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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이 병 천
상주(喪主)들의 뒤를 따라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포르말린* 냄새가 훅 코를 찔렀다. 흰 이불 홑에 가리어진 채 박 선생은 한쪽 구석에 반듯하게 눕혀 있었다. 그는 다만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두 귀가 저절로 모였다. 낮잠을 자다가 그대로 고인의 숨이 멎었다는 상주의 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사 그가 숨을 쉬고 있다고 해도 그 숨소리가 내게까지 들리지는 않을 성싶다. 나는 잠자코 윗목 책상에 기대어 섰다.
“다아 들왔으면 문을 닫어요!”
장의사에서 나온, 키가 작은 사내가 짧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쩌면 저런 사람들이 한 조가 될 수도 있을까 싶게 두 사내의 모습이 판이하게 달랐다. 키 작은 사내는 얼굴도 작은 데다 양미간도 좁은 데 비해 또 한 사내는 키도 몸집도 크고 얼굴도 넓다. 맏상제가 밖의 병풍을 끌어당기고 방문 미닫이도 조심스럽게 밀어놓았다.
“그려! 입관(入棺) 헐 때는 여름에도 문을 닫는 것이여.”
안집 주인이라는 할머니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거들었다. 기필코 문을 닫아야 하는 그것이 문상객이나 아니면 고인에 대한 예의라도 되는 것일까? 이를테면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도 옷을 갈아입을 때는 문을 닫거나 몸을 숨기는 것처럼…… 그렇다면 입관을 지켜보겠다고 좁은 방 안에 들어선 내가 고인이나 유가족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문은 닫혔고, 닫힌 그 문은 어떤 완강한 힘에 의해 나로서는 결코 열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사내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염습*에 필요한 작은 소도구들을 챙기더니 수의를 입히기 쉽게 접기도 하고 묶어놓기도 한다. 그들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서녘 햇빛에 새 수의에서 떨어지는 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 햇빛의 통로 아래 고인의 가난한 쌀자루가 눈에 띄었다. 두어 말가웃*이나 될는지…… 병천아, 엊저녁에는 내가 시 한 편 썼어야! 잘하셨네요. 어떤 시였습니까? 응, 제목이, 쌀이 떨어졌네여. 정 말로 쌀이 떨어져버렸어 야!…… 고맙다. 이따 내가 다 갚을 거셔! 내가 다아 알고 있어·…… 저게 그때 사둔 쌀일까 하고 나는 생각해본다.
준비를 모두 끝냈는지 작은 사내가 선생을 덮고 있던 이불 홑청을 걷어냈다. 다시 궁기* 서린 먼지가, 주검을 찾아 새까맣게 모여들었던 날벌레들처럼 일시에 날아오르는 게 보이고, 그 아래 선생의 굳은 얼굴이 나타났다. 내 옆에 서 있던 주인집 할머니가 혀를 차며 뭐라고 중얼거리자 선생의 따님들이 코를 훌쩍 이며 울먹였다. 에이구, 불쌍혀라! 에그 불쌍혀…… 다달이 사글세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을 주인댁 노인은 꼭 무슨 자탄(自歎)처럼 그 말을 되풀이했다. 선생의 손과 발은, 두 손이 한데 모여 아랫배 위에 그리고 두 발도 가지런하게, 노끈으로 묶여져 있었다. 사지가 아무렇게나 굳어버리지 않도록 방지하는 조치였지만 나는 선생의 묶인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선생의 죽음을 확인하였다. 누가, 어떤 일이, 생전의 그를 묶을 수 있었으랴.
사내들이 고인의 옷을 가위로 싹둑싹둑 베어내기 전 호주머니에서 꺼내놓은 최후의 유품은 피우다 만 담배 한 갑과 일회용 플라스틱 라이터, 그리고 성냥 한 갑이 전부였다. 몸이 고단하고 주머니에서는 용돈이 바닥나 버린 오후, 선생은 하릴없이 집에 돌아와 잠이나 청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 눈부신 구십 년대의 봄날에, 우리가 모든 자유와 인권을 담보로 맡긴 대신 세상에 지천으로 빵이 널리게 된 이 풍요의 시기에, 평생 동안 시를 써왔던 이 땅의 한 시인(詩人)은 가난과 병마로 죽어가다니…… 선생의 죽음은 도대체가 시대착오적이고 얼토당토않은 해프닝처럼 여겨진다. 나는 우연히도 내 앞으로 밀쳐진 담배, 근래에 들어서는 구경한 적도 없는 듯한, 선생이 남긴 푸른 솔을 슬그며니 집어 들었다.
“갖다 피우시우. 암시 랑토 않응게…….”
별스러운 유품이라도 선뜻 양보하듯, 아니면 정말이지 암시랑토 않음을 일깨워주려는 듯 주인댁 할머니가 내게도 참견을 했다. 침통하고 오롯이 모인 방 안의 분위기를 주책스럽게도 깨고 있다는 야속함이 없지 않았지만 그 점에서는 나도 예외가 아닐 것이었다. 어쨌거나 방 안에 선생의 피붙이 아닌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고 나는 묘하게도 선생의 죽음을 증명하고 주위에 전해줄 사람도 우리 둘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의 구멍가게며 세탁소, 그리고 싸전, 경로당 등을 한가하게 드나들며 저 할머니는 앞으로 선생의 마지막 생애와 선생 생전의 꿈과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어떻게 얘기할까.
가위로 잘린 옷은 쉽게 벗겨졌다. 그때부터 사내들은 미리 준비해온 솜으로 선생의 몸을 닦구 무슨 향유*인가를 듬성듬성 찍어 바르기도 했다. 그들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이따금 고인의 몸에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더럽고 찝찝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한편으로 망자(亡者) 에게는 가장 소중한 향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박 선생 자신이 그렇게 여길 것이었다.
유행이 지난 누런 잠바와 바지를 벗고 새 수의를 갈아입은 선생은 영락없이 활개를 펴고 누운 선비처럼 보였다. 살아생전에 저렇듯 술에 취하지 않고 저렇듯 깨끗한 새 옷만을 입고 있었다면 누가 그에게 말 한마디라도 허투루 건넬 수 있었을까. 나는 망인(亡人)을 보면서도 옷이 날개라는 속담을 떠올렸다. 좁은 마당 쪽에서 갑작스럽게 몇몇의 웃음수리가 들려왔지만 조문객들은 아직도 많지 않을 것이다.
염이 모두 끝나고 시신을 관 안으로 모신 뒤 마지막 절차는 둘러선 사람들이 제각각 종이고깔을 접어 나란히 덮어주는 일이었다. 저승을 향해 머언 길을 떠나는 망자에게 웬 고깔은 그리도 많이 필요한 것인지, 삿갓처럼 눈을 가리고 가려서 돌아오는 길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의미가 아니라면 그 저승길이 햇빛 눈에 부시고 이마 뜨거운 길이나 아닌지 모른다. 어쨌거나 사자(死者)의 길을 아는 장의사의 사내들이 이어서 노잣돈을 걷고, 곡(哭)을 하면서 입관은 끝났다. 그 노잣돈이라는 게 사내들의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들의 소도구 가방으로 그야말로 미끄러져가던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만 빼고 본다면 입관의 예는 장례의 전 과정을 통해 가장 엄숙하고 장중할 것이었다.
머리에 세 번 물을 묻히고 상복을 바르 입기 위해 밖으로 나서는 상주들을 따라 나도 고인의 방을 나섰다. 창문에 기대어 비스듬히 세워둔 관 뚜껑처럼 방 안에 얇게 펼쳐져 있던 삼월의 햇빛은 마당 뜨락이며 담벼 락에서는 쏟아지듯이 무더 기로 내리고 있었다.
“에구, 불쌍혀! 불쌍혀.”
그 표현만큼 노인의 심금을 짜안하게 맞추는 다른 말은 없는 것인지, 다시 그렇게 되뇌는 노인을 따라 장의사의 사내들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가위로 잘라버린 망인의 옷 보퉁이를 들고 와 대문 앞에 내려놓고는 망인이 남겼던 라이터를 꺼내어 그곳에 불을 붙였다. 나는 그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들을 음식상 앞으로 안내해 갔을 때 나는 그 모닥불 앞으로 다가갔다. 그 불빛이라도 쪼이고 싶을 만치 추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불 속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선생의 옷이 잘 연소되도록 하고 싶었다. 나는 막대기 하나를 찾아 들었다. 그런데 불을 휘저을수록 그 일은 내게 의무감처럼 느껴졌고 다 해지지 않은 선생의 옷처럼 다 연소되지 못한 선생의 생애를 내가 대신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선생이 남긴 푸른 솔 한 개비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어린 시절 몰래 피워보던 호박잎 말이처럼 그러나 입맛에 들지 않는 푸른 솔은 별나게도 독하고 매웠다. 나는 남은 담뱃갑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불 위에 던졌다. 담배는 내게도 있었다. 내가 던진 그것은 이내 푸르스름한 연기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휴전선? 휴전선을 가보자구?……휴전선을?……”
내가 맨 처음 그 운을 떼었을 때 선생은 꼭 그렇게 세 번을 반복해서 되물었다. 그날 나는 선생의 시를 받아야 할 일이 있어서 그 단골집에 들렀던 것인데 그는 이미 대낮부터 반쯤은 취해 있었다. 하기야 그즈음은 밤에 술을 마시는 모습을 좀체 볼 수 없기도 했다. 몇 잔 마신 낮술로도 저녁까지 깨지 않거나 그 몸이 버텨내 주지를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술은 끝내 버리지 못하는 위인이 그였다.
“앉어라야! 너 만날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한잔했어야.”
나는 앉지 않았다. 얼굴 정도는 알고 지내는 몇몇의 좌중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는 울 밑에 선 봉선화 알지야? 내가 그걸 잘하는 걸 알지야?”
아마도 틀림없이 선생은 이제 막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부르고 난 뒤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틀림없이 그 노래조차 다 맺지 못하고 어디, 네 모양이 처량하다에서나 아니면 길고 긴 날 여름철에서 더 계속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선생이 내게 안타깝게 확인하려는 말끝을 따라 좌중이 고개를 돌리고 조소(嘲笑)하는 모습을 봐서도 알 수 있는 노릇이었다. 매번의 술자리가 그 모양이었다. 이따금 어울리는 모양의 그들은 선생에게 몇 잔의 막걸리를 주고, 대신 선생은 아직도 그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으로나 이른바 민족시인의 말년이 어떤지 그들 자위의 방편이 돼주거나 하는 식이었다.
나는 괜찮다야. 선생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게 선생의 경제관념이기는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내 그 밥의 수단이라는 걸 하시할* 마음이 없으되 모르면 몰라도 그런 술자리에 담긴 뜻을 굳이 발설하자면, 체제의 구둣발에 흘린 밥을 즐겨 무릎 꿇고 포식한 이들이 그들 스스로 체득한 삶의 방편으로, 이유 있는 흉내로, 기꺼이 배 굶어왔던 이들에게 베풀고자 하는 질시며 손가락질의 자리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직은 젊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흔히 말한다. 그렇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선생의 배곯이를 옹호해야 할, 선생의 후배 문학도였던 것이다.
“선생님, 이 자리 술값은 오늘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다른 데 가서 한잔 더 하시죠.”
“그려? 글 안혀도 늬가 오면 일어설라고 했어야.”
여행을 한 차례쯤 다녀오면 어떨까. 심히 불쾌한 낯빛들을 띠고 있던 좌중을 뒤로한 채 우리는 술집 문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선생이 쓰셨던 시 제목의 휴전선을 떠올렸다. 여행이라는 낱말이 도대체 함께 붙여 쓰일 수 없는 그 휴전선 여행은 그렇게 비롯되었다.
“제군들은 들어라. 우선 제군들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G사단, 그중에서도 민통선 북방으로 배치받아 온 것을 환영한다.”
제군(諸君)이라는, 왠지 어감부터 군국주의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 말을 유독 좋아하던 지휘관은 그렇게 입을 열었었다. 라이방이라고 하는 검은 안경을 낀 채, 기껏 여남은 명에 지나지 않는 우리 전입자들을 이리저리 샅샅이 훑어보면서 하던 훈시였다. 잘 알다시피 라이방은 맥아더가 이 땅에 처음 보급시킨 일종의 군용물자였다. 그런데 당시의 웬만한 장교라면 밥풀 두 개를 달면서부터 미리 준비해 두는 필수품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맥아더식 빨부리*도 예외는 아닌 듯싶고, 그러고 보면 또, 제군이라는 용어도 맥아더에게서 차용하거나 힌트를 얻은 표현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정말 그렇다면 맥아더는 이 땅에서 자의든 타의든 야전군 사령관의 전술이나 인품을 모범으로 보인 게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우화 속에 등장하는 까마귀의 분장술을 더 알속* 있게 가르친 셈이다.
“제군들의 등 뒤에 위치해 있는 저 이백오십 고지 능선 너머로는, 아마 제군들이 말로만 들었을 일백오십오 마일 휴전선이 만리장성처럼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이런 피비린내 튀는 역사적인 현장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제군들에게 큰 행운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제군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 너머 임진강에 얼음이 얼면 적의 스케이트부대는 단 오 분, 불과 삼백 초 안에 제군들의 코앞까지 침투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얼음이 풀렸을 때는 어떤가? 그때는 빨대 하나만 입에 물고 물속에 가만히 있어도 한 시간 안에 제군들의 무릎 아래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저들의 호전성에 대비한 경계근무가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오늘 제군들과 처음 상면(相面)하는 본 지휘관의 첫 훈시이다. 이상!”
나는 그가 제군이라는 말을 대체 몇 번이나 구사할는지, 그리고 우리의 눈빛이 가 닿을라치면 그냥 반사돼 나올 뿐인 그 라이방을 그대로 낀 채 상면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인지 따위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지만 임진강은 그 뒤로도 끝없는 함정이었으며 고리임을 머지않아 깨우쳐야 했다. 임진강은 그 앞에 마주선 우리에게는 방어의 천연적 요새가 아니라, 말하자면 모순 같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 어떤 작전이나 사소한 운동시합, 또는 단체기합의 빌미로도 얼어붙은 임진강이나 물이 풀린 임진강의 비유를 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님, 들어보세요. 그렇게도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바로 그 지역의 최고 책임자가, 그러니까 옛적 저의 사단장이 그 탱크부대를 이끌고 서울로 내려왔던 그해 12월에는, 임진강이 얼어 있었을까요, 아니면…….”
“하하하하하…… 늬가 나중에 한번 알아봐야!”
모처럼 나들이 때문인지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들뜬 듯한 박 선생이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불광동을 지나면서부터 차 안에는 적잖은 군인들이 승차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목소리를 낮추어오던 터였다.
휴전선 여행이라는 말이 나온 뒤부터 선생은 이틀이 멀다 하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맘을 먹었을 때 후닥닥 다녀오면 되지 무슨 뜸을 그렇게 들이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적지 않았다. 우선 주말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직장에서 이틀쯤은 더 휴가를 얻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간인 통제선의 안쪽을 출입하는 일이라서 미리 허가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의 문제는 나대로의 해결방법이 있었다. 내가 전령사*로 근무하면서 밥을 해먹이고 잠자리를 해결해주고 심지어는 연애편지를 대필해줘서 결혼까지 하게 됐던, 나를 중신애비라고 부르던 당시의 소대장이 지금은 그쪽 지역의 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부인과 헤어지지만 않았다면 문제도 아닐 성 싶었다.
머지않아 답장은 왔다. 연애편지를 받아보던 옛 글씨체와 같다고 부인이 의아해하기에 실로 십 년 만에야 실토하면서 함께 웃었다는 내용이 우선 눈에 띄었다. 적조했을망정* 그동안 소식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결혼의 비밀을 여태껏 숨겨온 모양이었다. 굳이 제 입으로 발설할 일도 물론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부탁한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도 있으니 어느 때든 찾아오면 된다고 썼던 것이다.
십이삼 년 만에 다시 가보는 길들은 낯설었다. 이쪽을 향해서는 오줌조차 누지 않겠노라고 다짐은 했을지언정 3년을 뒹굴던 땅이었다. 그 맹목적인 추억 때문인지 내게는 없던 정 이 새로 돋아나는 느낌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선생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창밖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휴전선은 시의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휴전선이 아예 생애의 시작이고 끝인 경우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휴전선이 아니라 분단의 철조망이라고 다시 고쳐 보고 있노라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조금씩 나누어 받은 깊은 칼자국 같은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우리가 선착순 구보를 할 때 흔히 반환점으로 삼던 부대의 앞산에서는 이따금 불빛의 어떤 신호가 비치는 게 목격되곤 했다. 산 아래로는 제법 큰 마을이 펼쳐져 있었는데 우리 부대와는 오백 미터 상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마을 뒷산 중턱쯤에서는 한 달에 두어 번씩은 북쪽을 향해 불빛이 깜박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끝내 그 불빛의 정체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물론 그 뒤에 어찌 됐는지는 알 리 없지만 적어도 내가 군복을 벗고 제대하던 날까지는 그 불의 신호가 무엇이며 누구에게 보내는 연락인지 끝내 밝혀낼 수 없었던 것이다.
소문과 추측만 무성했다. 간첩일 것이라고도 하고 헤어진 이산가족이나 부부 또는 이제 중년을 넘겼을 나이 든 옛적의 연인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런그런 관계의 사람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병사다운 추측이기도 했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는 민통선 안에서 그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사람들은 실제로 거의 모두 그런 포한*을 지닌 사람들이기도 했다.
손전등을 이용해서 꼈다 켰다 깜박이던 그 불의 암호, 그것을 밝혀내기 위한 우리의 작전과 노력은 지금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5분 대기조를 출동시켜 불빛의 정체를 끌고 오려던 생각은 처음의 순진한 발상이었다. 현장에 도착해 보면 불빛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번번이 허탕을 친 뒤 나중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매복을 서보기도 했지만 그 일도 헛수고였다. 언젠가 한 번은 그쪽을 향하여 집중사격을 해본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불빛은 마치 우리를 조롱이라도 하듯 더 밝고 오래 계속되던 것이었다. 나중에는 차라리 그 불빛이 정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는 연병장이거나 내무반의 창문을 통해 멍청한 그리움으로, 그리고 종잡을 수 없는 우리들 각자의 추억으로 산허리에서 춤추는 불빛의 언어를 귀머거리가 되어 듣고 있을 뿐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연 불의 정체에 대한 우리의 수색작전은 관심이 시들해지거나 의례적인 것이 되어갔는데 그 작은 사고는 그 무렵에 일어나기도 했다.
그날도 우리는 매복 중이었다. 얼음이 얼었든 풀렸든. 게을리 할 수 없는 경계근무며 훈련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잠이 모자라고 녹초가 되어 지내야 했기 때문에 사실 그따위 불빛은 좀 잊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의례적인 매복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나는 아마 호 안의 흙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난데없는 연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와 함께 나는 얼핏 쏘지 말아달라고 외치는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무슨 일이냐고 외치는 소대장의 외침도 들려왔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사위가 조용한 속에서 누군가의 보고가 들렸다. 일병 모모모! 전방에 수상한 물체가 나타나서 사살했습니다!…… 전입해 온 지 얼마 안 되는 햇참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사고임을 알았다. 민통선 북방에서는, 그것도 야간이면 단 한 번의 암구호* 확인으로 사격하도록 교육이 돼 있었는데 녀석은 배운 대로 실행했던 것이다.
노인은 일갓집 잔치에 다녀오던 길이라고 했다. 물론 가족들의 증언이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노인 가족들의 표정이며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 같은 것이었다. 울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대체가, 올 것이 마침내 오고 맞이해야 할 것을 지금 맞이한다는 식이었다. 그들은 실향민이라고 했지만 그 점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휴전선의 무게와 상처를 다른 사람보다는 더 깊이 안아야 하는 사람들이었고 뿐만 아니라 그 무게와 상처만큼 고통을 분명하게 자각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총을 쏴야 했던 햇병아리 일병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웅이 되어 포상휴가까지 다녀오고 난 뒤 다른 부대로 전출해 갔지만, 숙명적으로, 그만큼의 견고함으로 휴전선의 포승을 받아야 했던 사람이었다. 휴전선은 그렇게, 누구든지 묶어버리는 무소부지*의 철사였던 것이다.
“야아, 이 병장! 이게 몇 년 만인가!”
민통선 입구의 검문소에서 만난 대대장은 내 손을 으수러져라 쥐고 흔들며 나를 이 병장으로 불렀다. 그의 전출로 우리가 헤어졌을 때는 내 계급이 상병 이었던 것 같은데 병장으로 불러주는 게 고맙게 여겨지기도 했다. 민통선이라고 하는 섬뜩하고 차가운 분위기 때문이거나 처음 전입할 당시 그때의 지휘관에게 들었던 제군이라는 말이 아직도 귀에 선연한 때문인지도 몰랐다.
“소대장님, 아니 대대장님! 정말 반갑습니다. 그새 벌써 십 년이 넘는 세월 이 뭉텅 달아났습니다.”
무궁화 두 송이가 피어 있는 그의 어깨를 뻔히 바라보면서도 나는 옛정을 환기시키기 위해 부러 능청을 떨며 대답했다. 그가 내 손을 다시 세차게 흔들며 껄껄 웃고 난 뒤 나는 준비한 선물을 그에게 내밀었다. 내 딴에는 어렵게 구한 양주였다. 그리고 나는 박 선생을 그때서야 소개했다. 혹시 일이 어려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편지에는 그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대장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선생은 평소대로 자기 이름 앞에 아호처럼 시인이라는 말을 붙여 스스로를 소개하였다.
“예에. 중령 배대응입니다. 휴전선에 관심이 많으시다니 반갑습니다.”
「휴전선」이라는 시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배 중령은 관심이 많은 걸로 알아들었던 모양이지만 굳이 밝히는 것도 사족일 듯싶었다. 나는 그가 선생의 신원 조회라도 하자고 할까 봐서 조마조마하던 참이었다.
“저게 무슨 소리다냐?”
배 중령과 내가 이런저런 찹다한 신변 얘기들을 주고받고 있을 때 문득 박 선생이 개구리 떼처럼 웅얼거리는 소리에 귀를 모으며 물었다. 그의 모든 신경이 휴전선과 휴전선의 상황에 쏠려 있을 것이었다. 젊었을 때 이후로 휴전선 구경은 도대체 몇십 년 만인지 모르겠다고 하더니 아까부터 이것저것 묻고 확인하던 터였다.
“저게 바로 그 유명한 대남 확성기 방송이에요.”
“그런디 왜 저런다냐야? 무슨 말을 허는지 이쪽서도 잘 딛긴다등만?”
“임진강 때문이죠. 여그는 강 하류쯤이라서 저쪽하고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거든요.”
정확하게는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까지 얘기하려다가 나는 말을 멈췄다. 그때 우리가 주둔지에 정렬해놓은 각종 포들은 또 어디까지 포탄을 날려 보낼 수 있는 것인지까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따금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 포의 유효사거리 한 중앙을 행군해 가는 그들이 보이고 그럴 때면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포탄을 장전하고 싶은 충동에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그쪽과 이쪽 쌍방의 과실(過失)사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면 저쪽에서는 정중하게 사과한다고 했다. 그 뒤의 조치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이쪽에서는 그런 머저리들이 생기면 영락없이 남한산성*으로 보내졌다.
“하하하. 무슨 말들을 하는지 듣고 싶으십니까?”
지프차의 앞자리에서 우리를 뒤돌아보며 배 중령이 웃었다. 길을 거슬러 오던 갈매기* 하나가 우리 차를 보고 목청껏 경례를 붙였다.
“그런데 실은 이쪽은 난청지역이기 다행입니다. 만약 그렇잖았으면 지금쯤 놈들은 뭐라고 방송해댈지 아십니까?…… 남반부의 시인인 박 아무개 선생과 연출자인 이 아무개 선생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어쩌구 할 겁니다.”
“그거 아주 재미있겄다야!”
“하하, 재미요?”
박 선생이 나를 보면서 침을 꿀꺽 삼키자 배 중령 이 토를 달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부대에서 선생님을 이곳에 출입시켜드리겠습니까?”
“아니 대대장님, 농담입니다.”
나는 그렇게 둘러 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배 중령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생이 재미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내 생각이 그러하였다. 내 얘기는, 듣고 있는 이쪽의 재미가 아니라 확성기를 대고 무엇이라고 말하는 저쪽의 재미였다. 강의 상류 쪽으로 파견나갔을 때 들은 바대로 이쪽의 실정을 낱낱이 비판하고 월북을 권유하는 등의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재미 이상의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했던 것이다. 확성기가 방송이라면 그야말로 삐라는 우리가 부르던 대로 신문이었는데 그것도 자체가 재미였다. 어쩌다 대기의 기류를 잘못 계산한 이쪽의 머저리가 저쪽으로 날려야 할 풍선을 도로 이쪽으로 떨어뜨리는 경우도 없지 않았는데 국내의 유명한 만화가들이 동원된 그런 삐라들에서 재미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박 선생이나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휴전선으로 나가보기 원했지만 배 중령은 막무가내로 식당을 찾아들었다. 군대의 상황들이란 무엇이든 기대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어서 조바심이 났지만 그렇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게 군대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선생이 약주나 많이 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선생은 실제로 술을 들지 않았다. 배 중령이 몇 번씩 권하면 마지 못해서 입술에만 칠하곤 했다. 시인이 어찌 술도 못하느냐는, 술과 함께 살아오고 술로 시를 짓기도 했을 선생에게는 다분히 모욕적일만한 표현에도 그는 그냥 웃음으로 대신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술이나 음식보다도 이야기에 더 열중하였다.
“대대장님, 그 왜 우리가 철책 근무할 때가 생각나는데요. 북쪽을 향해서 누군가가 자꾸 후라쉬로 신호를 했잖습니까.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연애편지만 쓰느라고 바빴던 줄 알았는데 그런 일에도 동생이 관심을 가졌었는가?”
“예에? 무슨 말씀이세요오. 저도 셀 수 없이 수색을 나갔고 또 그 놈의 매복 때문에 몸이 축날 지경이었었는데요.”
나는 내가 목격 했던 노인의 애꿎은 죽음까지도 얘기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배 중령이 바로 그 당시의 소대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그래! 이제는 추억으로나 잘 간직하고 있어라. 완전히 미궁속에 빠진 채 그 얼마 뒤에 흐지부지 없어져버린 일이니까 말야. 물론 나중에야 짐작은 했지. 불빛이 사라질 즈음해서 마을에서는 모두 세 사람이 죽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범인이 아니었겠어? 그 셋 중에서 진짜 첩자가 어떤 놈이었는지는 사실 가려내지 못했어도 말이지. 그런데 말야…….”
배 중령이 흘낏 자기 손목의 시계를 보더니 얘기를 계속하기 전에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박 선생이 재촉이라도 하듯 그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그 잠깐의 정적을 혜치고 웅웅거리는 저쪽의 확성기 소리가 또 들려왔다. 주저하지 말고 어서 넘어오라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간악한 미제 원쑤 운운하며 말하는 사람 자신이 북받쳐서 울부짖는 것일까…… 밤공기 탓인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고 그래서 아무래도 내게는 후자 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나 깨나 휴전선 너머 임진강 쪽으로 돌을 집어 던지는 노인이 있네.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는데, 이 양반은 아주 공개적으로 그러는 거야. 처음에는 휴전선 바로 이쪽이 논이니까 논의 돌들을 골라내는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나중에는 아예 철조망 사이에 작전상으로 박아둔 돌까지 빼내어 던지더란 것이지. 그 때문에 곤욕도 많이 치렀을 텐데 감시만 소홀했다 하면 나와서 또 돌을 던진다니까! ……노인이 기운도 좋지. 수류탄 정도의 돌을 삼십 미터 이상 날려 보낸다네. 그 역시 실향민이라고 하는데 실향민이면 실향민이었지 왜 돌을 날려야 하는지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아…… 김일성이한테 감자를 먹이는 것은 아닌데 말야.
그런데 어이, 동생! 내가 오늘 반갑다고 너무 변설*이 심한 게 아닌가? 자네 방송국 생활은 재미가 어때?…… 좋지?”
“좋습니다. 아직도 군인정신이니까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진작부터 즐기던 안주 한 접시를 큰 소리로 더 주문하였다. 그 노인에 대한 호기심 이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소대장님, 아니 죄송합니다. 대대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배 중령이 말을 재촉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의중을 벌써 읽었는지 박 선생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 있었다.
“내일 그 영감님을 좀 만나게 해주십시오. 자유스럽게요…… 할 수만 있다면 하룻밤을 함께 보냈으면 더욱 좋겠구요.”
“이 사람, 중신애비가 돼서 중신아들을 망칠려고 하는 게 아냐?”
“부탁입니다. 중신애비로서 그 한 가지만 부탁할게요. 네?”
나는 필사적인 기분이 되어 매달렸다. 그 영감을 만나지 못하고 그냥 내려간다면 휴전선 여행이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의 전령사로 일 년 남짓 지내오면서 나는 그의 기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는 내가 현역 시절, 구보를 죽도록 싫어한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뒤부터는 중대장에게 찜빠*를 먹으면서까지도 소대원들에게 구보훈련을 시키지 않던 위인이기도 했다. 끈질긴 내 애원에도 싱글싱글 웃기만 하던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알았어, 이 사람아! 그게 동생 직장의 군인정신인가? 하여튼 내일 보자구…….”
노인은 나이가 일흔여섯, 황씨 성이라고 했다. 나이와 농사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걸맞지 않을 만큼 눈빛이 형형했고 허리와 어깨가 곧았다. 아주 길지는 않은 흰 수염이 서릿발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노인은 우리를 대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므로 노인의 아들조차 우리가 아무리 누누이 해명을 해도 믿지 않으려고 하는 눈치였다. 낭패스러웠지만 그들이 받았다는 곤욕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삼십여 호가 넘음 직한 마을은 철조망 아래 길 하나와 논배미 두엇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펼쳐져 있었다. 휴전선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강마을이었을 것이다. 철조망 사이로 바라보니 제초제 때문에 노랗게 말라 죽은 갈대밭 너머로 흰 모래밭이 햇빛에 빛나고 있기도 했다. 이쪽 강 언덕 지금의 철조망이 지나는 어디쯤에는 그 옛날 나루터도 있었을 법하고 주막도 한 채 붐볐을 법했다. 그러나 멀리로는 와글와글하는 확성기 음이 귀찮고 바로 코앞에서는 갈댓잎이 서로를 부벼대는 소리 대신 바람이 철선에 부딪혀 우는 소리만 음산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이게 휴전선이 다냐? 이게 휴전선이여?”
박 선생은 처음 철조망 아래 다가서자마자 믿기지 않다는 듯이 그렇게 혼잣말을 한 뒤부터는 내내 입을 다물었다. 강의 하류여서 강폭이 넓은 건 사실이어도 실제보다 더 아득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저쪽 산허리가 차라리 박 선생을 맞아 애가 타는 그리움을 안타깝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나는 어쩔 수 없이 바로 내 앞의 박 선생이, 바로 그 앞의 휴전선을 두고 썼던 시를 떠올리고 있었다.
해가 서해로 점차 기울어지면서 자기의 금빛을 임진강 모든 물이랑의 수면마다에 고루 뿌려주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런 무렵의 바다나 강을 생전 처음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노인에게서 무엇인가를 듣는 일은 단념해야 할 것 같았다. 내 직장의 소속 부장은 언제나 말하곤 했었다. 툭 까놓고 얘기해서 우리 방송쟁이들이 뭐 가진 것 있냐? 그래서 섭외가 그만큼 중요하다구. 섭외만 끝나면 방송은 구십 프로가 끝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거라구!…… 그런 잔소리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노인을 설득해서 스스로 얘기를 하도록 할 자신은 있었는데 그때까지 노인은 입을 열기는커녕 우리들에 게 아예 눈길조차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 선생은 그대로 마당가에 서서 철조망에 이리저리 찢긴 임진강을 또 하염없이 바라보고 나는 노인에게 떠난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섰다. 어둑어둑한 방에 노인은 꼿꼿이 앉아 있었다. 나는 무턱 대고 큰절을 올리고 난 뒤 이제 그만 가겠노라고 말씀드렸다.
“아무쪼록 어르신네께서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외람된 말씀이나, 어르신네께서 기다리는 세월이 하냥 길기만 하겠습니까? 그러니 그때를 위해서도 건강으로 장수하십시오.”
나는 일어섰다. 한때는 이 근방 어디를 밤새워 지키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물론 사정이 다르다. 밤의 임진강, 밤의 철조망이 공포스럽게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방문을 열고 마악 나서려고 하는데 밖에 대고 외치던 노인의 음성이 나를 붙들었다.
“아가!”
나는 엉거주춤하고 그 자리에 섰다. 노인의 며느리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오자 그는 말했다. 여기 술상이나 좀 봐 오니라. 그리고 그는 잠시 혼란에 빠져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향해 이번에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갈 길이 아주 급하지만 않다면, 흐린 술이나마 한잔 들고 가시게, 밤길이 아주 적막하지만은 않으리……”
나는 박 선생을 재빨리 불러들였다. 노인이 읊조린 말은 어디선가 한문시의 번역으로 읽은 듯했다. 박 선생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어두침침한 방 안에 그만큼씩의 나이 차이로 셋이서 함께 앉아 있자니 무작정 흘러가던 한반도의 세월이 잠시 강변에 기대어 쉬고 있으리라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관향⁕이 어디시오?”
“함양이요.”
노인이 묻고 박 선생이 대답하였다.
“좋은 곳이오. 이 사람은 해주라오. 그런데 천 리 아래 함양 땅이 엎어지면 코 찧을 해주보다 가깝소그려. 연(然)이나⁕ 천 리를 헤쳐 이 노구(老軀)를 찾아온 객손을 박대함도 예의는 아닌 듯해서 잠시 잠깐 부끄러움으로 허물을 가릴랴고 하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방 안의 사물들이 하나하나 빛을 내듯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노인의 얘기도 왠지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았다. 이런 늦은 오후 무렵에 보초를 서면서 강을 보면 저 아래 서해에서부다¡ 물이 조금씩 밀려와 마른 모래밭을 야금야금 적셔놓고 이내 함께 잠기고 어울려서 거대하게 출렁거리곤 했었다. 그러나 실은 내가 아끼던 그런 시간과 모습 들은 적의 침투가 용이한 조건이라고 했다. 무엇이나 빛나고 반사하는가 하면 강이 겉으로까지 몸부림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방문만 열어도 보이는 저 강산이 바로 경기도 개성군 영남면이라오. 우리 황가는 누대*로 그곳에 태를 묻고 뼈를 묻어왔소. 그런데 나는 그곳에 태는 묻었으되 뼈는 묻지 못할 팔자이고, 육신은 강을 건녔으되 혼백은 아직도 배를 얻어 타지 못한 운명이라오. 죽고 난 뒤 내 육신의 뼈야 자식에게 단단히 일러두었거니, 삭은 가루가 되어 더러는 물속에 속절없이 잠겨가기도 하겠으나 또 더러는 철없는 날짐승이 물어다가 선영 곁으로 옮겨주지야 못하겠소? 허나 대를 이어가야 할 자식을 내 손으로 앗았으니…….”
술상이 들어오자 노인은 잠시 무겁게 이끌리던 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사 들고 갔던 술병의 마개를 열어 박 선생에게 먼저 술을 따라주었다. 선생과 나는 펼쩍 뛰다시피 했지만 노인은 아니라고 하면서 끝내 우리의 손을 때어 냈다.
“예(禮)와 비례(非禮)는 가려서 분별할 줄 아는 늙은이오. 고향에서 훈장 이십 년에, 적어도 장(長) 유(幼)가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공부한 서생이라오.”
박 선생은 그 술을 마셨다. 그러나 노인은 잔을 들어 말라붙은 입술을 축였을 뿐 마시지는 않았다.
“내 아들은 사 대 독자였는데, 피치 못한 사정이 있어 이 늙은이 혼자 월남한 지 이십 년이 되던 여름에 이 강을 건너왔었더랬소. 우직한 자식이 애비의 죄를 덜어주려고 했던 모양이오. 허나 아들은 험한 물길은 건녔을망정 인위(人爲)의 낮은 벽 하나는 넘지 못하고 그만 흉한 총탄에 쓰러져버리고 말았소. 애비 이름만 부른다기에 그때서야 알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그곳이 저 앞쪽, 지금은 한(恨)이 강초(江草)로 자라 키를 넘는 곳이오.
내가 이 동리로 이사한 것도 그 이후였소. 그전에도 물론 이 근방이었으니까 아들이 애비 살던 곳을 정확하게 가늠한 것은 사실이오. 허나 우매한 아들은 하늘이 바뀌고, 강이 그새 뒤집히고, 세월과 인정이 변했음은 간파하지 못했던 모양이오. 그 애가 알고야 그랬겠소? ……알고 그랬겠소? 그리고 그 애가, 먼저 와 있던 애비와 애비의 마을에서 자신에게 총을 겨누리라고 꿈엔들 의심 이나마 해보았겠소?
그 아이는 결국 공비로 처리되었다오. 모든 상황을 차치하더라도 동족의 목숨을 두고 공적의 많고 적음이 가려지는 세상이라오. 나는,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고 씻어낼 수 없는 죄업(罪業)으로 스스로 목숨을 절단하려고도 했소. 그때쯤 목숨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겠소? 그러나 생각할수록 그것은 그 애의 무지(無知) 탓도 아닐 뿐더러 내 잘못도 아니었소. 그 모든 근본은 바로 저, 철망이었던 것이오. 하여 나는 이날까지 홀로 된 따라지* 아이 하나를 주워다 아들 삼아 살고 있소만……”
웅웅거리는 확성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쯤이면 아마 월북을 권유하는 내용일 것이었다. 달이 떠오를 시각이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진짜로 넘어간 치들이 증언하는 목소리가 실려 오기도 하였다. 수색 때마다 우리가 주워 모으는 삐라를 보면 큰 잔칫상을 앞에 두고 그쪽에서 결혼한 부인과 함께 활짝 웃는 사진들도 많았다. 애비의 죄를 덜기 위해서라고 표현했지만 노인의 아들이 진정으로 찾아온 것은 이 땅의 무엇이었을까?
“우공(愚公)이 산을 옮기려고 했다던 고사(故事)를 기억하시오? 이 늙은이가 바로 우요. 타향 객손을 문전에서 등돌림도 허물이오만 실은 그래서 돌아서는 소맷부리를 붙잡았던 것이오. 그러하오! 남들이 모두 미쳤다고 하나, 하루 세끼 찬반*을 섭취하고 노구에게 고이는 미력으로 내 그래서 임진강에 자갈을 골라 넣기 시작했던 것이오.
저 흉칙망극한 철조망은 내 사십 년 세월로 지켜보지만 갈수록 강고해지니 대체 누구의 농간이며 도대체 무엇 때문이오? 허나 원치 않는 백성이 있다면 나와 함께 강에 돌을 메꿀 일이요, 저 괴물의 몸뚱이를 삼천만이 달려들어 토막토막 잘라내면 될 게 아닌가! 아니라면 또, 만백성이 줄을 이어 막무가내로 이 강 저 산을 출입하기 시작하면 될 터이고, 다녀와서 감옥소를 보내면 감옥소에 가면 될 것을…… 그게 동포대중이 함께 일로매진해야* 할 새 독립운동이건만…… 연이나, 땅에 지사(志士)는 없고 철조망에 만백성 이 명줄이라도 걸어놓은 것인지……
내 그럼에도 더욱 쓰리고 애가 탐은, 금명*에 이르러 쇠잔하니 이제 돌을 던질라치면 두 자 높이의 철망조차 넘기지 못하는 사실이오. 그리하여 깨달았소만, 내 아이와 더불어 그때 끊지 못한 부끄러움을……“
말을 다 맺지 못한 노인은 다시 끝없는 침묵 속으로 잠겨갔다. 노인의 길고 긴 한 생애가 내 앞을 이제 막 스쳐 지나가고 또 마감하는 느낌이었다. 잘잘못을 떠나서 놀랄 만한 순수와 열정을 지닌 분이었다. 박 선생이 내 옆구리를 찌르고 나서야 우리는 일어섰다. 나는 다시 노인에게 큰절을 했다. 무슨 말씀이든 드리고 싶었지만 적당한 어떤 말도 끝내 떠오르지는 않았다.
노인 집 대문을 나선 박 선생은 내 앞을 휘적휘적 걸어가더니 휴전선이 지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질겁을 하면서 내가 붙들었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강 너머 멀리에서부터 어둠이 천지를 물들여오고 있었지만 선생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는 하릴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철조망 아래에 이른 선생은 한참 동안 강 쪽에만 시선을 두고 있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러더니 무엇이라도 치받쳐 올라오는 것인지 갑자기 욱욱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나는 선생의 행동이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등을 천천히 두드리기만 하였다. 그러면서 철조망 아래에 우연히 눈이 갔던 것인데 거짓말처럼 그곳에 피어 있는 들꽃 하나를 발견하고 하마터면 큰 소리를 낼 뻔하였다. 선생님! 여기 꽃이 있어요!
“선생님 ! 이제 그만 돌아가셔야 됩니다.”
“나는 괜찮여. 나는 괜찮다야.”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여윈 그의 몸이 내 가슴에 아프게 끌려오다가 갑자기 저만큼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두리번거려 땅에서 무엇인가를 집어 들더니 선생은 그것을 휴전선 너머로 있는 힘껏 날려 보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노인에 이어 임진강을 향해 돌을 던져 넣으며 분노하던 선생을 그날 보았던 것이다.
공원묘지 입구에서의 영결식은 선생의 생애처럼 쓸쓸하였다. 그 흔한 거리제 한 번 지내는 일 없이 달려온 영구차는 그냥 굵은 돌을 깔아놓았을 뿐인 황량한 벌판에 일행을 내려놓았다. 아들 하나와 두 딸, 그리고 망자의 형님과 그 조카가 유가족의 전부였고 우인(友人) 몇몇과 전주의 예술인 삼십여 명이 모여 마지막으로 그를 보내고 있었다.
꽃샘바람이 부는 속에서 사람들은 발밑의 자갈들을 가만가만 굴리고 있었고 장례위원장이 앞에 나서서 슬프고 슬프고 슬프면서도 슬프지 않고, 슬프지 않고 슬프지 않고 슬프지 않으면서도 슬프다는 조사(弔辭)를 했다. 아침부터 취해 있던 우인 대표는 자갈밭에서 비틀거렸다. 그러고는 생시처럼 정겨운 반말과 욕설로 그 넋이 바람으로돌아와 우리 모두의 머리를 때려달라고 외치면서 조사를 마쳤다. 이어서 선생의 대표 시, 아마도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단 한 번도 떠나본 적 이 없었을 「휴전선」이 낭독되고, 수운(水雲) 과 증산(甑山)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기다린다는 내용으로 후배 시인이 조시(弔詩)를 낭송하기도 했다. 그런 다음 맨 끝으로 우리는 차례에도 없던 「우리의 소원」을 부르고 내친김에 울 밑에 선 봉선화까지도 함께 입을 모아 불렀다.
선생의 음택*은 공원묘지의 중앙 하단부에 마련돼 있었다. 상하좌우에 널린 수천 기의 무덤들이 그를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있음을 어렵잖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승에서보다도 저승에서 선생은 분명 덜 외로울 것이었다. 거기에서는 오히려 쌀 걱정이 없어진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선생은 자기의 휴전선, 아니 우리 자신들의 속일 수 없는 분단의 철조망에 대해 되풀이하고 거듭 되풀이하면서 일깨우고 들려주리라.
땅을 잘 고르고 밟아야 한다면서 선생이 묻힌 곳을 자근자근 밟고 있는 일행들을 보면서 나는 휴전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의 얘기들을 떠올렸다. 줄곧 차창 밖으로 시선을 둔 채 말이 없는 선생을 향해 나는 화두(話頭)를 붙잡느라고 넌지시 말을 꺼냈던 것이다. 선생님, 이제는 휴전선을 다시 쓰셔야죠? 오십 년대의 모습하고는 휴전선도 많이 바뀌지 않았던가요? 그러나 선생은 나를 한 번 쳐다보았을 뿐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리면서도 가타부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 진언*은 얼마나 서투르고 오만하며 또 방자하기 짝이 없는가! 도대체 오십 년대든 이 잘난 구십 년대든, 휴전선을 두고 바꿔 써야 할 것이라고는 눈을 파서 뒤집어 봐도 없었다. 나는 그 자각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사죄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의 시 제목과 똑같은 소설 「휴전선」을 쓰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인데 그는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멋지다! 정말 멋지다야…… 그러면 거그다가 내 이야기도 해라잉? 평토제*도 이제 다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참배객에 섞여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이제는 정말이지 미뤄두었던, 선생에게 약속했던 소설을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도대체 휴전선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한없이 막막해 있던 내 머리를 차고 매운 꽃샘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가 영결식에서 선생을 향해 철 따라 바람 되어 오라고 하던 조사를 했었다.
그렇다. 휴전선은 미신(迷信) 이다. 못된 이무기에게 해마다 처녀 하나씩을 바치는 대신 풍어를 얻으려고 했던 바닷가 마을의 전설처럼, 휴전선 마을의 저 황 노인과 같은 가족들의 사연처럼, 아니 평생을 일관되게 휴전선의 시인으로 살았던 선생을 지금 우리가 하무런 기약도 없이 매장해버리면서…… 그러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미신의 괴물을; 그 휴전선을 신(神)으로 섬기고 있지나 않는지……
『문학정신』 (1990. 5); 『사냥』 (민음사 1990)
이병천(李柄天)
1956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하고,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더듬이의 혼(魂)」 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아름답고 세련된 문체와 감수성을 바탕으로 현실의 구체적인 세목(世目)들을 솜씨 있게 포착한 소설들을 발표해왔다.
소설집 『사낭』 『모래내 모래톱』 『홀리데이』, 장편소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 『저기 저 까마귀 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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