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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바로 알기!
우리는 예언에서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계시를 분리시켜서 그것을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이라고 부를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말한 그런 은사가 아닙니다. 예언의 은사뿐 아니라 이 두 은사에 대한 정의도 그릇된 것입니다.
그럼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은사일까요?
이 중 특히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옳게 정의하려면, 계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계시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1) '계시'에 대한 재정립의 필요성!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이들이 계시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꿈, 환상, 음성, 입신, 주님과 천사의 방문, 혹은 내적 증거로만 계시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해긴 목사님도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분별 이 세 가지가 계시의 은사라고 주장합니다. 계시가 이 은사들을 통해서만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완전한 분류입니다. 왜냐하면 이 은사들을 오해하기도 했거니와,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분별의 은사로 '불리는' 것 외에 또 다른 유형의 계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놓친 계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님이 주신 지혜를 통해 진리를 계시적으로 정확하고 깊게 깨닫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혜를 통해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도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받는 계시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내적 계시의 증거가 되는 인물들
편의상 성령님이 주신 지혜를 통해 진리를 정확하고 깊게 깨닫는 것을 '내적 계시'라고 부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내적 계시를 받은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네 사람을 증거로 소개하겠습니다.
● 지혜자라 불리는 솔로몬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후, 하나님이 그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고, 이것이 하나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상 3:11-12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이처럼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은 그 지혜로 무엇을 했을까요? 재판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열왕기상 4:29-34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 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전도서 12:9-10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빨간 글씨로 표시한 부분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간단히 말해서,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진리의 말씀들" 즉 잠언, 전도서, 아가서 등 성경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에게 특별 계시가 주어졌는데, 그 계시가 꿈, 환상, 음성, 입신, 영적인 방문이 아니라 지혜를 통해서 임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해긴 목사님이 계시의 은사로 분류한 세 은사를 통해서만 계시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통해서도 계시가 임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주님을 목수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설교를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마태복음 13: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과연 이 지혜가 어디서 났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로부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설교에 대해 거듭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7: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한복음 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한복음 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한복음 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게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요한복음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이처럼 누누이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지혜가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
예수님은 박해를 예고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1:12-15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이것을 병행구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다음 구절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10:19-20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가복음 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때에 너희에게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누가복음 12:11-12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구변과 지혜"를 주신 것을 다른 병행구절들이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진짜 지혜가 계시의 통로 맞지요! 맞습니다. 하나님은 꿈, 환상, 음성, 입신, 영적인 방문을 통해서만 계시하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아니 자주 지혜를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 사도 중의 사도 바울
바울은 사도들 중 가장 많은 성경을 썼습니다. 신약성경의 3분의 2나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울서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 같이 썼고"
바울은 성경을 기록할 때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듣거나, 영적인 방문을 받고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처럼 그의 서신들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서 들은 것을 함구했습니다. 그는 여러분과 제가 편지를 쓰는 것처럼 썼습니다. 단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특별한 지혜로 썼습니다. 즉 바울이 집이나 옥에서 편지를 쓸 때 주로 작동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쓴 바울서신이 성경이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은 모두 특별계시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결국 지혜를 통해 특별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지혜가 계시의 통로 중의 하나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상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지혜는 계시의 통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통해 성경을 계시적으로 정확하고 깊게 깨닫는 것도 계시의 일종입니다.
2) 내적 계시의 증거가 되는 성구들
내적 계시의 증거가 되는 인물들에 이어 증거가 되는 성구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고린도전서 2:8-10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이 중 10절의 "보이셨으니"는 원어로 "아포칼릡토"로 계시를 뜻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에 대해 어떻게 바울과 또 듣는 이들에게 계시하셨을까요? 그 뒤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1-13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3절에서 바울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한다'는 것은 설교를 뜻합니다. 그런데 설교할 때 설교할 내용을 하나님이 그때마다 환상으로 부여주거나 일일이 음성으로 들려주시지는 않습니다. 대개는 지혜를 주셔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특히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13)라는 부분을 다음 두 구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누가복음 12:11-12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12-15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그러면 성령께서 곧 지혜를 주셔서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진리를 정확하고 깊게 깨닫는 것도 일종의 계시입니다.
● 갈라디아서 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나타내다"(아포칼륍사이)는 계시를 뜻합니다. 저는 오래도록 '내 속에 나타내신다'는 표현 때문에 이 구절이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틀렸습니다. 이 구절은 15-16절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와 17절의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라는 표현을 볼 때 다메섹 경험을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가 아니라 '내 속에' 나타내신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그 사건이 단순히 극적인 체험에서 멈추지 않고 계시적인 깊은 깨달음을 통해 바울의 심령에 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의 경험 때 외적 계시뿐 아니라 내적인 계시도 함께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계시는 다메섹 체험과 그 뒤 삼 일간 단식하며 기도할 때 임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주석이 그런 관점에서 이 구절을 해석하고 설명합니다. 먼저, WBC 갈라디아서 주석에도 리처드 롱에네커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대부분의 주석자는 이 구절을 고린도전서 9:1("내가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그리고 고린도전서 15:8("맨 나중에 내게 보이셨느니라")과 비교하며, 이 후자의 구절들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바울과의 만남을 암시한다고 본다(참조. 행9:1-19, 22:3-16, 26:12-18).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 사용되는 동사는 아포칼륍토("계시하다")라기 보다는 호라오("보다")로서 그 첫 번째는 능동태 (9:1, 헤오라카), 그 다음은 수동태(15:8, 오프데)이다. 호라오는 외적 영상을 암시하는 반면, 아포칼륍토는 내적 경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참조. A. Wikenhauser, PauJine Mysticism, 134-36).
또, 찰스 카우사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계시'라는 단어가 바울에게는 신비적 또는 카리스마적 의미로서 한 개인에게 나타난 특별한 현상을 언급하고 있지만(고전14:6, 26, 30; 고후12:1, 7 비교), 그것은 역시 세상 사람에게는 감추어졌으나 성령의 활동에 의해 어떤 이들에게 알려진 실재의 발현(unveiling)을 설명하는 것이다(고전2:6이하; 롬16:25; 엡3:35 비교). 그런 경우 계시란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의 일면과 관련된다. 바울이 여기서 의도적으로 사용한 그 단어는 후자의 의미일 것이다. 바울이 계시를 통해 아무도 받지 않은-1827년에 천사의 지시로 몰몬경의 금판을 발견한 조셉 스미스(Joseph Smith)와는 달리-새로운 교시를 받은 흔적이 전혀 없다. 알기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가렸던 베일이 걷히고 바울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도날드 캠벨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모르고 그분을 나사렛의 사기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바울에게 하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외적 환상을 보여주셨고, 후에 구세주의 인격과 사역의 충만한 의미에 관한 내적 계시를 보여주셨다. 이 계시의 목적은 바울을 통해 주님을 이방에 전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존 스토트도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기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협잡꾼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세주로 보데 되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이미 몇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이런 것들이 그때나 그 이후에 자신에게 초자연적으로 계시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참고 고전11:23). 하지만 이제 그는 그 사실들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계시였다. ...
그리스도가 '내 속에'(문자적으로) 나타났다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그것이 외적인 나타남이라는 것을 안다. 바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고전9:1; 15:8, 9).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그의 영혼의 내적 조명,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그의 마음에 비추신 것(고후4:6)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시는 대단히 내적이었으며, 완전히 그의 일부가 되어,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줄 수 있었다."
이제 아시겠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만 계시가 아니라 바울이 그 사건을 통해 지혜로 깊이 깨달은 것도 계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같은 내적 계시가 외적 계시 못지않게 혹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와 버금가는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하고도 얼마 안 있어 시들해지고 심지어 주를 떠나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신기한 체험만 하고 내적인 계시 즉 깊은 깨달음을 통해 예수님과 복음 진리가 그의 속에 깊이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외적인 계시와 체험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래서 얼마 안 가서 시들해지고 말라버립니다. 그러므로 신기하고 극적인 체험만 사모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외적인 계시보다 7배나 더 내적 계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복음을 영으로 깊이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바울처럼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빌립보서 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이 구절에 나오는 '나타내시리라'도 '아포칼륍세이'로 계시를 뜻합니다! WBC 빌립보서 주석에서 제랄드 호돈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카이 투토 호 데오스 휴민 아포칼륍세이). 이 절에 의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실상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하고 있다.
(1) 나는 '완전해'지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완전'(참고로, 여기서 완전은 완전성화가 아니라 구원의 완성 즉 부활을 의미한다-저자 주)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다.
(2) 나는 또한 너희가 나의 태도와는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3) 나는 논리적 주장이나 사도로서의 명령에 의해서는 너희들의 태도를 바꾸라고 설득할 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4)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너희들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운 계시 활동을 통해 그가 나에게 했듯이 '이것에 대해서도' 즉 완전에 관한 진리가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너희에게 계시해 주실 것이다(아포칼륍세이)."
김도현 교수님도 『빌립보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경주에서 함께 달려가는 성숙한 이들에게, 그들이 동의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이 '드러내실 것'('아포칼륍세이', 계시하실 것이다)이라고 말한다. 바울서신에서 '아포칼륍토'(계시하다)와 '아포칼쉽시스'(계시)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뜻을 계시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바울은 성령께서 빌립보 공동체에 깨달음을 주실 것이라는 전제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이 지혜로 진리를 정확하고 깊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도 계시라는 성경적인 명확한 증거입니다.
한편, 신약성경뿐 아니라 구약성경에도 이런 예가 있습니다.
시편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여기서 '열어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갈라'(galah)는 '덮개를 벗기다', '폭로하다'(uncover), '옮기다', '이동하다', '제거하다'(remove)라는 뜻입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나오는 "보이지"와 같은 단어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러므로 계시를 뜻합니다. 이처럼 시편 기자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놀라운 진리를 깨닫는 것을 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 진리를 정확하고 깊게 깨닫는 것도 계시임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모리스 세룰로는 계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시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 그것이 계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밀을 공개하시고, 신비를 드러내시고,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분명한 통찰력을 주시거나, 성경말씀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주심으로써 계시하신다."
또, 릭 조이너는 계시에 대한 참으로 인상적인 말을 했습니다.
"'계시'는 내 생각에, 타고난 재능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지식과 깨달음을 받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찰스 피니는 계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직접 역사하시는 성령은 외적인 표시를 통하여 살아 있는 생각을 전달한다. 성령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연구와 노력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성경구절들을 끊임없이 계시한다."
할렐루야!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성령님은 이런 방식으로 복음과 진리에 대하여 많은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혜로 진리를 정확하고 깊게 깨닫게 하시는 것도 계시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을 한 가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혜로 무엇인가를 깨닫는다고 그것이 다 계시는 아닙니다.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라 솔로몬이나 바울에게 임했던 것과 같은(물론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깊은 지혜가 임해야 합니다. 또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놀라운 것"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지혜에서 오는 정확하고 깊은 깨달음만이 계시입니다.
이런 계시는 찰스 피니가 잘 말한 대로 "살아 있는 생각"을 통해서 옵니다. 지혜를 통해서 계시가 임할 때는 그 생각들이 살아 있습니다. 또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번에 이것이 일반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진리에 대한 계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피니가 말한 대로 이런 깨달음은 자기의 노력과 연구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엡6:19 "비밀' 참조). 아무 것이나 깨달아진다고 계시가 아니라 이런 것이 성령님께서 지혜를 통해서 주시는 계시입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통해 계시로 주어지는 말씀에도 이런 특성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예언에도 이런 특성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월리스 해플린 2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일단의 예언자들에 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1)
이 구절에서 보면, 구약과 신약의 예언 방식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구약 모두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다. 즉 그들의 언어에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베어 있다는 말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대부분은 기록되기 전 이미 사람들에게 말로 전달되었던 것들이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예리하게 연마된 좌우에 날선 검에 비유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예언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14:24, 25)."
그러므로 이것으로 스스로 분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약 15-20년 전의 일입니다. 목회의 한계를 느낀 수많은 목회자들이 돌파를 기대하며 영성운동 집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꿈과 환상과 예언을 비롯해서 각종 계시의 은사들에 열광하며 간절히 그것들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습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계시는 극적인 신비 체험이 아니라 지혜로 고요히 복음과 진리에 대해 깊이 깨닫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 계시가 가장 정확하고, 가장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계시라는 것을 아무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돌파를 경험하기는커녕 도리어 전통적인 교회보다도 더 초라한 목회를 하는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이 설교를 통해 지금이라도 지혜를 통한 정확하고 깊은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 계시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그분들의 목회와 미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짧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혹 여러분이 목회자입니까? 그렇다면 지혜를 통한 정확하고 깊은 계시를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십시오. 혹 여러분이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귀를 솔깃하게 하는 입신간증 같은 것들에 혹하지 말고, 계시의 통로 중 하나인 지혜에서 나온 정확하고 깊은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래야 목회자는 진짜 영향력 있는 목회자가 되고, 성도들은 진짜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