 문제가 아주 극악 점으로 가서 자기가 돌아가게 되는 거길 가게 돼.
17절부터 읽습니다.
“예수께서 가 보시니 나사로를 무덤 속에 둔지 벌써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흘이 됐으면 이제는 사람이 고친다, 인간이 무슨 그런 힘으로 되살려낼 가능성은 거의 다 없어진 거. “나흘이나 돼서 냄새가 나게 됐습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는 어느 때 보면 가사상태에 빠졌다가 저절로 깨어나는 수도 있고, 또 무슨 약을 주면 낫는 수도 있지만 나흘씩이나 됐다고 그런다면, 그런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건 이제 살아났다면 어떻게 가사상태에 빠져 한동안 맥박이 좀 멎었다가 어떻게 살았다든지, 그런 게 아닐 거다, 말하자면 무슨 약을 준다든지, 무슨 자극을 주어서 그 덕에 된 거라든지, 그런 정도론 설명이 안 된다, 안 될 겁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오리 쯤 되는 가까운 곳이었는데, 많은 유대사람이 그의 오라비의 일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려고 와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맞으려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습니다.” 그건 그대로 믿으니까 이걸 보면 벌써 이 뭐 마리아, 마르다 그 신앙이 있지 않아요? “그러나 저는 지금이라도 주님이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들어 주실 줄 압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압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믿습니다.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가 믿습니다.”
저번에도 여기 오셨던 분들은 들으셨습니다만, 몇 번 한 말입니다마는 이제 이 우리가 이렇게 이 종교의 글, 경전, 더구나도 그게 이렇게 이 깊은 체험에서 나온, 그런데 관한 말을 읽을 때에는 말이 여기도 보면 이게 생명이라 삶, 산다, 죽는다 하는데, 산다, 죽는다 하는데, 우리 이 생물학적, 이 육체적인 이 생명을 두고 하는 건지? 또 정신을 두고 하는 건지? 분명치를 않지 않아요? 이렇게 뵈고, 저렇게도 뵈고, 이래서 이게 알기 어렵습니다. 문제가 나길 그래서 납니다. 그럼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 후에 마르다는 가서 자기 자매 마리아를 불러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께로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직 동네에 들어가시지 않고 마르다가 마중 나왔던 곳에 그저 계셨습니다. 집에서 마리아를 위로해주던 유대사람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울려고 무덤으로 가는 줄 생각하고 그를 따라 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 계신 곳에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아래 엎드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도 울고 따라온 유대사람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충격을 받으시고 안타깝게 여겨서 “그를 어디다 두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사람들은 “보시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셨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가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습니다만, 나사로를 그 죽은 이 몸을 살려내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은 아니었다고 하는, 뭐 그랬더라면 오늘날까지 나사로가 살아있어야 할거에요. 그런데 나사로 없어요. 그때 살려주었어도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거기는 믿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대체로 봐서 여길 읽을 때에는 사람들이 다 뭔가 하니 여기 이게 죽었던 사람 살아났다고 하는 데, 거기 아주 굉장한, 이게 여기 제가 아까 말씀한 이것 충분히 철저히 돼서, 이걸로 인해서 십자가라 하는 비극이 이제 나온다, 그랬습니다만, 그렇게 되는 원인이 어디 있냐? 그러면 죽은 사람 살렸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 살렸다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많이 믿어. 그렇게 되면 큰일 아냐? 그렇게 돼서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 살렸다하는 그 일이 나쁘다 해서 그런 것 아니라, 저 사람이 그렇게 큰 이적을 행해 놓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믿게 될 거야. 많이 믿게 되면 결단난다, 그건 이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생각해 봅시다만,
기독교 이전의 장생불사 이야기
로마사람들에서 우리나라를 다 빼앗고 뭐 이렇게 될 테니까,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아요? 그러면 왜 그 사람들이 그 죽은 사람 살렸다하면 그렇게 많이 믿게 되냐? 사람에게 죽는다는 게 중대한 문제니까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그 문제는 이제 인류역사가 언제부터 시작인 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오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종교를 말하면, 옛날종교에서는 이 불사, 장생불사, 임모텔리티(immortality), 어떻게 하면 장생불사하는 지경에 가겠냐? 그게 문제지.
여기도 이제 그 대답이 있어. 마리아 대답이 “이 다음 마지막 날에는 부활할 줄 압니다.” 그랬습니다만, 그건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도 믿는 거예요. 우리가 이집트에 뜨는 고적으로 피라미드라고 합니다만, 왜 사람들은 예수님 나시기 전 수천 년 삼천 년, 사천 년 전에 굉장한 힘을 드려 피라미드를 만들었나? 물론 일반서민까지 그러진 못했습니다. 왠가 하니 권력을 가지고 잘 사는 사람들은 잘 살고 못사는 사람들은 못사니까, 못사는 놈은 옛날이나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천당에 갈 자격도 없어요. 잘 살아야 가. 왜 그런가 하니 그 사람들 어떠한가하면 영혼불멸을 믿어요. 사람은 죽지만 영혼은 산다, 그걸 아주 현실적으로 믿어요. 그 어째 그랬냐 그러면, 인간의 근본, 사람이 정신적이라고 하는, 거기 있을 것입니다만, 그게 인류학을 연구하는 분도 유래를 알 수 없어요. 상당히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고.
가령 이 인류학을 연구해 온 그런 데서 예를 든다면, 사람이 벌써 언제부터인지 우리가 아는 인류의 유물이 있을 때 보면, 벌써 사람이 사람을 매장할 때는 그 곳에다가 내 버린 것이 아니고, 일정한 식으로 이렇게 묻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어떤 데는 동향을 향해 묻은 데도 있고, 어떤 데는 서향을 향해서 묻은 데도 있고, 또 어떤 데는 남향을 향해서 묻은 데도 있고, 방향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만, 거저 막 묻지를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생각하기에 따라서 달라요. 문제는 하나인데, 다시 살아나기 위해 그러는 건데, 동침 매장하는 건 올라오는 해를 보기 위해서 동침매장을 한 거고, 서침 매장은 같은 거지만 넘어가는 해를 봐. 해가 넘어가지만 내일은 다시 돋아온다, 거기서 다시 살아오는 게 있어. 그렇기 때문에 그걸 보라해서 거길 보게 해요. 또 사람이 죽은 다음에 부장품을 묻어요. 부장품을 묻는 데 그중에 묻은 게 뭐냐 하면 허제비를 많이 만들어서 묻은 거예요.
이집트 사람도 그러잖아요? 그다음 여러분이 아시는, 미이라 아시잖아요? 사람이 죽으면 내장을 다 끌어내고, 그것도 아까 말로 다 그런 거 아니에요. 잘 살아야 그렇게 해요. 잘 살아야 영생할 자격이 있어요. 못 살면 할 수 없어. 미이라 같은, 사람이 죽은 담에 내장은 썩어질 만한 부분은 다 끌어내고 잿물에다가 70일을 담가두어서, 그러면 잿물이 침투 돼가지고 그것이 광 솔가지처럼 돼요. 그렇게 된 다음에 세마포로 약품으로 자꾸 자꾸 싸서, 또 이집트 같은 데는 공기가 건조하니까 그래. 지금도 있다고.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되는 것 있겠습니다만, 시체가 썩지 않고 나오는 미이라라고 그러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우연히 돼 나오는 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애굽사람들은 아주 일부러 그걸 만들어. 왜 만들었냐 그러면, 죽지만 이다음에 영혼이 돌아와서 다시 사는 날 있다, 그걸 믿었어요. 그러니까 영혼이 불멸이라고 하는 건, 또 사람이 이렇게 장생불사를 원한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가 있기 전 훨씬 전부터.
그건 인간의 본성에서 나왔다고 그럴 수 있어요. 그러니 그것과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믿는 것이나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과는 같지를 않습니다. 내가 같다고 하는 말씀을 하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니라, 그것과는 같지 않다고 하는, 같진 않지만 관련이 없는 건 아닐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말할 건가? 길게 많이 말씀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자라서 됐다고. 자라서, 사람들의 생각이 유치하던 언제부터 생각을, 언제부터라고 할 수가 없겠지요. 산에 올라가서 냇물의 기원을 찾을 수가 없어, 차차차차 올라가면 마지막엔 골짜기 어디서부터 시작이 됐냐? 압록강의 시작, 한강의 시작이 인제라, 인제가 어디란 말이야? 인제 어디? 인제를 가도 한강의 시작점을 알 수가 없을 거예요. 강 하나의 시작도 그런데, 정말 강의 근원을 찾으면 어디가나? 하늘에 올라가. 모든 냇물은 하늘에서 내리는, 왠가 하니 비가오지 않고 냇물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골짜기에 있다고 하는 게 우스운, 골짜기에 어디 있어? 그건 찾다가 그만 두니까 골짜기까지 갔지. 더 찾으면 저기 하늘에까지 갈 거예요. 그런 모양으로 인류가 생각하는 것도 그래요. 언제부터 생각, 인류학에서 하는 것은 그건 후대에 오다가 있는 그 형정을 말하는 거지. 찾아 올라가면 어딜? 기원이 다 생명 그 자체 속에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 말로하면 그래.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시고 거기다 숨을 불어 넣어서 사람이 생령이 됐다, 그렇게 말하는 게 가장 좋을 겁니다. 그 이상 말할 수가 없을 거예요.
그것은 늘 하는 말씀입니다만 뜻을 말해요, 의미를, 뜻을 말하자는 거지. 여기 이 어떻게 되는 그 순서 과정을 말하자는 게 아니냐? 그런데 이제 아까 뭐 지금도 합리주의니 지식이니 그런 문제가 나왔습니다만, 지금은 이렇게 시대가 학문의 시대니까 이 학문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현상계에 속한 겁니다. 현상계, 더구나 자연과학은 그 현상계라는 것은 이건 어떻게 돼서 영어로 하면 외국 사람이 잘 그렇게 말을 하고, 외국말을 하면 실감 좀 갈 거니까 합니다만, 하우(how)라고, 저번에 우리 우주학 아폴로 설계했다는 하는 이가 와서 말하면서도 안 그럽디까? 과학이라는 하우, 어떻게 라는 걸 연구하는 거지만, 우리는 과학은 왜? what? 뭘? 하는 걸 생각하는 게 종교다, 그러고 합디다만 그거 좋은 말씀이에요.
이제 오늘도 요점은 거기에 있을 겁니다. 생각이 그 때문에 서로 달라져요. 그런데 인류가 생각을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생각을 하게 되는 처음에 있어서 이 주위에 현상계가 어떻게 라고 하는 데에 관심이 많이 갔을 것은 무리가 아닌, 지금은 우리가 보면 어린애는 그렇지 않아요. 속에 뜻을 알기에는 그게 상기도 정도가 멀었어요. 우리가 그걸 뭐라 하는가 하니 저게 이제 셈이 들었다, 셈이 든다는 것은 하나 둘 셋 센다는 말인데, 순리라는 말인데…(녹음13, 3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