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이 쓴 한국사
저자는 우물 밖의 개구리가 보는 한국사 The Frog Outside the well이다,
형식은 신채용 씨가 묻고 저자 ‘마크 피터슨’ 씨가 쓴 글이다. 1965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일하다 귀국하여 한국사를 하버드에서 석사학위를,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은 주변국 일본이나 중국의 침략 우려를 염려할 것이 없단다. 이유는 ‘한국인은 한국어로 말하기 때문이란다.’ 한 나라의 문화의 핵심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인의 언어를 파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전쟁에 항복하자 한국인은 곧바로 한국어를 사용했다.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 심지어 미국에도 정복당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언제나 한국어로 말할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국인은 고려 초기에 봉건제도를 버리고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시켰다. 인재 채용은 과거 시험으로 관리를 뽑았다. 이런 역사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일본과 대조적이다.
한국은 침략을 당한 횟수가 985회라 산출해냈다. 그것은 해적이 해안을 습격한 사소한 외부 침략도 헤아린 것이다. 몇 명 죽은 단지 해적의 습격이지 침략이라 볼 수 없는 사건들이다. 한국이 피해의 역사를 당했다고 보는 것은 문제다. 고려가 망하고도, 현재 왕 씨는 전국에 2만 5천 명에 달한다. 왕 씨 일족의 멸족이 아닌 증거다. 조선의 과거 급제자가 가장 많은 성씨는 전주이씨 가문이다. 조선의 과거 합격자 1만 5천만 몇 중에서 전주이씨는 872명이다. 6%다. 백제, 고구려의 귀족은 망국 후 절멸시킨 사례다. 한국의 성씨는 250개밖에 되지 않는다. 김씨가 21%, 이씨가 15%, 박 씨가 9%, 최씨 5%, 정 씨 5%. 이 5성이 합치면 국민의 절반이 넘는 55%다. 일본의 최대성 ‘사토’는 1.57%, 미국의 최대성 ‘스미스’는 0.8%, 스페인의 ‘가르시아’ 3.5%, 인도의 ‘싱’ 2.7%, 이란의 ‘모하마드’ 1% 등이다. 결론은 한국의 역사가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다는 다른 증거다. 특정 인구에 인구가 편중된 것도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다.
유럽의 국경은 10년마다 바뀌었다. 한국의 압록강은 국경이 1,000년을 유지한 것은 안정을 이해하는 중요 열쇠다. 몽골은 중국의 전역을 점령하고 황제가 되었지만, 한국은 지속적인 저항으로 고려왕이 왕위를 유지했다. 몽골의 완전 정복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은 유교 이념을 따르는 국가 건설이 이상이었지만, 한국에서는 현실이 된 셈이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가장 긴 왕조가 독자적으로 나라를 통치해왔습니다. 한국의 군주제는 부패방치 방편이 세워졌다. 왕권을 견제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 견제 역할을 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습적인 무덤 도굴꾼들이 있었다.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절망하여 도둑들이 무덤을 도굴할 정도의 혼란도 없었던 안정된 나라였음이 분명하단다.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 전쟁은 일본에 신의 선물이었다‘라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국은 일본 대신 분단되었으니 이전에 일본이 한국의 자원 덕분에 부유했다면, 이제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돈이 일본에 흘러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한국이 반도였음을 강조하고, 작은 나라로서 지리적 조건이 큰 나라를 섬길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이탈리아는 반도국이지만 큰 나라를 섬긴 적은 없습니다. 한국이 작은 나라란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한국을 유럽으로 옮기면 경제 규모에서 영국이나 독일보다 작지만,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보다 큰 유럽의 강국 못지않습니다. 우리는 ‘한’이란 개념이 일본 식민지의 부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한국의 유교는 17세기 후반부터 가중되기 시작했다. 가문의 땅은 아들딸 구분 없이 모든 자녀에게 분할되었다. 財産分財記, 同生和會文記 등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재산이 모두 장자상속으로 넘어간 것이다. 인구 압박과 경제적 압박으로 생존 방법을 찾아 유교를 구실로 삼아 딸에게 재산을 주지 않았다. 족보에는 초기에 아들딸이 가정과 사회에 동등한 지위를 공유했음을 보여준다. ‘장가간다’라는 표현이 나타난 것이다. 모든 아들딸이 순서대로 족보에 나열되었다. 8 고조도 5대 가계도에 나타났다. (팔고 조도는 나의 부모의 아버지, 즉, 조부, 조모와 외조부, 외조모의 4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 조부를 낳은 증조모의 부친, 즉 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 조모의 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 외조 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 외조모의 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를 합쳐 8조고다. 나의 DNA 염색체는 위 8명의 할아버지의 피가 1/8씩 분포되었다고 본 것이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이 어머니께 물려받은 집이다. 이이의 상속문서에 따르면 신사임당은 7명의 자녀를 아들, 딸, 율곡, 딸, 아들, 딸, 아들을 두었는데 동생화문기에 따르면 ‘형제자매들이 모여 평화롭게 협의하여 작성한 기록’이란 뜻으로 상속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처해 자녀들이 모두 찬성한 서명을 했다. 제사는 율곡이 맡는다는 문항은 따로 있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가 신씨 집안에 장가를 ‘간’ married into 경우다.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은 신사임당이 어머니 용인 이씨에게 물려받은 집이고, 용인 이씨는 자기 모친 강릉 최씨에게서 몰려 받았다. 최씨 가문은 모두 남성이 이 집안으로 장가를 오는 전통이 있었다. 한국에 본관이 있는데 장가간 전통으로 남자들이 전국으로 펴진 것이다.
딸들로 제사를 지냈다. 윤행, 또는 윤회봉사라고 하는데 재산이 장자상속이 되었다면 출가외인이 되고 잘해야 시집갈 때 지참금이나 혼수가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동생화회문기에, 부안 김씨 상속문서에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吾家異於他家 出嫁女子 則祭祀勿爲輪行”이라 기록됐다. “우리 가족은 이제부터 딸들이 돌아가며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란 것을 강조한다. 즉 우리 집은 상속이 평등 주위에서 장자상속제로 간다는 의미란다. 우리는 1592년, 1627년, 1636년,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전쟁 이후 조선이 사회. 경제적으로 변화했다고 말하는데, 전쟁 후 조선은 정상으로 돌아갔다. 왕도 노비도 농부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100년이 지난 후에 17세기 전쟁의 회복기에 변화가 일어났다. 두 세대가 지난 후에 일어난 일이다.
부계사회의 특징은 1. 상속, 2. 제사, 3. 족보, 4. 결혼, 5.마을 구조, 6. 양자, 7. 아들 선호 사상 등이다. 입양제도는 계후등록, 족보, 과거 합격자 명부인 사마방목을 기초해보면 초기는 입양 사례가 보이지 않는단다. 양자는 사후 백골양자의 경우가 많았다. 목적은 아버지와 다른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대를 잇는 것이다. 대를 잇는 목적은 ‘계후’라 불린다. 임란 이전은 부계와 모계 가문의 문장이 동의해야 입양 계후가 이뤄졌다. 이를 양변 문장이라 한다. 입양의 계후등록에는 8촌 이내의 당내 양자이면 예조에 가지 않고,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예조를 통한 검증은 10촌 이상에서 했다. 김옥균은 26촌의 친척에게 입양되었다. 과거에 급제한 김옥균을 인재 발굴 차원에서 입후된 듯하단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에 불을 붙이고 조롱하여 반란이 난다. 문신이 무관이 된 사례는 강감찬 장군이다. 고려는 평시든, 전시든 문신을 우대했다. 조선은 군현의 행정직에 절반은 무관으로 임명했다. 군경지대, 군사지역이다. 과거에 합격한 문무관을 양반이라 하고, 동쪽에는 문신 서쪽에는 무신의 표석이 계급별로 정전에 세워졌다. 한국은 문치로 유명하다. 중국처럼 내시들의 통제 활용이 없었다. 명 13대 만력제는 최악의 군주로 주색에 빠져 정사에 무관심하고 인접국 조선이나 일본에도 무관심하였다. 몸무게가 200킬로 나가고 너무 뚱뚱하고 게을러서 일어나 걷는 기본적인 행동도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한국의 환관들은 다른 관리들보다 오래 살았다.
저자는 19세기 말의 일본 상황과 한국의 상황을 비교하는 것을 좋아한단다. 일본은 사무라이에게 의존했다. 전통질서가 무너지자 사무라이는 자결을 택한다. 유명한 47인의 로닌(낭인) 사건도 일어난다. 자결은 사무라이의 역겨운 전통으로 자결치 않은 사무라이는 훗날 전쟁을 도발한다. 그리고 일본에 국한하지 않고 중국, 러시아, 한국, 만주, 동남아에 확장하고 끔찍한 ’난징 대학살’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은 칼의 힘으로, 한국의 붓을 꺾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지요! 이제 한국은 세계에서 식자율이 가장 높고, 고등학교 졸업률이 가장 높고, 대학 졸업률이 가장 높다. 국민이 산업, 기술, 서비스 분야에서 선두를 이끌 준비가 되어있는 나라다. 엔터테인먼트에서도 소프트 파워를 보여준다. 한국은 붓이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노벨상이 평화상 하나지만, 일본은 평화상 1명, 문학상 3명, 과학상 25명 모두 29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단다. 이를 비교하는 것은 나쁜 의도가 아니라 언젠가는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을 것이다. 한국이 인정받게 되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입니다. 기다려보세요. 라고 저자는 격려의 말을 한다. 이게 한국의 선비정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창의성, 영역에서 한국이 보여준 성공 역시 선비 전통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단다. ‘언더우드’는 “모든 사람이 한국의 위대한 경제 기적, 즉 ’한강의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교육의 기적이 경제 기적보다 먼저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했단다. 한국은 반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이 모든 일을 해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 범죄의 대가로 국토를 반으로 잘리지 않았다면 더 강력하고 성공적인 국가가 되었을 것이란다. 역사의 불공평함, 정의롭지 못했던 한국의 분단,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난 한국 전쟁에도 한국은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일어났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 중 하나로,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나라 중 하나로, 부상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정답은 ’선비정신’입니다. 선비정신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선비 전통에서 싫어하는 부분을 과감히 벗겨버리고 좋은 점을 간직하며 선비 전통의 좋은 측면을 앞으로 더 쌓아나가야 할 것이다. 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한국 시조, 세계문학에 공헌한다. 저자는 한국 시조를 세계적인 시의 형식으로 인정받게 만드는 시조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정몽주의 단심가를 외었단다. 그리고 시조를 한국어와 영어로 읊었다. 이제 미국과 전 세계에서 ‘시조 운동’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시조 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가 시카고의 작은 단체가 후원하는 대회로 14년째 개최되고 있단다. 고등부에 1,000명이 참가하고, 성인부에도 200~300명이 참가해 경쟁을 벌인단다. 시조 웹사이트도 늘어나, LA, 위스콘신, 오하이오, 미시간, 켄터키 등지에서 시조 대회가 열린다. 세종문화회는 미국 이외의 시조 작가들이 참가해 경쟁하는 ‘국제부’도 만들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단다. 한국 사람들은 시조를 ‘오래전에나 하던 거지‘라 말한다. 이게 문제다. 시조는 살아있는 시가 아니라 고대의 시 형식입니다. 한국의 시조를 살리는 수단으로, 창의력을 북돋우는 방법으로 시조 대회를 개최한다면 시조 전통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고전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시조를 쓰는 창의력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시조에서 이 접근법이 타당하다면 시와 문학의 다른 분야에서 타당할 것입니다. 라 저자는 주장하며 미국인이 지은 시조를 소개한다.
“찾는 자여, 개구리를 보게나. 그 작은 초록색 요기(요가 수행자)는 몇 시간 동안 앉아 있다네.
꼼짝하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그 자리에 있지만 그 혀는 파리를 잡을 준비가 되어있다네
개구리처럼 인내심을 지닌다면 언제든 혀를 뻗어 파리를 잡을 수 있을지니.
(원문은 영어로 세종문화회 텍사스 대회 성인부 장원 ’엘리스 데이비슨‘ 휴스톤지회 의 시조이다,)
2022.11.15.
우물 밖의 개구리가 보는 한국사
마크 피터슨, 신채용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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