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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홉의 갈매기
작가 ; 안톤 체홉(1860-1904)
발표 년도 ; 1897)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러시아어: 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영어: Anton Pavlovich Chekhov, 문화어: 안똔 체호브, 1860년 1월 29일 ~ 1904년 7월 15일)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1. 생애
체호프는 1860년 흑해 위에 있는 아조프 해 연안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Taganrog)에서 식민지 수입 상품점을 하는 아버지 파벨 예고로비치 (Pavel Egorovič)와 어머니 예브게니야 야코브레브나 모로조바 (Evgenija Jakovlevna Morozov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조부는 원래 농노였으며 부친은 조그마한 채소가게를 했었다. 체호프는 어릴 때부터 가게를 도와야만 했다.
1867년 고향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예비학교를 다닌 후, 1869년 고전 교육을 목표로 하는 타간로크 인문학교에 입학한다. 1872년 성적 불량으로 3학년 과정을 반복하며, 3년 뒤 고대 그리스어 시험에 낙제하여 다시 5학년 과정을 반복한다.
지방정치와 교회합창에 너무 열중한 부친은 파산, 체호프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며, 학교 때문에 홀로 남은 체호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스크바로 나왔다. 15세의 체호프는 큰 형 알렉산드르와 함께 문학 창작에 열중한다. 두 형 알렉산드르와 니콜라이 그리고 동생 이반이 5년 과정으로 타간로크 학교를 졸업한 반면, 체호프은 1879년 8년 과정으로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대학 진학 자격을 얻는다.
같은 해 타간로크 모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모스크바로 올라가 그 곳에 이미 자리를 잡은 부모 형제들과 재회하며, 같은해 10월 모스크바 대학의 의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 때부터 체호프는 의학공부를 하는 한편 타간로크에서 받는 장학금과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의 잡지에 유머 단편을 써서 그 기고료로 부모와 세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1887년 연극 이바노프의 첫 상연이 있기까지 체호프은 문학잡지 《귀뚜라미(Strekoza)》, 《파편(Oskolski)》, 《자명종(Budilnik)》, 《페테르부르크 신문》 등에 100줄에서 150줄로 한정된 짧은 단편과 수필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기고한다. 특히 1883년에는 《Oskolski》에 매 이주일마다 모스크바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컬럼을 맡는다. 체호프의 글은 호평을 받았으며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신진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이처럼 글을 써 돈벌이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83년 10월부터 의학 졸업시험 준비에 열중하여 다음해 9월 졸업을 했다. 그러나 23세 때 걸린 폐결핵[1] 이 체호프의 건강을 늘 위협하게 된다. 그 해 11월에 처음 결핵 증세로 요양하게 되었다. 1884년에는 또한 첫 단편집 《멜포네네의 우화》가 출판된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2] 시베리아, 사할린 섬 여행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 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를 마주보는 크림 반도로 옮겼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이에 항의하여 스스로 사임하고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2. 작품세계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長幕物)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3] 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이바노프>는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프라토노프>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숲의 정(精)>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곰>(1888)이나 <결혼신청>(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바냐 아저씨>(1899),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會話劇)을 확립했다.
<갈매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정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
<바냐 아저씨>는 앞서의 <숲의 정>을 다시 쓴 것으로서 그 톨스토이즘이나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세 자매>는 초연 후 전집에 수록되자 다시 고쳐쓴 바 있다.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은 체호프의 44세 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갈매기>
갈매기 - 사랑과 예술의 이중주(二重奏)<줄거리>
1막 8월 중순.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쏘린의 영지. 그의 동생인 당대 최고의 여배우 아르까지나와 그녀의 애인 유명작가 뜨리고린이 여름휴가를 즐기러 찾아온다. 작가 지망생인 아르까지나의 아들 뜨레블레프는 애인인 배우지망생 니나와 함께 아르까지나와 뜨리고린에게 보여줄 새로운 형식을 연극을 준비한다. 드디어 공연의 막이 오르고 병약한 외삼촌 쏘린, 그의 주치의인 의사 도른, 도른의 연인인 뽈리나, 뜨레블레프를 짝사랑하는 그녀의 딸 마샤, 마샤를 사랑하는 교사 메드베젠코, 뽈리나의 남편이자 영지관리인인 샤므라예프도 함께 관람한다. 하지만 아르까지나는 공연 내내 뜨레블레프의 작품을 무시하고 조롱한다. 격분한 뜨레블레프는 서둘러 막을 내리고 사라진다. 아르까지나로부터 뜨리고린을 소개받은 니나는 어쩔줄 몰라한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마샤는 도른에게 뜨레블레프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2막 일주일 후, 정오, 1막과 같은 장소. 시내 외출을 기다리며 아르까지나, 도른, 마샤, 베드베젠코가 책을 낭송하고 있다. 연극을 반대하는 부모의 여행을 틈타 자유롭게 쏘린의 별장을 방문한 니나가 쏘린과 함께 들어온다. 아르까지나는 뜨레블례프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진다. 이때 영지 관리인 사므라예프가 들어와 외출용 말을 준비할 수 없다고 한다. 아르까지나는 사므라예프와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영지를 떠나겠다고 한다. 뜨래블레프는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고 홀로 남은 니나의 발 아래 호숫가에서 죽인 갈매기를 던지고 언젠가는 자신도 이렇게 죽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니나의 냉담함에 절망한 뜨레블레프는 뜨리고린이 나타나자 자리를 떠난다. 뜨리고린은 니나와 작별인사를 나누던 중, 작가로서 지쳐버린 자신의 생활과 고민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니나는 뜨리고린의 성공을 마냥 부러워한다. 뜨리고린은 죽은 갈매기를 보고 단편소설의 소재를 떠올리고, 아르까지나는 뜨리고린에게 좀 더 머무를 예정이라는 말을 전한다.
3막 또 다시 일주일 후. 거실. 아르까지나와 뜨리고린이 영지를 떠나는 날, 마샤는 뜨리고린과 작별인사를 하며 메드베젠코와 결혼할 거라고 말한다. 니나는 아무도 모르게 뜨리고린에게 목걸이를 건네준다. 아르까지나는 쏘린에게 자살에 실패한 뜨레블레프를 잘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쏘린이 갑자기 쓰러지게 되고, 이를 계기로 뜨레블레프는 아르까지나에게 상처의 치료를 부탁하며 화해를 한다. 하지만 뜨레블레프가 뜨리고린을 비난하면서 둘은 크게 다툰다. 뜨리고린은 니나가 준 목걸이의 의미를 알게되고 아르까지나에게 자신을 놓아달라고 말하지만 결국 아르까지나에게 설득을 당하고 함께 떠나기로 한다. 모두들 기차역으로 떠나는 순간, 니나는 뜨리고린에게 자신도 모스크바로 가서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을 말한다. 뜨리고린은 니나에게 자신의 주소를 알려준다.
4막 2년 후, 뜨레블레프의 서재. 마샤는 메드베젠코와 결혼을 했고, 뜨레블레프는 작가가 되었다. 아르까지나는 쏘린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도른의 연락을 받고 뜨리고린과 영지를 찾아온다. 한편 도른은 뜨레블레프에게 니나의 소식을 묻는다. 사람들은 니나가 배우가 되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고, 뜨리고린과의 동거생활마저 엉망이 되고 결국 버림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지금은 이곳에 와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뜨레블레프는 뜨리고린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뜨레블레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로또게임을 한다. 뜨레블레프는 자신의 창작방향에 대해 고민하는데, 이때 니나가 뜨레블레프를 몰래 찾아온다. 뜨레블레프는 니나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하지만 니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과거의 행복과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 하며 여전히 뜨리고린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떠나버린다. 니나가 떠나버린 후 뜨레블레프는 자신의 원고를 찢어버리고 총으로 자살을 한다.
~작품해설
<갈매기>는 체홉4대 작품의 첫 작품으로 1896년 완성된 작품이다. <갈매기>의 초연은
1896년 10월 알렉산드린스끼 극장에서 올려졌고 그 공연은 외면당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후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다시 한번 네미로비치 다체코의 설득으로 공연이 이루어졌는데 그 공연으 대성공을 거두었다. 4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전통적인 극작술에서 벗어나 제1막에서 뜨레쁠레프라는 주인공의 위기, 절정의 상황으로 시작되어진다.
이 작품은 체홉의 4대 작품중에서 가장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되기도 했으며 뭔가 모호하면서 낭만주의적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하지만 체홉 극에 대한 이해가 점점 넓어지면서 최근에 와서는 이 작품의 불가해성과 모호성에 대한 논란이 증가하고 있다. 체홉 연구가 빠빼르느이는 “<갈매기>는 여전히 규명이 안된채로 우리 극장의 앞에 있다. 그 불분명함과 ‘이단적’인 낯설음과 새로움으로 인해 우리를 좌절케 한다.”라고 말했다. 체홉 스스로도 이 작품이 “극예술의 모든 법칙에 반하는”,“이상한 결말을 가진”,“이상한 희곡”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이 작품이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표현 방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어서 인상주의적, 상징주의적, 자연주의적인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다고 서술하였다. 실제로 환경에 종속되어 도태되어 버리는 인물들의 삶들은 리얼리즘적이고, 특별한 무대적 사건 없이 인물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관객적으로 제시하는 점에 있어서는 자연주의극이며, 갈매기라는 상징물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상징주의적이고, 탈출구가 없는 인간 존재의 고찰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부조리적이기도 하다.
이런 모호함들 속에서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체홉이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꿈꿨다는 것이다. 이는 작품 안에서 뜨레쁠레프가 기존 연극계를 비난하는 것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거닐고, 옷을 입고 다니는지 묘사하고, 저속한 장면과 말 속에서 유용하고 알기쉬운 도덕심을 낚아 올리려 노력하지만.....’ 체홉은 어쩌면 삶과 무관하게 분리되어 있거나 단순 묘사에 그치는 예술, 혹은 뻔한 교훈적 내용을 전달하려는 연극. 즉 이 인간 삶이 객관적 모습들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삶의 실제적인 경험들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체홉극이 무대화에서 특히 배우의 역할이 중시되는 이유와도 연관되어 있다. 사실주의극에서 인물을 둘러싼 환경이, 상징주의극에서 의미를 구축하는 상징이 중요하다면 삶의 진솔한 체험을 드러내는 체홉극에서는 무대 위에 살아있는 인물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 있기 때문이다. ‘4막의 희극’이라는 <갈매기>에 대한 체홉의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규정도 의미를 한정짓지 않는 삶의 객관적 제시라는 관점에서 일면 이해될 수 있다. 삶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든 그 자체로는 비극도 희극도 아니며,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삶에 대한 긍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선으로 볼 때, 체홉 극은 희극으로 보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희망 아닌 희망’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