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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8월10일 연중 제19주일
[수도회] 야성(野性)의 회복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제1독서 1열왕 19,9ㄱ.11-13ㄱ
† 제2독서 로마 9,1-5
† 복음 마태 14,22-33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장면을
만납니다. 엘리야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다가오신 주님에게서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납니다. 미사에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부드러운 손길과 영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모두 지친 마음과 번뇌에 찬
생각에서 잠시 벗어나 전례를 통하여 다가오시는 사랑의 주님께로 온전히
향합시다.
★ 엘리야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신다. 그분께서는 강한 바람이나 거대한
지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으며, 이 모든 것이 사라진 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동포에 대한 깊은 사랑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그는 이스라엘에 수많은 은총이 주어졌으며 예수 그리스도 또한 육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음을 상기시킨다(제2독서).
★ 새벽에 호수 위를 걸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이 유령으로
여기며 무서워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이라고 밝히신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청하여 물 위를 걸어 그분께 다가갔으나 두려운
마음이 들자 물에 빠져 버린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건져 주시며 부족한
믿음을 나무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면 오늘 복음의 첫 부분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호수 위에서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에 집중하다 보면 자주
간과하곤 하는 이 부분을 주의 깊게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이처럼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걷는 기적을 통해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주신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척 주의 깊게 이 만남을 준비하시는 것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직접 군중을 돌려보내셨습니다. 그 뒤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그곳에 머무르셨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멀어졌고 심한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심으로 이 만남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며
그들이 당신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온몸으로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깨달음을 위해 제자들은 군중 사이에서 자신들을 사로잡은 도취와
피상성에서 떨어져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 없이 시련을 만났을 때
자신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절감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얼마나 약한지, 그들을 위하여 나타나신 주님을 ‘못 알아볼
정도’로 얼마나 흔들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체험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존재가
아니라, 오직 주님 당신과 인격적으로 만나라고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이제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는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군중 속에 묻혀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용기 있게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각자를 위하여 이러한 만남을 준비하시고
다가오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희망 안에서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일로 만드시는
2014년 가해 8월10일 연중 제19주일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오 14,22-33
미국 제너럴일렉트로닉스의 연구소 소장이었던 윌리스 휘트니는 늘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할 수 없는 수천가지 이유를 댄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에는 그 일을 해야 할 단 한 가지 이유만 있으면 된다.”
해야 할 한 가지 이유, 그리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수천가지 이유. 과연
어떤 이유를 쫓고 있을까요? 우리들은 세상의 기준들을 내세워서 할 수
없는 이유들을 얼마나 많이 만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만든
그러한 부정적인 이유들이 정작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중요한 차이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행복한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가지만을 보면서 희망을 간직하는 반면,
불행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수천가지의 이유를 보면서 절망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떨까요? 행복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불행한
사람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지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이
기적은 이미 오래전에 욥이나 다윗과 솔로몬 왕등을 통해서 예언된 바가
있습니다. 특별히 욥기를 보면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욥 9,8)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이 기적은 참으로 인간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분이 물 위에서도 땅 위처럼 걸으실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의 물 위를 걸으심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특이한 것은 베드로 역시 잠깐이라도 물 위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청하지요. 그는 주님의 명령이 있어야지만
물 위를 걸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너라.”라는
명령에 물 위를 걸어 예수님을 향해 걷습니다.
성경에도 예언되어 있는 하느님만이 가능한 일을 믿음도 약하고 의심도
많은 베드로가 잠깐이라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거센 바람에 두려운
마음이 들어 물속에 빠지게 되지만, 하느님의 영역 안에서 잠깐 동안
하느님처럼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물론 주님의
크신 사랑이 한 가운데에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것은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 청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도 약하고 의심도 많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마음이
흔들려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마음으로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우리 역시 주님의 영역 안에서 주님 체험을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희망 안에서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일로 만드시는 주님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파울로 코엘료).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두 군데의 잡지사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매달 20일이 원고
마감 날이지요. 원고 마감 날에 다다르기 전에 글을 미리 써놓으면 참
좋겠는데, 어느 날 달력을 우연히 보게 되면 19일이고, 20일인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그 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글 쓰는 데에만 전념을 하게
되지요.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그렇게 임박해도 글은 써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평화방송 라디오 강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
중에 한 주를 제가 맡아서 하고 있지요. 제 날짜에 방송이 되기 위해서 한
주 전에 미리 녹음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강론이 미리 준비되어
있어서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올리는데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이렇게 여유가 생기면 다른 일들을 미리 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여유가
생기면 또 다른 일들이 다가오게 되고, 또 급하게 글을 쓰고 방송을 하게
됩니다.
사실 절박할 때에 창의력도 나오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지금
절박한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 어쩌면 새로운 창의력을 맞이할 때이며
이로써 나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킬 소중한 시간을 맞이하시는
것입니다. 결코 절망하고 포기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삶을 살 수 있는 우리입니다.
- 인쳔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야성(野性)의 회복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8월10일 연중 제19주일
열왕기 상19,9ㄱ.11-13ㄱ 로마9,1-5 마태14,22-33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오 14,22-33
야성(野性)의 회복
문명의 야만이란 역설의 시대입니다. 야성을 잃어가는 시대입니다.
야생화(野生花)같은 참된 야인(野人)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특히 야성(野性)을 잃은 야당(野黨)은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야성을 잃는다는 것은 순수한 열정을 잃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야성이
사라진 그 자리에 마성(魔性)이, 야만(野蠻)이 자리 잡기 마련입니다.
예전 군생활에 윤 일병 사건과 같은 잔인한 사건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야성은 있었지만 이런 잔혹한 야만의 폭력은 없었습니다.
야성을 잃어가기에 마성의 악마요 괴물들입니다.
다음 신문 컬럼에 공감했습니다.
-존 그레이가 말하듯
“기술과 과학은 축적되지만 인간의 도덕은 언제나 새로 시작된다.”
물질과 달리 인간과 관련된 부분은 세대를 거듭한다고 해서 더 발전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더 퇴보하기 일쑤다.
교양 있고 예의바른 인간들이라고 해도 갑자기 변화한 물적 조건이나
종교가 된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쉽게 야만인이 된다.
야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야만을 ‘척결’한다는 불가능한 바람이 아니라,
그 야만 속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래서 하느님을 찾는 구도자적 열정이 필수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열정이 있을 때 야만이나 마성은 순수한 열정의 야성으로 변모되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야성 회복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고독을 추구하십시오. 고독을 추구할 때 야성의 회복입니다.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입니다. 고독을 통해 삶은 깊어지고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예전부터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고독과
침묵을 사랑했습니다. 고독의 거울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얼굴이요 내 얼굴입니다. 그러니 고독의 추구는 하느님의 추구요,
고독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없는 고독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에 승리하여
이들을 모두 죽인 후, 이제벨의 마수를 피해 도주하는 참 고독한 처지의
엘리야입니다.
바로 이때 그가 찾은 곳은 고독의 땅, 하느님의 산 호렙에 있는 동굴이요
여기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역시 군중을 배불리 먹인 다음
지체치 않고 그 자리를 떠나 고독의 땅, 산을 찾습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예전 사막의 고독과 침묵을 찾았던 사막의 수도승들처럼
이 두분은 산의 고독과 침묵을 찾았고 거기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기도하십시오. 고독은 그대로 기도로 직결됩니다.
기도할 때 야성의 회복입니다. 마음의 순수, 마음의 열정을 회복합니다.
사람은 '기도의 동물'입니다. 어려서부터 기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기도
습관보다, 믿음 유산보다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아 결국 괴물이 되고 악마가 됩니다. 기도하지 않고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기란, 야만을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고독은 필연 기도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가 그 모범입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마침내 고독 중에 주님과의 만남이 시작된 엘리야입니다. 예수님 역시
기도의 힘으로 제자들의 곤경을 멀리서도 꿰뚫어 봤고 즉시 도움의
손길을 뻗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었음은 다음 대목이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렀다.‘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믿음의
뚜렷한 표지요 이런 주님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믿음 약한 제자들입니다.
그대로 제자들의 기도 부족을 드러냅니다. 물속에 빠져드는 위기 시의
베드로처럼 우리도 곤경 중에 기도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주님을 만나십시오.주님을 만날 때 야성의 회복이요 인간성의 회복입니다.
현대인들의 결정적 불행은 주님과 만남의 부재에 있습니다.
아니 종파를 떠나 주님과의 만남인 신비체험은 이제 필수가 된 세상입니다.
바오로의 깊은 고백 역시 주님을 만났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닿았기에 이런 진정성 넘치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가 얼마나 동포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랑했는지 깨닫습니다.
주님을 만날 때 야성의 회복과 더불어 믿음의 증진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서' 사람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주님 주시는
믿음이 용기의 원천이 되고 이 믿음의 빛 앞에 사라지는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고
안팎으로 평화가 도래합니다.
배 안에 있던 이들은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믿음을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새삼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의 체험이 기도하게 만들고 믿음을 증진시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순수한 열정을, 야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1.고독을 추구하십시오.
2.기도하십시오.
3.주님과 만나십시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가 이 셋을 다 충족시켜 줍니다.
사실 주님과의 일상적 만남에 미사보다 더 좋은 성사도 없습니다.
바로 이 미사은총이 일상에서의 주님과의 만남 체험을 촉진시켜 줍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주님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130,5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한없이 부드러운 하느님
2014년 가해 8월10일 연중 제19주일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오 14,22-33
한없이 부드러운 하느님
열왕기 상권을 통해 전해지는 엘리야 예언자의 하느님 체험은 얼마나
생생하고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산 호렙 한
동굴 속에서 밤을 지새웁니다. 불도 없던 시절 산중에서, 그것도 깊은
동굴 속에서 얼마나 캄캄하고 무서웠겠습니까? 엘리야 예언자가 잠이나
제대로 잤겠습니까? 꼬박 밤을 지새우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기도하는 일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 중에 주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열왕기 상권 19장 11절)
나약한 인간 세상을 떨치고 강건한 주님의 나라로 건너오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광명의 나라로 넘어오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모든 것이 제한된 멸망과 죽음의 세상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주님 나라로 옮겨오라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짧지만 강렬한 주님의 부르심에 엘리야는 하느님을 뵙기 위해 산 위로
올라갑니다. 그 순간 하느님께서 당신의 현존하심을 엘리야 예언자에게
생생하게 드러내시는데, 그 모습이 바위조차 깨트려버리는 강한 바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지진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소멸시켜버리는 불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에게 다가오신 하느님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현현은 절대로 파괴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강한 바람, 두려운 지진, 뜨거운 불 등등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실체를 엘리야 예언자에게 드러내셨는데, 그 모습은
‘조용하고 부드럽고 감미롭기 그지없는 음성’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하느님께서 공포와 진노, 파괴와 살상의
하느님이 아니라 한없이 부드러운 모습이라는 것이 말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분신입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메시아로서의 모습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분께서는 절대로 악에 악으로 맞서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협하고 살해하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를 다 쓰던 적대자들에게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눈물로 용서로 기도로 화해로
맞서셨습니다. 결국 조용하고 감미로운 소리로 맞서신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풍랑을 만나 공포에 떠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음성 역시 너무나도 부드럽고 감미로운 소리였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오 복음 14장 27절)
하느님께서 깊은 동굴 속에서 두려움에 잠겨있을 때 두려움의 동굴 속,
불신과 의혹의 동굴 속에서 생각만 해도 마음 든든한 주님 앞으로 나와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스승 예수님께서는 역풍의 두려움에서 떨고 있는
제자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동굴 밖으로 나와
산위에 서라고 외치십니다. 삶과 죽음의 지배자이신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과 의혹, 반신반의의 동굴에서 깨달음과 깊은
신뢰의 산 위로 올라오라고 초대하십니다.
군부대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 사고를 바라보며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한 인간이 또 다른 한 인간을 그리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단 말입니까? 동물들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리도
집요하게 어떻게 그리도 똘똘 뭉쳐 한 약자를 철저하게 깔아뭉갤 수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기성세대 탓입니다. 영화 하나를 만들어도 초대박 흥행을 터트리기 위해
점점 더 폭력성을 가미합니다. 영화 한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지 모릅니다. 청소년들이 즐겨 애용하는 게임
중에 주인공이 어깨에 다양한 최신식 무기를 장착하고는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만나는 모든 존재를 싸그리 살상하는 게임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죽음의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 청소년들이 고스란히 군
입대를 합니다. 모든 것이 제한된 병영생활 안에서 심심풀이삼아 그런
게임을 동료들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한없이 부드러운 하느님, 그 어떤 살상이나 폭력, 죽음의 문화를 거부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이 부끄러운 죽음의 문화 앞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만이라도 반대의 깃발을 올려야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만이라도
폭력성이 지나친 영화 안보기 운동, 잔혹한 격투기 금지 운동, 폭력 게임
개발 반대운동에 적극 나서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서울] 세속파도에 빠지고 말지요.
2014년 가해 8월10일 연중 제19주일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오 14,22-33
세속파도에 빠지고 말지요.
믿을 만 한 걸 제대로 정하고 끝까지 강하게 믿어야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조변석개(朝變夕改) 철새정치인 수많은 어른들의 모습이 이렇지 않나요?
철들었다는 건 뭔가요? 판단능력의 발달과 요지부동의 자신감 아닌가요?
세상의 배움이란 내용이 재물과 명예 권력을 향한 졸작체계라 봅니다.
불변의 대전제인 진리를 따라 갖춰진 배움을 익혀야 숭고한 인간이 됩니다.
진리를 의심하고 세속의 배움에만 몰두하면 세속파도에 당연히 빠지지요.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태오 14,31)”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흔들리지 않는 믿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8월10일 연중19주일 (마태14,22-33)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오 14,22-33
흔들리지 않는 믿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방황,
안주, 순례의 삶입니다.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이 줏대 없이 이리저리
헤매는 삶, 이 삶을 방황이라고 표현합니다. 안주는 천상을 바라보고
영원한 삶을 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현실에 머물러서 그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가려하는
모습입니다. 순례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고 동시에 하느님의
품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 품 안에
들어가기까지는 늘 불안합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성인은 “비틀거리고
절면서 바른 길을 가는 것이, 편안히 서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보다 낫다.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 관심을 두지만 우리
믿는 이들의 관심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이
순례의 길입니다. 높은 산과 언덕, 절벽을 통과해야 하는 길이 순례의
길입니다. 평탄하고 곧고 콧노래를 부르며 경쾌하기 걸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 끝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과감히 돌아서야 합니다. 방황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으며 순례의 길을 끝까지 걷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의 삶의 여정을 보면, 아기 예수님의 잉태, 마굿간에서의 출생,
시므온의 예언, 이집트로의 피난,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음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시신을 내려 품에
안으시고,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시는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자신을 봉헌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분이라 하는 것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이겨 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이 말했듯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으로 우리의 모범이요, 표양이십니다.
우리도 끝까지 순례의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매괴성모님을 수난 받은 성모님으로 칭합니다. 6,25때 인민으로부터
일곱방의 총탄을 맞고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의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어머니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계십니다. 천상을 바라볼 때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적개심,
두려움 등.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하늘에서 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먼저 하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혼자 기도하시던 예수께서는 맞바람을 만나 파도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풍랑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빠져 있자 거기에서
구해주시려 단숨에 달려가셨습니다. 위기에 빠진 자녀를 구하는 심정으로
서둘러 가셨습니다. 그리고“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게는 물위를 걸어‘오너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예수께로 걸어갔습니다.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고 청한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이었습니다.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마태14,30).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는 물에 빠졌습니다. 결국은 주님을 가슴으로 받아들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의지가 약했습니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 해도 그 속에
주님이 계시거늘 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이 생기면 믿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둠과 거친 맞바람으로 여겨지는
위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가정의 불화, 경제적 어려움, 이웃과의 소원한
관계, 알콜, 흡연, 도박 등등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 두려워 집니다.
그러나 이때야 말로 내가 기댈 주님께서 다가오고 계시는 때입니다. 거센
바람을 뚫고 제자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 바로 나의 삶의 자리에도
오십니다. 아니 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만을 보니까 옆에 게신 그분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위기와 어려움에 처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두려움보다 먼저 와 계십니다. 그러니 평온할 때도,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우리는 늘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어 그분께 철저히 의지해야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한 스님께서 돌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 뻔하자 ‘아이구,
하느님!’하셨답니다. 누구든지 급할 때에는 ‘하느님 맙소사!,‘아이구
하느님’을 찾게 되고 봉변을 당 할 때에는 ‘하늘이 노할 일이다’, 하늘
무서운 줄 알아라, ‘하늘만은 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큰 힘을 가진 어떤 것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종교심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에 이르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종교심을
승화시켜 신앙심으로 끌어올릴 때 비로소 그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정하권). 우리는 본능을 넘어 옛 생활을 버리고 새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심은 인간을 찾으시며 은총과 계시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부르시는
인격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자세를 일컫습니다.
하느님이 먼저 부르셨기에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신앙’(믿음)
입니다(차동엽).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2디모1,9).
그러나 믿음은 아무래도 ‘머리’로 믿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수긍하고 받아들여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6).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가슴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현존, 사랑, 예수께서 주시는 용서와 평화 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믿음의 모범으로 아브라함을 보면 되겠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히브11,17).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도록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시편37,3).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14,1).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야고1,6).
그리고 마침내 의지로 믿어야 합니다. 세상의 셈법을 따르지 않고
조건이 어떠하든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철석같이 믿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 신앙 안에 키워온 어떠한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는 것입니다. 그 때는 내가
원하는 때와 방법이 아니지만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11,23-24).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야고2,22).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마태17,20). 결국 하느님의
약속을 확고히 믿고, 이미 받은 사람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항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
하였습니다(로마4,20-21). 우리도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내 사업이 잘 된다면, 내가
행복해 진다면, 건강이 좋아진다면, 성공한다면’, 그 때 하느님을 믿고
감사드리고 헌금도 많이 하겠다고 합니다. 소위 ‘……한다면’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비록 악한 사람이 선한 이들보다 잘 사는 듯이 보여도, 착하게
산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랑하는 이가 고통 안에 있어도 나는 그
순간에도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신뢰할 것입니다.’하면서‘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한마디로 전천후 신앙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했듯이 어떤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변화무쌍하고 덧없는 세월에도 상관없이 소신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립4,11-12)하고
말했습니다.
사실 믿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적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26절에 보면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7장 21절에서도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하며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위기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급히 달려오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굳건해 지시길 바랍니다. 어떤 불이익이나 비난이 거센 바람과
성난 물결로 밀려오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으시길 빕니다.
마음의 시험과 환경의 풍파가 다가와도 끄떡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만큼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깊지 못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면 그가 은총을
간수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은 생각
않고 은총의 결과물에만 매달리게 되고 결국 타락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은총을 주실 때 시련을 통해서 주십니다. 시련의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3-4). 그러므로 더 많은
시련과 단련을 통해서 그만한 은총을 준비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도 실패를 통해서 더 큰 제자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25년동안 수많은 시련과 환난 속에 단련을 받았고, 야곱도 20여년간
머슴살이를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요셉도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충실한 사람었으나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13년 동안
종으로 팔려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하느님을 거역하지 않고 인내를 통하여
그의 영적 믿음을 성장시켰고 마침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는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은총은 시련을 통해서 다가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닥친 세찬 바람이 은총이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볼 때 어떻게 되는지를 그는 확실히 체험했습니다. 믿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도 그 속에
숨어계신 예수님을 보는 사람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항로에서도 역풍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을 통해서, 아내를 통해서 오기도 하고, 자식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공동체를 통해서도 이웃을 통해서도 옵니다. 물론 직장을 통해서도 오고,
주변 환경과 생활을 통해서도 견딜 수 없는 큰 아픔이 옵니다. 그러나
그때야 말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요, 더 큰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순간 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곤경의 맞바람을
보지 말고 그 한복판에 계신 구원자 예수님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지켜 주시니 말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에는 의심이 암이래요, 항암제는 오직 믿음뿐이고요.
그러니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로지 주님 뿐,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
그러므로 사람을 믿어서 발등 찍히지 말고
오로지 주님을 믿으십시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십자가, 믿음과 용기의 원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8월10일 연중 제19주일
<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복음: 마태 14,22-33
< 십자가, 믿음과 용기의 원천>
‘명량’이란 영화는 이순신 장군이 배 12척을 가지고 적군의 배 330척과
맞서 싸워 승리한 명량해전을 소재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마들어졌습니다.
영화의 핵심 단어는 ‘두려움과 용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기는 이길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군의 배가 200척을 넘어서고
아군의 유일하게 있는 거북선 한 척마저 불타버린 상황에서 몇 명
남아있지도 않은 군인들은 탈영을 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순신을 암살하려고까지 합니다.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순신은 모든 군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탈영하다 잡힌 군인의 목을 베고,
자신들의 진지를 불태우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으니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고 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장군들부터 헛된 전쟁은 하지 말자고
단체로 찾아와 항의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성웅(聖雄)’으로 불리는 것은 그가 어떻게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들과의 대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내가 죽어야겠지...”
결전의 날 12척의 배가 적군을 향해 나아가지만 이순신의 배를 제외하고
나머지 배들은 줄행랑을 치기 위해 뒤 쪽으로 빠집니다. 이순신은 그들이
그럴 것임을 알았다는 듯 혼자서 적들과 맞서 싸웁니다. 한 척, 두 척, 세
척... 열 척을 혼자 맞서 싸워 이기는 것을 지켜본 다른 장군들이 하나
둘씩 이순신과 다시 합류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맞서 싸워도 쓰러지지
않는 이순신을 보면서 희망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 기세로 12척의 배가 죽기 살기로 앞으로 나아가니
일본의 배들이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풍랑이 부는 갈릴레아 바다 위에서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두려움을 이기신
분이니 용기를 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야 합니다. 물론 십자가의 승리는 조금
뒤에 벌어질 일이지만 이 사건은 그 십자가의 승리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시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죽기로 싸운다면 이길
수 있고 살기를 원한다면 죽게 될 것임을 스스로 보여주며 용기를 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싸워 승리하시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주눅 들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물 위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은 자신만의
힘으로는 결코 이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이 세상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혼자서는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음을, 즉 세상의 압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부모에게 학대받는
아이였습니다.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세상은 두려운 곳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힘으로 자수성가하여 최고급 스포츠카까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차고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들어가 보니 어린 아들이 못으로
스포츠카를 긁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아버지는 손에 잡히는 공구로
아들의 손을 내리쳤습니다. 아들은 대수술 끝에 손을 절단해야만 했습니다.
수술이 끝난 아들은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아빠, 다시는 안 그럴게요. 용서해 주세요.”
그 다음 날 아버지는 차고에서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자신의 스포츠카에
쓰인 낙서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쓴 글자는 이것이었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이 사람은 세상에서 돈 많고 강한 사람이 되려고 했지만 아들이 입히는
아주 작은 손해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지배를
받는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세상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재산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명예나 즐거운 무언가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 등,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바로 ‘믿음’에서 나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에 떨던 장수들이 이순신이 혼자의 힘이지만
죽기로 싸우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도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처럼,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신 승리자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것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두려움 때문에 다시 물속으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분만으로 충분하기에
자신의 생명까지도 쉽게 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욕심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기를 소원하여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 하느님께서
그에게 어떤 산으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산으로 가면 한 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가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곧장 뛰어서 산으로 올라갔더니 진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큰
부자처럼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
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빙긋 웃어 보이더니 사람 머리만한
다이아몬드 하나를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고 매우 기뻐하며 집으로 내려온 이 사람은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밤새 그 큰 다이아몬드만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것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 어제 만난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다이아몬드를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 말고 더 좋은 것을 주세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계시기에 이
귀중한 것을 마치 돌덩이처럼 내어주십니까? 분명 더 좋은 것이 있을
텐데 빨리 그것을 저에게 주세요.”
그 욕심 많은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를 가지고 계시다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세상의 짧고 하찮은 영화가 아닌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계시기에 이 세상 것은 돌덩이와 같이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이 세상 것에 집착하고 산다면 세상
누구에게도 믿음과 용기를 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겠지...”
이 말은 이순신 장군이 알고 있었던 믿음을 주는 방법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생명마저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을
때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생기는 것이 바로 믿음과 용기인 것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잡혀서 로마로 순교하러 오면서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발 날 구하려 하지 마십시오. 나는 사자들의 이빨에 갈기갈기 찢기며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그 용기는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생깁니다. 물론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만이 아닌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겨 잠깐 세상의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지만 다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분은 우리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다시
물 위를 걷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리스도처럼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용기와 믿음을 얻어 이 세상을 발밑에
두며 자유롭게 거닐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자유롭게 사는 법은 두려움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에서의
해방자가 바로 그리스도이시고 또 내가 해방되면 내 주위 사람들도 나를
통해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께 이렇게 청해봅시다.
“저도 물 위를 걸으라고 명령하십시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놀라운 일들(마태14,22-33)
2014년 가해 8월10일 연중 제19주일
<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복음: 마태 14,22-33
놀라운 일들(마태14,22-33)
찬미예수님! 알렐루야~~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수만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고나서 사람들은
“이분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 아닐까!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닌가!”
하며 열광을 하기 시작합니다. 수 만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게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제자들도 “제대로
스승님을 만났구나!” 하면서 흥분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 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돌려보내십니다.
“여러분이 보신 놀라운 광경을 집에 돌아 가셔서 이웃들에게 가족들에게
전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놀라운 일을 우리 민족에게 베풀고 계시다고
전하십시오. 내일이고 모레고 우리는 또 만날 수 있습니다.” 하면서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고 산으로 들어가셔서 고요하게
새벽녘까지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밤을 새서 기도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는 바람 속에도, 지진이 지나고 난
뒤에도, 또 불길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고, 그 모든 것이 지나고 나니까
고요하게 주님의 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세상사에 바쁘고 이일저일 머릿속에 담아두고 매일 텔레비전 앞에
머물러 있고, 세상의 일들을 쫒아 다닌다면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고요하게 머물면서 기도할 때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아들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고 나서 새벽녘에 맞바람과 싸우고 있는 제자들에게
물위를 걸어서 다가가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바라본 제자들은 놀라서
“유령이다.” 라며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용기를 내어라.” 말씀 하십니다. 여기서 “나다.”
하는 말씀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가 사람들에게 주님을 뭐라고 전해야 하겠습니까?” 했을 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다.” 하시는 말씀은 “내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다.” 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홍해 바다를 마른 발로 건너게 해시주고,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주신
하느님께서 이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빵을 많게 해주시고,
물 위를 걷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라고 합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도 시련을 만나거나, 인간관계가 삐걱거리거나,
가정에 우환이 있게 되면 금방 냉담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사도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기회가 좋든 안 좋든 우환이 있든 없든 항구하게 주님께 매달려야합니다.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조금씩 그 분이 살아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베드로사도가 물에 빠져들 때,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니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건져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런 유혹에 빠졌을 때
예수님 앞에 와서 “제가 지금 힘이 듭니다.” “제가 지금 유혹 중에
있습니다.” “제가 자꾸 게으름을 피웁니다.” 하며 한 번 두 번 용기를
내어서 나오다 보면 다시금 은총 안에 머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시자 세찬 바람이 고요해 집니다. 제자들은
엎드려서 절을 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기도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잠재우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예수님의 신원을
조금씩 알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기도에서 “저희가 삶과 역사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알아 뵙고
어떠한 시련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 역사 안에 살아계신
분이고 어떤 시련이 와도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해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모르고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을 도외시할
때도 하느님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시면서 까지 우리 인간이
돌아오기를 바라시고 인간이 바른 길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일, 기적이라는 것을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고요히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알아들으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지난 해 멕시코에서 성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체가 성혈로
변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기도하고 다시 미사성제를
거룩하게 봉헌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멕시코는 가톨릭국가인데
개신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20%가 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면서까지 “미사 안에
내가 있는데 너희들이 어디를 가느냐.” 하면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또 유럽의 메쥬고리예에서 33년이 넘게 성모님께서 발현을 하시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기도하고, 기도 하고, 또 기도 하여라.” 하면서
미사성제에 거룩하게 참여하고, 고해성사에 참여하고, 성경말씀을 굳게
믿으면서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보내시어
우리 가톨릭교회가 가야할 길을 유럽교회에 전해주는 것입니다.
유럽교회는 많은 교회가 텅 비어있습니다. 사제도 적고 주일미사에
나오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도외시하면서 살고
있으니까 당신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면서까지 너희가 이렇게
살면 안된다하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메쥬고리예를 순례하며 변화됩니다. 여름철이 되면 하루에 2-3만 명씩
미사참례를 하기도 하고, 사제만도 200여명이 넘게 같이 미사를
드리기도 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닌지는 거기서 맺어지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단식하며
고해성사 보면서 자신의 일생을 정화하는 시간들을 갖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맛을 느끼게 됩니다. 그 곳에 처음 성모님이 발현했을 때에 그곳
청소년들도 성모님이 유령인줄 알고 도망을 갑니다. 다음날 할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성수를 뿌려 귀신인지 아닌지 확인을 합니다. 그러자
성모님이 인자하게 웃으시며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셨다.” 고 아이들을 안심시키면서 조금씩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주십니다.
빵을 많게 하시고, 기도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 세상에서 초자연적인 놀라운
일들을 인간을 위해서 하십니다. 우리는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따라서 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아멘.
- 수원 교구 죽전1동 하늘의 문 성당 윤민재 베드로 희망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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