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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국 신문에서 강남은 여전히 정신병동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기사의 제목이 상당히 도발적이었습니다. 서울 강남은 한국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들, 엘리트들, 부자들이 사는 곳인데 왜 이런 주장을 할까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사를 꼼꼼하게 읽어보았습니다. 이 기사는 서울 강남에서 31년 동안 정신과 병원을 운영한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이 의사 선생님은 오랫동안 환자들과 만나면서 느낀 바가 있었고, 그래서 3년 전에 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 이런 제목의 책을 썼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사람들을 진료하며 경험했던 것을 토대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한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에 따르면 3년이 지난 지금 서울 강남은 여전히 정신병동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주장을 할까요?
이분은 자기 주장의 근거로 요 근래에 일어났던 몇 가지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2024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수능 만점자 출신의 의대생이 강남역 인근의 고층 빌딩에서 자신의 여자친구를 흉기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의대생은 졸업 후 병원을 개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여자친구를 사귄 겁니다. 의도적으로 건물을 많이 소유한 건물주의 딸과 교제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자친구 몰래 혼인 신고까지 해버렸습니다. 이 사실이 여자친구의 부모님이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법적 조치를 취했고 그렇게 코너에 몰리자 여자친구를 살해해버린 겁니다.
또 병원 의사들 중에는 불면증으로 찾아온 여성 환자들에게 마약성 물질이 있는 약을 처방하고 환자가 잠에 들면 성폭행한 경우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간호사가 퇴근한 시간 아무도 없는 시간 CCTV 작동을 멈추고 약을 투여했습니다. 환자는 그 자리에서 깊은 잠에 빠지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의사들은 완전 범죄라고 생각하고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로 말미암아 경찰 수사를 받게 되었고 이 범행이 탄로난 것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 사례를 소개했는데 다들 하나같이 비상식적인 범행이었습니다. 그리고 범행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똑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엘리트들입니다. 그래서 이 의사는 질문합니다.
사회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는데, 이 사람들은 왜 이럴까?
이분의 자문 자답은 이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 사람에 대한 따뜻함, 타자에 대한 이해, 약자에 대한 배려와 포용, 이런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이런 것에 훈련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저 학교에서 사회에서 경쟁해서 이기는 것,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것, 그런 것만 배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의사 선생님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강남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수치상으로 볼 때 강남이 좀 더 극단적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은 어느 지역, 어떤 사람이든 내면적으로 크고 작은 그런 문제를 가지고 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신앙의 차원에서 한번 이야기해 봤으면 합니다. 성경은 여호와 라파,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면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 영적으로 일그러진 사람, 그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이 일그러진 내면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사람의 내면 세계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육체의 욕망과 성령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그런 병리 현상과 유사한 일들이 육체의 욕망에 이끌림을 받을 때 일어난다고 이야기합니다.
19절에서 21절을 보면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 이 단어들은 성적인 범죄를 의미합니다. 또 우상숭배와 마술 여기서 마술이라는 것은 한국식으로 말하면 무속과 같은 것입니다. 종교적인 범죄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원수 매점과 다툼 시기와 분냄, 분쟁과 분열, 파단과 질투,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범하는 죄들입니다. 술 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노릇 방탕의 죄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죄 짓고 하나님에게 죄 짓고 다른 사람에게 죄 지으면서 사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이런 죄를 짓는가?
육체의 욕망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면 성령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사랑과 기쁨, 화평, 자기 마음에 하나님이 임해 있기 때문에 그 마음 상태가 평안합니다. 그리고 인내와 절제, 선함, 하나님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친절과 선함을 나타냅니다. 인내합니다. 그리고 신실과 온유와 절제의 삶, 행동이 언제나 균형 잡혀 있습니다. 신중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 시대를 생각하면서 어떤 해법을 제시하실까요?
내면적인 불안, 영적인 공허함,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병리 현상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어떤 해법을 우리에게 제시할까요?
바울 사도는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렇게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우리가 함께 나누다 보면 공감이 안 되는 분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라. 이 말은 교회에서 너무 많이 하는 말이고 또 너무 익숙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대답을 들을 때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 있습니다.
원래 교회는 그런 이야기하는 곳이야 그렇게 치부합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면 이 말의 의미가 좀 다르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왜 이렇게 대답하고 있는지 좀 더 근원적으로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당시 갈라디아 지방에는 유대로부터 온 율법주의 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들의 주장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되었다 할지라도 유대인들이 지키는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이 지키는 그 율법을 지켜야 온전한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전도하는 이유는 과거 유대교에서 배웠던 인간론 때문입니다.
유대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 내면에 두 개의 상반된 성향을 넣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선한 성향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성향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이 두 성향 중에 악한 성향이 더 강하다고 했습니다. 이 악한 성향을 바울은 육체의 욕망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선한 성향만 넣어주시지, 왜 악한 성냥까지 넣어주신 것일까?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라피드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욕망이 없으면 그 삶의 발전이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탐심이 없으면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게으름에 빠질 것이고, 세상의 경제 발전도 없을 것입니다.
또 더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 의학은 발전하지 않습니다. 질병에 걸려도 이것은 운명이려니 그렇게 생각하고 죽음의 길을 택합니다. 의학 발전이 없습니다. 하지만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있으면 약을 찾고 음식을 조절하며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을 연구합니다.
이처럼 욕망은 역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순기능도 있다. 랍비들은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거예요. 만약에 이 욕망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범주, 그 범주 안에서 사용하면 이 욕망은 순기능을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범주가 무엇입니까?
율법입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율법이 중요하다. 율법을 알아야 된다.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이 율법은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구원의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외우게 합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자기 내면의 내면화시키도록 강조했습니다.
이런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고서도 율법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율법을 버리는 것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 사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와서 왜 율법을 따르지 않느냐 당신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한 겁니다.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왜 달라졌을까요?
자신이 유대인으로 살 때 느꼈던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데요. 율법을 지키지만 마음으로는 선한 것을 원해도 실제로는 악하게 사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율법을 지키며 선하게 살려고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악하게 사는 걸까요?
바울은 이런 현상을 이야기하면서 사람 아니에요 죄가 역사하고 있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죄는 단순하게 실수하는 게 아닙니다. 죄는 단순하게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사람 안에서 실제적으로 작용하는 힘입니다. 사탄입니다. 그래서 죄가 역사하면은 사람이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해도 자기 의지대로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고백입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향한 선언입니다. 인간은 죄 아래 있고 죄는 너무 힘이 세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게 선포합니다.
그래서 탄식합니다.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해법이 없다는 거예요. 이런 상황을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능력이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 1절과 2절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정답이라는 겁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실제적으로 삶의 변화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어떤 변화입니까?
갈라디아서 5장은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점점 변해간다. 우리의 성품이 변해간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사십시오.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 현실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여러분 여러분에게 성령은 임해 계십니까?
우리가 새로운 삶, 죄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려고 하면 우리 안에 성령이 계셔야 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진짜 성령은 임하여 계십니까?
사도행전 2장 38절의 말씀입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온 사람 그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성령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진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까요? 성령이 계신다면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한 것을 구분하는 두 가지 기준을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기준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으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는 저주를 받으라.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주님입니다. 그렇게 고백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 스스로에게 한번 여쭤보면 됩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나 여쭤보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준은 성령의 은사와 연관이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면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가 있다는 거예요. 선물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은사는 방은 치유 예언과 같은 뭔가 초월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의사도 있지만 가르치는 것, 찬송하는 것, 설교하는 것, 교회를 다스리는 것,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이런 은사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은사가 있을 겁니다. 그것을 확인해 보면 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 문제입니다. 정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사람들은 그 은사로 교회를 덕스럽게 한다는 겁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사람, 그 사람은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볼 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육신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좀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내 생활을 따져보니까 여전히 육신의 욕망을 쫓아서 살아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식욕에 대한 것을 생각하고, 또 직장에서 출근을 하면 오늘 저 사람을 어떻게 한번 밟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여전히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고 있다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일까 계시지 않는 것일까 그런 질문을 가지고 계신 분도 있을 겁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죽는 그날까지 육체라는 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이 육체의 속성, 육체의 욕망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이런 육체의 욕망을 통해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육체의 욕망 이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우리 내면에서 성령을 따라 살 것인가 육체의 욕망을 쫓아 살 것인가 날마다 그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전쟁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반드시 그 싸움에서 이깁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오늘도 그래서 주님의 손길에 붙들려 살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으면서 진리의 성령님,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내 심령에 필요한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이 성령 강림 주일은 교회사 전반에서 볼 때 2세기 후반부터 교회가 지켜왔던 아주 오래된 절기입니다. 1800년 동안 이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교회는 이 절기를 지켰을까요?
그리고 오늘 우리는 왜 이 절기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요?
그냥 지키는 겁니까?
아닙니다. 로마서 8장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십자가에서 구원해 주셨는데, 그 구원이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임하신 이 성령님을 통해서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보회사입니다. 보회사는 우리 옆에 계시며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욕망이 득실거리는 세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그 욕망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 세상에서 예수 구원을 몸소 나타내며 살 수 있도록 이 성령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성령은 이 구원을 완성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령 강림죄를 지키면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고, 오늘 나는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것을 돌아봐야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그것을 돌아봐야 합니다. 또 성령님은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우리 존재를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사는 생물이 아닙니다. 성령이 머무시는 성령의 전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본능대로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거룩한 존재, 영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지만 거룩한 사람,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살아야 되는 존재입니다. 때로는 우리 안에서 영적인 싸움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이 성령님과 함께 승리하고 영적으로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성령 강림절을 지킨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성령을 따라 사십시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을 한 이유는요. 그 당시 잘못된 세상의 가르침, 종교적인 가르침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유대 율법주의라는 그 가르침이 들어왔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 교회도 여러 측면에서 어려움을 당하는데 그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세상의 가르침과 연관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느슨하게 살아갑니다. 마치 영적으로 잠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따라 사는가 그것을 따져봐야 합니다.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가 성령을 따라 사는가? 성경은 오늘 그것을 묻습니다.
바울 시대의 갈라디아 교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들어온 지식 그것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 시대를 세속주의 시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세속주의가 무엇입니까?
AI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세속주의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생각하는 세계관, 그것과 연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물질 중심적 과학주의, 물질 중심적 경제 이런 것이 세속주의와 연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해도 사람들은 사람을 세속적으로 바라봅니다.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의 동물로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동물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가장 많은 곳이 어디입니까?
그중에 하나가 강남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강남에서 왜 정신병적인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들은 세상의 교육에 철저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 많이 배운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르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거 붙들고 살아갑니다. 교회에 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따라 사십시오. 여러분 안에 성령이 임하여 계십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교회는 원래 저런 말을 해요. 원래 교회는 그런 말을 하는 곳이야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실제적인 역사보다는 세상의 가르침을 따라갑니다. 그 가르침 속에서 영적 전쟁을 경험합니다. 죄책감이 더 커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또 욕망을 쫓아 살고자 하는 그런 유혹들이 커져 온 것을 경험합니다. 그 가운데 신앙의 공허함을 느끼는 겁니다. 성경을 따라 사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권면입니다. 그러면 이 정답은 세속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권면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 강림절 이주일의 우리를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따라서 살아가는지 내 삶의 기준을 한 번 더 체크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예언자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느 골짜기에 갔는데 그 골짜기에 마른 뼈가 가득했습니다. 그 마른 뼈가 얼마나 말랐는지 다 백골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스러질 정도로 말라 있었습니다. 그 뼈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이게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버린 이스라엘 바벨론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그 이스라엘도 그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완전히 죽어서 말라 비뚤어진 그런 백골 상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명령하십니다.
인자야 너는 가서 그 마른 뼈를 향해 외쳐라.
그래서 외쳤습니다.
그 마른 뼈를 향해서 외치니까 뼈 위에 살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형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뼈에 그 사람에게 생명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외치라고 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사람들을 살아나게 하라 외쳤습니다. 여기서 생기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 루아흐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이여 오시옵소서 하나님의 영이여 불어서 저 사람들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때 그 마른 뼈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무능하고 무기력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 변모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성령이 오시면 이 땅에 일어날 변화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존재. 그러나 그 존재에게 성령이 임해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고 또 군대로 살아가라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임재하신 것은 우리의 삶을 이렇게 바꾸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먼저는 내가 변하고 우리 교회가 변하고 그리고 세상이 변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또 소망을 가지고 우리 같이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님 우리 가운데 오시옵소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나를 변화시켜 주시고 교회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이 땅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성령님의 역사가 이 성령 강림 주일에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옵소서
우리의 소망하는 마음으로 같이 찬송하고요.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