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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크게 받은 다니엘(단10:10-21)-2021.1.31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만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생활을 오래해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리도 모르고 구원의 감격도 모릅니다. 그러면 삶의 기쁨이 없고, 신앙생활의 즐거움도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아야 합니다. 때문에 잠언서22장1절을 보면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는 않는 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이지요. 한마디로 은총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이에요.
기독교는 은총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은총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은총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고, 은총을 받을만한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에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은총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가 다를지라도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다만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은 은총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아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임을 모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은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선물입니다. 오늘 대표적으로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주인공은 다니엘입니다.
(1) 은총을 크게 받은 다니엘아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면 은총이 무엇일까요? 은총[恩寵]은 은혜라는 단어와 병행해서 사용되고 있지만 은혜와 사랑의 합성어입니다. 은혜은, 괼총이라는 한자어입니다. 여기서 굄이라는 말은 사랑을 말합니다. 에스더서 2장15절에 보면, 바사의 수산궁 아하수에로 왕의 궁녀로 있던 에스더가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굄은 특별히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말입니다. 굳이 은혜와 은총을 구분하자면 은총이라는 말은 은혜보다 좀 더 깊고 광범위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과 은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강조하신 말씀이 사랑과 은혜요, 사도 바울도 입만 열면 강조하는 것이 은혜와 사랑입니다. 때문에 은총은 가장 성경적인 용어인 것이지요. 은총의 생명은 깨달음과 누림에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은총도 깨닫지 못하면 은총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총을 깨닫지 못하면 은총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물론 은총도 깨달음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은총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누린다는 말은 은총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삶이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은총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입니다. 일반 은총은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누리는 혜택이요, 특별 은총은 구원받은 성도들만 누릴 수 있는 혜택입니다. 때문에 성도된 자는 일반 은총은 물론이고, 특별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은총도 더 크게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은총을 누구보다 더 크게 받은 사람입니다. 무려 세 번이나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서 은총의 주인공인 셈입니다. 9장23절에 보면,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10장11절은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또한 19절에 보면,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은총을 크게 받은 비결이 무엇일까요?
먼저, 다니엘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와서 갖은 유혹을 받으면서도 오직 믿음으로 시련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의 몇 사람을 잡아왔습니다. 그들은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을 골라서 데려온 것입니다(단1:4).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최고 엘리트 소년들을 정략적으로 잡아온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을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고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공급하여 삼년을 기르게 한 것입니다.
그들 중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기들이 평소 먹던 채식을 고집한 것입니다. 그들이 제공하는 식물들이 거의 다 우상의 제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왕궁에서 제공하는 특별 음식이 싫었겠습니까? 누가 산해진미를 싫어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우상 제물로 자기들의 영혼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지요. 더러운 우상 제물로 자기 영혼의 더럽힘을 방지하려고 거절한 거예요(8절). 이것이 바로 다니엘의 믿음입니다.
사실 믿음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신적인 자아가 있고, 영적인 자아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기회만 있으면 부딪칩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상한 말로 영적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이른바 육신의 자아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기에 바쁘고, 영적인 자아는 하나님을 쫓아가려고 힘을 쓴다는 말이지요.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지요(롬8:5). 그래서 둘 사이에는 항상 긴장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의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롬8:6). 왜냐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더러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롬8:7).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자기 마음과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자기 마음과 생각을 잘 다스리려고 해도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나 능으로는 안됩니다.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가능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총이 입혀져야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자기 마음을 얼마든지 합리화 시키고 타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바벨론 왕의 비위를 건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른바 자기 양심과의 타협을 시도했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괜히 느부갓네살의 비위를 건들다가 죽임이라고 당하면 하나님 나라에 큰 손실이 아니겠느냐고 말입니다. 이른바 그들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은 믿음의 논리가 아니라 양심의 논리라고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기의 뜻을 정하였습니다(단1:8).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단을 세운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과의 타협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말의 양심도 흔들림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환관장에게 그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 뜻을 분명히 고했습니다. 다니엘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 다니엘을 하나님이 내버려 두실 리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다니엘의 하나님이십니다. 다니엘의 믿음을 보시고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9절). 다니엘의 믿음이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은총을 입혀주신 거예요. 다니엘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입은 비결입니다.
또한,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기도요, 기도가 삶이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메대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되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로 하여금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웠습니다(단6:3). 그런데 다니엘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세력들이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찾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에게서 아무 틈과 허물을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다니엘의 종교를 건들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음을 안 것입니다(6:5). 사단은 영물입니다. 아주 간사합니다. 그래서 삼십 일 동안 왕이나 다른 신에게 기도할 수 없는 금령을 정하게 한 것입니다. 이른바 기도중지 명령을 건의한 것이지요.
삼십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속에 던져 넣기로 한 거예요(단6:7). 다리오 왕은 어인을 찍어 금령을 반포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을 향해 창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6:10). 얼마든지 잠간 동안 그들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기도를 멈출 수 있습니다. 소낙비 올 때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아니면 문을 닫고 기도하든지, 혹은 마음으로만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자기 양심과의 타협을 시도할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다니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꼼수도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전에 행하던 방식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리오 왕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말라는 살벌한 금지령 속에서도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지요. 결국 무리들의 고발로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곳에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사람이었지요(9:3,10:12).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지혜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능력입니다. 한마디로 기도는 세상을 이기는 권능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 두 사람이 입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워싱턴이 속한 북군이 이긴다는 것이고, 한 사람은 워싱턴이 패한다는 것입니다. 패한다는 사람은 숫적으로 열세인 워싱턴의 군대가 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긴다는 사람의 논리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찬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겨울 날 그가 숲속을 지나다가 사람소리가 들려서 가보았답니다. 그랬더니 워싱턴장군이 얼굴을 눈 덮인 땅에 묻고 기도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기도하는 워싱턴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워싱턴의 군대가 이겼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받는 절대적인 비결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사람은 겸손합니다. 한마디로 겸손한 사람이 기도합니다. 교만하면 기도 못합니다. 다니엘은 누구보다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그가 하나님 앞에서 취한 행동은 오직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었던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다니엘은 고레스 왕 삼년에 큰 전쟁에 관한 이상을 보았습니다(10:1). 그 전쟁은 자기 민족 이스라엘에게 다가오는 엄청난 핍박과 환란의 내용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너무 슬펐습니다. 때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세이레 동안 금식 기도를 한 것입니다(2절). 물론 자기 민족과 동족에 대한 연민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말입니다. 드디어 기도를 통해서 메시아적인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크게 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총이 크게 임하면 자신의 연약함과 두려움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다니엘은 환상을 보자마자 자기 몸에 힘이 빠지고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9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민족의 아픈 현실을 바라본 다니엘은 앉아서 걱정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떠들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거나, 이 방법 저 방법을 얻으려고 꼼수를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을 인정하고 겸비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두려움에 빠져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의 손이 어루만지시면서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깨닫고 일어나라’고 위로하신 것입니다(11절). 하나님은 다니엘의 겸비함을 보시고 위로하셨던 것이지요. 이른바 겸손한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 것입니다.
일찍이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었지만 다시 한번 하나님의 크게 받은 은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19절).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니엘처럼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연합해야 합니다. 즉, 믿음의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이 세 가지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떤 유익을 받았을까요?
(2) 다니엘에게 임한 최고의 은총은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10-11절)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토 귀환령이 떨어졌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것에 불과하지만, 사실 하나님을 모르는 고레스 왕은 정략적으로 피지배국의 백성들에게 유화정책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귀환명령을 내린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고레스 왕에게 하나님은 이사야서44장28절, “그는 나의 목자”라고 말씀하시고, 45장1절에서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사야서45:4-5절에 나와 있습니다. 비록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지라도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런 칭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해 그를 배역으로 사용하신 것이지요. 그의 믿음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악인들도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유대나라가 주전 586년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만에 본토로 돌아올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일관되게 예언해 주셨습니다(렘29:10). 그 예언이 고레스 왕을 통해 이루어진 거예요. 이는 고레스의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 은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너진 성전을 수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순조롭지 않았어요. 사마리아 방백들의 방해공작이 극심했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방해공작으로 공사는 지연되고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으로 다니엘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땅에 남아있는 백성들에게 장차 주어질 ‘큰 전쟁에 관한’(1절) 환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큰 전쟁은 역사적으로 볼 때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한 유대인들이 당할 엄청난 핍박을 의미합니다(BC175-164년).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알렉산더대왕 죽은 후에 4개로 분할된 헬라 제국 가운데 북방 수리아의 왕입니다. 그는 자기 형의 뒤를 이어 왕에 등극한 후에 제우스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 말살정책을 폈습니다. 안식일을 금지하고, 성전제사를 금지하며, 할례를 금지하고, 성전에 부정한 돼지 피를 뿌리는 등 무자비한 정책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적그리스도였습니다. 마태복음24장15절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었지요. ‘에피파네스’는 헬라어로 “명백히 나타난 신”이라는 뜻입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은 그에게 ‘에피마네스’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에피마네스’는 ‘정신병자, 미친놈’이라는 뜻이거든요.
다니엘은 그 전쟁의 환상을 보면서 기도하다가 힛데겔 강가에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정금 띠고, 황옥 같은 몸을 입고 번갯빛 같은 눈을 가지신 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분이 바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하던 일행들은 보지 못하였지만 다니엘은 보았습니다. 하지만 동행하던 사람들은 크게 떨며 놀라 도망하여 숨어버렸습니다. 다니엘은 그 이상을 보고 몸에 힘이 빠졌습니다. 낯빛이 변하고 얼굴을 땅에 댄 채로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기절을 한 것입니다.
그런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 것입니다. 그 은총은 다니엘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10절). 그의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켜주셨습니다(10절). 그리고 일어서라고 하십니다(11절). 마치 중환자실에 누워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환자를 다루듯이 다니엘을 위로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하라고 명령하십니다(19절). 다니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은총은 위로였습니다. 위로는 은총을 크게 받은 다니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현대인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상처거든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많고, 정신적인 상처를 받고 사는 사람들도 많으며, 육체적인 상처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살면서 한 두 번의 상처를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이에요.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나름대로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 이곳으로 저곳으로, 혹은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위로를 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위로는 없습니다. 참된 위로는 오직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총을 크게 입은 사람은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만지시고 위로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해 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악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또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기 원하십니다. 삶에 무게를 견디지 못해 울고 있는 영혼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위로해 주시기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은총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임했습니다(14절).
(3)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가 임했습니다(14절)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부어집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했습니다(12절). 그는 세이레 동안을 절제하면서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지혜의 목마름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12절을 보면 천사가 다니엘에게 와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기도를 작정한 순간부터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결심하던 첫날부터 들으신바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반드시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먼데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내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기도의 긴급함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기도의 목마름도 잘 아시고, 간절함도 잘 아십니다.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신속히 응답하십니다. 보통 라디오 전파속도가 1초에 18만6천 마일을 간다고 합니다. 빛의 속도는 1초에 약 30만KM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속도는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긴급하게 기도하면 긴급하게 응답하십니다. 절박하게 기도하면 절박하게 응답하십니다. 그만큼 다니엘의 기도가 시급하고 다급하고 절박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하나님 보좌에 첫날부터 상달된 것입니다. 물론 사단의 방해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면 사단도 쉬지 않고 방해합니다(13절).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급하게 미가엘 천사를 파송하사 다니엘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가브리엘 천사와 미가엘 천사가 나오는데 그들의 역할이 다릅니다. 가브리엘 천사장은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천사요, 미가엘 천사장은 전투하는 천사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러 오는 가브리엘 천사를 막는 바사국군을 미가엘이 와서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하나님 은총의 또 다른 방편인 것입니다.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인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다니엘은 앞으로 자기 백성들의 당할 일(11장-12장)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깨달음은 11장-12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바벨론은 바사에 멸망을 당하고, 바사는 헬라에 멸망을 당할 것이며, 헬라제국은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다시 4개로 분할될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신비로운 영적세계를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언약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4). 또한 정직한 자에게 그의 교통하심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음이여”(잠3:32). 그리고 창세기18:17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다 알려주시고, 다 보여주시며, 다 깨닫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깨달음을 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신 것이지요. 이것보다 더 큰 은총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의 비밀한 세계를 깨닫게 하시는 은총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은총인 셈입니다. 우리 모두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깨달음의 은총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세상의 힘은 하루가 다르게 쇠하여 가지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만 하면 날마다 새 힘을 얻습니다. 절망하던 사람에게 소망이 생기고, 죽고 싶어 하던 사람에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슬퍼하던 사람에게 즐거움이 생기고, 낙담하던 영혼이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삶이 회복되고, 건강이 회복되며,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가 회복됩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열방이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새 힘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자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새 힘을 날마다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탄력을 받고 강건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만져주심과 강건하라는 명령을 받고 즉시 힘이 나서 1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은총을 크게 받은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새 힘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새 힘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또 다른 은총의 방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새 힘을 공급하심으로 인하여 특별한 은총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삶이 힘들고 지친 영혼들에게 새 힘을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새 힘은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약한 자를 강건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사단과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다니엘은 낙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더 이상 슬퍼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새 힘으로 은총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자가 되십시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최고의 은총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은 오직 내안에 나를 성전 삼고 나와 함께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 그 어떤 것도 겁내지 아니하고, 두렵지 아니하며, 오직 주가 주시는 능력으로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능치 못함이 없음을 아시고 오직 주가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반드시 크고 놀라운 일들이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주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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