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후에서 투쟁한 여투사 (1912-1936)
1912년.
러시아 연해주 니꼬리스고의 한 조선인 농가에서 새 생명이 고고성을 울렸다. 갓난애의 이름은 리금옥.
세월은 빨리도 흘러 어느덧 금옥이가 학교 갈 나이가 되었다. 딸애였지만 공부를 시키려고 금옥의 부모는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그로제꼬프 신흥리로 삶의 터전을 옮기였다. 거기서 금옥이는 신흥소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우리 글로 조선어, 산수 등을 배웠다.
신흥리는 워낙 인적이 드문 무연한 새밭이였다. 조선서 온 이주민들이 논을 풀고 벼농사를 짓게 되면서 차츰 인가가 늘어났는데 개척후 3∼4년 만엔 300∼400세대 조선인들이 모여들어 제법 큰 마을을 이루었다. 조선사람들이 개척한 땅이라고 사람들은 지명을 신흥리라고 했다 한다.
금옥이가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 신흥리에는 중국 동만(연변)에서 1920년 《경신년대토벌》을 겪은 조선독립군들이 머물러있으며 줄기찬 군사훈련을 하고있었고 극동빨찌산에 참가했던 조선인 10월혁명당 당원들도 다시 지방에 돌아와 활동을 벌렸다. 조선인 혁명지사들이 어린 금옥에게 준 영향은 아주 컸다. 그때 벌써 금옥이는 러시아10월혁명, 일제에게 짓밟히고있는 조선 삼천리금수강산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있었다.
무남독녀를 둔 금옥의 아버지 리창언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늘 금옥이 어머니와 집탈이였다. 그때마다 금옥이는 어머니와 함께 울기가 일쑤였다. 그런 아버지가 딱 질색이였다. 6년제 신흥소학교를 마치고 약 300리 떨어진 니꼬리스고 고급학교에 가게 된 금옥이는 날듯이 기뻤다. 잔뜩 흐려진 아버지의 낯을 보지 않게 되었다는것이 그에게는 기쁨이 아닐수 없었다.
1927년 가을, 금옥의 외삼촌 고하경(열사)이 사촌 고하정의 뒤를 이어 간도 용정으로 떠나게 되었다. 당년의 간도―용정은 러시아 연해주 조선인들이 우러러보는 서울로, 글읽기 좋은 고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공부하려면 그래도 용정으로 가야 한다!》
구지욕에 불타던 연해주 조선인학생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갈구를 토로했었다. 금옥이도 용정에 가고싶었지만 나어린 소녀였기에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있다가 외삼촌에게서 소식이 와서야 부모를 따라 길을 떠났다.
금옥이는 배움의 천리길을 도보로 걸어 1929년 봄에 연변 땅인 연길현 봉소평(오늘의 연길시 민주촌)에 이르러 발을 멈추게 되었다. 금옥의 어머니는 용정 우장리에 세집을 잡고 금옥이를 사립 대성중학교 2학년에 진학시켰다. 학교에서 금옥이는 조공동만도 엠엘파계통의 주요골간이며 소선대 총책임자인 외삼촌 고하경의 영향 그리고 이 조직의 주요책임자인 김철 등 혁명자들의 영향을 받아 혁명의 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얼마 후엔 조직의 파견을 받고 사립동흥중학교에 넘어가 학생신분으로 지하선전사업에 투신하였고 1929년 11월에 있은 《광주만세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28년에 첫 중공당조직이 연변땅에 뿌리를 내렸다. 1930년 중공동만특별지부에서 상해 5.30참안 다섯돐을 기념하여 군중적폭동을 발기하자 조공당 동만도의 여러 파들도 적극 호응해 나섰다. 화룡현 용신사 동량어구의 하승리부근에서 김근(열사)을 총책임으로, 김철(열사)을 총지휘로 하는 《폭동지휘부》가 설립되었다. 리금옥은 《폭동지휘부》의 배치에 따라 폭동격문을 살포하는 책임을 짊어졌다.
1930년 5월 30일 밤, 용정일대의 군중 100여 명이 동산 《대륙고무공장》부근에 은밀히 모여들었다. 한 책임자가 폭동을 선포하면서 이 밤에 용정을 까막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용정 시가지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소련을 옹호하자!》는 폭동격문들이 산지사방에서 흩날렸다. 일제놈들은 용정 시가지안을 참빗질하기 시작했다. 이골목 저골목을 에돌아 집에 들어선 리금옥은 제꺽 가마를 들고 삐라를 구들고래안에 감추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6월 10일에 승지촌 하승리부근에 설치된 폭동지휘부가 파괴당할줄이야. 폭동지휘부의 식모가 밀정이였던 모양이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폭동지휘부 주요성원인 강학제는 김철 등 동지들을 피신시키고 홀몸으로 싸우다 희생되었고 포위돌파중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김철은 체포된후 용정영사관에 끌려갔다가 희생되었다. 소식을 접한 리금옥은 가슴이 찢어지는듯 했다. 자기를 혁명의 한길로 이끌어주던 김철동지가 아니였던가! 금옥이는 간악한 놈들을 요정내지 못하는것이 한스럽고 원통했다.
지도자를 잃고나니 혁명활동은 더구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던 그해 가을 어느날 밤, 뜻하지 않던 총소리가 용정의 밤정적을 깨뜨렸다. 중국측 상포국의 엄숙한 경고도 마다하고 아무런 증건도 없이 거들먹거리며 중국육군대구역에 들어섰던 일본경찰 두놈이 중국육군대의 총에 맞아 한놈이 즉사했다는것이다. 이 사건으로 용정시가지는 계엄상태에 들어갔다. 바로 그날 저녁, 연길현 의란구에서 온 중공의 한 책임자가 금옥이네 집에 있다가 수색망에 걸려들었다. 금옥이네 집에서 유숙하던 학생들도 금옥이와 함께 용정영사관에 끌려갔다.
금옥이는 정희라는 가짜 이름으로 신분을 폭로하지 않고 놈들의 물고문과 뭇매질을 이겨냈다. 놈들은 그의 외태머리를 잡아채며 바른대로 대라고 위협했지만 금옥이는 종시 모르쇠를 놓았다. 아무런 단서도 쥐지 못한 놈들은 금옥이를 내놓지 않을수 없었다. 영사관에서 풀려나온 금옥이는 자기의 이름을 리정숙이라고 고쳤다.
1930년 8월 13일, 중공연화중심현위가 화룡현 평강구에서 건립되었다. 10월에 중공동만특위가 정식으로 건립되면서 연화중심현위도 연화현위로 개칭되었다. 그해 9월에 리정숙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뒤이어 중공연화현위 첫 부녀위원으로 부임되었다. 리정숙은 현위의 동지들과 함께 현내 각지로 다니며 당의 기층조직을 건립하고 봉건전통에 예속된 광범한 부녀들을 조직, 발동하는 간고한 사업을 추진시켰다.
어느 한번 평강구에 내려간 리정숙은 일부 부녀들이 야학에 나오고싶어도 오지 못한다는 정황을 헤아리게 되었다. 수천년을 내려오며 부녀들을 속박한 봉건쇠사슬에 매여 지금까지 몸부림치는 여성들의 처지가 안스러워 리정숙은 가슴이 쓰렸다. 그는 야학에 나온 여성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여성들은 남자들의 노예가 아니지요. 여성으로서 혁명에 나서자면 먼저 인간으로서 남자의 예속으로부터, 봉건의 멍에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조선민족이 일제의 예속에서 벗어나자 해도 부녀군중이 조직되어 일떠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의 말은 마디마디가 야학에 나온 부녀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부녀해방으로부터 민족해방까지 담론한 리정숙의 말은 부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어주었다.
허나 열풍처럼 불어치던 당내《좌》적경향은 동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였다. 중공만주성위에서 일련의 《좌》적모험계획을 제정하고 시달함에 따라 당조직과 단조직, 공회조직 등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 총행동위원회로 합병하였다. 중공연화현위에서도 폭동을 당의 중심과업으로 삼았으며 연화현총행동위원회가 연화현위를 대체하였다. 일체는 폭동을 위하여 흥분하고 들끓었다.
러시아10월사회주의혁명승리 13돐을 맞으며 현에서는 도회지와 농촌에서 대규모적인 지방군중폭동을 단행하기로 결정짓고 준비사업을 다그쳤다. 선전삐라 등사임무를 책임진 리정숙은 저도 모르게 연해주에서 처음 10월혁명소식을 듣던 일을 생각하였다. 혁명의 함의도 터득하지 못하고 덩달아 기뻐서 야단이였던 그날이 어제 같은데 오늘 자기가 그 승리를 위해 싸우고있지 않는가!
용정영사관에서는 사처에 끄나불을 늘여놓고 호시탐탐 노리며 냄새를 맡았다. 기념일을 하루 앞둔 1930년 11월 6일 일제 순경들이 현위연락소를 불의에 습격하였다. 연화현과 용정구위의 간부 및 기타 동지들 40여 명이 단번에 체포되었다. 리정숙도 체포되어 영사관 류치장에 갇혔다. 하지만 신분이 폭로되지 않은데다가 나들이 가는 농촌여성처럼 차렸기에 인츰 풀려나왔다. 리정숙은 새로 조직된 현위와 인차 연계를 맺고 파괴된 조직을 복구하는 투쟁에 뛰여들었다.
1931년 2월에 연화현위는 용정으로부터 연길현 무산촌으로 본부를 옮겼다. 그해 봄, 연화현위는 화룡, 연길 두개 현으로 갈라지고 연길구위가 연길, 의란, 팔도 등 3개 구위로 갈라졌다. 리정숙은 현위의 지시에 좇아 새로 구성된 팔도구위 산하의 태양묘, 횡도하자, 룡암동, 봉림동, 물레거우, 상발원 등지에서 기층 당조직과 부녀회 건립을 도와주었다.
이듬해 봄, 리정숙은 상발원부근에서 다시 적들에게 걸려들었지만 다행히 신분이 폭로되지 않은 덕에 적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그뒤 리정숙은 당의 파견을 받고 조선 함흥제사공장에 가서 한시기 노동운동에 종사하였다.
1933년초, 연길현내의 왕우구, 석인구 등 항일유격구들에 건립된 쏘베트정부는 항일의 수요에 좇아 인민혁명정부로 개칭되었다. 리정숙은 항일유격구와 백색구역을 넘나들면서 지하활동을 견지하였다.
그해 10월의 어느날, 리정숙은 로투구구위 산하의 태평구일대에 나섰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어 국자가 일본영사관에 압송되었다. 놈들은 리정숙을 얕보고 쉽사리 꺽어놓을줄 알았는데 얼마 안가 자기들이 오산했음을 알아차렸다. 놈들의 얼굴에서 야비한 웃음이 사라지고 살기가 번뜩이였으며 악착 같은 고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리정숙을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임신중인데다 랭돌방에서 보내면서 고문까지 당하다보니 리정숙은 그만 병이 나 더는 지탱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놈들은 리정숙을 가석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숙의 병은 중했다. 남편 염응철(외삼촌의 연줄로 알게 된 혁명자. 1933년에 봉소평 리정숙의 집에서 결혼. 후에 조선에서 체포되어 희생됨.) 이 조선에 파견되어가다보니 친정어머니가 고추가루장사를 해서 리정숙의 병구완을 해주었다.
1934년에 리정숙은 딸을 낳았다. 젖이 없다보니 갓난애는 태여나자부터 어머니 젖 한모금도 먹어보지 못하고 외할머니 손끝에서 자랐다. 아버지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유복녀, 외할머니를 어머니로 아는 가긍한 딸, 리정숙은 고시랑대는 딸을 두고 몇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모성애를 몰붓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리정숙이였지만 신념만은 송죽 같은 여인이였다. 자리에 누워서도 그녀는 항시 근거지에 마음을 두고있었고 자기집을 적후투쟁에 나선 동지들의 비밀연락소로 쓰게 하였다. 어머니를 통해 국자가의 형편을 알아서는 동지들에게 제공해주고 또 위험에 직면한 동지들을 여러번 구해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연길영사관 순사들이 느닷없이 그의 집에 나타났다. 보석받은 몸이라 놈들이 찾아오는것은 비일비재이지만 그날 따라 왜놈과 한통속이 된 조선인순사들만 우르르 쓸어든것이다. 리정숙은 병석에 시달리는 몸이였지만 놈들을 준절히 꾸짖었다.
《이렇게 누추한 집을 찾아주니 고맙긴 하오만 다 같은 조선사람이라면 놈들 앞에서 설설 기지만 말고 정세를 똑똑히 내다보길 바라오. 일제는 조만간에 망할 것이오. 그때 가서 주구의 신세가 어떠하리란 걸 당신들은 잘알아야 할 것이오.》
마디마디가 페부를 찌르는 말이라 순사놈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리정숙의 병은 차도를 보일줄 모르고 점점 더 악화되기만 했다.
1936년 2월 18일 리정숙은 24세의 애 된 나이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렇게 갈망하던 새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임종시에 리정숙은 어머니와 모여든 사람들에게 혁명은 꼭 승리한다면서 《혁명승리 만세!》를 기운껏 불렀다.
생명의 최후순간에도 혁명자의 신념을 명기한 리정숙은 조선민족의 훌륭한 딸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