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13세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광복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20세의 나이로 악극단 ‘민협’에 입단하면서 단원들이 지어준 ‘삼룡’이라는 이름으로 무대 인생을 살았다. 훗날 배씨는 “그 때나 지금이나 삼룡이란 이름은 조금 모자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배우가 되는 마당에 이름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 ▲ 고 배삼룡의 생전 모습. 음료 '삼룡사와' 광고(좌), 영화 '아리송해'(우측 위), 영화 '형사 배삼룡'(우측 아래)에 출연한 모습.
스크린에서도 빼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다. 1966년 영화 ‘요절복통007’을 비롯해 ‘형사 배삼룡’, ‘아리송해’, ‘마음 약해서’ 등 14편의 작품에서 주·조연으로 활약했다.
1980년대 들어 고인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1980년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음료업체 ‘삼룡사와’가 도산했고, 신군부로부터 ‘저질 코미디’를 한다는 구실로 방송출연 정지를 당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훗날 배씨는 “당시 김종필씨를 대통령 후보로 과하게 지지하면서 당시 정권의 미움을 산 것 같다”고 말했다. 고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나를) 참 좋아하셔서 가끔 (청와대로) 초대했다”며 “박 전 대통령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거냐?’ ‘지금 제일 먹고싶은 것이 뭐냐’ 등의 질문을 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고인은 1990년대 중반 흡인성 폐렴 진단을 받았다. 2007년 6월 서울 목동의 한 행사장에서 쓰러져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한 뒤 줄곧 투병생활을 해왔다. 투병 중에도 어려움은 계속됐다. 친아들 배동진 씨와 양아들인 코미디언 출신 가수 이정표 씨의 감정싸움이 벌어졌고, 1억3000여 만원의 병원비가 체납돼 병원측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배씨를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졌지만, 일부에서는 모금을 사칭해 사기행각을 벌이는 이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