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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부를 하는가] <45>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남들과 달라야해" 삐딱함이 이슬람 문화를 만나게 했다
한국인 최초로 이스탄불에 유학…이제 레몬같은 교수가 되려 한다
따스한 이슬람의 실체에 대해 한 방울의 지식이라도 다 내놓는…
1984년 터키 이스탄불대학 정문에서.
나는 이슬람 문화를 공부했다. 14억명 57개국이 속해있는 세계 최대 단일 문화권이 나의 관심사이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에서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는 분야이고, 알고 있는 지식도 아직은 편견과 오류가 심한 편이다. 적대적 이해 당사자인 서구중심의 시각으로 그 문화를 이해해 왔고, 현재도 세계의 흐름에서 마이너리티의 입장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을 공부하게 된 것은 나의 지독한 입시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는 시험과는 인연이 멀었다.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갈 때 이미 재수를 경험했다. 대학에 갈 때도 삼수까지 해서야 겨우 한국외국어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시험만 치면 실패였다. 고등학교 동기생 150여명이 3학년으로 서울대를 다닐 때 나는 외대에서 서너살 아래의 학생들과 소위 학부동기로 함께 반말을 하며 지내야 했다. 나이가 많다고, 분위기를 흐린다고 그 흔한 미팅 한 번 끼워주지 않았다.
뒤처진 인생을 따라잡기 위해 나이 든 신입생은 취직과 고시, 유학의 꿈을 오가며 혼란스런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넘을 수 없는 걸림돌이 나의 숨통을 조여왔다. 취직을 하든 고시공부를 하든 동기생 뒤꽁무니만 평생 쫓아 다녀야 하는 이류 인생이 무엇보다 싫었다. 그래! 생각을 바꾸자.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가야해. 다른 모든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분야를 건드려 보는 거야. 오일 쇼크 직후 나라전체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환한 웃음을 띠며 다정하게 다가오는 놈이 있었다. 이슬람이었다. 다행히 외대에는 중동 관련 학과가 있었고, 이집트에서 오신 아랍 교수가 계셔서 그와 함께 새로운 이슬람의 세계를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의 호기심은 수긍이 아니고 비판과 반박을 위한 공부가 중심을 이루었다. 왜 이 첨단 시대에도 하루 5번의 전근대적인 예배를 고집하는가, 일년에 한 달씩 굶고 어떻게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가, 일부다처를 포기하지 하지 않는 한, 이슬람이 야만적이고 여성인권 탄압이라는 오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칼과 코란의 방정식이 이슬람의 호전성을 확산시킨 배경이 아닌가. 앨콜리라는 이집트 교수는 그 때마다 오히려 미소를 띄며 하나하나 나의 비판에 답해주고 편견을 교정해 주었다. 그 분이 추천해 주시는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왜곡과 편견의 모습이 아닌 보다 따스한 이슬람의 실체를 어렴풋이 보게 되었다.
이젠 누구와도 대화가 되지 않았다. 유학을 결심했다. 미국에서 당시 이 분야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템플 대학의 이스마일 파루키 교수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 밑에서 이슬람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고. 팔레스타인 출신의 대학자는 한국 학생이 이슬람 역사를 공부하겠다는 포부를 높이 사서 와도 좋다고 했지만, 자료가 풍부한 터키의 국립이스탄불 대학교를 추천했다. 마침 한국과 터키간의 문화교류협정에 따라 이스탄불 대학교에 최초로 정부장학금이 나와 유학길은 그곳으로 향했다.
1984년 1월 2일. 이스탄불에서 이슬람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물을 만난 물고기였다. 인사차 들른 문과대학장은 서류를 훑어보더니 1453년 이스탄불 대학교 설립 이래 최초의 한국유학생이라고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당시 이스탄불은 인구 600만의 대도시로 한국 교민은 한 사람도 없고 파견된 코트라 직원이 고작이었다. 한국대사관도 450km나 떨어진 수도 앙카라에 있었다. 나는 이스탄불에서도 가장 종교성이 펄펄 살아있는 파티 지구에 집을 얻었다. 모든 이웃과 친구가 되어 함께 예배보고, 그들과 똑같이 한 달간 단식의 고통을 나누면서 온 몸과 온 정신으로 이슬람을 배우고 익혔다.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소서. 당신만 믿고 당신만 따르리니 나를 천국에 이르게 이끌어주소서." 이슬람인들의 기도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왜 그들을 달리 보는가. 최규성기자
이웃과는 친해졌지만 학문세계는 달랐다. 이스탄불 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아직도 성적평가를 위해 리포트 대신 시험을 친다. 나의 시험 콤플렉스가 다시 도졌다. 아무리 밤을 새워 열심히 해도 터키 학생들과 경쟁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천적 교수가 있게 마련. 동양사를 가르치는 여교수가 문제였다. 필수 과목인 유목문화론 시험에 59점을 주었다. 낙제였다. 재시험에서도 똑같이 59점을 주었다. 규정상 1년 후 재수강이 가능하고, 그 때 또 낙제하면 수학능력 부적격자로 제적이었다. 다음 해 이 과목을 다시 들었다. 열심히 해서 시험을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59점을 주었다. 청천벽력이었다. 15일 이후 재시험에도 실패하면 퇴학이다. 유학의 꿈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실패한 인생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용기를 내서 그 교수 집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했다. 차가운 한 마디. “자네만 유학생활 한 줄 알아. 외국학생이라고 대충 봐 줄 거라고는 꿈도 꾸지마.”
알 수 없는 오기가 치밀었다. 그래, 그 교수의 저서 ‘유목문화론’을 깡그리 외워버리자.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나는 그 때 깨달았다.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500페이지나 되는 두터운 책을 수십번이나 정독했더니 그 책이 기적처럼 외워지는 것이다. 드디어 운명의 시험 날. 그 교수가 직접 감독으로 들어왔다. 두 문제 모두 이미 책에서 익힌 내용이다. 나는 감독교수가 지켜보는 앞에서 책에 있는 내용을 정확하게 기술했다. 그리고 90도 절을 하고 교실을 나왔다.
며칠 뒤 공고판에 붙은 나의 성적은 100점이었다. 문과대학이 생긴 이래 그 교수로부터 100점을 받은 학생은 처음이었다. 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내가 이스탄불의 마르마라 대학 교수가 된 이후 유목문화론을 강의할 수 있었지만, 지금도 이스탄불의 모교를 찾아가도 나는 애써 그 교수의 연구실을 피해 다닌다. 그 때의 충격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만약 대학교수가 되어 강단에 선다면 학생들에게 이렇게 무모한 시험만은 치르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수가 된 이후 한 번도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해서 성적을 준 적이 없다. 주로 스스로 할 수 있는 과제를 준다. 어느 대학에서는 교양과목이라 반드시 시험을 요구할 때도 일관되게 이를 거부하다가 경위서를 쓴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나는 이 원칙을 지키고 있다.
본격적인 논문준비에 들어갔다. 나의 아랍어 실력이 또 문제가 되었다. 나의 지도교수는 자료해독 불가판정을 내리고 1년간 아랍어 연수를 명했다. 이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초급 아랍어를 배운 이후라 튀니지의 부르기바 스쿨에서 6개월간 혹독한 아랍어 전문교육을 받아야 했다. 다시 돌아 온 이스탄불의 토프카프 박물관의 고문서국과 오스만 공문서 자료실. 나의 삶의 공간이고 학문의 산실이었다. 100만권이 넘는 필사본이 수백년동안이나 묵묵히 연구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소장 학자들이 경쟁하듯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중세 오스만어로 된 고문서를 뒤져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는 지루한 작업을 계속한다. 6년간이나 이 어두컴컴한 자료실을 뒤지고 원전을 읽었다. 근시인 나의 시력은 이미 안경으로 교정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했다. 여기서 나는 신라와 고려에 관련된 자료 20여권을 확인하고 읽었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오스만 술탄의 밀사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압둘 라시드 이브라힘의 조선 보고서도 찾았다.
러일전쟁과 한일합병 당시의 이슬람세계의 반응을 기록한 자료들도 접할 수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은 9~16세기 사이에 이슬람과 투르크 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해 어떻게 동아시아로 전파되고 그 과정에서 어떤 문화적 상호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문화교류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두 문화 모두에 대한 기초적인 공부, 나아가 문화 전파루트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보다 넓은 안목과 다양한 자료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다행히 중세 동서의 문화전파루트가 거의 대부분 이슬람권이고 역사적으로 투르크 문화의 깊은 영향을 받은 지역이라서 비교적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이슬람과 그 문화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폭발하고 여기 저기 쉴새없이 불러주는 것을 보면 대학 1학년때의 비딱한 결정에 항상 감사함을 느낀다.
이스탄불 대학교의 논문 지도교수였던 메흐메트 사라이 박사는 한국으로 떠나는 나를 불러 앉혀놓고, “교수는 항상 레몬이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레몬의 존재가치는 맛이나 빛깔, 향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품고 있는 액에 있으며, 그 액은 스스로 짤 수 없고 남들에게 얼마나 철저히 짜여지느냐에 달려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강의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질문과 토론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는 한 방울의 지식이라도 모두 내놓을 수 있는 레몬교수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나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달려간다. 작년 한 해에도 학교 바깥에서 100회 이상의 이슬람 관련 강연을 했다. 요청이 있고, 시간과 여력이 남아 있는 한, 지식의 한 방울이라도 사회에 되돌리려는 레몬교수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이희수 교수는…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이슬람연구소를 만들어 이슬람을 올바르게 알려주는 대중강연과 글쓰기에 힘쓰는 이슬람문화 전문가이다. 1953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어과를 졸업하고 88년 터키 국립 이스탄불 대학에서 신라와 이슬람 교류사 연구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연구로 신라를 정확히 묘사한 이슬람권의 고지도를 발굴하기도 했다. 이슬람권의 유엔인 OIC(이슬람회의기구) 연구원과 이스탄불의 국립 마르마라대학 조교수를 거쳐 95년부터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_터키 친선협회 사무총장이며 터키에는 90회를 다녀왔을만큼 이 지역문화에 정통하다. 한국 이슬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슬람’ ‘한-이슬람 교류사’ ‘터키사’ ‘이슬람문화’ ‘세계 문화기행’ 등의 책을 썼다.
한국일보 : 2006/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