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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년에 휴게실88 원문보기 글쓴이: JZang.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
장덕
데뷔/결성: 1976년 활동/시기: 1970, 1980년대 솔로활동과 오빠 장덕과 듀엣으로 활동 생년월일 : 1962년 4월 21일 사망 : 1990년 2월 4일 “잊지 말아요/ 우리의 사랑을/ 잊지 말아요/ 우리의 기억들을/ 이제는 시간이 됐어요”. 한창 성장기에 있던 약관의 한 뮤지션은 이와 같이 이별의 가사를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모든 음악인의 죽음은, 팬들에게 공허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괴로움을 동시에 안겨주기 마련이지만 나이 어린 스타일수록 그 황당함은 배가되죠. 우리 음악계의 지각변동을 바로 목전에 둔 1990년,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한 장덕은 '80년대 추상적이고 모호했던 가사를 가지고 있던 음악들의 모습을 띠고 있으면서도 당시 10대들이 품고 있던 생각을 표출할 수 있었던, 신세대적 감각이 출중했던 프로듀서 중의 한 명 이었습니다. 그녀의 음악은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그로 인한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한결같이 어둡게 이별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지만 그녀의 활약은 우리의 뇌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80년대 음악의 끝은 고 유재하의 죽음이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 아니라 장덕의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던 바로 그 시기였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김완선, 이선희 이상으로 롱런하며 최초의 여성 프로듀서로, 지금 박진영의 위치에 서 있었을 그녀를 생각하면 밀려드는 애석함은 원혼이 되어 팬들의 가슴에 박혀 있죠. 시립 교향악단에서 활약했으며 안익태가 인정했다는 첼리스트 아버지와 서양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남들과 다른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녀는 '뿐철학'이라는 동양 사상에 빠져 수시로 집을 비우는 아버지로 인해 텅 빈집에서 잠드는 날이 많았으며 오빠가 음악활동으로 집을 나간 이후에는 몸서리쳐지는 외로움에 가출을 시도하며 급기야 유서를 써놓고 음독자살을 기도하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숙제를 빌미로 처음 작곡을 접한 그녀에게 그나마 음악은 세상의 유일한 친구가 돼 주었죠. 그녀는 오빠에게 배운 기타로 줄곧 오선지와 씨름하며 노래를 곧 잘 불러 <누가 누가 잘하나> 등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았으며 중학교 들어서는 곡을 발표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중 2때 만든 곡인 '소녀와 가로등'은 그녀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7년 진미령에 의해 불려져 제1회 MBC 국제가요제에 입선했으며 그녀는 최연소의 나이로 무대에 나가 악단을 지휘했죠. 이 대회와의 인연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져 '78년 장현의 '더욱 큰 사랑', '79년 박경희의 '사랑이었네', '80년 최병걸의 '사랑은 떠나도' 등이 모두 입상하며 나이 어린 소녀의 음악적 진가를 높여주었습니다. 자살소동으로 놀랜 어머니의 주선으로 오빠 '장현'과 함께 '드래곤 랫츠(Dragon Rats)'라는 이름으로 미 8군 무대에 오른 그녀는 라틴 음악과 팝을 통기타로 연주하며 한국판 카펜터즈(Carpenters)로 인식되었죠. 그러던 중 영화 <마음의 행로>에 출연하며 연예계에 데뷔할 수 있었으며 곧 '현이와 덕이'라는 듀엣으로 음악계에 신고식을 치룹니다. '순진한 아이', '꼬마 인형' 등으로 인기를 모은 그녀는 안양예고에 진학했으며 주연을 맡은 <내 마음 나도 몰라>를 비롯해 <우리들의 선생님>, <선생님 안녕>, <우리들의 고교시대> 등 10여 편의 하이틴 영화에 출연하면서 아역 스타로 이름을 날립니다. 또한 <푸른 시절>에서는 음악으로 참여합니다. 고교 졸업 후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녀는 테네시 주립대에서 작곡을 전공하며 계속 음악과 관련된 공부를 합니다. 하지만 짧은 결혼 생활, 향수병 등으로 미칠 듯한 외로움이 다시 찾아오자 다시 서울로 도망쳐 와 솔로로서 첫 번째 음반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날 찾지 말아요'가 머릿곡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앨범은 기대만큼 높은 팬들의 사랑을 가져다주진 않았죠. 3년 전 활동했던 음악계와 판이하게 달라서 당황한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 우울한 분위기와 보내야 했으며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의 음악을 맡기도 했지만 식음을 전폐하며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다못한 오빠의 제안으로 다시 현이와 덕이를 재구성하게 되었으며 다행히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날 찾지 말아요' 등이 다운타운과 라디오를 중심으로 괜찮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그녀는 다시 한번 홀로서기를 시도합니다. 1986년 발표한 앨범은 그녀가 누린 인기의 총합이었습니다. TV와 신문을 온통 그녀의 이름으로 도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곡은 최대의 히트곡 '님 떠난 후'였습니다. 이 곡은 <가요 톱 텐>에서 연속 5주 1위를 하며 그 해 최고의 곡이 되었으며 이 곡과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어려워'란 수준작이 들어 있는 앨범은 그 해 빠질 수 없는 히트 대열에 끼었습니다. 언론과 매스컴의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그녀는 이후 정수라 이선희 등과 바지 삼총사로 불리며 '이별인줄 알았어요', 김파 작곡의 귀여운 댄스 넘버 '얘얘', '내 말 좀 들어요' 등을 히트시키며 가수로서 확고한 터전을 잡았고 이은하에게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김진아에게 '묻지 말아요' 등을 주며 작곡가로서 동료가수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누렸죠. 그녀의 오빠 고 장현은 그 동안 출연했던 밤무대를 모두 정리하고 매니지먼트에 힘을 쏟아 장덕을 비롯해 박혜성, 훈이와 슈퍼스타 등의 가수들을 영입해 '코아기획'이라는 음반 매니지먼트 회사를 차립니다. 이 대열에 합류한 그녀는 어느 때보다 더 앨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1990년 KBS신년 특집극 <구리반지>에 출연하며 과거 연기했던 경험도 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늘은 약 7개월의 시간을 두고 장덕과 그녀의 오빠 장현을 차례대로 불러갔습니다. 설암을 앓으며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던 고 장현은 그녀의 장례식에서 열창해 주위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죠. 그녀의 사망원인은 치사량의 수면제로 인한 약물과다복용으로 밝혀졌습니다. 평소에도 불면증으로 고생했던 그녀의 잠자리를 보살펴주던 약이 그녀를 영원히 잠들게 했던 것이죠. 그녀의 사후에는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발표되었으며 여기에는 위일청, 이선희, 임지훈, 김범룡, 지예, 박혜성, 임종환, 전영록, 최성수, 진미령, 양하영 등이 참여해 그녀의 곡을 불렀습니다. 어머니 이숙희씨는 그녀의 삶에 대한 보고서 성격의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란 제목의 책을 발표해 외롭고 쓸쓸했던 그녀의 유년기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첫댓글 제 기억속에는 다재 다능 했던 아름다운 소녀의 기억만으로 남아있습니다for 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