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수 교수님은 80년에 광주교대로 처음 오셨다. 나도 80년에 1학년 입학했다.
1941년생이시니 당시 40대 초반이셨다.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하시고
고등학교에 계셨다신다. 나의 첫발령지인 금일동교에 후배들을 데리고 하계연수를 왔을 때였다.
이정화 형이 금호고 제1회 1학년 1반 1번이었는데 그 때 국어를 가르치셨다고 서로 반가워 하셨다.
정병우 교수님과 한 연구실을 쓰시다가 나중에 정교수님이 학생과장으로 가시자
한칸을 쓰시며 방송반과 신문반을 같이 지도하셨다.
방송반을 분리해야 한다시며 2학년 때 장성 후배인 라윤성이를 방송반으로 보내고 여학생들을 뽑아 분리하셨다.
난 어른들한테 자주 다가가지 못한다.
산 아래 몇 집만 있는 동네서 자라 나 혼자만 따로 학교를 다녀 난 혼자일 때가 많았다.
김교수님께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고 내가 쓴 기사들도 엉망이어서 꾸중만 듣고 빨간 색연필로
난도질을 당한 때라 더 접근하기가 어려웠을지 모른다.
2학년 때 편집장을 했을 때인데, 추석 무렵 내게 담배를 주셨던 기억이 있다.
난 냄새를 모르기에 담배 안 피운다고 하니 후배들에게 줄수도 있지 않으냐며 가져 가라 하셨다.
난 수줍어 했고, 그 분은 무뚝뚝할 정도로 자기 표현을 않으셨다.
나중에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내가 김교수님의 말투나 행동을 닮았다고 할 때
난 말도 안되는 소리말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역대기자회 떄 가끔 뵙고, 장학사 발령을 받고 나서는 명절에 받은 선물이 부끄러워
나도 교수님께 선물을 보내곤 했는데, 그걸 항상 부담스러워하셨다.
연극반이나 나중 글쓰는 애들은 집에 찾아와 술도 마시며 취해 헛소리를 하고 가곤 하는데
학보사 애들은 왜 안 오느냐고 하실 때도 있고, 가끔 득량 강골 처가집에서 모임을 갖자고도 하셨지만,
한번도 이뤄진 적이 없었다.
언젠가 딱 한번 봉선동 국제호텔 부근의 댁으로 아마 재봉이와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사모님과의 대화가 서로 씨라고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있어서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교대를 정년하실 2005년 무렵엔 역대기자회 선배까지 불러 퇴임식을 마련한 적도 있긴 했다.
장성청에 근무할 때는 어느날 청까지 걸어오셔서 필암서원 교육관 운영계획을 손수 쓰신 걸 주고 가시기도 했다.
그 날은 조금 일찍 나와 교수님 진월동 댁까지 모셔드린 기억이 있다.
가끔 강골마을 처가에 와서 농사일도 하시다가 요즘은 뜸하신가 보다.
얼마 전 재봉이가 눈이 온다고 테니스 취소되었다고 중수문에 와 장어탕을 먹자고 했다.
그와 강골마을을 걷다가 교수님의 처가에 들렀더니 웬 젊은이가 관리하고 있었다.
위치는 대강 알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너른 집에다가 주변의 밭과 숲이 부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바로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찾아보니 처가집과 자네집이 멀지 않으니 꼭 가 보고 싶다 하셨다.
마륜이라는 동네가 유서가 있는 동네라며 그리 가까운 줄 모르셨다 하신다.
올 가기전에 한번 인사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재봉이와 석주에게 전화하니 좋다고 한다.
재봉이가 태국에서 연구년 중인 이광성 교수한테 다녀온다고 하여 조금 늦춰 12월 26일로 날을 잡았다.
교수님께서 예약하시겠다며 인원을 말해 달라하셨단다.
재봉이가 국어과의 후배 교수이니 그와 연락을 편하게 하시지만 내게는 어려워 하신 듯하다.
광주에 있는 낙주한테 연락하니 금방 좋다고 연락이 온다.
교육감협의회에 있다가 광주 교장으로 있는 재남에게 전화하니 전원이 꺼졌다.
페북 메신저를 보내고 기다려도 답이 없다. 영대한테도 연락해 보니 선약이 있댄다.
재봉이가 완도의 임윤철한테 연락해 보겠다고 해 그러라고 한다.
교수님을 그리는 여자 후배들의 마음이 짐작되지만, 연락을 않고 5명이라고 말한다.
난 5시라고 석주 등한테 말했는데 재봉이는 6시라고 알고 있다.
고흥도화에 들렀다가 화순 이양에서 찬바람을 쏘이며 놀다가 광주에 가도 5시가 안 됐다.
진월동 대성여고 부근을 지나며 송기인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기훈이가 돈을 많이 벌때는 그가 술값을 앞서 내니 부담이 없었는데 쪼잔한 나는 이제 연락을 잘 않는다.
주차를 할 곳을 찾다가 5시가 다 되어 마선생마약국밥집에 들어가니 일꾼이 6시 아니냐고 한다.
석주와 윤철이가 곧 도착할 듯해 교수님께 5시라고 하니 금방 나오시겠다고 하신다.
재봉이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5시 10분쯤에 낙주와 윤철이가 오고 석주도 금방 온다.
다행이 재봉이도 금방 도착한다. 6시이지만 미리 와서 맞을 준비를 하려 했다 한다.
방도 없이 구석에 6명이 앉는다.
교수님은 이 집을 지날 때 맛있게 보여 이집에서 사 주고 싶었노라 하신다.
내가 짖궂게 드셔보셨냐니 아니라신다.
맛있는 걸 주문하라 하신다.
수육 중을 두개 시켜 3명앞에 놓는다.
고기는 부드럽고 맛있다. 옆자리에 앉은 젊은 애한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교수님은 더 맛있는 걸 사 주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하신다.
내가 살짜기 일어나 카운터로 가는데 낙주가 달려온다.
그가 동부교육장을 할 때 교수님 모시고 축하하러 가겠다했는데 못했다.
둘이 실랑이를 하는데 교수님이 달려와 내 카드를 빼앗고 자기 카드를 내신다.
재봉이는 형설출판사의 개정판 잘 말하기 두꺼운 책을 봉투에 담아 준다.
윤철이는 완도에서 전복을 가져와 교수님께 드린다.
난 재율이한테 사 온 도화 지죽 김을 한속씩 나눠준다.
아래로 걸어가 차를 마시고 헤어진다.
석주가 퇴임기념 멋진 차로 교수님을 모셔다 드리고 목포로 내려가겟다고 한다.
낙주도 가고 윤철이와 대리운전을 부르려는데 재봉이가 완도에서 온 윤철이를 위해 한 잔 더 하잔다.
길 가의 맥주집에 가서 한잔 더하고, 재봉이 단골이라는 풍암동에 가서 한잔 더 하고 택시타고
재봉이 윤철이를 내려주고 선교동으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