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잃고 보게 된 것
2025 'みぎわ(물가)‘ 65호에서
미토 키요시(水戶 潔)
하마마츠(浜松) 성서집회
그 일은 올 3월 17일, 바람이 강했던 날 저녁 무렵에 일어났다. 가까운 우체국에서 볼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자전거에 올라탔는데, 그만 부주의해서 넘어지면서 핸들이 오른쪽 눈을 강타하였다.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다행히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피가 흐르는 오른쪽 눈을 손으로 누르면서 겨우겨우 집에 도착했다. 다치지 않은 왼눈으로 거울을 보니 오른쪽 눈에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병원에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휴대전화로 구급차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서부터 신기한 행운이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빈 구급차 한 대가 우리집 가까이를 지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호출한 지 5분도 안 되었는데 도착하였다. 서둘러 구급차에 올라탔더니, 담당자는 진료가 가능한지 벌써 병원에 전화를 걸어 알아보고 있었다. 그 결과 시내에서 가장 의료수준이 높은 하마마츠대학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30분 안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병원 응급실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신기했던 것은, 내 마음이 전혀 떨리지 않았고, 오히려 차분히 모든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중에 안 일인데, 안과 치료기술에 관한 한 시즈오카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T 의사 선생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T 선생의 침착한 대응과 말에 안심이 되어, 이 눈이 최악의 경우까지 안 가겠구나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안도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수술에 들어가기 전 내 눈의 상태를 본 T 선생은 직감적으로 부상 당한 오른쪽 눈이 회복하기는 아주 어렵다고 판단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이제부터의 수술에 저의 최선을 다하겠지만, 최악의 사태도 각오해야 합니다.”라고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전신마취 상태에서 약 두 시간에 걸쳐 수술이 이뤄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다음날 아침 병실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T 선생은 일부러 병실로 찾아와서, 어젯밤 수술 전에 미리 말씀한 것처럼 오른쪽 눈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는데, 이상하게도 떨리거나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받아들여졌다. 나도 그 까닭을 잘 모르겠지만, 참 뜻밖의 상황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당시 주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던 나는 주께 완전히 맡기지 못하였다. 그 일을 주의 뜻으로 받아들이기까지도 꽤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게 사실이다. 당시는 이후 나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수술이 끝나고 입원생활에 들어가게 된 후, 처음으로 성서집회의 다케이(武井陽一) 선생에게 전화로 내가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였다. 선생은 진심어린 말씀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선생의 이 말에 무엇보다 용기를 얻은 게 사실이다.
“한쪽 눈을 잃고도 일상생활을 편안히 누리고, 사회활동까지 열심히 하는 분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 집회의 이와다(岩田堯, 목사출신) 선생도 실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요.”
용기를 얻음과 동시에 나는 충격으로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동안 이와다 선생의 한쪽 눈이 실명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관심 없이 이와다 선생을 대했던 것인가. 참으로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집회에는 이와다 선생을 포함하여 세 분의 시각장애인이 계신다. 그중 한 분이 올해 99세이신 하마마츠 맹학교 전 음악교사였던 아이하라(相原夏江) 씨, 그리고 또 한 분은 ‘마스모토 우메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책 등을 출판하신 후쿠시마(福島 憲太) 선생이고, 지금은 돌아가신 하마마츠 맹학교 교사이셨던 카노(狩野益男) 선생도 그랬다.
무신경한 데다가 통찰력도 부족한 나는 이분들의 핸디캡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관심 조차 없이 살아온 것이 문득 생각나 죄송하고 후회스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지금까지의 내 건강한 생활이 당연한 일이 아니고, 본래 내가 받았어야 할 시련을 내 대신 그분들이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는 증명 가능한 일은 아니다. 오른쪽 눈이 빛을 잃고나서야 새롭게 볼 수 있었던 나의 체험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 하나님은 나에게 이 시련을 주신 게 아니었을까 받아들였다.
우치무라 간조가 ‘축복이 되는 죽음’이라는 글에서 말한 바 있다.(聖書之硏究 141호, 1912.)
“죽음의 고통은 절대로 무익하지 않다. 그 고통을 통해 자신의 죄 씻음을 받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죄도 얼마간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치무라 간조는 죽음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데, ‘죽음’을 ‘시련’으로 바꿔 읽으면, 나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알게 된다. 지금은 한쪽 눈으로 부자유함을 느끼며 살지만, 역설적으로 ‘보이는 행복’에 감사하고, 위에서 오는 은혜에 감사하는 하루하루이다.
첫댓글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석으로 가꾸기 위해 갈고 닦는 아픔을 참으시는 구나 합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당장의 눈앞에 닥친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참 어리석은 자임을 회개합니다. 주여! 이끌어 주소서
보석이 되어가시는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도 그 길 따라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