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처| 백구영 목사
한때, 유행하던 대중 가요 가운데 장재남이란 가수가 부른 "빈 의자"란 유행가가 있습니다.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난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되어 드리리이다.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난 빈 의자,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라.
두 사람이 와도 괜찮소.
세 사람이 와도 괜찮소.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들,
무더기로 와도 괜찮소.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난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되어 드리리이다" 라는 노래입니다.
대중 가요 치고는 매우 건전한 뜻이 담긴 교훈적인 노래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요즘,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라"는 소리를 많이 들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들으러 오라, 보러 오라, 먹으러 오라, 사러 오라, 축하하러 오라, 감상하러 오라, 놀러 오라는 초청장, 청첩장, 초대장, 안내장 등 선전 홍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오라는 소리들은 모두 우리를 위한 소리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소리들입니다.
자신들의 청중이 되어주고, 관중이 되어주고, 고객이 되어주고, 하객이 되어 달라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녀도 무엇이 충족되기보다 자기 소모에서 오는 허탈감과 피로감을 더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나 오늘이나 우리를 위해서만 부르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주제도 "오라" 하시는 부르심입니다.
이사야 1:18-20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시며 용서해 줄터이니 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보내시는 소환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와서 시비를 가리자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선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잘못된 민간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거절하며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의 백성일지라도 행한 대로 갚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법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한번 기회를 줄터이니 거짓 믿음을 버리고 순종하며 사느냐 불순종하며 죽느냐를 택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의 말씀은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겠다”고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여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세상의 병고생사의 짐을 진자들을 의미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율법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수고하고 서기관들이 그들에게 부과한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백성들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즉, "율법의 무거운 짐진 자는 은혜의 자리에 나오라. 그러면 너의 짐을 가볍고 쉼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라 부르시는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우리를 "오라" 부르시는 이유를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오라 하심은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1:18절에 "…오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리라" 하셨고, 마태복음 11:28절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회개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죄가 무엇입니까?
종교적 타락, 도덕적 부패도 무서운 죄려니와 그보다 더 큰 죄는 자신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므로 어떤 죄 가운데 있어도 멸망시키시거나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었습니다.
또한 율법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치고 배워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는 불신앙이라기 보다는 잘못된 신앙이요, 도덕적 죄라기 보다는 신앙적인 죄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도덕적 죄의 회개는 죄를 뉘우치고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지적 회개입니다.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입니다.
다음은 정서적 회개입니다.
잘못을 미워하고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은 의지적 회개입니다.
죄를 미워할 뿐 아니라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자백에도 사적인 자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없는 개인적인 죄는 하나님께 자백하면 해결됩니다.
대인적인 자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진 죄는 하나님께 자백할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도 자백해야 해결됩니다.
공개적인 자백이 있습니다.
공적 대상에 대해 지은 죄는 공개적 자백을 해야 해결됩니다. 그래야 그 회개를 받아 들이시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 죄의 회개는 정권을 교체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자신을 다스려 왔습니다.
내가 내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내가 다스리는 왕국은 언제나 밤낮 없이 짜증과 분노와 불만과 불안이 가득한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를 퇴위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왕국의 왕으로 모셔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회개입니다.
위의 두 본문은 모두 이방인을 향해 오라 하심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오라 하심이었습니다.
교회 밖 불신자들을 향해 오라 하심이 아니라 교회 안 신자들을 향해 오라 하심이라는데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오라 하심은 순종의 멍에를 메고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사 1:18 중반절에 보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하셨고 마태복음 1:29절에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진위를 분명히 하고 바른 것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서 겸손과 순종을 배울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 겸손과 순종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고대 모든 도덕의 체계 속에는 겸손과 순종의 덕이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기 위한 논리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겸손과 순종을 최고의 덕이요, 최고의 교리로 만드신 것입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멍에인 순종을 통해 온유와 겸손을 배우면 쉼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대 전설에 의하면, 새는 처음에는 날개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창조주께서 뒤뚱거리는 것이 안쓰러워 날개를 달아 주었습니다. 처음에 새들은 날개가 무겁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몇몇 새를 제외하고는 날개를 받아드렸습니다. 신기하게 이 멍에가 새들을 하늘 높이 날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멍에를 받아드리지 않은 새들은 지금도 땅위를 뒤뚱거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멍에는 그리스도인의 영혼의 날개입니다. 누구나 순종의 요구는 멍에처럼 거부감을 갖게 하나 순종의 멍에를 메면 날개처럼 가볍게 그리고 높게 신앙생활도 일상생활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 복음서도 무조건의 구원을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도 인간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로 용서받고, 믿음으로 다시 말하면 순종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셋째, 오라 하심은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1:19절에 보면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하셨고, 마태복음 11:19 하반절에는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과 영에 안식을 주시기 위해 죄에 지치고 피곤해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안식이 무엇입니까?
이 안식이란 육적 안식이 아니라 영적 안식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평안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 양심과의 화평에서 오는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안식은 안정입니다.
안팎의 근심, 걱정과 세상의 온갖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보화를 받는 안정입니다.
안식은 확신입니다.
무거운 짐을 함께 지시고 함께 가시는 주님의 임재를 믿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얼어붙은 호수 같은 고요가 아니라 조용하나 도도히 흐르는 강물 같은 것입니다.
부산에 100세 생일을 맞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척 고생스러운 인생을 살았는데 100세 생일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하는 시간에는 정신이 없었죠. 걱정할 틈이 있나요? 앉았을 때는 푹 쉬죠. 쉬지 말고 걱정하라는 성경말씀은 없지 않아요? 밤이 되면 많은 생각과 근심, 걱정이 떠오르지만 자버리죠. 자는 시간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시간이니까요. 그렇게 살다보니 100세라는군요"
순박하면서도 뜻깊은 안식의 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3대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첫째로, 중요성의 필요(need of Significance)
둘째는, 안정성의 필요 (need of Security)
셋째도, 소속의 필요 (need of Belonging)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인정이 필요하고 의식주뿐 아니라 정신적 안정이 필요하며 어디엔가 소속된 소속감이 있어야 하는데 이 셋 중에 한가지만 문제가 있어도 불안해 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존재의 인정, 정신적 인정, 소속감을 줄 수 있는 가정, 직장, 학교 등 여러 단체와 관계가 있으나 이는 모두 불완전한 인위적인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품에 거할 때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와 앉아도 좋은 빈 의자도 일시적인 쉼은 줄 수 있어도 영원한 안식을 줄수는 없습니다.
참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주님만이 안식을 주실 능력과 안식을 주실 사랑과 안식을 주실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를 통해 용서를 받고 순종의 멍에를 메고 온유와 겸손을 배워 참 안식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