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빛깔/김뱅상-
오후의 가슴둘레, 바이올렛이다
어깨 너머로 햇살 서너 줌 짓물러지고
하늘 바다 돌 파도, 한통속으로 물들어 가면
저녁, 벤치 옆 길목을 서성인다
막 몸속을 통과하는 스펙트럼의 맨 아래
끊어지듯 이어지는 선율들
바람 아니, 바이올린
그래, 이럴 땐 세상에서 가장 긴 혀를 가진 내가 나를 핥는 거야
닿을 수 없는 우듬지가 있었지
내 속에 나 부풀어 오르고
가슴둘레가 왜 이리 꿈틀거리지?
카페베네 2층 창가
맨 아래쪽 옆구리 울렁일 땐 마른 나뭇잎? 흔들린다
둥치마저 꿈틀거리고, 이 몸통
사라진 줄 알았던 것들 몸 안쪽을 향해 걸어온다
바스락거리는 것들이란 늘 조금씩 어려운 것이지만
가위를 들고 장미 넝쿨을 자른다 가지들은 손가락을 손등을, 가슴을 찌르기도 하지
잘려 나간 꽃들 흩어지고
저녁의 빛깔 손바닥 위에 올리면
잘린 지문들
바람 사붓대는 길목에서
푸른부전나비 한 마리 오물거리는
바이올렛, 어둠 쪽으로 겹쳐져 가고
내일은 또 어떤 빛깔들, 자라날까
박제 그림자/김뱅상
더듬이가 잘려 나간 그림자들 거짓말을 쏟아냅니다 형광
깜박입니다
신발을 더듬는데 문득,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엊그제 붙잡힌 슬픔엔 고막도 없다던데
핀 박힌 가슴 하나, 떠올립니다
무슨 울음이 이리 더듬거릴까요? 현관에서
*
현관 센서 등이 켜진다
더듬, 더듬
빛이 사라진다 누가 다녀가는 걸까?
문 쪽을 바라본다
여닫이문 열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불 켜지고 문 앞, 웬 발자국?
귀 기울이면, 박각시나방 한 마리
더듬이 겹눈, 불빛 따라 어두워지고
저런, 몸에 꽂힌 저 핀 좀 봐
얼마나 오래 뽑지 못한 가슴일까? 녹이 슨 몸통하며……
깨진 날개 끝
그래,
녹슨 게 어디 나방 몸통뿐일까?
현관, 어두워진다
어떤, 어둠은 등으로부터 오는 걸까?
머릿속, 어두워지고
어둠 속에선 왜 눈을 감아야만 돌아볼 수 있을까? 어둠에도
센서가 있는 걸까, 나를 닫으면
빛 들어온다 들어서지 못하던 발자국들,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어
*
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본다, 이내 돌아서는
환한 어둠 속에서 손 맞잡고도
이렇게 커다란 틈 하나 비집지 못하는, 뒤꿈치 든 저 발자국
그런가, 너도
가슴에 박힌 핀 하나 네가 빼지 못하는구나, 빈 머리를 흔드는
더듬이를 꿈틀거려 보지만
잘려 나간 촉감, 어느 불빛을 따라갔을까?
한밤, 현관에 불 켜지다 꺼지면
자꾸만 출렁거리는 나방 한 마리, 또는 그림자 한 쌍
날 만나지도 못하고 힐끔 돌아서려는
*
무슨 그림자들이 이리 희번덕거릴까요?
어떤 슬픔은 왜 자꾸 더듬거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