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요
Stoicism'
헬레니즘 시대에 발생하여 전기 로마 시대까지 성행한 철학의 한 유파.
로고스로 대표되는 보편적인 이성과 금욕적인 삶을 중시했으며, 후에 바뤼흐 스피노자를 비롯한 합리주의 철학에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인 스토아 철학자로는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키티온의 제논,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로마의 오현제 중에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있다.
2. 역사
스토아라는 말은 폴리그노트라는 벽화로 장식된 아덴의 (스토아 포이킬레) “채색 강당”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강당에서는 스토아 학자들이 강의했다.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4세기 말경에 페니키아 출신으로서 키티온의 제논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논이 자기 학파를 설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에피쿠로스의 아테네 이주(BC. 307/06)였던 것 처럼 보인다. 에피쿠로스의 학설은 인간 삶의 목표에 흥미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또한 이 세계를 우연의 장으로 간주한 삶의 예술이었다. 제논은 이 두 주장에 대해서 격분했다. 왜냐하면 로고스 때문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는 점을 에피쿠로스가 완전히 간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논은 인간과 인간의 생활태도에 대한 질문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했다. 윤리학의 주제는 스토아 철학의 시초에서도 역시 철학함의 출발점이었다. 인간은 자기의 생활태도의 근거를 에피쿠로스의 자연주의와는 달리 코스모스를 제어하는, 그리고 자신의 단일성에 토대를 놓는 로고스의 기능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토아 철학은 “있는 그대로의 삶”(kata tén physin zén)을 삶의 이상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렇듯 윤리학과 물리학을 한 묶음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스토아 철학에서 사상의 조직적인 일치인 체계(System)가 획득해야만 했던 그 의미를 가리킨다.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 제국 말에 이르는 후기 고대(古代)를 대표한다. 키프로스섬 태생의 창설자 제논과 그 제자로서 적빈(赤貧)과 노동으로 이름 높던 소아시아의 아소스인(人) 클레안테스, 그 제자로서 스토아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킬리키아의 항구 도시 솔로이(솔리)의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설을 로마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로도스섬의 파나이티오스, 종교적 경향이 강한 오론테스강 하반(河畔)의 아파메아인 포시도니오스, 로마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스토아 학파 철학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전기(古典期)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좋은 가문 출신 사람들의 철학이 아니라, 변경(邊境) 사람이나 이국인의 철학이었으며,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널리 지중해(地中海) 연안의 여러 지방에 영향을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의 여러 파와 스토아파 사이의 대립은 격렬하였다.
고전기까지의 철학의 여러 학설을 수용하여 일반화 ·통속화한 점에서 절충주의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 기반에는 고전 철학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로마시대 사람들의 저작을 제외하고는 스토아파의 저작은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아서 연구상 어려움이 있다.
일반적으로 스토아 학파는 자연관에 있어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와 변화에 관한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하면서 윤리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특히 키니코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스토아 철학의 전개과정은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초기는 기원전 3세기경으로 대표자는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인 제논(336∼264 B.C.), 그의 제자인 클레안테스, 크리시포스이고
중기는 기원전 2세기경에 해당하는 시기로 이 때 활동한 사람은 파나이티우스, 포시도니오스가 있다.[1] 후기는 1세기 로마 제국에 해당하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있다.
사도 바울로의 선교 행적을 다룬 사도행전에도 바울로가 아테네에서 선교를 할 때 에피쿠로스학파의 일원과 스토아 학파의 일원이 바울로와 논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3. 사상
스토아 학파의 핵심 사상은 '불행은 결코 우리의 행복을 감소시킬 수 없다'이고, 스토아 철학은 불행을 이기는 철학이다.
초기 스토아 철학은 이전 철학과 달리 지식의 추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헬레니즘 철학을 대표한 스토아 철학은 보편적이고 평온하며, 질서 있는 존재와는 거리가 먼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방편(ars vitae)을 내놓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보기에 영원한 우주 질서와 불변적인 가치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은 이성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곧 인간 존재가 따라야 할 모범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성의 빛이란 세계 전체에 경이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여 질서 있게 살아가는 기준이다. 스토아 도덕철학도 전세계가 하나의 커다란 도시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이 도시의 충성스런 시민으로서 덕과 올바른 행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 일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 스토아 도덕철학은 도덕 가치, 의무, 정의, 굳센 정신 등과 같은 덕목에 중심을 두고 보편적인 우애와 신처럼 넓은 자비심을 강조함으로써 가장 호소력 있는 학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애지(愛知: 철학)는 논리, 윤리, 자연 부문으로 나뉘나,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분파가 아니라 서로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다. 즉 하나의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애지'를 구성하는 3요소로 이루어진다.
지혜는 ‘신의 일과 사람의 일에 관한 지식’이라고 정의되지만, 이것은 사물에 관한 관조적(觀照的) 지식이 아니라, 인간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실천적 지식이다. 지혜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에 스토아파의 특징이 있으며, 이 원리에 바탕을 두어 스토아철학은 고대철학원리의 주체적인 반성철학이 되었다. 애지(愛知)는 이러한 지혜를 습득하기 위한 ‘삶의 기술(ars vivendi)’의 연습이며, 이러한 재주를 갖는 사람이 현자(賢者)인 것이다. 그리고 현자의 지혜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충동’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병으로서의 정념(情念)이 있다. 이 정념에 흔들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데에 ‘활달한 삶의 흐름’이 있다. 스토아파의 현자의 이상은 바로 거기에 있다. 스토익이라고 불리는 비정한 금욕주의적 심정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자의 유덕한 삶이란 이성을 갖춘 유한한 개개의 자연물(인간)이 자연에 의하여 부여된 그대로의 자기의 ‘운명’을 알고, 운명대로 살아감으로써 본원(本源)인 자연과 일치하는 ‘동의(同意)’의 삶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 그 자체가 이성적 존재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귀환(自己歸還)에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자는 모든 자연물의 근원인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과 일치한 자이며 신과 같은 자, 바로 신 그것인 것이다.
이와 함께 스토아 철학의 인간관과 윤리관은 이성주의와 금욕주의로 대표된다. 즉, 스토아철학자들은 이성의 법칙에 의해 운행하는 자연에 대한 사고와 다르게 인간과 삶에 대하여는 비관주의적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은 신적 이성이 지배하는 자연 속에서 이성을 공유하고 있는 점에서 신의 일부이다. 소우주에 해당하는 인간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이성법칙에 따라야만 인간의 타고난 자연적인 본성에 부합된다. 이성적 영혼이 인간을 지배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롭고 행복하다.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비이성적인 부분 즉, 감정, 욕구, 정념을 지배케 함으로써 자연법에 일치시키고 인간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알맞은 의무를 드러내고 실천하게 만듦으로써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삶의 최고 목표는 ‘실천적 덕’이다. 덕은 그 자체로 가치로운 것이며, 일체의 존재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과 동일한 것이다.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 덕을 목표로 삼을 때 행복은 달성된다.
이러한 이성에 투철하고자 하는 철학은 헬레니즘이란 무대배경을 통하여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이성적인 자연세계는 한치의 빈틈도 없이 이성법칙에 따라 질서롭게 조화를 이루는 결정론적인 세계이다. 이와 반대로 인간세계는 전쟁과 패배,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되는 무질서의 세계이다. 더 이상 인간은 일상적인 행복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세속적인 성공과 행복의 성취는 우리의 능력 밖에 머문다. 따라서 스토아 학파에서 말하는 행복은 능력의 발휘보다는 인간의 욕구를 억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혼돈의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이성에 따라 통찰하고 운명을 감수하며, 의지의 힘으로 현실의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다. 삶의 목적은 오로지 이성의 의한 냉담한 부동심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는 육체적인 욕구, 충동, 정서로부터 해방된 자유이며 인간 영혼의 덕인 것이다. 스토아철학 초기의 비관적이고 숙명론적인 성격은 로마시대에 접어들면서 건실한 로마의 정신으로 변모하여 사회에 대한 엄격한 의무감, 동포애, 윤리적인 사명감을 대변하게 된다.
3.1. 행복론
보편적인 '인도주의사상'과 또한 그에 못지 않게 포괄적인 '세계시민의 사상'을 고대에 있어서 처음으로 제창하고 나선 스토아 철학자들은 개체적 인격이 지니는 긍지에 넘치는 확고부동한 존엄성과 절대적인 윤리적 의무 이행을 역설함과 아울러 엄격한 금욕주의적 윤리를 예찬하였다. 그들은 개인들끼리의 도덕을 통한 행복감 추구를 표방함으로써 도덕과 행복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는 플라톤의 행복론과 차이가 없는 것 같으나,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도덕이 폴리스(도시국가)라는 공동체를 전제로 하고 도시국가 공동체의 보존을 목표로 한 도덕이라면, 스토아 학파의 도덕은 서로의 개인적 자유 실현과 행복의 원리로서의 도덕이었다. 스토아 학파는 서로가 공유하는 도덕 원리가 우주 자연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지한 자연은 인격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스토아 학파들이 인지한 자연은 스스로 질서정연하다는 것이다. 자연은 모종의 초월적인 법칙이자 내적 원리로서 우리의 삶에 어떤 흔들리지 않는 지표를 던져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주적 진리를 잘 분별하는 이성적 삶이 행복에 도달하는 길로 보면서, 행복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우주 자연의 법칙을 똑바로 인식하여 철저하게 그것에 따라 부동심(아파테이아)의 상태로 유유자적하게 사는 사람이다. 삶에 연연해 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근심과 빈부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우주의 진리와 일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인생이라고 하였다.
플라톤의 이성이 인간의 다양한 내적 욕망을 조화롭게 구현하는 삶을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본성에서 강렬한 욕망의 요소를 인정하면서 이성에 의해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면, 스토아 학파의 이성은 자연의 내부에서 흔들림 없이 확고부동하게 그 스스로의 모습을 보존하는 원리로서, 조화를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자연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욕망의 측면을 완전하게 제어 또는 무력화시키는 원리이다. 따라서 스토아주의자들은 감각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무지와 탐욕 그리고 그것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유약함과 그로 인한 불행을 뼈저리게 깨닫고 흔들리지 않는 이성의 원리에 따라 철저히 금욕적인 훈련을 수행하여 그야말로 우주 자연의 원리를 완전히 스스로의 삶 속에서 관철해 내는 것, 이것이 곧 진정한 성인(현자)에 이르는 길이자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개인의 행복, 자유, 안심입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각 개인들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의식, 도덕감을 갖고 살아야한다고 말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하는 정신을 강조하였다. 스토아주의자들이 말하는 행복은 자기애, 자기 보존본능에 기초한 개인의 행복이었고, 윤리적 생활태도의 목표는 자기완성을 통한 안심입명에 있었다. 이 점이 국가주의적인 도덕감, 의무감까지 포함하여 국민의 행복, 공동체의 행복을 강조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과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생각, 의지, 미래에 대한 태도에서만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스토아주의자들이 말하는 행복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열린 기회며 어떤 인생의 상황에서도 추구할 수 있고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했다. 행복은 우리가 '내 것으로 가질 수 있는 ' 그 무엇이다. 스토아 사상가들이 선호하는 비유를 들자면, 뱃사람이 바람의 방향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방향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러나 행복 역시 세상사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행복은 결코 고통받지 않는다. 행복은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의 덕행이 지닌 '명민함과 탁월함'에 의존하며, 그 탁월함은 세상의 그 어떤 역경에 의해서도 압도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떤 불행도, 운수 사나운 일도 결코 우리의 행복을 망치거나 전복시킬 수는 없다. 자신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설령 아무리 많은 불행을 감당해야 한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행복한 사람일 수 있다. 스토아 학파가 말한 행복의 비밀은 행운이 우리에게서 훔쳐가지 못할 것을 소유하는 데 있으며 아무도 훔쳐가지 못하는 이것은 바로 덕행이다.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행복은 레슬링과 같다’고 보았다. 행복이란 레슬링처럼 패배시켜야 할 적수를 가져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부단히 경계하고 또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스토아 학파의 행복론에는 우주 자연의 법칙에 대한 숭고한 믿음과 그에 바탕한 숙명론적이고도 처절한 금욕주의가 깊게 깔려 있는 것이다.
3.2. 인식론
초기 스토아 학파는 지식의 본성에 관한 많은 가정들을 에피쿠로스학파와 공유하였다. 에피쿠로스학파와 마찬가지로 스토아 학파도 지식의 기초를 두 가지, 오류에 빠질 수 없는 감각적 인상과 원초적, 후천적 개념들이라고 믿었다. 또한 스토아 학파는 개념의 근원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설명을 하는데 그에 따르면 한 사람이 태어날 때 그의 정신은 텅 빈 백지같지만 그가 이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개념이 이 백지 위에 쓰여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최초의 개념은 감각들에서 유래하며 이 경험들이 기억에 남는다. 몇몇 개념들은 자연적으로 생기기도 하는데 이를 ‘프롤렙시스’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에피쿠로스학파에 비해 인간의 정신적 상태에 대한 분류를 훨씬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그들은 회의주의에 맞설 수 있을만한 인식론을 제시했는데 플라톤이 대비했던 지식(episteme)과 의견(doxa)이라는 상태에 ‘인상(katalepsis)’을 도입한 것이다. 섹스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 문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인상을 인식적 현상(phatasia kataleptike)과 관련해서 정의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서로 연결된 세 가지가 있는데 지식과 의견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인상이 바로 그들이다. 지식은 건전하고 확고하며 논증에 의해서 변화될 수 없는 인식이다. 의견은 근거가 약하며 거짓인 동의이다. 이들 사이에 인상이 위치하는데 이는 인식적 현상에 대한 동의라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현상이란 폭넓은 용어로서 감각에 드러나는 바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의견을 갖도록 하는 근거까지 포함한다. 인상 또한 마찬가지로 감각에서 유래할 수도, 이성에서 유래할 수 도 있다. 인상은 지식과 의견 사이에 위치하는데 의견은 일종의 특별한 요소인 동의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상은 의견과 달리 거짓일 수 없으며 또한 지식과 달리 결코 우리의 마음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힘을 포함하지 않는다. 고로 인식적 현상이란 ‘존재하는 바로부터 생겨나며, 존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게 각인된 인상을 주는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인식적 인상을 설득력을 기준으로 네 유형으로 분류한다.
(1)설득력이 있는 인상: ‘지금은 낮이다’, ‘나는 말하는 중이다’
(2)설득력이 없는 인상: ‘만일 어둡다면 지금은 낮이다’
(3)설득력이 있는 동시에 없는 인상: 철학적 역설들
(4)설득력이 있지도 없지도 않는 인상: ‘모든 별들의 수는 홀수이다’
그러나 설득력이 진리를 보장해주는 기준은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기도 한 현상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이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인상적 인상 뿐만 아니라 합리적 인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케실라오스는 스토아 학파의 인식적 인상인 ‘어떤 것이 존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게 각인된 무언가’라는 정의를 비판한다. 그는 과연 참인 인상과 구별될 수 없는 거짓 인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제논은 만일 정확하게 일치하는 거짓인상이 존재하면 그런 인상은 인식적 인상일 수 없다고 동의한다. 그래서 그는 인식적 인상에 대한 위의 정의를 수정하여 ‘존재하지 않는 바로부터는 생겨날 수 없는 종류의 인상’이라는 점을 더한다.
3.3. 자연법
인간사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는 많으나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중요한 것은 운명의 위협을 극복하는 정신이며,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마치 그것이 너에게 일어나기를 네가 원했던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라. 만일 네가 신의 결정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 세네카, “자연의 의문들”
스토아 학파가 제시한 바람직한 삶으로서 ‘자연에 따르는 삶’ 이란 이성에 따르는 삶인 동시에 자연의 법칙, 즉 자연법에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인간은 그러한 법칙을 수용할 수는 있어도 바꿀 수는 없으므로, 결국 스토아 학파가 주장하는 윤리적 삶이란, 신이 정한 우주와 세계의 질서에 인간이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스토아 학파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연법은 자연(우주)에 처음부터 존재해왔다고 여겨지는 것으로서 자연법칙에서 유래한다. 자연법칙은 사실문제와 존재문제이다. 예컨대, 두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는 중력 법칙은 사실문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법칙으로부터 규범성을 도출하면 자연법이 된다. 이는 성리학에서 ‘이(理)’를 소이연(所以然: 자연법칙)과 소당연(所當然: 도덕 법칙) 성격을 모두 갖는 것으로 보는 것과 유사하다. 자연법칙과 도덕 법칙을 구별하지 않는 것을 칼 포퍼는 ‘주술적 사고’로 폄훼하면서 전(前) 근대적인 사유로 본다. 자연법은 자연법칙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존재’문제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는다. 쉽게 말해서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력 법칙이 정말 자연법칙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고 적용될 것이다. 둘째, 인간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처음부터 우주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단지 이성을 가지고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스토아 학파에 의하면 외적인 사건은 인과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므로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으며,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사건에 대한 우리의 내적인 태도와 의지뿐이다. 스토아 학파는 이와 같은 내적인 것에서 도덕의 기초를 찾는다. 외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모든 외적인 것들은 선, 덕, 행복과는 무관하다. 선, 덕, 행복의 기초는 우리의 의지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 즉 우리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스토아 학파의 주장이다.
스토아 학파는 인과 법칙에 따른 필연성이 우주를 지배한다고 하면서 인간도 그런 질서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면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인정할 수 있는가가 문제 된다. 인과 법칙에 따른 필연성의 지배, 즉 결정론의 지배에 순응하는가 하는 내적 태도 영역에서만 자유 의지를 인정한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러한 질서에 순응하거나 말거나 하는 태도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토아 학파에 의하면, 우리를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성취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 또는 행위의 동기이다. 덕 있는 삶이란 자연법인 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삶이므로, 인간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말고, 단지 그 행위가 이성과 자연법에 일치하는지만을 생각하고 행위해야 한다. 스토아 학파는 결과와 무관하게 ‘해야만 하는’ 행위가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을 ‘의무’라고 하였다. 스토아 학파의 이러한 생각은 칸트의 의무론에 영향을 주었다.
스토아 학파는 인간이 도덕적인 삶을 살려면 우리 내면의 의지와 태도가 이성을 따르고 자연법에 일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정념(감정)이 이성을 가리게 되면 우리는 도덕과 무관한 육체, 권력, 부, 명예, 건강, 질병, 가난 등에 마음을 빼앗기고 근거 없는 기쁨이나 슬픔, 욕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하고 동요하게 된다. 스토아 학파에 의하면, 정념은 비이성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영혼 안의 움직임이며 과도한 충동에 불과한 것이다. 정념은 강할수록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고, 우리를 잘못된 태도로 이끌고 간다. 따라서 스토아 학파는 우리에게 정념의 지배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스토아 학파는 정념이 없는 이러한 상태를 ‘아파테이아’[2]라고 불렀다. 아파테이아는 한결같이 이성적 원리들을 따름으로써 어떤 외부적인 상황에 의해서도 동요하지 않는 정신의 의연함과 평온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은 정념에서 해방된 자유인의 삶을 최고의 윤리적 이상으로 삼은 근대의 스피노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스토아 학파에 따르면, 자연법은 자기애를 넘어 가족, 친구, 동료 시민, 나아가 인류 전체를 포옹하고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이런 자연법이 인간의 윤리적 삶의 근거가 되는 모든 세계, 모든 국가의 실정법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스토아 학파의 세계 시민주의 사상과 자연법사상은 고대 로마와 중세, 근대의 자연법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4. 특성
스토아 철학은 논리학, 물리학 및 윤리학이라는 세 가지 체계로 분류된다. 윤리학이 가장 상위를 점하는 데 반하여 논리학과 물리학은 그의 예비적 단계를 이루고 있다. "순리적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이 스토아 학파의 윤리론을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즉, 인간이란 이성존재로서의 천성을 타고난 까닭에 순리적 생활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곧 '이성적인 생활'과 같은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유일한 덕성도 깃들여 있으며 동시에 유일한 행복도 깃들여 있는바, 결국 이 두 가지 측면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스토아 학파들은 자연과 윤리를 분리시키지 않았고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자신의 행복과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보았다. 키케로는 스토아의 윤리를 역설적으로 요약하기를 "덕행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이다"라고 말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일을 당해도 당신은 행복할 것이다. 인생의 모든 부침 속에서도 오래도록 지속되는 만족감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덕행이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있어서는 그 모두(생명, 건강, 소유, 명예 등과 같이 흔히 사람들에게 존중되는 것과 노령, 질병, 빈곤, 예속, 죽음 등과 같이 흔히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단지 '무관심사'로 그칠 뿐이다. 이성을 현혹하는 감정을 뿌리치기 위한 끈질긴 투쟁을 벌이는 것이 인간의 과업이고, 도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와같은 감정을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정신은 열정으로부터 해탈되어야만 하는데, 이와 같은 상태를 스토아 학파에서는 마음의 안정(아파테이아, apatheia)이라고 일컫는다. 스토아주의의 윤리는 완벽한 도덕적 자유 및 도덕적 지배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노력이고, 그 노력의 정점에서 주어지는 영혼의 평정상태가 아파테이아인 것이다.
5. 영향
5.1. 고대 그리스 문화와 정치
거리의 평범한 그리스인들은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거의 알지 못 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공공 장소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토론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스토아 학파는 플라톤주의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방식으로 "대중 철학"이 되었다. 그것은 죽음, 고난, 재산, 가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권력 그리고 노예 제도를 어떻게 여겨야 하는지를 말해줬다. 헬레니즘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스토아 학파는 불운에 맞서는 심리적 요새를 제공했다.
정치적인면에서, 안티고노스 왕조[3]는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과 관련이 있었다. 군주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의 제자라고 전해진다. 그는 제논이 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의 가정 교사로 일하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제논은 그 일을 하기에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양해를 구했다. 또 스토아 학파 철학자 페르세우스는 안티고노스 왕조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또 다른 헬레니즘 독재자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인 스파이러스를 고문으로 두었다. 스파이러스가 주도한 스파르타의 개혁(외국인의 시민권 확대, 토지 재분배 등)은 일부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사회 개혁으로 비춰지고 있지만 그것이 클레오메스에게 힘을 주는 수단에 불과했다.
5.2. 중기 스토아 학파
중기 스토아 학파는 타르수스의 안티파트로스, 파나이티우스, 포시도니우스를 포함한 스토아 철학자들의 업적을 아우르는 데 사용하는 용어다. 이전에 중기 스토아 학파에 대한 학문은 "구스토아" 사이의 단절 정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철학자들과 이전의 스토아 학파들 사이에 스토아 사상에 진화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안티파트로스는 크리시푸스보다 더 결혼과 가족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특히, 이런 스토아 학파들은 플라톤의 '티마이어스' 대화를 중시했다.
파나이티우스는 이전의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이 발견한 주기적인 대화재를 부인했다. 포시도니우스는 크리시도스의 순수 지적인 감정론은 거부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을 만들고 중기 스토아 학파는 여전히 스토아 학파로 남아 있었다. 키케로는 자신의 작품 중 첫 두권의 책을 파나이티우스의 논문에 근거를 두었다고 말한다. 이는 일부 전문가들이 중세 스토아 철학을 고대 스토아 철학보다 더"실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D.Sedley는 적절한 기능에 대한 어떤 작업도 그러한 초점을 갖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5.3. 로마 정치
기원전 155년 아테네는 로마의 한 대사관에 세명의 스토아 철학자를 대표단으로 보냈다. 그들의 가르침은 교육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회의론자 카르네아데스는 스토아 철학을 반대하며 하루의 수천명의 군중들에게 연설을 했고 정의는 그 자체로 진정한 선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날 그는 모든 면에서 중재자와 같은 관점을 갖는 것이 중재자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제안에 반대하는 주장을 했다. 이 변증법적인 기술은 그리스 철학적인 문화에 대한 깊은 회의적인 의심과 더불어, 대 카토와 같은 원로들에 의해 모든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한 보수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기원전 86년에 로마는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키케로 같이 야망이 크고 부유한 로마인들이 아테네의 철학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국민들을 위해 그리스 철학을 대중화했다. 쾌락주의는 로마의 군대에서 선호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스토아 학파는 원로원과 다른 정치적 세력들, 운동가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 공화국의 마지막과 연관된 로마 정치인들은 그리스 철학과 여러가지 연관성이 있었다. 스토아 학파와 관련된 이들 중에는 소 카토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있다. 브루투스의 동료 암살자이자 처남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공언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스승으로 스토아 학파 철학자 아테노도로스 칼보스를 두고 있었다
5.4. 기독교
스토아 학파는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플라톤주의와는 달리 기독교와 스토아 철학의 관계에는 우선 간과될 수 없는, 근본적인 대립이 개재해 있었다. 즉 이 대립은 성경의 하느님이 세계에 초월해 있다는 사실에서 주어졌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신적인 것이 코스모스 안에 완전하게 내재해 있다고 주장했다. 즉, 신성의 총괄개념은 코스모스를 완전히 지배하는 로고스이며, 프뉴마[4]이며, 코스모스의 영혼이고, 세계에 내재하고 세계를 일치시키는 신성은 세계를 소생시키고 주기적으로 태워버리는 불 속에서 질료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교부들 중에서는 오직 테르툴리아누스만이 하느님만이 현실성이라고 한다면 물체임에 틀림 없다는 이런 공격적인 논증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 이외의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는 물질 세계를 초월해서 독자적으로, 순수하게 영적인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는 플라톤의 학설이 신의 초월성과 비육체성을 고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인간론에서도 역시 기독교 신학은 스토아 철학과 근본적인 대립을 맛보았다. 왜냐하면 이 철학은 영혼의 불가사성에 대해서 논란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토아 철학의 유물론이 불어온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들은 이 세상의 현존을 초월하는 생명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물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같은 몇몇 기독교 신학자들은 (세계가 불에서 사라진 다음에 또 다시 일어나는) 사물의 회귀에 대한 스토아 학설 가운데서 죽은 자의 부활을 암시적으로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죽은 자의 부활은 기독교가 희망하고 있는 대상이다.
이러한 해석은 우주론적인 순환을 정향하고 있는 스토아 철학의 세계 이해가 늘 새롭게 반복되는 만물의 회귀를 가리키고 있는 반면에 단지 유일회적인 반족으로 회귀한다는 사상을 가리키는 게 틀림 없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순환적 표상은 생명이 죽은 자의 부활로 단 한번 회귀한다는 기독교 희망과 일치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의 이해나 인간론에서 이러한 근본적인 대립이 있었지만 그래도 기독교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의 개개 항목 중에서 상당 부분을 이런 스토아 철학의 표상에 근거해서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로고스 개념이 첫 번째로 거론되어야만 한다.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로고스 개념을 선재적인 신의 지혜에 대한 성서의 사상과 등가를 이루는 철학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 이해와는 달리, 오히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누스[5] 개념과 상응하여 세계를 초월하는 본질로 표상했다. 그뿐만 아니라 로고스는 창조주 하느님과도 구별되었다. 로고스는 이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세계에 현재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말의 “단어”로 표명된, 영혼에서 빠져나온 로고스(logos prophorikós) 사이에 있는 차이점은 근본적으로 인간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로고스의 활동을 고려하여 생겼는데, 이 차이점이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서 특별히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스토아 철학은 인간 영혼에 속한 로고스의 두 형식을 구별했는데, 이 구별은 2세기에 기독교 삼위일체론을 진일보 시켰다. 즉 한편으로는 신의 로고스가 아버지와의 영원한 일치에 현존한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육화를 통한 로고스의 등장 사이를 구별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 경우에 로고스의 등장은 예수의 출현이 유일회적인 사건이었다는 사실에 한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로고스가 “씨앗”의 형태로 창조 시에 활동했다는 것이 그 정점이었다. 이 씨앗은 “전체” 로고스가 육화 사건에서 “완전하게” 등장할 수 있도록 인류가 준비하는 기능이었다.
기독교 신학이 스토아 학파와 접촉하고 있는 두 번째 주제는 인간 창조 시에 신의 인간에게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한 프뉴마에(창세 2:7) 대한 표상을 통해서 주어졌다. 그렇지만 성경의 입장에 따르면, 따라서 기독교 신학에서 하느님의 영은 프뉴마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표상과 달리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초월하는 위상을 갖는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이제 인간은 영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주어진 “은총”이다. 기독교 신학은 2세기 후반 이래로, 아마 선택받은 이들의 본성에 기초를 둔 프뉴마에 대한 영지주의적 표상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영의 고지(告知)를 구원 질서에 한정시키고, 또한 창조 시에 받은 생명의 숨을 신의 영과 구별하려는 경향을 추구했다.
스토아 철학은 인간이 신의 프뉴마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과의 차이점이 더욱 첨예화 되었다. 이것은 영혼이 자연적으로 신과 유사하다는 플라톤의 전제에 대한 거부와 상응한다. 스토아 철학의 프뉴마 표상은 하느님 이해에서도 역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요한 복음서 4장 24절에 “하느님은 영이시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한 바람의 본성과 영 사이의 유사성이 영에 대한 구약 성서의 표상과 고대 그리스의 프뉴마 표상, 그리고 스토아의 그것과 공통적인 기초에 속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느님의 특징을 가장 순수한, 모든 것을 괄통하는 질료라는 스토아적인 의미에서 프뉴마라고 해석했다.(adv. Praxean 7).
오리게네스가 물체의 부분과 복합이 수미일관하다는 점을 암시함으로써 이러한 입장을 우스꽝그럽게 했던 논쟁이 끝난 다음에 기독교 신학에서 신적인 영은 전반적으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의 표상이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비물체적인 누스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물론 스토아 철학의 프뉴마 표상보다 성경적 영 이해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신의 이해에서 신인동형설적인 rudgia의 발전에 출발점이 되었다.
이런 경향은 신의 오성과 의지의 관계에 대한 라틴 스콜라 철학의 심리학적 숙고를 통해서 현안으로 등장했다. 그렇지만 스토아 철학의 프뉴마론은 우주에 대한 경건과의 결합을 통해서, 또한 신의 초월에 대한 오인을 통해서 신을 영이라고 표상하는 성경적 입장에 대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실제적인 것들과 신적인 것들이 물체적이라는 생각에서 나타나는 스토아 철학의 유물론이 여기에 연관되었다. 물리학은 스토아 철학의 프뉴마 표상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근대 물리학의 ‘장’개념은 이 프뉴마 표상의 유물론적 경향을 벗겨냈다.
또한 이로써 신학은 한편으로는 플라톤의 누스론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면에서 성경의 영(靈) 사상에 접근되어 있는 스토아 철학의 영 표상보다 훨씬 더 영에 대한 성경적 진술에 들어맞는 해석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무한한 장이라는 개념이 전술한대로 자신의 작용 효과가 나타나는 모든 유한한 현상으로 생각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다.
기독교와 스토아 철학의 이해가 맞닿아 있는 그 다음의 주제는 세상 진행을 관리하는 신의 섭리에 대한 학설이었다. 이 학설은 제논과 크뤼십포스에 의해서 에피쿠로스 견해와는 반대로 형성되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환희에 빠져있는 신들이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에피쿠로스 철학이 아니라 플라톤의 착상에 근거할 수 있었다. 플라톤은 열 번째 율법서에서 아덴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들은 자신의 소유물을, 즉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모든 죽어야 할 피조물을”(Nomoi 902 b 8f.) 애지중지 돌본다.(899 b 4-905 d 6). 더구나 “만물 중에서 미미한 것들이나 소소한 것들을”(902 e 3)은 물론이고, 또한 그 무엇보다도 인간을(905 d 2) 돌본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서 pronoia(섭리)라는 단어가 아니라 epimélia(관심)이라는 단어를(903 e 3) 사용했다. pronoia라는 표현은 프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 회상기 Memorabilien에(Ⅳ,3,12) 나온다. 그런데 이 개념은 크세노폰에 의해서 우주 사건의 질서에 대한 표상과 묶이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만물이 인간 때문에 창조되었다는 명제와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인간을 목표로 하는 신의 섭리는 제논과 크뤼십포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다음에 체계적인 인간 중심주의로 자리를 잡았다. 이 인간 중심주의에 대해서 막스 포렌쯔가 말하기를 “그리스 철학의 영과는 근원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는데, 섭리의 인간 중심주의는 아주 놀랍게도 구약 성경의 창조 신앙(시편8:6,7)과 연관된다. 폴렌쯔는 제논이 ‘이런 형식의“ 섭리 신앙을 아마도 자기 고향인 페니키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스토아 철학의 섭리 사상은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서 채용된다.물론 성경의 세상 초월적인 하느님과 관련되었는데, 이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섭리 사상은 성서에 하느님의 세계 통치를 특징적으로 설명하는 데 아주 탁월하게 어울렸다. 프로노이아 개념은 신약 성경에서는 아직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로 설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때때로 클레멘스 편지에서 발견된다.(24,5). 그리고 2세기 호교론자인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스는 하느님을 인식하기 위한 그 토대를 이 개념에서 확보하였다.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 같은 이들의 알렉산드리아 신학에서는 기독교 교리를 조직적으로 제시하는 데 권위적 있는 의미를 획득했다. 요컨대 구원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클레멘스에 따르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구원자에게서 현실화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교회의 교리가 단지 허구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게 뻔하다는 것이다. 그 다음 시대가 되자 이 문제들은, 그리고 그 이외의 문제들은 키케로와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에 의해서 다루어졌다. 기독교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운명신앙을 거부하고, 또한 악의 원인인 인간의 의지적 자유가 도덕적 악과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함으로써 그들의 편을 들수 있었다. 기독교 신학은 세상에 만들고 세상을 관리하는 로고스와 일치하는 헤이마르메네의 운명적 세력을 표상함으로써 이러한 논증에서 세상을 초월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위한 전제를 제공했다.
스토아 인식론도 역시 기독교 신학에 그 흔적을 남겼다. 특히 신앙과 신앙의 확실성에 대한 이해에서 그렇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서가 그리스인들을 가리켜 신앙을 어떤 토대도 없이 야만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신앙을 잘못 언급한다고 비판했지만 동의(synkatáthesis)에 대한 스토아 학설과 관련해서 신앙의 개념을 자유로운 결정에서 발생하는 승인(prólepsis)이라고, 또한 신의 선택에 기초한 자연성이라는 의미에서 신앙을 본질(히브리서 11:1)이라고 해석한 바실레이데스와 반대로 신이 두려운 줄 알고 승인하는 것(synkatáthesis)이라고 규정했다. 클레멘스는 이를 통해서 동의(assensus)가 곧 신앙이라는 이해에 토대를 놓은 셈이다. 이런 이해는 기독교 신학에서 나중에 권위를 확보했으며, 결국 바오로의 로마서 10:9에서 제시되었다. 바오로는 같은 문장에서 신앙을 프로렙시스(승인)라고, 히브리서 11:1에 따라서 희망의 대상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연결된 미래의 구원을 선취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신의 약속에 기초를 둔 희망에서 신의 로고스는 우리의 스승이며, 또한 클레멘스에 따르면 신앙의 확신은 바로 이것과 관련된다. 클레멘스의 경우에 고의적인 승인을 강조함으로써 신앙의 동의는 틀림 없이 자발적인 색조를 갖게 되었다. 이 자발적인 색조는 신앙의 동의를 스토아 철학의 동의론과 구별시키는데, 이 스토아 철학에서 동의의 확실성은 개인들의 지각과 판단이 전체 경험에 편입되는데 따라 달라진다. 그렇지만 신앙의 확증에 대한 기독교 교리가 계속적으로 논의되는 역사 속에서, 신앙적 확증이 자라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판단이 경험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되었다. 존 헨리 뉴먼은 이 문제를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에 대한 매우 놀랍도록 실체적인 접근을 통해서 다루었다
단일 문제로서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은 자연적으로 신을 인식이나 자연 신학에 대한 학설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에서 특별히 효과가 심대했다. 기원전 2세기에 파나이티오스는 이 학설을 국가 예배의 정치 신학과, 또한 시인들의 신화적 신학과 구별했다. 자연신학 개념은 그 누구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기독교 교리와 묶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때까지는 여전히 신의 인식에 대해서 어떤 특징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 인식은 인간 본성상, 인간의 영혼이 창조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면에서 경험을 통해서, 또는 모든 경험 이전에 주어진 것인데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늦게 자연적인 신의 인식을 파악하게 된 다리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기본 개념(koinai ennoiai)을 통해서 주어졌는데, 이것을 키케로는 본유(本有)개념(ideae innatae)라고 해석했으며 여기에는 도덕적인 생활 태도의 기본 개념 이외에 신성의 실존과 그를 경배할 의무를 안다는 것이 포함된다.
한 로고스의 활동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에게서 비슷하게 형성된 공통의 기본 개념이라는 학설은 전체 인류가 기본 법원칙을 안다는 총괄개념이 곧 자연법이라고 보는 스토아 학파의 기초다. 자연법 학설은 스토아 철학의 자극에서 시작되어 로마의 법학자들에 의해서, 또한 철학적로는 키케로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자연법이 기독교 사상에 끼친 영향은 바오로의 이방인들도 역시 “본성적으로 법대로 행하고”(로마서 2:14), 따라서 그들에게는 법의 요청이 마음에 새겨진다고(로마서 2:15) 언급한 이래로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구약 성경적 율법의 권위가 자연법적 핵심으로 축소됨으로써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미 이레네우스는 예수가 해석하고 완성시킨 율법의 “자연명령”에 대해서 예수의 오심으로 해체되어버린 구약성경의 제의 법과 사법과는 반대로 언급했다. 자연법은 기독교 신학이나 로마의 법학자들에게 사회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법칙의 기초로 이해되었다. 소유의 불평등과 국가적 권리 체제의 불평등이 사회적으로 유지됨으로써 근원적으로 자유가 깨져버린다는 것은 죄의 결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에른스트 트뢸치에 따르면 기독교적으로 변화된 이런 자연법은 “교회의 고유한 문화 신조”가 되었다.
양심(Gewissen)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해석은 자연법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요컨데 양심이 단지 스토아 철학 때문에 발견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나름대로의 태도에 대한 내적인 증거의 조유를 삶의 태도에서 깨달아가는 것이다. 양심은 오히려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도의 비극 시인들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중기 스토아 철학은 근원적으로 경고하거나 혹은 호소하는 양심의 소리로부터 모든 경험에서 발생하는 의식을 깨달았는데, 이 의식은 도덕적인 태도의 기본 법칙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황 가운데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양심에 대한 신약 성서적 진술이, 즉 로마서 2:15;13:5, 혹은 코린토 후서 4;2, 티모테오 전서 1:5;19, 또한 3:9 등이 해석되었다. 여기서 양심의 소리는 스토아 철학의 koinai ennoiai(공동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윤리 규범 의식을 표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근대까지 집요하게 유지되었으며, 양심판단의 역사적인 상대성을 의식적으로 오랫동안 뒤로 물리쳤다.
기독교 신학이 스토아 철학과 밀접한 접촉을 가졌던 마지막 부분은 윤리학의 취급에 대해서 언급되어야만 한다. 모든 인간이 도덕적 기본 개념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기원전 2세기에 파나이티오스는 윤리학을 책임론(Pflichtenlehre)라고 제시했다. 이에 기초를 두고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죽은 해(기원전44년)에 논문 De officiis를 썼다. 그렇지만 그는 책임개념에 대해서 이미 몇 년 전에 문답집 De finibus bonorum et malorum에서 논쟁을 벌였다. 이 두 문헌은 기독교 신학에서 윤리를 조직적으로 다루는 시초로서 중요하게 되었다. 특히 서방 기독교에서 그렇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는 최초로 윤리학 문제를 독립적으로 다루었는데, 이것은 키케로의 입장에 가까이 섰다. 그렇지만 스토아 철학자와 키케로는 책임 개념(kathékonta)의 폭을 매우 크게 확대시켰다. 여기에는 그 본성상 인간에게 “따라붙는” 모든 행위가 포함되었다. 말하자면 자기 보존, 번식,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같은 것들이다. 이성적인 행위(kathorthómata)는 책임의 전체 주변과 밀접한 동아리를 형성한다. 즉 이성을 통해서 흥분을 감소시키는 행동방식의 동아리를 형성한다는 말인데, 이 행동 방식은 전통적인 덕 개념을 통해서 특징화된 것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이제 honestum(존귀함) 개념을 오는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조건과 관련시켜서 책임 개념을 완전히 비스토아적인 방향으로 전환함으로써 책임 개념을 협의적인 의미에서 도덕적인 책임으로 몰아넣었다. 이 honestum 개념은 키케로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여러 개별적 문제에서 스토아 철학의 이해를 좇았다. 스토아 철학의 세계 경건성이 기독교가 이해한 영과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간에 유효적절한 자극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거리감은 그들이 신을 내재(內在)주의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나타나는 그것이다. 전체 기초 설정이 심대하게 다른데도 기독교가 스토아 철학의 통찰을 받아들인 그 외연은 개별적으로 훨씬 현저하다. 중세기 라틴 저술가들에 의해서 유지된 스토아 철학 사상은 문화적 의식이 기독교로부터 벗어날 때도 새로운 방식으로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초기 근대에 발생했다.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은 스토아 철학의 자연 개념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불러왔다. 요컨데 인간적 자연과 코스모스적 자연 사이에서 스토아 철학이 보여준 상응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스토아 철학의 윤리학과 자연을 따르는 암호는 자신이 스토아 철학자였든지(세네카), 혹은 스토아 학파에 보도했든지(키케로) 이런 고전적인 문필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휴머니스트들에게 호감을 받았다. 여기서 기독교와 분리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기독교적 동기와 스토아 철학을 포함한 그리스-로마 시대의 동기가 새롭게 융합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이 자신들의 섭리론을 다루면서 스토아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마르틴 루터도 역시 예정론과 라우렌티우스 발라(Laurentius Valla) 시대의 스토아 철학적 결정론에 매우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에 필리프 멜란히톤은 수년 후에 의지의 자유에 대한 키케로의 논증에 근거해서 이런 stoicas disputationes(스토아철학 논쟁)에 참여했다.
멜란히톤이 키케로의 입장에 근거해서 스토아철학의 숙명론에 반대하고, 또한 그것이 기독교 신학에 끼친 영향을 반대했지만, 그는 바로 키케로의 중재를 통해서 다른 스토아 학파를 수용했는데, 특별히 이성의 “자연적 빛”에 대한 학설인데,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확대된 본유 관념에서 -무엇보다도 윤리학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빌헬름 딜타이에 따르면 이제 멜란히톤에게는 “18세기에 영국의 이신론자들이나 독일의 합리주의자들이 선포했던 것처럼” 자연신학과 도덕에 대한 학설이 이미 전면에 등장한다. 아직은 원죄론을 뒤로 밀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인간에게 공통되는 본성을 따르는 일이 현재의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데 기본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17세기에 자연법론과 함께 자연적 신인식과 자연적 윤리의 권위에 대한 확신은 종파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된 기독교 교리에 맞서서 근대 사상이 독립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고, 또한 사회의 평화를 뒤흔드는 종파적 대립을 멀리하고 사회를 재건하려는 기초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단서가 될만한 인물은 헤르베르트(Herbert von Cherbury, 1583-1648)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De veritate(진리에 대하여, 1624)에서 인간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그리고 키케로에 따르면 “본유(本有)적인”, 즉 consensus gentium(민족일치)라는 의미에서 모든 민족에게 해당되는 기본 개념을 스토아 철학적인 바탕에서 받아들임으로써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종교적 기본 진리론을 발전시켰다. 신의 리얼리티, 신을 섬겨야 할 책임, 신을 섬기는 핵심이라 할 덕과 경건성의 연결, 모든 과오를 용서받아야 할 필연성, 죽음 이후의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보답. 그는 이 다섯 가지 종교의 기본 진리를 참으로 보편적인 교회의 근본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나중의 이신론과 합리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렇듯 스토아적 동기의 도움으로 윤리학은, 물론 종교도 역시 그 근본적인 면에서 신의 역사적 계시에 대한 의존성으로부터 일탈하게 되었으며, 자연 이성의 자율에 토대를 놓게 되었다.
헤르베르트는 그에 앞서 몽떼뉴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보존하고 전개하려는 자연적 본능을 스토아 철학적인 바탕에서 다시 수용했다. 키케로에 의하면 이 자기 보존과 전개를 알므로서 시간 의식이 형성된다.(De fin. Ⅲ,16ff.). 17세기가 끝나갈 무렵 자기 보존 사상은 바뤼흐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통해서 유한한 만물에 해당되는 형이상학의 기본 원리로 보편화되었다. 그에 말에 따르면 만물은 애를 쓰며 자기 존재를 고집한다. 스피노자는 상술한 시기인 17세기 끝무렵의 십년 어간에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양식으로 이런 사상을 상당히 강조해나갔다. 이미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인간론은 자기 보존을 추구하는 원리를 모든 인간의 태도에 결정적인 요소라고 간주했다.(Leviathan Ⅰ,14). 또한 그것을 사회계약론의 기초라고 간주했다. 사회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자유롭게 처리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사회적 평화를 통해서 각기 개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정치의 통치질서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 기독교의 자연법론과는 달리 이제부터는 인간의 근원적인 평등과 자유라는 (스토아적인) 이상이 다시 관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자연 상태와 같은 자유가 죄로 인해서 숙명적으로 상실된 게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개인들과 상관 없이 국가 권력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이다. 이 국가 권력은 그것을 통해서 보증된 시민의 자유가 사회 상태의 틀에서 교환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다. 자기 보존의 원리는 근대 사회학과 윤리학이 종교적 전제들로부터 독립하도록 견인했는데, 이러한 견인의 보다 넓은 의미는 결코 과대평가될 수 없다. 인간 실존의 자율과 자기만족성이 차지하고 있는 근대의 위치는 단순한 이성 자율을 뛰어넘어 과대평가되는 바로 그곳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근대 신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논하기 전에 우선 일련의 주제들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 주제들은 우선 기독교에 의한 결과로 발생한 것이며, 또한 순수 철학적 반영이라는 부차적 주제가 된 그것이다. 이런 테마에 대한 면밀한 고찰은 근대 철학이 기독교 전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사실 명료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작업이다.
위경[6]에는 사도 바오로와 세네카의 거짓 서신이 존재한다. 이 위조품은 로마 가톨릭교회 신학자이자 4대 교부 중 한 사람인 히에로니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언급되었기 때문에 아주 오래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글자들이 바오로에 의해서나 세네카에 의해서 쓰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오로가 스토아 학의 철학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생각이 스토아 자연 주의와 관련해서는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도 마찬가지다.[7]
윤리학의 자연 법칙 이론들의 전통은 직접적으로 스토아 학파에서 유래된 것 이다.[8] 아우구스티누스는 또 도덕적 공동체 안에 동물의 도덕적 공동체 가입에 관한 문제에 관하여 플라톤보다 스토아 학파를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
1983년 알랭 베르베케 박사는 스토아 학파가 기독교 사상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전통이라는 맥락에서 스토아 사상을 다루는 데는 어떤 섬세함이 필요했다. 신이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양쪽에서 거의 동의되었지만, 인간 영혼의 상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정통성은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가 발견한 종류의 물질주의적 인류학에서 오늘날의 기독교도들이 당연시 여기는 영혼의 물질주의적 개념으로 발전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소위 스토아 학파라 불리는 것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지만 양심과 자연 법의 개념들은 스토아 학파의 사고와 명확한 관련이 있다.
5.5. 르네상스와 초기 현대 철학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에는 기독교와 스토아 학파의 체계적인 통합을 이루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이것을 네오 스토아 운동(Neostoicism)이라고 불렀다. 네오 스토아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유스튀스 립시위스였다.
헬레니즘 철학이 일반적으로 현대 철학에 미친 영향은 퀸스 대학교(캐나다) 교수 존 밀러와 예일 대학교 교수 브레드 인우드의 에세이를 보면 된다.
6. 현대 스토아 학파
현대인에게 바쁘고 혼란스러운 생활에 맞는 최첨단 심리요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랜 기간이 소요되고, 빈번하게 감정과 개인사를 조사하는 프로이트식 심리치료법은 임상적 효능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렇게 자주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현재 활용되는 요법은 거의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축약할 수 있는 일련의 규칙과 자기계발 기법들로 구성된 인지행동치료다. (실제로 컴퓨터로 실행되는 경우도 있다) 인지행동치료는 공포와 불안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부정적인 사고패턴을 스스로 인지하고 더욱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사고를 대체하도록 유도한다. 가령 대인관계에서 불쾌한 경험을 하고 나면 '내가 호감을 느끼는 유형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항상 불쾌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이 경우 인지행동치료는 초기 인식을 중립적으로 재설정하도록 만들고(어쩌면 상대방이 다른 일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라서 무례하게 굴었을 수도 있어), 부정적인 자기 인식에 근거한 '집약'적인 결론으로 건너뛰는 습관에 저항하도록 만든다. 이 방식은 임상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예를 들어 영국의 국립임상연구원은 확실한 대화요법으로 인지행동치료를 권장하기도 했다. 인지행동치료는 말 그대로 '증거기반' 요법으로서 철저히 현대적이지만 과학 이전 시대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인지행동치료의 기원이 된 영감이 현재 나름의 방식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나는 매일, 모든 면에서 나아지고 있다.'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의 절정처럼 들리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주문은 프랑스의 약사로서 자기계발서를 통해 최초로 세계적인 명사가 된 에밀 쿠에Émile Coué라는 흥미로운 인물에게서 나왔다. 그는 <자기암시라는 책으로 1920년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긍정적인 주문을 반복하면 정신건강과 신체건강을 개선하는 일종의 무의식적인 태도인 '자기암시'를 촉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심쩍은가? 쿠에는 이런 말도 했다. "우리의 뇌가 행동을 좌우하는, 생각, 습관, 본능에 해당하는 못을 박는 널빤지라고 가정하라. 나쁜 생각이나 습관 혹은 본능, 말하자면 나쁜 못이 존재한다면 좋은 생각이나 습관 혹은 본능, 말하자면 나쁜 못이 존재한다면 좋은 생각이나 습관 혹은 본능을 그 위에 놓고 망치로 두들겨라. 다시 말해 자기암시를 하라. 새 못이 들어가는 만큼 오래된 못이 빠져나온다. 망치로 두들길 때마다, 다시 말해 자기암시를 할 때마다, 새 못은 더 들어가고 오래된 못은 더 빠져나온다. 그래서 일정한 횟수만큼 망치질을 하면 오래된 못이 완전히 빠지고 새 못으로 대체된다. 이런 대체가 일어나면 그에 따라 사람도 변한다."
이는 현대식 인지행동치료의 이면에 있는 생각과 같다. 두 요법은 모두 저절로 생겨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인지하고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적절한 반응으로 대체함으로써 나쁜 생각을 완전히 몰아내도록 유도한다. 이 방식은 쿠에와 동시대 인물로서 심리치료 분야에서 '이성적 설득' 학파를 만든 신경병리학자 폴 뒤부아Paul Dubois가 추구한 치료 원칙이기도 했다. 그는 이 원칙을 다름 아닌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적용했다. 초점을 맞춘 이성적 노력('인지')을 통해 감정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이 원칙은 이미 2,000년 전에 개발되었다. 그 주인공은 스토아 철학자들이었다. 이제 그들도 되돌아오고 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쓰는 '스토아주의적(금욕적)Stoical'이라는 단어는 스폭Spock(<스타트랙> 시리즈에 나오는 등장인물 - 옮긴이)처럼 엄격하거나, 절제되어 있거나, 불평 없이 고통을 감수하거나, 심지어 감정이 없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보다 쾌활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스토아 학파는 키프로스의 섬 도시 키티움 출신의 제노Zeno가 아테네에서 창시했으며, 에픽테토스Epictetus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글들을 남겼다. 그 핵심 사상은 "인간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시각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에픽테토스의 말로 잘 표현된다. 다시 말해서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지만 그에 대한 생각, 그리고 감정은 바꿀 수 있다.
약 2,000년 후인 1962년에 합리적 정서행동치료의 창시자이자 아론 벡Aron Beck과 함께 현대적 인지행동치료 분야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가 사람은 어떤 대상이나 사건이 아니라 '외부의 대상 및 사건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 혹은 내면화된 문장'에 영향을 받는다는 취지의 글을 썼다. (여기서 '내면화된 문장'은 에밀 쿠에가 말한 무의식적 자기암시, 즉 좋은 못으로 몰아내야 하는 나쁜 못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엘버트 앨리스도 쿠에의 책을 읽었다) 엘리스는 "이 원칙은 원래 스토아 철학자들이 발견하고 언급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아론 벡도 다음과 같이 자신이 추구하는 요법의 역사적 기원을 분명하게 밝혔다. "인지요법의 철학적 기원은 스토아 철학자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각을 바꾸면 강렬한 감정도 통제할 수 있다."
현대에 인지행동치료가 인기를 끈 데 따른 가장 놀라운 효과는 고대 스토아주의 자체의 부활일지도 모른다. 현재 엑서터 대학은 해마다 런던에서 '스토아 주간' 행사를 연다.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이 행사에는 전 세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대담과 워크숍을 통해 스토아 철학을 읽고, 수련법을 연습하며, 설문에 참여한다. 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신스토아주의자인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는 2014년에 "일주일에 걸친 수련 후 참석자들의 긍정적 감정이 9퍼센트 늘어났고, 부정적 감정이 11퍼센트 줄었으며, 삶에 대한 만족도가 14퍼센트 높아졌다."고 밝혔다. (꾸준히 수련하는 사람들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 결과도 초기 결과를 확증했다)
원래 수립된 스토아주의는 인지행동치료와 같은 종류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원칙과 몇 가지 구체적인 기법은 흡사했지만 스토아주의는 (일부 심리치료사는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대 요법에 수용되지 않은 몇 가지 명상법뿐만 아니라 논리적, 형이상학적 체계까지 포괄한다. 심리치료사이자 <인지행동치료의 철학The philosophy of Cognitive-Behavioural Therapy>을 쓴 도널드 로버트슨Donald Robertson은 스토아주의 서적들이 "대부분 현대 인지행동치료와 부합하는 여러 구체적인 심리적 기법 내지 수련법을 포함하고 있으며, 여전히 유요한데도 일부는 잊히거나 간과되고 있다."고 썼다. 가령 그는 죽음에 대한 체계적 명상법 혹은 (그리스어로) ‘멜레테 타나투Melete thanatou’라는 명상법을 잃어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현대에 이뤄진 일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죽음에 대한 인식은 신체건강을 개선하고, 성장 중심의 목표를 우선시하고, 긍정적인 기준과 신념에 따라 살고, 보완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평화롭고 자애로운 공동체를 개발하고, 개방적이고 성장을 중시하는 행동을 촉진할 수 있다." 로버트슨이 직접 되살린 또 다른 기법은 "아주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보듯" 폭넓은 관점에서 사태를 조망하여 사소한 걱정을 떨쳐낸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보여준 뛰어난 사례처럼 매일 아침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도 유용하다. "오늘도 고마움을 모르고, 폭력적이고, 기만적이고, 질투심 많고, 몰인정한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나를 잘못된 일로 끌어들이지 못하므로 내게 해를 입히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나는 가족에게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협력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또 계속해서 넓어지는 소중한 존재들의 원 안에 자신이 있다고 상상하는 '히에로클레스Hierocles의 원'이라는 명상법을 시도해볼 수 있다. 이 원은 가족 및 친구로부터 시작하여 이웃, 같은 도시 주민, 동포, 전 인류, 나아가 자연계 전체로 넓어진다.
아마도 가장 어려운 수련은 당신에게 생길 수 있는 나쁜 일들을 생각한 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프레메디타티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일 것이다. 가령 심각한 부상이나 감정적 좌절을 겪는 상황을 상상하고 '덜 선호하는 무심Dispreferred indifferent'으로 대하는 것이다. 즉,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는 편이 더 좋지만 생긴다 해도 도덕적 가치관이나 도덕성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심'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피글리우치는 이 수련이 "인지행동치료에서 특정한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기 위해 활용하는 요법과 아주 흡사하다."고 지적한다.
끝으로 세네카Seneca처럼 저녁에 다음과 같은 엄격한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질 수 있다. "오늘 어떤 나쁜 버릇을 고쳤는가?" "어떤 잘못에 맞섰는가?" "어떤 면에서 더 나아졌는가?"
보다시피 스토아주의는 단순한 인내가 아니며, 안락하지도 않다. (실제로 니체는 스토아주의를 '자기 폭압self-tyranny'이라 불렀다) 그러나 비행기와 휴대폰이 존재하는 지금도 스토아주의를 2,500년 전만큼이나 일상생활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다. 스토아 학파의 모든 신조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가령 그들은 창조적 영성의 발현인 로고스Logos라는 원칙이 우주를 관장한다고 믿었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일부 현대 물리학자들은 이런 개념을 마다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전체적으로 진보적인 편이었다. 그들은 노예들에게 연민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놀라울 만큼 범세계주의를 추구했다. 에픽테토스는 모두가 두 세계의 시민이라고 말했다. 즉, 인접한 정치 공동체에 해당하는 '작은 도시'의 시민일 뿐만 아니라 전체 우주에 해당하는 '거대한 도시'의 시민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스토아 철학은 이성의 거대한 동력원이다. 그래서 거대한 구도 안에서 우리가 처한 자리에 대해 다른 시각, 말 그대로 하늘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취하도록 권유하며, 인지가 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생각의 힘이 자신을 개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부활한 스토아 철학, <리씽크>, 스티븐 폴, p3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