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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이 여편네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1988년 2월 10일 오후 2시 15분경.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 사는 최태식 씨(가명·36)는 벌써 몇 십 분째 자기 집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버스운전기사인 최 씨는 전날 오전에 출근했다가 이날 새벽근무까지 하고 이틀 만에 귀가하는 길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무슨 일인지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집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최 씨의 운행 스케줄 및 퇴근시각을 알고 있는 아내가 그 시각 집을 비울리는 없었다. 최 씨의 고된 근무 환경을 잘 알고 있는 아내는 매번 최 씨가 퇴근할 시간에 맞춰 정성스런 식사준비를 해놓고 반갑게 맞이하곤 했었다. 더구나 평소 같았으면 집 밖까지 들려야 할 두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참다못해 최 씨는 옆 집 베란다를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조용한 연립주택에서는 한 남자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1988년 발생한 일명 ‘중곡동 모자 살인사건’이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도착했을 때에도 최 씨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현장은 참혹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집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안방 장롱과 화장대 서랍은 죄다 열려 있었고 옷가지와 가재도구 등 살림살이들도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안방에는 최 씨의 아내 윤수임 씨(가명·32)가 결박된 채 피투성이 상태로 죽어 있었다. 윤 씨는 목이 졸린 흔적이 역력했고 하의가 벗겨진 상태였는데 충격적인 사실은 그녀의 몸에 난 여러 곳의 찔린 상처 외에도 복부에 길다란 상처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범인은 윤 씨를 성폭행한 후 목을 조르고 배를 찌르는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집안을 둘러보던 수사팀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 씨의 어린 아들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죽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 씨의 장남(9)은 부엌에서, 차남(7)은 작은 방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됐다. 모두 손이 묶이고 입에는 수건이 물려진 상태였다. 온갖 끔찍한 살인현장을 누비고 다닌 베테랑 형사들조차 고개를 돌렸다.
‘인간이냐 악마냐’
처참하게 피살된 세 모자를 본 수사팀의 입에서는 저마다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엽기살인사건이었다.
사건발생 직후 보고를 받은 서울지방경찰청은 동부경찰서장을 필두로 30여 명의 형사들을 배당, 수사본부를 편성했다. 당시 이 사건은 서울청 강력계장이 수사지도관으로 차출됐을 정도로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사체 상태로 볼 때 피해자들은 모두 사망한 지 15~20시간가량이 지난 것으로 추정됐다. 현장 상황으로 볼 때 범행시간은 2월 9일 오후 5시에서 밤 10시 사이일 것으로 추정됐다. 수사팀은 가장 먼저 집안을 뒤진 흔적에 주목, 금품을 노린 강도살인 쪽으로 수사를 했다. 젊은 주부와 어린 아이들만 있는 집만 골라 범행을 저지른 전형적인 강도사건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조사결과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최 씨의 집에는 이렇다 할 값나가는 귀금속이나 패물 등이 없었으며 실제로 없어진 금품들도 없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젊은 주부와 어린 아이들만 있는 집을 노린 강도의 범행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도난품이 없다는 것은 범행동기가 적어도 금품을 노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사팀은 모자에게서 크게 반항한 흔적이 없다는 점에 주목, 면식범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에 들어갔다. 특히 범행이 야심한 밤이나 새벽시간이 아니라 가장인 최 씨가 집을 비운 사이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그때를 노린 계획범행일 가능성도 있었다. 어린 아이들까지 살해하는 등 범행수법이 잔인하다는 점에서 원한에 의한 보복 살인으로 보이기도 했다. 또 최 씨 부인이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치정살인일 가능성도 열어두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격자를 찾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건 발생 추정시각 최 씨의 집에 침입하거나 인근을 배회한 수상한 사람을 봤다는 목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근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 수사를 진행하던 수사팀은 몇 가지 증언들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2월 9일 오후 5시 40분경 평소 최 씨의 아내 윤 씨와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 주부가 최 씨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누군가가 받더니 수화기를 내동댕이 치더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주민도 10여 분 전에 최 씨의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누군가가 받아서 그냥 끊어버리더라는 진술을 했다. 이웃집 여인은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전화를 더 걸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고 결국 그날 밤 10시경에 집으로 찾아가 벨을 누르고 아이들을 불러보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답이 없어 그냥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ㅡ이웃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이들 모자 3인은 9일 오후 5시 이후 변을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이는 사체와 혈액응고 상태 등을 근거로 수사팀이 추정한 사망시각과도 일치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수사팀은 통상 그렇듯 피해자의 최측근 인물이자 최초 신고자인 가장 최 씨의 행적부터 훑었다. 최 씨에 따르면 그가 아내와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9일 오전이었다. 최 씨는 “9일 오전 11시경 회사에 출근해 이날 밤 11시까지 버스운전을 했는데 다음날 새벽근무에 배정되는 바람에 귀가하지 못하고 회사 대기실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10일 새벽 4시부터 오후 1시까지 근무한 뒤 귀가했다”고 진술했다. 확인결과 최 씨의 진술은 모두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결과 최 씨의 가정사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외국의 건설현장에서 수년간 일하다가 80년 중반부터 시내버스 운전기사로 근무해온 최 씨는 주변에서도 상당히 평판이 좋았다. 특히 최 씨는 아내와 유난히 금실이 좋은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두 아들을 키우며 화목한 가정을 꾸려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 씨의 아내 윤 씨도 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람들은 최 씨 부부가 누구에게 흠잡힐 행동을 하거나 깊은 원한을 살만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한목소리로 진술했다.
용의자를 찾기 위해 철저한 탐문수사를 했지만 사건의 단서가 될 만한 진술은 확보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체발견 이틀 후 수사팀은 최 씨로부터 중요한 얘기를 듣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사건발생 1년 전인 1987년 2월 최 씨가 근무하는 버스회사 내에서 회사가 발칵 뒤집어질 만한 큰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속칭 ‘삥땅’이라고 하는, 버스요금 빼돌리기를 해오던 운전기사들이 적발됐던 것이다. 결국 회사 측의 고발로 그해 11월경 최 씨의 동료 운전기사 3명이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되고 한 명은 도주했다고 한다. 문제는 도주, 잠적한 운전기사 임갑수 씨(가명·35)였다. 최 씨는 수사팀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임갑수는 수배를 받고 도피 중이었는데 수시로 전화를 걸거나 몰래 찾아와서 최 씨를 협박했다고 한다. 최 씨가 회사에 밀고하는 바람에 자신이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 있으니 도피자금과 생활비를 대달라는 것이었다”
최 씨의 진술대로라면 실직당하고 수배자 신세가 된 임 씨는 최 씨에게 적잖은 분노와 원망을 느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동안 최 씨를 협박한 내용을 보면 임 씨는 최 씨의 가족들을 해코지 할 수도 있어 보였다.
보복살인! 수사팀은 최 씨의 범행동기가 어느 정도 충족된다고 판단했다. 정황상 최 씨의 버스 운행 스케줄을 훤히 꿰고 있는 임 씨가 최 씨가 근무 중인 틈을 타 가족들을 상대로 보복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임 씨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탐문 수사를 진행하던 수사팀은 임 씨의 고향이 충청북도라는 점과 그가 수 년 동안 청주와 충주 일대에서 화물차 운전을 한 경력이 있다는 점 등에 주목하고 그 일대에 수사대를 급파, 수사망을 좁혀나갔다. 그리고 임 씨의 동생이 거주하는 청주를 샅샅이 뒤진 결과 사흘 만인 13일 오전 청주시내의 허름한 여관에 은신해 있는 임 씨를 검거했다.
급습한 수사팀에 의해 체포된 임 씨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범행 일체를 순순히 자백했다. 범행동기는 수사팀의 예상대로 보복살인이었다. 임 씨의 자백에 따른 사건 경위는 이렇다.
임 씨는 버스운임을 가로채면서 쏠쏠한 부수입을 챙기고 있었다. 가까이 지내는 버스기사들끼리는 서로 알고도 모른 척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회사 측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됐고 임 씨는 다른 동료기사들과 함께 졸지에 해고되고 만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임갑수는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그 길로 잠적했다. 도망자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나마 고정 수입이 끊겨 생활이 곤란해진 것은 둘째치고 항상 쫓겨다니는 불안한 생활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던 중 임갑수는 평소 친밀하게 지내던 동료 운전기사 최 씨가 밀고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졸지에 회사에서 쫓겨나 수배자 신세로 전락한 것은 순전히 최 씨의 고자질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 일그러진 복수심에 사로잡힌 임 씨는 결국 최 씨의 가족들을 상대로 잔혹한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최 씨의 버스 운행 스케줄을 꿰고 있던 임 씨는 2월 9일 오후 5시 30분경 범행에 사용할 과도를 구입해 최 씨의 집을 찾아갔다. 평소 남편의 직장동료로 안면이 있었던 최 씨의 아내는 별 의심없이 문을 열어줬다. 과자를 사들고 온 아빠 친구의 방문에 어린 아이들은 신이 났다.
임 씨는 최 씨의 아들들에게 “아저씨가 엄마와 할 얘기가 있으니 방에 가서 놀아라”고 말한 뒤 문을 걸어 잠궜다. 아이들을 내보낸 임 씨는 돌변했다. 그는 무방비 상태에 있는 윤 씨를 강간한 후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그리고 방에서 놀고 있던 최 씨의 두 아들들도 같은 방법으로 살해한 뒤 집안을 흐트려놓고 강도살인사건으로 위장한 뒤 유유히 현장을 빠져 나왔다.
임 씨는 범행 후 곧장 집으로 가서 피묻은 점퍼와 양말 등을 아내에게 세탁하도록 한 뒤 그날 밤 과거 직장 동료를 불러내 태연하게 술까지 마신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경찰 수사를 우려한 임 씨는 과거 화물차를 운전하고 다녀 지리가 밝은 청주 일대를 떠돌아다니며 은신을 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강도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임 씨는 사형을 확정받고 1990년 4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