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소복을 입고 긴긴밤을 먼저 가신 서방님 생각하며 눈물짓는 과부.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이미지인데요. 사실 과부의 수절에 관한 것들은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이지만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과부는 수절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결혼하지 않고 남편을 그리고 시부모를 모시며 평생을 살았다는 이야기죠. 이런 이야기들은 미담이 되어 여기저기 떠도는데 여기에는 여성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한 무서운 처사가 숨어 있습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과부가 새로 시집가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일부 양반가에서 체통을 위해 수절을 강요하기는 했어도 대중 사회에 널리 퍼진 현상은 아니었지요. 그런데 임란이 지나고 조선 중후기에 들어서면서 양민들에게까지도 수절과 절개를 강요하는 현상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성리학의 보급과 교조화로 인한 것인데요, 이런 수절을 강요하게 된 것은 주자와 정자(程子) 탓이었습니다. 『소학』에 보면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군가 정자에게 물었다. “과부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도리에 옳지 않을 듯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러니 정자가 말했다. “절개를 잃은 자를 취하여 자신의 짝으로 삼는다면 자신이 절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자 다시 그가 말했다. “혹 외로운 과부가 빈궁하고 의탁할 곳이 없거든 개가를 해도 됩니까?” 정자는 이에 “안 된다! 왜냐하면 굶어 죽는 일은 지극히 작고, 절개를 잃는 일은 지극히 큰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긴 했지만 일종의 계급적 측면으로서 존재한 것이지 인간 자체를 깔아뭉개지는 않았습니다. 공자 시대까지는 현실에의 도리와 이성적 판단을 중요시했지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어떤 특정 형태를 강요한 일은 없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 예시도 없이 단지 남편이라는 이유로 절개를 강요하고 죽음조차 당연하게 받아들이라는 잔혹함은 오히려 그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었죠. 유학 자체가 교조화되고 종교화되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까요? 마치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 철학의 발달은 이루었지만 현실에서 어처구니없는 강요와 압박이 이루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성리학적 가부장제에서도 여성의 개가를 금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개가를 한 여성의 자식은 『경국대전』의 예전조에 의거 ‘재가한 부녀자의 아들과 손자는 문과, 생원시, 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다.’라고 해두었습니다. 즉 개가한 여성의 자식은 양반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시험조차 치르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것이지요. 거기다 수절하거나 열녀로 인정된 여성의 가문에는 열녀라는 명예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혜택도 주어서 후대까지 군역의 면제와 세금 감면이 주어졌으니 은근한 여성의 수절과 열녀를 위한 주변의 자살 압박은 작은 것이 아니었지요.
임란 이후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런 열녀가 증가하는데 『소학』이나 『삼강행실도』 등의 보급으로 인한 백성교화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전란 이후 무력화된 중앙정부의 권위와 양반 이하 백성들에 대한 충성 강요를 위한 목적도 있었죠. 소위 ‘여자도 남편을 따라 절개를 지키는데 충절이야 말로 말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이지요. 덕분에 여성들은 남자가 결혼식을 치르기도 전에 죽어버려도 시댁의 귀신이 되라며 쫓겨 다녔고, 남편이 병약한 걸 알면서도 그 가문이 좋은 집안이면 딸을 억지로 혼인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형태는 사실상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라 남편이 먼저 죽어버리면 소위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며 시댁에서 쫓겨나고, 친정으로 가면 ‘여자는 시댁 귀신’이라며 다시 쫓겨납니다. 결국 오도 가도 못하는 여자가 서낭당 나무 밑에 서 있을 때, 결혼 못한 동네 총각이 업어 가면 그나마 다행인데, 보통 양반집 부녀자는 이런 형태를 혐오하도록 교육받은지라 목매달아 죽는 경우가 많았죠. 시댁도, 친정도 이런 일을 모르지는 않을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서 딸을 죽여버리고 열녀라는 칭호와 함께 무형, 유형의 혜택을 얻어갔던 것입니다.
하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다 보니 정약용은 『열부론』을 지어 이런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비판하며 아래 네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열녀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는데,
첫째, 남편이 맹수나 도적에게 핍박당해 죽었을 때 아내도 호위하다 따라서 죽는 경우
둘째,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강간당했을 때 굴하지 않고 죽었을 경우
셋째,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자신의 뜻에 반해 부모 형제가 개가를 강요, 이에 저항하다 죽음으로 맞섰을 경우
넷째, 남편이 원통하게 죽고 나서 아내가 남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노력하다가 밝힐 수 없어 함께 형벌을 받아 죽은 경우
요즘 생각으로 이것도 불합리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시대를 생각했을 때 정약용의 네 가지 열부 조건은 그야말로 열부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안에만 열녀라고 하지 어처구니없이 자살한 사람들까지 모두 열녀라고 하는 것은 개죽음일 뿐이다, 라는 것이었죠. 정약용은 이 열부론을 이야기하면서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라, 남편이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다. 이는 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지요. 당대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열녀 만들기가 유행했으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인지.
더더욱 웃기는 건 이렇게 죽은 열녀라 할지라도 그 이름 석 자 올리는 것은 없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전주 용진서원에서 유림들에게 보낸 통문인데 보성 오씨의 열행을 유림들이 이 세상에 널리 알려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의 이름은 없고 보성 오씨라는 것뿐입니다. 여성이 열녀로서 죽음을 맞이해도 이름 한자 남길 수 없는 것에 반해 남자는 ‘속현(續絃) - 거문고와 비파의 끊어진 줄을 잇는다.’이라는 우아한 말로 재혼이 허락되었으니 여러모로 봐도 손해는 여성에게 일방적인 것일 뿐이었죠.
죽는 수절이 아니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성적 욕구는 있는 법입니다. 형태가 조금 다를 뿐 여자라고 성욕이 없지는 않지요. 그런데 일찍 남자가 죽어버릴 경우 다른 남자를 끌어들일 수도 없고 평생을 혼자 살아야 했으니 이는 자신의 성기를 실로 꿰매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윤복의 <과부>라는 작품을 보면 여러 가지 성적 코드가 보이는데 흰 소복을 입고 머리를 올린 여성은 과부를 상징하고, 옆에 땋아 내린 머리를 한 여인은 처녀죠. 그런데 그녀들이 앉아 있는 나무 앞에는 개 한 쌍이 새끼를 치고 있고 새들도 짝을 지어 날고 있지요. 옆 나무에는 꽃이 피었으니 바야흐로 춘삼월, 이런 성적 기호를 보고 과부는 배시시 웃고 있지만 처녀는 그냥 뚱한 얼굴에 체면 없이 웃는 과부를 꼬집고 있습니다. 옛 말로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라는 것처럼 과부의 성욕을 비유해 표현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