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옥천사에서 점심을 공양하고 옥녀봉 전망대에 올라 서산권역을 조망한 다음 내려와 단체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모두 각자의 승용차에 올라 개심사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보현님 뒤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오후 1시 20분경 옥천사를 나섰습니다.
옥천사에서 개심사까지는 약 20.8km로 약 41분 거리에 있습니다. 뒤를 따르는데 우리 네비게이션과는 다소 달라서 의아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뒤따른 끝에 옛 기억이 살며시 나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오후 2시를 넘겨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으로 향하는데 앞서 가신 도정 스님께서 차를 몰고 나오시면서 개심사 경내까지 차로 진입하신다면서 가셨지만 보현님과 우리는 일주문으로 향했습니다.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 일주문
예전에 왔을 때는 세운지 얼마 안 되어 단청이 안 된 상태였는데 세월이 흘러 단청이 된 일주문을 이제야 봅니다.
개심사(開心寺)는 충남 서산시 운사면 개심사로 321-86(운사면 신창리 1번지) 상왕산(象王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입니다.
전통사찰 제38호 개심사(開心寺)
절의 창건은 백제 의자왕 14년(654)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창건하여 개원사(開元寺)라 하였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서는 14세기 초반에 폐사되었는 듯 진정 천책(眞淨天頙) 스님이 지은 『호산록(湖山錄)』에, '절은 이미 무너져 숲이 무성하게 자랐고, 다만 절 뒤편에 새로 지은 3칸짜리 부도전(浮屠殿)만니 있다'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14세기 중반에 다시 중건하였는데, 충정왕(忠定王) 2년(1350) 처능(處能) 스님이 중창하하면서 개심사(開心寺)라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성종」조에 의하면, 성종 6년(1475) 충청도 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사냥을 하면서 산불을 내서 절이 소실되었으나 이 해에 다시 중건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영조 16년(1740) 중수를 거쳐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4호인 명부전(冥府殿),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8호인 심검당(尋劍堂), 무량수각(無量壽閣)ㆍ안양루(安養樓)ㆍ팔상전(八相殿)ㆍ객실ㆍ요사채 등이 있습니다.
가람배치는 북쪽의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각의 당우를 놓고 그 전방에 누각건물을 배치하고 있어, 조선 초기의 배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부전과 팔상전 등은 대웅전과 안양루를 잇는 남북 자오선(子午線)의 주축이 되는 일반적 가람배치형식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건축양식은 다포계(多包系)ㆍ주심포계(柱心包系)ㆍ익공계(翼工系)의 형식을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개심사 불교대학 신입생 모집
깊은 산중에 공부를 하러 오시는 분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만약 공부를 하는 분들이 있다면 얼마나 장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붉게 물든 단풍이 는길을 끕니다.
마음을 말끔히 씻고 마음을 열고 오르는 계단입니다.
비니초님이 손에든 것은?
이 비닐 봉지 안에는 개심사에서 "지구환경을 지키자", "1회용품을 줄이자", "생명을 살리는 채식을 하자" 등등의 캠페인을 벌이고자 하는 손현수막이 들어 있습니다.
제2회 개심사 국화전시회 -기간 10월 28일~11월 30일-
열체크를 하고 들어갑니다.
나를 비추어 보라는 경지(鏡池)
거울이란 나의 모습을 비춰보는 도구입니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 비추어 줍니다. 그러나 마음은 비추어 줄 수 없습니다. 거울이 마음을 비출 수 없으나 나의 모습을 비춤으로 해서 마음의 일단을 엿보게 합니다. 얼굴엔 그의 얼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경지는 마음의 거울을 상징합니다.
경지의 다리를 건너는 모습
다음은 어디로?
형형색색의 국화
법당으로 가는 길이 아름답습니다.
상왕산개심사는 별나라 같습니다.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선생 글씨-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에 대하여
「평남 중화 출생으로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ㆍ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ㆍ백운거사(白雲居士).
8세 때부터 외삼촌인 서화가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 때 중국에서 8년간 서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로 올라와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師父)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고 1902년경 일본에 가서 사진기술을 익혀 1903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열었다.
그후 1913년 다시 그 사진관 안에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화랑을 개설하여 표구 주문과 함께 서화매매를 알선하기도 했다. 1915년 5월에는 '고금서화관' 신축건물에 다시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라는 3년 과정의 사설 미술학원을 열어 후진양성과 전람회를 개최했다. 이때 학생들의 교재로〈서법요결 書法要訣〉ㆍ〈난죽보 蘭竹譜〉ㆍ〈육체필론 六體筆論〉등을 펴냈다. 한편 '서화미술회', '서화협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의 서예부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는 등 근대서화계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하다가 66세로 죽었다.
서예의 각체에 두루 능하며 특히 활달한 대필서로 이름을 날렸다. 금강산 구룡연의 20m에 달하는 미륵불(彌勒佛) 예서, 내금강의 천하기절(大下奇絶) 초서, 법기보살(法起菩薩) 해서 등 각서(刻書)가 남아 있고 전국의 궁전ㆍ사찰ㆍ현판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해인사의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부벽루의 '금수강산'(錦繡江山), 서울의 '보신각'(普信閣), '희정당대조전'(熙政堂大造殿) 등이 유명하다. 그림으로는 1920년 창덕궁 희정당에 그린 벽화 〈총석정절경 叢石亭絶景〉과 〈금강산만물초승경 金剛山萬物肖勝景〉이 있는데 화려한 색채와 사실적 묘사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문인화가답게 호방한 필치가 돋보이는 묵죽(墨竹)이 뛰어나며 근대적 화풍이 엿보이는〈폭포〉ㆍ〈말〉등의 작품도 있다.」 -백과사전-
안양루(安養樓)를 돌아 해탈문(解脫門)을 통하여 대웅보전으로 향합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1963년 보물 제143호 지정되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41년 수리공사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여 조선 성종 15년(1484)에 중창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우보처 지장보살 본존 아미타불 좌보처 관세음보살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주불은 아미타불입니다. 그런데 대웅보전이란 전각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개심사에서는 이 틀을 벗어나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을 극락전(極樂殿), 무량수전(無量壽殿), 혹은 아미타전(阿彌陀殿), 수광전(壽光殿)이라 하는데 이 이름을 쓰지 않고 대웅전이라 한 것이 기이합니다. 그런데 대웅보전 앞 왼쪽에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전각이 있는데, 그 전각에 모시지 않은 것은 무슨 연유일까? 무량수전이 아니고 무량수각이라 하니 급이 달라서 그런지 이 전각은 스님의 요사채로 활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층석탑
심검당(尋劒堂). 설선당(說禪堂)이라는 편액도 걸려 있습니다.
심검당(尋劒堂) 편액
사찰에서 주로 선실(禪室)이나 강원(講院)으로 쓰이는 당우(堂宇)를 심검당이라 합니다. 지혜를 날까로운 칼에 비유하여칼 또는 칼을 잘 쓰는 뛰어난 검객(劍客)을 찾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날카로운 기봉(機鋒)을 가진 지혜로운 선객을 찾는 곳이란 뜻입니다.
심검당에 덧붙여져 지어진 건물. 기둥이 비뚤비뚤한 것이 특징입니다.
개심사에는 이밖에도 비뚤비뚤한 기둥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많습니다. 곧은 것은 곧은 대로 비뚤비뚤한 그대로 제역할을 다함을 볼 때 잘나고 못난 차별을 떠난 절대평등의 정신을 봅니다.
심검당에 대하여
심검당에 드니 이미 다 모여 계셨습니다.
제주도 남선사 주지 도정 스님과 <법구경 이야기> 저자 무념 스님
다시 찍었어야 했는데... ㅎㅎㅎ
묘운 스님과 허정 스님
고원영 작가와 그의 지인
허정 스님께서 개심사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생각나는 것은 대웅보전의 아미타불에 대한 말씀입니다. 왜 대웅보전에 아미타불에 모셨는가에 대한 미스터리입니다.
1941년 대웅보전을 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여 조선 성종 15년(1484)에 중창되었음이 밝혀졌는데 그때 산불이 나서 전각이 모두 소실 되었을 때 아미타불상은 온전하게 보전 되어 중창후 모셨다고 하니 아미타불은 적어도 1484년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성보로 모셔오고 있다 합니다. 그때 불상을 소중히 모신 게 아닌가 함입니다.
제가 여쭈었습니다.
"개심사에는 몇 분의 스님이 계십까?"
"다섯 분이 소임을 맡고 계십니다."
"올 때 보니까 불교대학 신입생을 모집하고 계시는데 현황은 어떠하십니까?"
"학생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설사 공부하러 와도 숫자가 줄어들어 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 모두 고민하면서 관심을 끌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원칙론만 피력했습니다.
기타 여러 가지 이야기가 화기애애하게 한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경청하는 모습
보리심님과 보명님, 그리고 묘운 스님과 함께 오신 거사님
차 한 잔을 마셔볼꺼나.
경청하시는 모습
옥천사 주지 무구 스님, 울산 선재선원 묵담 스님, (사)세상과 함께 이사장 유연 스님
보현 수인화님, 가루라님, 무구님, 옥천사 신도회장
차 한 잔 받으시지요.
울산 선재선원 묵담 스님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청소년 법회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특기할 것은 매년 동계와 하계의 템플스테이 4박5일 절명상 수행을 실시하는데 3박4일 동안 매일 3000배씩 1만배 절명상을 한다고 하며 하계에는 봉정암 순례를 하는데 영시암부터 봉정암까지 십보일배(十步一拜)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여 놀라움을 자아냈습니다. 티벳의 국민들이 오체투지로 몇 달에 걸쳐 마음의 성지인 라싸까지 순례하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세워 하는 것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으나 어린 학생들이 영시암에서 봉정암까지 십보일배를 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고 놀랍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학생들이 이를 해낸다고 합니다. 이 학생들은 정말 몸과 마음이 튼튼하고 건전하게 자라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강인한 인내심이 길러지고 큰 자부심을 가지며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 지도하시는 묵담 스님께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유연 스님은 (사)세상과 함께 이사장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기본정신으로 어려움에 있는 아이들과 이웃들을 돕고 생태보존을 위해 노력하며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 국내사업 뿐만 아니라 해외사업, 환경사업을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비니초 여여행님, 보현 수인화님, 가루라님
언제나 수고 많으신 무구님
경허(鏡虛) 스님과 만공(滿空) 스님의 진영이 걸려 있습니다.
眞言不出口(진언불출구) -호서산인 원담(湖西山人 圓潭) 스님 글씨-
眞言不出口(진언불출구). "참된 말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 말씀은 민족자주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1931년에 선학원에서 선교홍보지(禪敎弘報誌) <禪苑>을 창간하였는데 여기에 만공(滿空) 스님의 <眞言不出口(진언불출구)> 휘호로 표지를 장식했다고 합니다.
첫댓글 아휴!
이 많은 사진과 글들 올리신다고 넘넘 수고많으셨습니다.
근데 볼수록 반가운 사진들...ㅎㅎㅎ
그리고 제 사진이 언제 이렇게 많이 찍혔대요...헐
백우님!
엄청 수고하셨습니다_()()()_
제 카메라 반경에 잡히면 담을 수 밖에요. ㅎㅎㅎ
다른 곳에 날라다 옮겨 주셔서 무척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이 순례기를 다른 곳으로 옮겨 보려 해도 잘 되지 않던데
어떻게 해야 되나요?
감사합니다. _()_ _(())_
@백우 이것은 폰으로 카페에 접속하셔서 여기로 들어오시면
이 사진과 같은 화면이 나옵니다.
그러면 아래의 표시 된 공유를 클릭 하십시오.
@보현 그라그 나서 두 번째 사진의 아랫쪽을 보시면 카카오톡 그림이 나옵니다.
그러면 다시 카카오톡을 클릭 하시면 익숙한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하시고자 하는 작업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보현 새로운 것을 배웠습니다.
방법 따라 해 보니 되네요. ^^
감사합니다. _()_ _(())_
"비뚤비뚤한 기둥으로 지어진 건축물" 보러 '開心寺' 참배하기를 10여 차례. 이 좋은 그림을 통해 추억합니다.
가게도, 주차장도 없던 시절! 40대!
그러나 이 그림은 꼭 서울 강남 '봉은사'나 '조계사'風이어서 ...
시간이 넉넉했더라면 그런 장면을 많이 잡아서 담고 싶었으나 짧은 짬을 낸지라
제한적이었습니다. 절집 건축물에 이와 같이 비뚤비뚤한 기둥으로 지어진 예가 많은 것으로 압니다.
그 중에 우선 생각나는 것이 안성 청룡사 대웅전 기둥입니다.
국화꽃을 인위적으로 모양을 내면 크게 자연 스럽지는 않지요. 어디를 가나...
감사합니다. _()_ _(())_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