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수(金燦洙) (1882 ~ 미상)】 "대한제국 참위 출신, 북로군정서에 합류, 천수동 천수평 전투 승리."
1882년 1월 3일생으로, 서울 출신으로 알려져있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기록에 따르면 1907년 당시 거주지는 한성부(漢城府) 북서(北署) 관광방(觀光坊) 벽동계(碧洞契) 암동(岩洞) 제44통 제6호였으며, 1911년 판결문에는 경성부 북부 삼청동(三淸洞)으로 나와 있다. 대한제국 육군 참위(參尉) 출신으로 중국 만주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제3중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1899년 10월 13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해 1903년 6월 26일 졸업하였다. 그 해 7월 3일 육군기병 참위(參尉)에 임명된 후, 1904년 기병대대 견습(見習)을 거쳐, 1905년 시위기병대대(侍衛騎兵大隊)와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에서 근무하였다. 1907년 8월 1일 일제가 강요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그 해 9월 3일 육군 참위에서 해직되었다.
1910년 말부터 1911년 2월까지 김좌진(金佐鎭)을 비롯하여 박종원(朴鐘元)·안승구(安承龜)·민병옥(閔丙玉)·조형원(趙亨元)·남정면(南廷冕)·이영렬(李永烈) 등과 함께 6차례에 걸쳐 부호들을 대상으로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해 3월 초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경성부 북부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같은 해 6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받았고, 불복해 항소했으나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8월, 북로군정서에서 대한제국 장교 영입을 위하여 국내에 파견된 이성규(李成奎)를 따라 김규식(金圭植)·홍충희(洪忠喜)·박형식(朴亨植)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에 합류하였다. 북로군정서는 1919년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서 서일(徐一)·김좌진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무장독립운동단체였다. 1920년 왕칭현에서 서일·현천묵(玄天默)·김좌진·김규식·이범석(李範奭)·조성환(曺成煥)·홍충희 등과 중광단(重光團)에서 발전한 정의단(正義團)을 다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는 데 참여하여 총사령관 김좌진 휘하의 보병중대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20년 9월 12일 북로군정서에서 보병 1개 대대를 편성하였을 때, 김규식·홍충희·오상세(吳祥世) 등과 함께 중대장에 임명되어 대대장 김사직(金思稷)을 보좌하였다. 1921년 10월 21일 허룽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천수동(泉水洞)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청산리 부근 전투에서 적군의 공격을 격파한 독립군이 갑산촌(甲山村)에 도착하여 거주 동포들의 환대를 받으며 쉬는 동안, 북로군정서 사령부는 부락민들로부터 적정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적 기병 1개 중대가 갑산촌을 지나 30리 떨어져 있는 천수평에 들어가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격을 가하여 적의 기마 중대 120명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 천수평 전투 당시 제3중대장으로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22년 8월 북만주 지역의 독립군들의 통합운동의 결과로 조직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에 참여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인 둥닝현(東寧縣)에 본부를 두었고, 총재는 이범윤(李範允), 군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은 김좌진, 군사부장은 조성환(曺成煥)이었다. 이 때 군사부 부원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남만주와 북만주의 독립단을 통일하기 위한 회의 개최를 촉구하기 위해 김좌진·김규식·계화(桂和)·김혁(金爀)·강국모(姜國模)·최진동(崔振東)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1월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해 개최된 부여족통일회의(夫餘族統一會議) 결과, 그 해 3월 10일 결성된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해 홍충희(洪忠熹) 등과 함께 군사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이후의 행적과 사망연도에 대해서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대한군정서 관련 기사(『독립신문』 1921. 2. 25) [판형1] |