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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롯기 1,1.3-6.14ㄴ-16.22
마태오 22,34-40
오늘 독서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뒤를 따르려고 고향과 종교를 버리는 룻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보편적인 소식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에 속하지 않으면서 더욱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시하던 모압 사람 룻이,
과부인 시어머니에게 충실함과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면서, 뒷날 베들레헴의 가정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연결 고리가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간에 벌어진 논쟁에서 전개됩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라삐 학교가 모세 법을 갈라놓았던 613개의 계명을 감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잘 알려진 성경의 본문을 상기시키십니다.
먼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모든 경건한 유다인이 아침과 저녁마다 반복해서 바치던
‘쉐마’(이스라엘아, 들어라!: 신명 6,4) 기도를 인용하십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는 레위기 본문(19,18)을 상기하십니다.
레위기에서 이웃의 개념은 친척과 같은 나라 사람만을 뜻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로 확대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주는 새로움은 두 가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형제에 대한 사랑을 주님의 법의 핵심이요 본질로 정의하십니다.
그다음, 예수님께서는 법의 전문가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서로 달리 구분된 것으로,
그래서 다른 수준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던 두 계명을 통합하시고 이를 동일하게 여겨야 할 원칙과 요약으로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 곧 성경 전체를 요약해 줍니다.
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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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마르코 신부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마태오 22,34-40
동시에 발생하는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와 부활에 관해 논쟁을 벌이다가 낭패를 본 모양이다. (마태 22,23-33)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모세오경만 경전으로 여겼기 때문에 모세오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활신앙을 배척한 사람들이다.
부활신앙이 경전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6세기경에서 2세기경 사이로서 이 시기에 기록된 예언서
(이사야, 에제키엘, 다니엘)와 묵시문학(마카베오) 등에 부활신앙이 나타난다.
그들이 죽은 형의 가문을 이어주는 모세의 율법, 수혼법(嫂婚法; 창세38,8; 신명 25,5-10)을 근거로
예수께 괴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다.’
는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신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세금에 관한 논쟁’(마태 22,15-22)에서 예수의 대답에 탄복을 하고 물러갔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다시 몰려왔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진다.
이 시험은 어떻게 하든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다.
사실 율법교사들은 모세의 율법 중 248개의 행령(行令)과 365개의 금령(禁令) 모두를 똑같은 비중으로 여겼다.
이 중에서 가장 큰 계명 하나를 집어내라니(35절), 우리가 보기에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를 제시하시고, 이 계명에 버금가는 제2의 계명도 잇달아 제시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알고 있는 ‘하느님 사랑’(신명 6,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이다.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 천명하신다.
613개의 계명들은 분명히 서로 다른 계명들이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모든 계명이 똑같은 비중을 지닌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와 이에 버금가는 둘째 계명을 제시하시는 것일까?
기준은 간단하다. 무엇 때문에 계명이 존재하는 가를 따져보면 된다.
계명의 존재이유는 하느님과 인간(이웃)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계명인 동시에 모든 계명의 기본적인 정신, 즉 골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인 셈이다. 사랑 없이는 어느 계명도 완벽하게 준수될 수 없고, 빈껍데기로 있을 뿐이다.
사랑이 하나의 계명을 성취시켜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구약의 율법(613개)을 몽땅 지키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한다면 율법을 능가하는 행위를 수행한 셈이 된다.
그런데 우리들 사이에는 하느님은 사랑한다면서 인간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이 바로 나라면 왜 예수께서 수많은 율법들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한데 묶어 가르치시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순서(first and second)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동시(synchronize)에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중에 이웃사랑에 대한 의지가 굳건해지며,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순명이 확증된다.” (루돌프 불트만)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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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범 라파엘 신부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마태오 22,34-40
사랑의 계명
몇년 전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라는 무장 테러 단체 때문에 레바논을 무차별 공격한 것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전쟁이 발발되자 레바논 정부는 평화협정을 맺자고 이스라엘 정부에 요청했으나 이스라엘은 거부했으며,
급기야 레바논 정부는 이 전쟁이 빨리 종결되도록 교황청에 중재 요청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휴전협정을 맺는데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은 그때 그 전쟁에 대한 뉴스를 보고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테러나 전쟁이 사랑으로 표현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끔은 내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에 의해서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힘들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진정으로 네 마음과 목숨, 정성을 다하여 온전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셔야 하는 자리에 다른 세속적인 우상들이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둘째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데도 저의 감정과 제 계산에 의해서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내 마음 가는대로 판단하고 오만과 편견으로 제게 잘하는 사람들만 좋아하고
그들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제가 하느님과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내어주는 사랑이 아닌 겉으로 들어나는 내 욕심에 의한
사랑을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삶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그저 지켜야 하는 계명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제 주위에 있는 분들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평생을 삯바느질로 해서 번 돈을 장학금으로 내어 놓으신 할머니,
고아들을 거두어 드려 택시 운전을 하시며 그 아이들을 돌보시는 부산의 어느 스님,
우리나라 땅도 아닌 일본에서 철로에 쓰러져 있는 일본인을 구하려다 세상을 떠난 이수현님,
고향을 떠나와 30년 넘게 한국인을 위해 사목하시며 누구보다 한국인을 사랑하시고
한국이 고향이라고 말하시는 성 골롬반 선교사 신부님들,
그분들의 모습과 잔잔한 미소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 순수한 사랑을 우리가 함께 찾고 그 사랑을 함께 실천하고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사랑, 그 첫사랑을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우리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이웃에게,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먼저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기 힘들 때 예수님께 기도드립시다.
‘하느님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했지만, 그럴 때에도 제 몸의 일부가, 제 마음의 일부가
하느님을 향해 있었음을 알아주소서.
이웃을 제 몸같이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지만 사랑하려고 노력했음을 당신께서 알지 않습니까?
주님, 사랑합니다.’
부산교구 박재범 라파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